[사서읽기/논어4] 지금도 공자님의 '효(孝)'가 유효한가요?
곰곰
2022-07-11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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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산지 20년이 넘었다. 타지에서 생활하면 자주 뵙기 힘든 부모님에 대한 ‘효’는 더욱 간절해진다. 나와 사정이 비슷한 남편은 혼자 계신 시어머니가 걱정되어 나에게도 안부 전화를 드리는지 자주 확인한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일도 누가 시켜서 하려면 마음이 달아나는 법. 나는 미루다 미루다 마지못해 한 번씩 전화를 드리곤 한다. 아무래도 이건 ‘효’라고 말하기 좀 그렇다. 얼마 전 친정엄마의 칠순을 기념한 여행을 준비하면서 기왕이면 더 멋진 장소, 더 맛있는 음식, 기준보다 더 나은 곳이 어딜까 고민했고 그에 따라 여행 일정은 빡빡해졌다. 다행히 별다른 다툼 없이 여행을 잘 마쳤고 ‘고마운 딸’이라는 답변이 돌아왔지만, 문득 그때 내가 ‘효’라고 믿고 행한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
공자가 ’효’를 말하다.
<논어>를 보면 여러 사람이 공자를 찾아와 효에 대해 묻는다. 당시에도 효를 어떻게 실천하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공자의 대답은 명쾌하지 않다. 효는 구체적인 행위들로 드러나는 것이지, 하나의 본질로 설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공자는 일정한 형식(禮)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격식에 맞는 행동이라도 마음이 빠져 있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래서 공자는 효에 대해 묻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지 않고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 해준다. 한번은 맹무백이 효에 대해 물었다.
맹무백이 효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모는 오직 자식이 병들까 근심합니다.”
孟武伯問孝. 子曰: "父母唯其疾之憂." (위정 6)
아마도 맹무백은 건강이 좋지 않았나보다. 그러니 공자는 부모에게 효도한답시고 특별한 무언가를 하기 전에 자기 몸부터 잘 보살피라고 한 것이 아닐까. 부모의 걱정을 덜어드리는 것이야말로 효라고 말이다. 이번에는 자유가 효에 대해 묻는다. 공자의 대답은 앞서와 또 다르다.
자유가 효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요즘에 효는 부모님께 음식을 잘 해드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개나 말도 모두 잘 먹여 키우니, 공경하는 마음이 없으면 무엇이 다르겠느냐?”
子游問孝. 子曰: “今之孝者, 是謂能養. 至於犬馬, 皆能有養 ; 不敬, 何以別乎?” (위정 7)
날카로운 지적이다. ‘요즘’이라고 한 걸 보니 공자가 살았던 시대에도 효를 형식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나보다. 부모를 잘 봉양(奉養)하면 된다고, 즉 자식은 늙은 부모를 먹여 살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자는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말하면서 개와 말을 예로 든다. 사람은 개와 말에게도 먹이를 가져다 주고 집을 만들어 준다. 만약 공경하는 마음이 없다면 부모를 봉양한다고 해도 개나 말을 키우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다. 아마도 공자가 보기에 자유는 부모를 모시는 데에 마음으로는 정성을 다하지 못했던 듯하다. 그래서 음식을 잘 해드리는 것에 그쳐서는 안되고 마음으로 봉양해야 함을 강조한다. 공자가 말하는 ‘효’는 가장 정성스럽되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효’에 대해 생각하다.
공자는 춘추전국시대 혼란의 원인을 도덕성의 타락으로 진단하였다. 그 혼란을 극복하고 올바른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핵심요소로 ‘인(仁)’을 주장한다. <논어>에서 인은 사랑하는 마음이다. 나 자신을 수양하고 다른 사람까지 사랑하게 되는 것. 남을 배려하고 남과 함께 하며 나아가서 남을 위하는 의미까지 담겨있다. 인을 실천하는 근본은 효이다. 공자는 늘 가까운 데에서부터 인을 실천한다. 나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수양하는 ‘극기’에서 시작한 인은 나와 가장 가까운 내 부모를 섬기는 마음으로 이어지고 내 부모를 섬기는 마음처럼 다른 사람을 섬기고 공경한다면 더 이상의 규범과 도덕이 필요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평천하가 그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다는 것은 윗사람이 부모께 효도하면 백성에게서 효가 일어나고, 윗사람이 웃어른을 제대로 모시면 백성에게서 공경함이 일어나고, 윗사람이 홀로된 사람을 불쌍히 여기면 백성이 배신하지 않는다. 이러한 까닭에 군자에게는 ‘자신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헤아려 보는 도가 있다.”
所謂平天下在治其國者, 上老老而民興孝, 上長長而民興弟, 上恤孤而民不倍, 是以君子有絜矩之道也.
<대학> 전10장 - 平天下章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평천하를 말하면서 효를 그 시작점으로 삼는다. 공자가 말하는 효는 우리가 생각하고 실천하는, 단순히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봉양하는 것보다도 범위가 훨씬 넓다. <논어,사람의 길을 열다>(배병삼)에서 저자는 부모가 내리사랑을 하는 것은 모든 동물이 다 그렇지만, 부모의 사랑을 알아채고 그것을 감사히 여겨 이를 되갚겠다는 동물은 오로지 인간밖에 없다고 한다. 그만큼 효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공자는 이 인간만이 가진 ‘사랑 되돌려주기’(치사랑-上愛無)에 깊이 감동 하였고, 이 되돌려주는 사랑을 확산시켜 세계를 평화롭게 만들겠다고 작정했다.
효는 목표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우리가 운동을 하고 체력을 키우는 것은 땀을 흘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효를 실천하는 것은 효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 ‘되돌려주는 사랑’이라는 근육을 발달시키기 위해서다. 가족은 우리가 인을 계발하는 헬스장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사랑하는 법과 사랑받는 법을 배운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에서 시작하라. 사랑으로 충만한 관계는 결코 가족 안에서 머물 수 없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서 가족으로, 이웃으로, 국가로 모든 지각있는 존재로 관심의 영역을 확장할 때 인은 연못에 던진 돌멩이처럼 커다란 원을 만들며 퍼져 나간다는 것이 공자의 믿음이다.
‘효’는 방법론이다.
자하가 효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모님 앞에서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일이 있을 때는 젊은이가 힘든 일을 대신하고 술과 음식이 있을 때는 어른이 먼저 드시게 하는 것,
이것을 효라고 할 수 있겠는가?
子夏問孝, 子曰: "色難. 有事, 弟子服其勞; 有酒食, 先生饌, 曾是以爲孝乎?” (위정 8)
공자는 부모를 위해 수고로운 일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한다. 이것도 효성스러운 태도는 맞지만, 효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얼굴빛(표정)’이 중요하다고 한다. 아마 자하는 효행을 실천하기는 하는데, 얼굴 표정에는 귀찮은 기색이 그대로 드러났던 모양이다. 그 표정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많이 불편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효라고 할 수 있을까? 마음이 빠져 있다면 당연히 행동의 효과도 반감된다. 효를 행함에 있어서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공경이다.
최근에 어르신 케어 AI 로봇이라는 광고를 봤다. 로봇이 노인의 가장 친한 벗이라니 슬픈 마음이 먼저 들었다. 이미 고령화 시대는 시작되었고 노인을 책임지고 보살필 필요성은 점차 커지는데, 바쁜 자식은 부모를 챙길 여유가 없다. 그렇지만 독거노인을 살피는 반려 로봇이 자식의 미안한 마음을 대변해 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한숨이 난다. 남편 등살에 시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드리는 나도 결국은 이와 비슷한 것 아닌가? 공자의 효에 대입해 보면, 효성스러운 태도가 진정한 가치를 발휘하려면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 하니 말이다.
공자의 ‘효’는 현재의 나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공자의 말대로 부모님께, 나아가 시어머니께 진심에서 나온 미소를 지으며 기꺼이 ‘효’를 행한다면 무척 기쁘고 좋은 일이라는 결론에 다다르자, 정작 내 마음은 답답하고 불편해진다. 지금도 그런 효만이 마땅한 것일까? 과거의 사상은 흐트러지고 모든 것이 변했다. 그럼에도 옛날에 장착된 효의 마음은 그대로 남았고 그 형식도 크게 변한 것 같지 않다. 봉양도 제대로 못하는 시대에 어르신 케어 로봇은 효의 형식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음에도 찜찜한 마음이 드는 것은 그런 이유일테다.
하지만 효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공자는 효가 구체적인 행위이기에 그 마음을 중시했다. 마음은 일반화해서 말할 수 없고 행위로 드러나야 하기 때문에 질문하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다른 답을 주었다. 시대가 변한 만큼 전통적인 효에 대한 생각만 고집하는 것은 편협한 생각이다. 아직 그런 사람이 있다면 공자는 도리어 역정을 내지 않았을까. 공자가 말한 효의 기본과 ’색난(色亂)’의 의미는 되새기되, 지금도 그것이 유효한지 다시 물어야 한다. 얼굴색을 적극적으로 관리하여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드리는 것이 의미있는 효일지, 정체된 효의 자리에 머물면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공경에 미치지 못함에 힘들어 하는 건 괜찮은지 말이다. 효가 살아 있으려면, 지금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효의 방법, 각자의 처지에 따른 맞춤형 효의 방식을 상상하고 계발해야 할 때가 아닐까. 여전히 ‘효’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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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모님께 효도하기 인생과제입니다.
가부장 문화의 분위기가 여전한 상태에서 마음을 담는 효를 행하기
아슬아슬 줄타기도 해보고 가끔은 반항도 해보고
슬기로운 효도생활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보는 수밖에
AI는 좀 ......
곰곰의 논어읽기 재밌습니다~
효도와 관련 얼굴빛을 가다듬기 어렵다는 색난의 문제를 고민해 보게도 되는... 시간이었어요^^
병원을 전전하는 친정엄마 때문에 막내동생은 오늘도 전화기를 붙들고 여기저기 이것저것 알아보느라 바쁩니다. 동생은 동양고전을 배우지 않았는데도, '효'를 말할 때 절로 막내동생을 떠올릴만큼 엄마에 정성을 다합니다. 엄마의 지독한 고집과 아들만 좋아라하는 고약한 말에 눈물도 찔금거리고 '다시는 엄마 수발 안하겠다'고 선언하지만, 그래도 역시 제일 먼저 엄마의 보족기와 살살 녹는 복숭아를 사야 된다고 난리 블루스를 칩니다. 효의 사상이 바뀌었나요? '효도란 이러해야 한다'고 말하기 전에 이미 몸이 먼저 움직이는 동생이 있어 엄마한테 덜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