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읽기/논어4] 지금도 공자님의 '효(孝)'가 유효한가요?

곰곰
2022-07-11 10:19
381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산지 20년이 넘었다. 타지에서 생활하면 자주 뵙기 힘든 부모님에 대한 ‘효’는 더욱 간절해진다. 나와 사정이 비슷한 남편은 혼자 계신 시어머니가 걱정되어 나에게도 안부 전화를 드리는지 자주 확인한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일도 누가 시켜서 하려면 마음이 달아나는 법. 나는 미루다 미루다 마지못해 한 번씩 전화를 드리곤 한다. 아무래도 이건 ‘효’라고 말하기 좀 그렇다. 얼마 전 친정엄마의 칠순을 기념한 여행을 준비하면서 기왕이면 더 멋진 장소, 더 맛있는 음식, 기준보다 더 나은 곳이 어딜까 고민했고 그에 따라 여행 일정은 빡빡해졌다. 다행히 별다른 다툼 없이 여행을 잘 마쳤고 ‘고마운 딸’이라는 답변이 돌아왔지만, 문득 그때 내가 ‘효’라고 믿고 행한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

 

공자가 ’효’를 말하다.

 

<논어>를 보면 여러 사람이 공자를 찾아와 효에 대해 묻는다. 당시에도 효를 어떻게 실천하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공자의 대답은 명쾌하지 않다. 효는 구체적인 행위들로 드러나는 것이지, 하나의 본질로 설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공자는 일정한 형식(禮)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격식에 맞는 행동이라도 마음이 빠져 있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래서 공자는 효에 대해 묻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지 않고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 해준다. 한번은 맹무백이 효에 대해 물었다.

 

맹무백이 효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모는 오직 자식이 병들까 근심합니다.”
孟武伯問孝. 子曰: "父母唯其疾之憂." (위정 6)

 

아마도 맹무백은 건강이 좋지 않았나보다. 그러니 공자는 부모에게 효도한답시고 특별한 무언가를 하기 전에 자기 몸부터 잘 보살피라고 한 것이 아닐까. 부모의 걱정을 덜어드리는 것이야말로 효라고 말이다. 이번에는 자유가 효에 대해 묻는다. 공자의 대답은 앞서와 또 다르다.

 

자유가 효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요즘에 효는 부모님께 음식을 잘 해드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개나 말도 모두 잘 먹여 키우니, 공경하는 마음이 없으면 무엇이 다르겠느냐?”
子游問孝. 子曰: “今之孝者, 是謂能養. 至於犬馬, 皆能有養 ; 不敬, 何以別乎?” (위정 7)

 

날카로운 지적이다. ‘요즘’이라고 한 걸 보니 공자가 살았던 시대에도 효를 형식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나보다. 부모를 잘 봉양(奉養)하면 된다고, 즉 자식은 늙은 부모를 먹여 살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자는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말하면서 개와 말을 예로 든다. 사람은 개와 말에게도 먹이를 가져다 주고 집을 만들어 준다. 만약 공경하는 마음이 없다면 부모를 봉양한다고 해도 개나 말을 키우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다. 아마도 공자가 보기에 자유는 부모를 모시는 데에 마음으로는 정성을 다하지 못했던 듯하다. 그래서 음식을 잘 해드리는 것에 그쳐서는 안되고 마음으로 봉양해야 함을 강조한다. 공자가 말하는 ‘효’는 가장 정성스럽되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효’에 대해 생각하다.

 

공자는 춘추전국시대 혼란의 원인을 도덕성의 타락으로 진단하였다. 그 혼란을 극복하고 올바른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핵심요소로 ‘인(仁)’을 주장한다. <논어>에서 인은 사랑하는 마음이다. 나 자신을 수양하고 다른 사람까지 사랑하게 되는 것. 남을 배려하고 남과 함께 하며 나아가서 남을 위하는 의미까지 담겨있다. 인을 실천하는 근본은 효이다. 공자는 늘 가까운 데에서부터 인을 실천한다. 나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수양하는 ‘극기’에서 시작한 인은 나와 가장 가까운 내 부모를 섬기는 마음으로 이어지고 내 부모를 섬기는 마음처럼 다른 사람을 섬기고 공경한다면 더 이상의 규범과 도덕이 필요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평천하가 그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다는 것은 윗사람이 부모께 효도하면 백성에게서 효가 일어나고, 윗사람이 웃어른을 제대로 모시면 백성에게서 공경함이 일어나고, 윗사람이 홀로된 사람을 불쌍히 여기면 백성이 배신하지 않는다. 이러한 까닭에 군자에게는 ‘자신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헤아려 보는 도가 있다.”
所謂平天下在治其國者, 上老老而民興孝, 上長長而民興弟, 上恤孤而民不倍, 是以君子有絜矩之道也.
<대학> 전10장 - 平天下章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평천하를 말하면서 효를 그 시작점으로 삼는다. 공자가 말하는 효는 우리가 생각하고 실천하는, 단순히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봉양하는 것보다도 범위가 훨씬 넓다. <논어,사람의 길을 열다>(배병삼)에서 저자는 부모가 내리사랑을 하는 것은 모든 동물이 다 그렇지만, 부모의 사랑을 알아채고 그것을 감사히 여겨 이를 되갚겠다는 동물은 오로지 인간밖에 없다고 한다. 그만큼 효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공자는 이 인간만이 가진 ‘사랑 되돌려주기’(치사랑-上愛無)에 깊이 감동 하였고, 이 되돌려주는 사랑을 확산시켜 세계를 평화롭게 만들겠다고 작정했다.
효는 목표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우리가 운동을 하고 체력을 키우는 것은 땀을 흘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효를 실천하는 것은 효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 ‘되돌려주는 사랑’이라는 근육을 발달시키기 위해서다. 가족은 우리가 인을 계발하는 헬스장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사랑하는 법과 사랑받는 법을 배운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에서 시작하라. 사랑으로 충만한 관계는 결코 가족 안에서 머물 수 없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서 가족으로, 이웃으로, 국가로 모든 지각있는 존재로 관심의 영역을 확장할 때 인은 연못에 던진 돌멩이처럼 커다란 원을 만들며 퍼져 나간다는 것이 공자의 믿음이다.

 

‘효’는 방법론이다.

 

자하가 효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모님 앞에서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일이 있을 때는 젊은이가 힘든 일을 대신하고 술과 음식이 있을 때는 어른이 먼저 드시게 하는 것,
이것을 효라고 할 수 있겠는가?
子夏問孝, 子曰: "色難. 有事, 弟子服其勞; 有酒食, 先生饌, 曾是以爲孝乎?” (위정 8)

 

공자는 부모를 위해 수고로운 일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한다. 이것도 효성스러운 태도는 맞지만, 효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얼굴빛(표정)’이 중요하다고 한다. 아마 자하는 효행을 실천하기는 하는데, 얼굴 표정에는 귀찮은 기색이 그대로 드러났던 모양이다. 그 표정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많이 불편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효라고 할 수 있을까? 마음이 빠져 있다면 당연히 행동의 효과도 반감된다. 효를 행함에 있어서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공경이다.
최근에 어르신 케어 AI 로봇이라는 광고를 봤다. 로봇이 노인의 가장 친한 벗이라니 슬픈 마음이 먼저 들었다. 이미 고령화 시대는 시작되었고 노인을 책임지고 보살필 필요성은 점차 커지는데, 바쁜 자식은 부모를 챙길 여유가 없다. 그렇지만 독거노인을 살피는 반려 로봇이 자식의 미안한 마음을 대변해 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한숨이 난다. 남편 등살에 시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드리는 나도 결국은 이와 비슷한 것 아닌가? 공자의 효에 대입해 보면, 효성스러운 태도가 진정한 가치를 발휘하려면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 하니 말이다.

 

 

공자의 ‘효’는 현재의 나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공자의 말대로 부모님께, 나아가 시어머니께 진심에서 나온 미소를 지으며 기꺼이 ‘효’를 행한다면 무척 기쁘고 좋은 일이라는 결론에 다다르자, 정작 내 마음은 답답하고 불편해진다. 지금도 그런 효만이 마땅한 것일까? 과거의 사상은 흐트러지고 모든 것이 변했다. 그럼에도 옛날에 장착된 효의 마음은 그대로 남았고 그 형식도 크게 변한 것 같지 않다. 봉양도 제대로 못하는 시대에 어르신 케어 로봇은 효의 형식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음에도 찜찜한 마음이 드는 것은 그런 이유일테다.

하지만 효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공자는 효가 구체적인 행위이기에 그 마음을 중시했다. 마음은 일반화해서 말할 수 없고 행위로 드러나야 하기 때문에 질문하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다른 답을 주었다. 시대가 변한 만큼 전통적인 효에 대한 생각만 고집하는 것은 편협한 생각이다. 아직 그런 사람이 있다면 공자는 도리어 역정을 내지 않았을까. 공자가 말한 효의 기본과 ’색난(色亂)’의 의미는 되새기되, 지금도 그것이 유효한지 다시 물어야 한다. 얼굴색을 적극적으로 관리하여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드리는 것이 의미있는 효일지, 정체된 효의 자리에 머물면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공경에 미치지 못함에 힘들어 하는 건 괜찮은지 말이다. 효가 살아 있으려면, 지금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효의 방법, 각자의 처지에 따른 맞춤형 효의 방식을 상상하고 계발해야 할 때가 아닐까. 여전히 ‘효’는 질문이다.

댓글 3
  • 2022-07-12 16:27

    시부모님께 효도하기  인생과제입니다.

    가부장 문화의 분위기가 여전한 상태에서  마음을 담는 효를 행하기

    아슬아슬 줄타기도 해보고 가끔은 반항도 해보고

    슬기로운 효도생활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보는 수밖에

     AI는 좀 ......

    곰곰의 논어읽기 재밌습니다~

  • 2022-07-15 07:32

    효도와 관련  얼굴빛을 가다듬기 어렵다는  색난의 문제를 고민해 보게도 되는... 시간이었어요^^

  • 2022-07-19 18:48

    병원을 전전하는 친정엄마 때문에 막내동생은 오늘도 전화기를 붙들고 여기저기 이것저것 알아보느라 바쁩니다. 동생은 동양고전을 배우지 않았는데도,  '효'를 말할 때 절로 막내동생을 떠올릴만큼 엄마에 정성을 다합니다. 엄마의 지독한 고집과 아들만 좋아라하는 고약한 말에 눈물도 찔금거리고 '다시는 엄마 수발 안하겠다'고 선언하지만, 그래도 역시 제일 먼저 엄마의 보족기와 살살 녹는 복숭아를 사야 된다고 난리 블루스를 칩니다. 효의 사상이 바뀌었나요? '효도란 이러해야 한다'고 말하기 전에 이미 몸이 먼저 움직이는 동생이 있어 엄마한테 덜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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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군 2023.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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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꼭 필요할까요 『해피크라시』, 에바 일루즈 · 에드가르 카바나스 지음       나는 ‘나는 솔로(solo)’를 즐겨본다. 이번 기수 ‘영수’는 자기소개에서 자신의 가치관에서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를 어필했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 ‘영수’는 이제껏 그런 느낌을 주었던 다른 출연자들처럼 큰 이변이 없는 한 틀림없이 매력적으로 어필 될 터였다.  ‘정숙’역시 “평소에 긍정적이세요?”라는 ‘광수’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 당연히 좋은 것아니냐?”고 화답했다. 행복을 위해 긍정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우리 시대의 이런 이야기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에바 일루즈와 에드가르 카바나스의 『해피크라시』를 읽고 나면 무심히 들어오던 ‘행복’과 ‘긍정’이라는 평범한 단어에 갑자기 버퍼링이 걸릴지 모른다. 후기 자본주의 소비사회 특히 미국 사회에서의 감정의 위상에 주목하는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2007)』와 『사랑은 왜 아픈가』(2011) 등을 통해 감정의 영역과 경제 영역의 상호 침투 양상을 날카롭게 분석해온 것으로 유명한데, 이 책 『해피크라시』(2018)에서는 신자유주의 소비 사회 속의 거대한 ‘행복 추구의 물결’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기에 말이다. 실은 ‘행복’이라는 단어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좋음, good)’을 최고선이라 규정하며 지난하게 우리를 설득한 것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행복(happiness)’은 그저 복된 운수, 즐겁고 기쁜 상태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주관적인 만족과 안녕감을 의미하기에 말이다. 하여 객관적으로 명확히 파악되기 어려운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전 세계가 문화적, 도덕적, 인류학적 편견이나 전제 없이 해맑게(?) 사용하는 ‘무해한’ 언어 중의 하나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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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르륵 2023.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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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의 결과는 우연일까, 필연일까?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닐 슈빈     닐 슈빈은 2004년,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낸 과학자로 온 세계의 신문 1면을 장식한 주인공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물고기와 양서류의 중간 형태를 보여주는 화석 ‘틱타알릭’이다. 3억 7,500만년 전에 살았던, 지느러미 안에 두 팔을 가진 물고기 ‘틱타알릭’은 수생동물의 육지 전이의 명백한 증거가 되었다. 닐 슈빈은 1990년대부터 화석탐사에 나섰는데, 이 시기는 인간게놈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등 분자생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던 때였다. 화석이 과거에 살았던 생명체의 존재를 보여준다면, 생명체의 배아와 유전자 연구는 화석만으로는 알기 힘든 생명의 역사에 대한 정보를 찾아낸다. 닐 슈빈은 화석과 유전자, 두 영역을 자유롭게 오가며 진화의 비밀을 밝히는 진화생물학자이면서 『내 안의 물고기』와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등의 대중적 과학서를 쓴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는 다윈(1809~1882)의 시대로부터 유전자 편집기술로 실험이 이루어지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생물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발견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증명하기 위해 실험과 연구에 뛰어든 과학자들이 이야기는 마치 소설처럼 흥미롭게 읽힌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진화론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진화가 일어나는가’는 언제나 뜨거운 이슈였다. 이 이야기는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1859)에서 단 한 단어만을 바꾼 『종의 기원에 대하여 On the genesis of species』(1871)로 다윈을 비판한 마이바트(1827~1900)의 문제제기로부터 시작한다.   다윈은 한 종의 진화는 수많은 중간단계를 거친다고 생각했다. 마이바트는 자신이 찾을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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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2023.1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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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을 하고 가다가 라디오 광고를 듣고 웃음이 났다. 광고의 주인공은 ‘현해환경’이라는 기업이었다. 대개 ‘00환경’은 고물상의 고급진 표현인 경우가 많다. 현해환경은 고물상은 아니지만 배관청소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였다. 그 업체가 장자에 나오는 현해(懸解)라는 한자를 쓰는지 안쓰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내가 웃었던 이유는 그 광고를 듣고 과연 ‘현해’라는 뜻과 기업의 일이 절묘하게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꽉 막힌 배관을 뚫어 물길을 해방시키듯, 장자의 현해(懸解)는 스스로의 마음을 옭아맸던 상황에서 풀려나는 ‘자기해방’의 경지이다. 세 번째 ‘읽고쓰기1234’의 마지막에서 나는 물화를, 자기동일성의 해방이며 현해(懸解)로 가는 지름길을 연 것이라고 썼다. 올해의 마지막 읽고쓰기1234에서 나는 현해를 비롯한 장자의 개념을 꼼꼼하게 읽고, 나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관찰해보려 한다.   식은 재 같은 마음과 마른 나무 같은 몸 유소감은 장자철학의 주요 내용이 안명론(安命論)과 소요론(逍遙論)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각각 운명론과 자유론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운명론에서 출발해서 자유론으로 결론지어지는 구조로 장자철학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장자의 철학체계도 여러 사상적 측면이 내부에서 대립하고 또 융합하면서 유기적으로 하나의 사상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인정한다. 특히 장자는 현실에 대한 깊은 관찰과 비판, 그 현실의 초탈과 이상적 세계가 극단적으로 대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장자철학 안에는 현실세계와 이상적 세계로서의 정신세계가 늘 대립하고 있다. 장자철학 안에서 끝없이 모순적 국면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대립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대립과 모순은 장자가 살았던 당대의 사회적 맥락과 떼어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가 살았던 전국시대 중기는...
운전을 하고 가다가 라디오 광고를 듣고 웃음이 났다. 광고의 주인공은 ‘현해환경’이라는 기업이었다. 대개 ‘00환경’은 고물상의 고급진 표현인 경우가 많다. 현해환경은 고물상은 아니지만 배관청소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였다. 그 업체가 장자에 나오는 현해(懸解)라는 한자를 쓰는지 안쓰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내가 웃었던 이유는 그 광고를 듣고 과연 ‘현해’라는 뜻과 기업의 일이 절묘하게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꽉 막힌 배관을 뚫어 물길을 해방시키듯, 장자의 현해(懸解)는 스스로의 마음을 옭아맸던 상황에서 풀려나는 ‘자기해방’의 경지이다. 세 번째 ‘읽고쓰기1234’의 마지막에서 나는 물화를, 자기동일성의 해방이며 현해(懸解)로 가는 지름길을 연 것이라고 썼다. 올해의 마지막 읽고쓰기1234에서 나는 현해를 비롯한 장자의 개념을 꼼꼼하게 읽고, 나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관찰해보려 한다.   식은 재 같은 마음과 마른 나무 같은 몸 유소감은 장자철학의 주요 내용이 안명론(安命論)과 소요론(逍遙論)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각각 운명론과 자유론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운명론에서 출발해서 자유론으로 결론지어지는 구조로 장자철학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장자의 철학체계도 여러 사상적 측면이 내부에서 대립하고 또 융합하면서 유기적으로 하나의 사상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인정한다. 특히 장자는 현실에 대한 깊은 관찰과 비판, 그 현실의 초탈과 이상적 세계가 극단적으로 대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장자철학 안에는 현실세계와 이상적 세계로서의 정신세계가 늘 대립하고 있다. 장자철학 안에서 끝없이 모순적 국면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대립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대립과 모순은 장자가 살았던 당대의 사회적 맥락과 떼어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가 살았던 전국시대 중기는...
봄날 2023.1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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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진한 시기 중앙집권과 지방분권 사이에서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 읽기     들어가기 : 처음에는 한나라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 요즘 중국 한나라와 관련 있는 책을 보고 있다. 한나라에 관한 모든 것을 알자는 모토였지만, 세미나에서 읽은 책은 두세 권 남짓이다. <춘추>를 해석해낸 동중서의 <춘추번로>, 한 무제의 평전과 <염철론> 및 <사기>. 처음 김영민의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의 관심은 전적으로 한나라에 있었다. 세미나에서 강의안을 쓰자고 결의한 이상, 관련 이차자료를 봐야 하는 이상, <읽고쓰기 1234>도 하고 겸사겸사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나라에 대한 나의 관심은 지금 우리가 ‘중국’이라고 할 때 상상되는 모든 것들(‘漢’)의 원형이 이때 만들어졌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즉 흉노와의 전쟁을 통해 획득한 영토는 이후 중국인의 관념적 국토 영역의 한 원형이 구축되었으며, 독존유술獨尊儒術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중국 통치의 시스템이 마련되었으며, 경학/역사/문학 등 중국 정신 문화 영역에서의 모델이 구축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적으로 당시의 지도만 보더라도 우리가 상상하는 중국 영토와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나라 시대에 단지 그 ‘원형’이 세워졌다는 의미이지, 완벽히 확립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로부터도 우리는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역사적으로 다르게 상상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는 중국을 하나의 단일한 단위로 생각하는 본질주의적 접근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져 있다. ‘중국’이 역사적으로 고찰되어 온 과정을 밝히는 작업인 셈이다. 그는 서론에서 기존 정치사상사 전개에 딴지를 건다. 어떻게? 바로 그들이 밟고 서 있는 ‘기본...
  진한 시기 중앙집권과 지방분권 사이에서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 읽기     들어가기 : 처음에는 한나라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 요즘 중국 한나라와 관련 있는 책을 보고 있다. 한나라에 관한 모든 것을 알자는 모토였지만, 세미나에서 읽은 책은 두세 권 남짓이다. <춘추>를 해석해낸 동중서의 <춘추번로>, 한 무제의 평전과 <염철론> 및 <사기>. 처음 김영민의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의 관심은 전적으로 한나라에 있었다. 세미나에서 강의안을 쓰자고 결의한 이상, 관련 이차자료를 봐야 하는 이상, <읽고쓰기 1234>도 하고 겸사겸사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나라에 대한 나의 관심은 지금 우리가 ‘중국’이라고 할 때 상상되는 모든 것들(‘漢’)의 원형이 이때 만들어졌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즉 흉노와의 전쟁을 통해 획득한 영토는 이후 중국인의 관념적 국토 영역의 한 원형이 구축되었으며, 독존유술獨尊儒術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중국 통치의 시스템이 마련되었으며, 경학/역사/문학 등 중국 정신 문화 영역에서의 모델이 구축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적으로 당시의 지도만 보더라도 우리가 상상하는 중국 영토와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나라 시대에 단지 그 ‘원형’이 세워졌다는 의미이지, 완벽히 확립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로부터도 우리는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역사적으로 다르게 상상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는 중국을 하나의 단일한 단위로 생각하는 본질주의적 접근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져 있다. ‘중국’이 역사적으로 고찰되어 온 과정을 밝히는 작업인 셈이다. 그는 서론에서 기존 정치사상사 전개에 딴지를 건다. 어떻게? 바로 그들이 밟고 서 있는 ‘기본...
자작나무 2023.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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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 - 『문명들의 대화』 뚜웨이밍   뚜웨이밍(杜維明), 어디서 들었더라   학이당에서 한참 공부할 당시 유학의 흐름을 따라 주자를 거쳐 어찌어찌 왕양명의 『전습록』을 읽게 되었다. 그 때 문탁샘은 양명의 전기문으로 『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이라는 책을 뽑으셨지만 아쉽게도 그 책이 절판인 고로 최재묵 교수님이 쓴 『내 마음이 등불이다』로 바꾸어 읽었다. 그런데 종종 왕양명이 등장하는 순간마다 문탁샘은 우리가 뚜웨이밍의 책을 읽었다고 기억하고 계신 듯하다.   “왜, 우리도 읽었잖아. 그 책 왕양명의 전기인데… 그 책 쓴 사람이잖아.” “……?”   그렇게 이름만 익숙한 뚜웨이밍, 아마도 그가 궁금은 한데, 그의 다른 책이 딱히 없어서 이 책, 『문명들의 대화』를 사지 않았나 싶다. 1940년생인 뚜웨이밍은 현대 신유가로 대표되는 지식인이다. 중국 윈난성(雲南省) 쿤밍시(昆明市)에서 태어나 타이완의 뚱하이(東海) 대학을 졸업하고 1968년 하버드에서 동아시아 역사 · 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옌칭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중국 베이징대학교 고등인문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문명들의 대화』는 2000년 대 초 발행된 책으로 뚜웨이밍의 인터뷰, 강의록, 저널의 기고문 등을 모아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지은이의 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글들은 중복되는 내용도 많고, 다소 산만하게 구성된 점도 없지 않다. 또 2000년 대 초에 쓰인 책이라 저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 이제는 철지난 것이 되어버린 면도 좀 있다. 더 최근 자료가 있을까 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유학,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2015년)라는 제목의 강연 영상을 볼...
유교,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 - 『문명들의 대화』 뚜웨이밍   뚜웨이밍(杜維明), 어디서 들었더라   학이당에서 한참 공부할 당시 유학의 흐름을 따라 주자를 거쳐 어찌어찌 왕양명의 『전습록』을 읽게 되었다. 그 때 문탁샘은 양명의 전기문으로 『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이라는 책을 뽑으셨지만 아쉽게도 그 책이 절판인 고로 최재묵 교수님이 쓴 『내 마음이 등불이다』로 바꾸어 읽었다. 그런데 종종 왕양명이 등장하는 순간마다 문탁샘은 우리가 뚜웨이밍의 책을 읽었다고 기억하고 계신 듯하다.   “왜, 우리도 읽었잖아. 그 책 왕양명의 전기인데… 그 책 쓴 사람이잖아.” “……?”   그렇게 이름만 익숙한 뚜웨이밍, 아마도 그가 궁금은 한데, 그의 다른 책이 딱히 없어서 이 책, 『문명들의 대화』를 사지 않았나 싶다. 1940년생인 뚜웨이밍은 현대 신유가로 대표되는 지식인이다. 중국 윈난성(雲南省) 쿤밍시(昆明市)에서 태어나 타이완의 뚱하이(東海) 대학을 졸업하고 1968년 하버드에서 동아시아 역사 · 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옌칭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중국 베이징대학교 고등인문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문명들의 대화』는 2000년 대 초 발행된 책으로 뚜웨이밍의 인터뷰, 강의록, 저널의 기고문 등을 모아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지은이의 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글들은 중복되는 내용도 많고, 다소 산만하게 구성된 점도 없지 않다. 또 2000년 대 초에 쓰인 책이라 저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 이제는 철지난 것이 되어버린 면도 좀 있다. 더 최근 자료가 있을까 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유학,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2015년)라는 제목의 강연 영상을 볼...
진달래 2023.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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