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주역이야기 10회] 택수곤(澤水困), 뉘우치는 마음으로 가라

봄날
2023-04-22 18:40
370

주역의 4대 난괘 중 하나인 택수곤(澤水困)괘는 한 마디로 ‘결핍의 시대’을 상징한다. 이때의 결핍은 위는 연못이고 아래는 물인 곤괘의 물상이 변하면서 발생한다. 표면에 보이는 것은 연못인데, 연못에 차 있어야 할 물이 아래로 다 빠져나가 버려 못이 바짝 말라있는 상태. 물이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빠져나가는 연못은 더 이상 생명력이 없다. 택수곤괘의 결핍은 곧 생명력의 결핍이다. 나는 그 모양이 정확하게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생태파괴의 현장을 가리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사람들은 수천년 전에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던 자연 생태계가 망가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곤괘를 통해 경고의 메시지를 던져주려고 했던 것 아닐까? 그렇다면 택수곤괘에는 그런 비극적인 사태를 벗어날 수 있는 메시지도 함께 담겨있지 않을까? 나는 택수곤괘를 생태적 관점으로 읽어보려 한다.

 

인류문명은 택()에서 시작됐다

곤괘를 생태와 연결하여 생각하게 된 것은 바로 연못을 뜻하는 ‘택(澤)’이라는 글자 때문이다. 주역의 괘는 여덟 가지의 자연의 형상을 본따서 만든 3획을 두 번 겹쳐서 만들어진다. 여덟 개의 괘에서 표현하는 자연의 물상은 하늘(☰), 땅(☷), 불(☲), 우레(☳), 바람(☴), 물(☵), 산(☶), 연못(☱)이다. 이 물상들의 변화하는 모습과 서로 작용하는 모습을 보고 만든 것이 주역이니, 주역은 당연히 자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성괘 중에서 다른 괘의 물상은 뚜렷한데, 연못은 어딘가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물을 뜻하는 감괘(坎卦)가 엄연히 있는데 굳이 같은 물을 머금고 있는 택괘(澤卦)가 또 다른 소성괘를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연못, 즉 ‘택(澤)’이라는 글자가 가리키는 습지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됐기 때문이다. 습지는 옛날에는 하늘과 땅, 불, 바람, 그리고 물에 견줄만큼 뚜렷이 구분되는 성질과 능력(영향력)을 갖추고 있었다. 유독 습지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변한 것에는 까닭이 있다.

 

우리가 아는 상식은 이런 것이다. 인류 문명은 관개농업이 가능한 큰 강 유역에 사람들이 모여 농사를 지으며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곳에서부터 발전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말이다. 그러나 인류학자 제임스 스콧은 인류 문명은 습지에서 시작됐으며, 오늘날의 문명은 고대 사람들이 수 만년 동안 유지했던 ‘길들지 않은 자연’을 파괴한 위에 세워진 국가주의 문명이라고 주장한다. 초기에 인류가 모여 살기 시작한 곳은 습지였는데,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거의 전적으로 습지 자원을 이용했다. 습지는 수련이나 부들 같은 식물들 말고도 조개, 가재, 작은 포유류, 철따라 이동하는 짐승 등 주요 단백질 공급원들이 함께 먹이사슬을 이루고 있었다. 이 때문에 습지는 사람들이 정착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했다. 주역에서 말하는 택(澤)은 고대사회의 수많은 동식물들이 그곳에 깃들어 살면서 의식주를 해결했던, 풍부한 생명력이 살아있던 습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초기 정착 촌락과 초기 도시생활이 습지에서 기원됐다는 사실은 왜 간과되었는지 묻게 된다...늪지, 소택지, 습지는 일반적으로 문명의 거울상으로 여겨졌다. (이것들은)길들지 않은 자연이고 인적미답의 땅이며 건강과 안전을 위협하는 장소였던 것이다. 소택지와 관련해서 문명이 벌인 일은 바로 배수작업을 통해 잘 정리된 생산적 곡물 경작지와 촌락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건조지대의 문명화는 곧 관개를 의미한다. 물이 찬 늪지대의 문명화는 곧 배수를 의미한다.”(제임스 C. 스콧 『농경의 배신』)

 

문명과 야만의 전도(轉倒)

습지에서 먹이를 구하던 개구리가 그곳에 알을 낳고 개구리가 부화되면 그것을 먹이로 하는 뱀 등이 습지를 찾아온다. 또 뱀을 잡아먹는 짐승들이 습지에 모여든다. 짐승들의 분비물이 습지 주변 식물들의 양분이 되어 풍성한 수풀을 구성한다. 하지만 택지에서 물이 빠져나가면 택지에 기댄 이 생태계가 파괴된다. 택지의 물이 마르는 순간, 먹이사슬은 깨지고,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 것도 살지 않는’ 불모지가 된다. 그러니까 벼, 밀, 보리 같은 곡물 중심의 농업이 온갖 채집과 수렵의 문화를 ‘야만’으로 딱지 붙이자, 온갖 생명의 보물창고였던 습지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무엇이 야만이고 무엇이 문명인가. 바로 그 문명의 이름으로 늪지대의 물이 빠져버린 모습이 정확히 택수곤괘 아닌가. 곤괘의 곤(困)이라는 글자는 나무(木)를 에워싼(囗) 모양을 가지고 있다. 나무의 성장이 어떤 방식으로 방해받아 어려움에 빠진 상태. 이때 곤괘의 어려움, 결핍은 원래 가지고 있는 힘이 가리워지거나 가로막혀 생기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원래 가지고 있는 힘은 무엇이고, 그 무엇을 가로막는 것은 또 무엇일까.

 

곤괘의 괘사는 “곤은 형통하고 바르니, 대인이라서 길하고 허물이 없다. (그러나)말을 하면 믿지 않는다(困 亨 貞 大人吉 无咎 有言不信)”이다. 이때의 말(言)은 대인의 말일 것이다. 그러니까 대인이면 길한데, 지금은 그 대인의 말을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곤괘가 처한 상황은 대인의 말이 통하지 않는 시대의 모습을 가리킨다. 생태의 관점에서 보자면, 곤괘의 괘사에 나오는 대인은 바로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주체이다. 습지는 습지대로 온갖 생물들이 사는 형태를 보전하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대기가 조화로운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는 주체. 자연 그 자체이거나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 아닐까.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소인일 것이다. 곤괘는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는 대인과 소인의 싸움터이며 곤괘의 상황은 소인들에 가로막혀 대인의 힘이 발휘되지 못하는 사태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보자. 곤괘의 효사들은 그렇게 대인의 도가 소인에 가로막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이미 물이 빠져버린 습지에 식물들이 뿌리를 내리는 데 큰 곤란을 겪거나, 간신히 뿌리를 내렸다 해도 성장의 고통이 극심하거나 기계로 파헤쳐지는 습지에서 버티는 것이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다. 늪이 머금고 있어야 할 물이 빠져나가 버려 생긴 이 사태는 소인들이 벌인 일의 결과이다. 이때 곤괘의 대인은 자연이다. 자연의 도(道)가 가리워지거나 방해받지 않으면 습지는 뭇 생명들의 안식처로 살아갈 수 있다.

 

자연이 하는 일

택수곤괘는 고난을 풀어나가는 대인은 자연, 즉 자기복원력을 지닌 자연이라고 말한다. 자연이 스스로를 치유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특히 구오의 효사가 대변한다.

 

“코를 베고 발을 벰이니 적불에 곤하나 마침내 늦게는 기쁨이 있으리니, 제사에 씀이 이롭다.(九五 劓刖 困于赤紱 乃徐有說 利用祭祀(구오 의월 곤우적불 내서유열 이용제사)”

 

의월(劓刖), 즉 코를 베고 발을 베는 것은 고대 중국에서 행해지던 신체형의 일종이다. 여기서는 파괴로 인해 습지의 생물들이 당하는 온갖 상처와 피해로 읽힌다. 거대 발전담론에 의한 오늘날의 습지 파괴는 주역에서 말해지는 것 이상으로 전면적이다. 구오의 효사에 등장하는 붉은 앞장식, 즉 적불(赤紱)은 곤괘의 고난을 타개하는 주인공으로서, 긴 시간에 걸쳐 상터를 치유하고  새살이 돋게 하는 굳센 존재이다. 자연의 하는 일은 하나의 종, 또는 하나의 개체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만물이 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배치하는 일이다.

 

인간의 할 일, 치유의 말 하기, 뉘우치기

하지만 자연의 복원력을 그저 앉아서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다. 자연의 도와 손을 맞잡고 인간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 곤괘 상육의 효사는 제일 먼저, 우리가 자연에 대해 습관처럼 해오던 것들을 멈추고 ‘뉘우치는 마음’을 가지라고 말한다.

 

“칡넝쿨과 위태로운 곳에 곤함이니, 동할 때마다 뉘우침이 있다고 말하며 뉘우치는 마음으로 가면 길하다.(上六 困于葛藟 于臲卼 曰動悔 有悔 征吉 상육 곤우갈류 우얼올 왈동회 유회 정길)”

 

갈류(葛藟)는 칡넝쿨, 얼올(臲卼)은 불안하고 위태로운 모양을 뜻한다. 칡넝쿨처럼 마구 엉켜있어 도저히 풀기 어려운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해법은 바로 ‘뉘우치기’이다. 왈동회유회(曰動悔有悔)는 곤괘의 어려움을 뚫고 나가는데 있어 구오와 더불어 ‘치유하는 말을 주고 받으면서 실제로 뉘우침에 이르는 것’이 인간의 할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자연에 대해 습관처럼 후회할 짓만 해왔다. 인간 생활의 편리함을 들어 밤을 낮처럼 밝게 만들고, 숲의 나무를 잘라 힐링하우스를 만들고, 늪에서 자라던 뭇 생명들을 앗아 유전자콩을 수확했다. 그러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고 말해왔다. 이제 그 말을 바꿀 때가 되었다.

 

“우리는 세상이 파괴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정보의 홍수에 둘러싸여 있으나, 세상에 어떻게 양분을 공급할지에 대해서는 아무 얘기도 듣지 못한다. 환경주의가 암울한 예언과 무력감의 동의어가 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로빈 월 키러머 『향모를 땋으며』)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동안 환경주의라는 스스로의 틀에 갇혀 비관과 상실감만 재생산해왔다. 이제 우리의 할 일은 ‘후회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고 ‘치유의 말’을 하는 것이다. 지난 ‘414기후정의파업’은 그 규모나 언론 노출빈도에 상관없이 ‘치유의 말’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작은 속삭임이라도 절망이 아닌 희망을 길어내는 말을 하면서 ‘뉘우침’에 입각해 하나씩 행동에 나설 일이다. 극한으로 치닫는 생태파괴 뿐 아니라, 이 땅위에 사는 인간의 기본권과 공공성의 가치가 묵살되고, 불공정, 부정의가 만연한 사회가 언제까지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움직일 때마다 후회의 말을 하고 후회하는 마음을 두라(曰動悔 有悔).” 곤괘의 상육은 분명 우리에게 그동안의 안일함과 자괴감의 시간을 뉘우치고, 스스로를 회복하는 자연과 함께 인간의 회복을 위해 나아가라고 말한다.

댓글 6
  • 2023-04-23 07:07

    인류의 문명은 '택'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 새삼 다시 다가오네요.
    그리고 또다른 '택'에서도 우리의 태도를 볼 수 있겠지요. 뉘우치는 마음으로...
    잘 읽었습니다!!!!!!!!

  • 2023-04-23 12:52

    택수곤괘를 생각하며 최근 황윤감독이 찍은 영화 <수라>를 같이 보고 싶습니다.
    <수라>는 또 다른 습지인 새만금의 수라갯벌을 찍은 영화입니다.
    6월에 개봉한다는데.. 이곳저곳에서 공동체상영을 하더라고요.

    • 2023-04-23 18:24

      내가 청량리한테 여러번 이야기했는데, 필름이다에서 공동체상영좀 추진해보라구...... 쩝!!!

  • 2023-04-23 18:23

    김산하의 <습지주의자>도 좋아요.^^

  • 2023-04-24 09:36

    습지에 한 번 다녀와야겠어요...

  • 2023-04-26 07:29

    습지...... 관광지로만 생각해온 무지한 1인 입니다.
    뉘우치는 '택수'곤을 보니 거꾸로괘인 절제하는 '수택'절도 생각나네요.
    너무 잘읽었습니다^^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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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4.04.22 | 조회 125
봄날의 주역이야기
우리 사무실은 한 사람의 후원자 A씨가 거액의 전세 보증금을 빌려준 덕에 월세 없이 5년여를 버텨왔다. 그런데 그 후원자가 그것을 돌려받고 싶어했다. 실은 이런 뉘앙스의 말을 일년 전부터 들어왔다. 하지만 월세가 얼마가 되었건 새로운 고정지출을 만드는 건 회사 운영에 큰 위협이 된다는 점에서, 나는 듣고도 모른 체 해왔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동네서점’을 지향하며 청년 중심으로 운영되는 서점의 관리자 B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우리 서점이 0월말로 전세기간이 만료돼요. 조금 더 공간이 크고, 학교와 가까운 곳으로 옮길 생각인데...혹시 함께 공간을 얻을 생각이 있으신지요?”   한번도 이 문제에 대해 입밖에 낸 적도, B씨와 논의한 적도 없었는데, 나는 이상하게 그 제안에 끌렸다. 늘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던 A씨에 대한 부채를 해결하고픈 생각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공간을 함께 나누면 월세의 부담도 덜고, 초기 위험부담도 적어질 거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나는 덜컥 동의를 해버렸고, 하루 이틀 사이에 신축건물 2층 공간을 발견하고, 며칠 사이에 월세계약까지 해치워버렸다. 누가 떠민 것도 아닌데,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정해진 수순처럼 나의 결정은 거침 없었다.   택천괘(澤天夬)는 바로 이런 결정의 순간을 가리킨다. ‘결단하다’, ‘결정하다’의 뜻을 가진 쾌(夬)라는 글자는 활시위를 당길 때 엄지에 끼는 깍지나, 깍지를 낀 손의 형상에서 나왔다. 활은 쏘아 맞히는 도구이고, 시위를 당긴 화살은 언젠가는 쏘아야 한다. 쾌괘는 목표를 겨누었다가 깍지를 풀어놓는 그 순간의 상황이다. 겨눌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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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4.01.08 | 조회 322
봄날의 주역이야기
다섯 달 동안 주역공부를 같이 했던 친구들과 발표회를 치렀다. 준비하면서 이번엔 좀 색다른 방식으로 해보자고 뜻을 모았다. 에세이를 발표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많은 친구들이 퍼포먼스나 전시같은 형식을 택했다. 나도 몇 달 전부터 배우기 시작한 민화를 이용해 주역을 표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런 저런 궁리 끝에 8개의 소성괘를 민화기법으로 그려보기로 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민화로 주역을 표현한 작품들이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민화 작품이 음양오행을 중심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태극모양이거나 3획의 검은색 막대그림은 주역을 아는 사람에게도 흥미를 끌지 못했다. 그러니까 8개의 소성괘가 가진 물상을 그린 것은 없었다는 것이다. 참고할만한 것이 없다는 아쉬움과 함께 나야말로 소성괘의 물상을 제대로 그려보리라는 욕심도 생겼다.   하늘, 땅, 연못, 번개(우레), 불, 물, 산, 바람의 물상을 가진 소성괘를 가시적으로 표현해내는 것은 만만하지 않았다. 하늘을 그냥 파랗게, 땅을 그냥 황토색으로 칠하는 것은 소성괘를 잘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산, 번개 등을 형상화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려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바람’을 뜻하는 손괘(巽卦)를 형상화하는 일이었다. 바람은 기체의 움직임 자체이니 육안으로 볼 수는 없고, 불거나 멈추는 데 일정한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발생과 소멸 또한 예측할 수 없다. 형체없는 자연물의 형상화 때문에 머리가 아플 정도로 고민하다가 마침 손괘에 배속된 자연물에 나무도 있다는 것에 착안해서 ‘나무에 이는 바람’을 그리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바람을 다시 보게 됐다. 바람은 형체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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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2 | 조회 214
봄날의 주역이야기
  쌀벌레가 나타나야 쌀이 상한 것을 안다 십년이 넘도록 함께 웃고 지내던 동아리에 일이 생겼다. 표면적으로는 멤버 중 몇몇의 술이 과해서 벌인 쌈박질이지만, 그것은 오랫동안 동아리 내에서 묵혀두었던 ‘과거사’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육십갑자가 넘은 사람들이 해도 되는 말과, 절대로 하면 안되는 말을 마구 내뱉었다. 욕설을 몇 번 주고받던 사람들이 급기야 의자를 집어던지고 주먹다짐을 하고 말았다. 장수하는 동아리로, ‘성격 좋은 사람들’이 모인 동아리로 주변의 부러움을 샀었는데, 비록 술기운을 빌렸다고 하지만, 누군가의 가슴 속에 상처가 되는 말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십년의 우정은 어디로 가고, 곪을대로 곪아버린 관계만이 드러났다. 그것은 주역의 18번째 괘인 산풍고(山風蠱)괘가 형상화한 ‘벌레먹은 그릇’, 바로 그것이었다.   괘명인 고(蠱)라는 한자는 그릇(皿) 속에 많은 벌레가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벌레의 종류를 정확하게 규정하지 않고 있지만, 이때의 벌레는 쌀에서 생겨나는 바구미 같은 류를 생각하는 것이 적당할 듯하다. 좀 오래된 쌀독을 열었을 때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구미처럼, 우리는 벌레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쌀이 상했을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바구미가 튀어나온 순간, 일은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넘어가고, 시선은 쌀에서 벌레로 옮겨간다.     산 아래 머무는 바람이 하는 일 이렇게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진 데에는 나름대로 원인이 있을텐데, 64괘가 배열된 차례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측면이 있다. 산풍고괘는 18번째 괘인데, 16번째 괘는 ‘기쁨’을 나타내는 뇌지예(雷地豫)괘이고, 17번째는 ‘남을 따른다’는 뜻을 가진 택뢰수(澤雷隨)괘이다. 그러니까, 기뻐하고 따르는...
  쌀벌레가 나타나야 쌀이 상한 것을 안다 십년이 넘도록 함께 웃고 지내던 동아리에 일이 생겼다. 표면적으로는 멤버 중 몇몇의 술이 과해서 벌인 쌈박질이지만, 그것은 오랫동안 동아리 내에서 묵혀두었던 ‘과거사’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육십갑자가 넘은 사람들이 해도 되는 말과, 절대로 하면 안되는 말을 마구 내뱉었다. 욕설을 몇 번 주고받던 사람들이 급기야 의자를 집어던지고 주먹다짐을 하고 말았다. 장수하는 동아리로, ‘성격 좋은 사람들’이 모인 동아리로 주변의 부러움을 샀었는데, 비록 술기운을 빌렸다고 하지만, 누군가의 가슴 속에 상처가 되는 말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십년의 우정은 어디로 가고, 곪을대로 곪아버린 관계만이 드러났다. 그것은 주역의 18번째 괘인 산풍고(山風蠱)괘가 형상화한 ‘벌레먹은 그릇’, 바로 그것이었다.   괘명인 고(蠱)라는 한자는 그릇(皿) 속에 많은 벌레가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벌레의 종류를 정확하게 규정하지 않고 있지만, 이때의 벌레는 쌀에서 생겨나는 바구미 같은 류를 생각하는 것이 적당할 듯하다. 좀 오래된 쌀독을 열었을 때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구미처럼, 우리는 벌레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쌀이 상했을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바구미가 튀어나온 순간, 일은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넘어가고, 시선은 쌀에서 벌레로 옮겨간다.     산 아래 머무는 바람이 하는 일 이렇게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진 데에는 나름대로 원인이 있을텐데, 64괘가 배열된 차례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측면이 있다. 산풍고괘는 18번째 괘인데, 16번째 괘는 ‘기쁨’을 나타내는 뇌지예(雷地豫)괘이고, 17번째는 ‘남을 따른다’는 뜻을 가진 택뢰수(澤雷隨)괘이다. 그러니까, 기뻐하고 따르는...
봄날
2023.07.04 | 조회 285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의 4대 난괘 중 하나인 택수곤(澤水困)괘는 한 마디로 ‘결핍의 시대’을 상징한다. 이때의 결핍은 위는 연못이고 아래는 물인 곤괘의 물상이 변하면서 발생한다. 표면에 보이는 것은 연못인데, 연못에 차 있어야 할 물이 아래로 다 빠져나가 버려 못이 바짝 말라있는 상태. 물이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빠져나가는 연못은 더 이상 생명력이 없다. 택수곤괘의 결핍은 곧 생명력의 결핍이다. 나는 그 모양이 정확하게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생태파괴의 현장을 가리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사람들은 수천년 전에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던 자연 생태계가 망가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곤괘를 통해 경고의 메시지를 던져주려고 했던 것 아닐까? 그렇다면 택수곤괘에는 그런 비극적인 사태를 벗어날 수 있는 메시지도 함께 담겨있지 않을까? 나는 택수곤괘를 생태적 관점으로 읽어보려 한다.   인류문명은 택(澤)에서 시작됐다 곤괘를 생태와 연결하여 생각하게 된 것은 바로 연못을 뜻하는 ‘택(澤)’이라는 글자 때문이다. 주역의 괘는 여덟 가지의 자연의 형상을 본따서 만든 3획을 두 번 겹쳐서 만들어진다. 여덟 개의 괘에서 표현하는 자연의 물상은 하늘(☰), 땅(☷), 불(☲), 우레(☳), 바람(☴), 물(☵), 산(☶), 연못(☱)이다. 이 물상들의 변화하는 모습과 서로 작용하는 모습을 보고 만든 것이 주역이니, 주역은 당연히 자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성괘 중에서 다른 괘의 물상은 뚜렷한데, 연못은 어딘가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물을 뜻하는 감괘(坎卦)가 엄연히 있는데 굳이 같은 물을 머금고 있는 택괘(澤卦)가 또 다른 소성괘를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주역의 4대 난괘 중 하나인 택수곤(澤水困)괘는 한 마디로 ‘결핍의 시대’을 상징한다. 이때의 결핍은 위는 연못이고 아래는 물인 곤괘의 물상이 변하면서 발생한다. 표면에 보이는 것은 연못인데, 연못에 차 있어야 할 물이 아래로 다 빠져나가 버려 못이 바짝 말라있는 상태. 물이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빠져나가는 연못은 더 이상 생명력이 없다. 택수곤괘의 결핍은 곧 생명력의 결핍이다. 나는 그 모양이 정확하게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생태파괴의 현장을 가리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사람들은 수천년 전에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던 자연 생태계가 망가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곤괘를 통해 경고의 메시지를 던져주려고 했던 것 아닐까? 그렇다면 택수곤괘에는 그런 비극적인 사태를 벗어날 수 있는 메시지도 함께 담겨있지 않을까? 나는 택수곤괘를 생태적 관점으로 읽어보려 한다.   인류문명은 택(澤)에서 시작됐다 곤괘를 생태와 연결하여 생각하게 된 것은 바로 연못을 뜻하는 ‘택(澤)’이라는 글자 때문이다. 주역의 괘는 여덟 가지의 자연의 형상을 본따서 만든 3획을 두 번 겹쳐서 만들어진다. 여덟 개의 괘에서 표현하는 자연의 물상은 하늘(☰), 땅(☷), 불(☲), 우레(☳), 바람(☴), 물(☵), 산(☶), 연못(☱)이다. 이 물상들의 변화하는 모습과 서로 작용하는 모습을 보고 만든 것이 주역이니, 주역은 당연히 자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성괘 중에서 다른 괘의 물상은 뚜렷한데, 연못은 어딘가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물을 뜻하는 감괘(坎卦)가 엄연히 있는데 굳이 같은 물을 머금고 있는 택괘(澤卦)가 또 다른 소성괘를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봄날
2023.04.22 | 조회 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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