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주역이야기 5회] 호랑이 꼬리를 밟다, 리호미
봄날
2022-04-03 21:49
568
대학 졸업반때 처음으로 이력서를 썼던 기억이 난다. ‘00고 졸업’ ‘00대 졸업예정’이 내 이력의 전부였다. 이후 내 이력서에는 다양한 경험들이 한 줄씩 추가됐다. 줄과 줄 사이, 수많은 관계 속에서 부대끼며 울고 웃던 내력을 이력서에 표현할 길은 없지만, 어쨌든 이력서를 쓰는 것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효과는 있다. 이력서의 끝에는 ‘위의 내용은 사실과 틀림없음을 증명하며, 사실과 다를 경우 그에 따른 피해를 감수한다’는 서약까지 붙어있다. 주역 천택리(天澤履)괘의 이(履)라는 글자는, 바로 자신의 살아온 내력을 거짓없이 써야 하는 이력서의 이(履)자이다. 이 글자는 ‘밟는다’ ‘신발’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천택리괘는 나 또는 누군가가 만들어낸 ‘길’에 대한 이야기이다.
천택리괘는 위는 하늘, 아래는 연못의 형상을 하고 있다. 또 상괘는 굳세고 하괘는 기뻐함이라는 각각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상체가 가진 곧은 품새를 하체가 기뻐하며 따르는 것이 천택리괘의 내용이다. 그리고 이 ‘하늘의 올곧음을 기뻐하면서 기꺼이 따르는 모습’을 주역은 리호미(履虎尾),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이때 상체인 건괘는 호랑이를, 하체인 택괘는 사람을 상징한다. 사람이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뜻인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내가 천택리괘를 흥미롭게 느낀 건, 괘사와 효사에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똑같은 구절이 세 번이나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구절은 세 번 모두 각각 다르게 해석되고 각각 다른 강도로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호랑이 꼬리를 밟는 것은 예(禮)의 실천이다
천택리괘의 괘사는 ‘리호미(履虎尾) 부질인(不咥人) 형(亨)’이다. “호랑이 꼬리를 밟는데 사람을 물지 않으니 형통하다”고 풀이한다. 이때의 리호미(履虎尾)는 실제로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니까 ‘호랑이’와 ‘꼬리’, 그리고 ‘밟는다’의 의미를 각각 읽어내야 한다. 우선 호랑이는 앞에서 말한 대로 하늘, 하늘의 법칙이다. 꼬리가 뜻하는 것은 뒤, 즉 앞서지 않고 따라가는 것, 앞선 이의 뒤통수를 보는 것이다. ‘밟는다’가 의미하는 것은 실천이다. 상전에서는 이 실천을 예(禮)라고 설명한다. 예란 어떤 것일까? “하늘이 위에 있고 못이 아래에 있는 것이 리괘(履卦)이니, 군자가 그것을 본받아 위아래를 분별하고, 백성의 뜻을 안정시키는 것”이 바로 예이다.
위아래를 분별한다고 하면 즉각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작동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예(禮)는 청년의 희망을 찍어누르는 ‘수저드립’같은 것이 아니다. 예란 천도가 드러난 대로 치밀하게 사는 것이다. 그리고 예를 다한다는 것은 사람마다 (자신의 지위나 상황과 상관없이)어떤 일에 대한 ‘A to Z’의 과정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같은 실천에는 ‘기꺼이 따라함’이라는 단서도 붙는다. 그러니까 이때의 예는 법이나 제도로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내재한 자율성을 기반으로 한 실천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실천의 방향은 ‘하늘이 제시하는 길’ 즉, 천도(天道)이다. 그런데 하늘의 길은 대로처럼 우리 눈앞에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 것이 천도를 따르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천택리괘는 그 어려운 천도를 따르는 핵심이 실천이라고 말한다. 실천없이 천도는 실현되지 않는다. 비록 어떻게 하는 것이 천도를 따르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끊임없이 책임지며 돌아보는 일에 내가 직접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괘사는 일(事)이고 효사는 때(時)이다
그런데 이런 ‘천도를 따르는 일’을 왜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위험천만한 이미지로 표현했을까? 혹시 정말로 호랑이 꼬리를 밟는 것처럼 극적인 순간, 혹은 장면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 아닐까? 이 리호미는 주역의 텍스트가 가지는 매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괘사의 리호미가 사회적인 약속을 실천하는 일(事) 전체를 가리킨다면, 효사의 리호미는 그 실천과정에서 생기는 일종의 ‘위반’, 즉 일상에서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실수, 어긋남의 순간(時)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때의 리호미는 길(吉)하고, 어떤 때의 리호미는 흉(凶)하다. 길한 것은 그 실수를 잘 다루어 일상을 회복한 것이고, 흉한 것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결국 리호미는 잠시도 쉬지 않는 인간의 행위과정, 즉 일상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변용에 대한 스토리이다. 천택리괘의 효사에서 다루는 리호미를 자세히 살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구나 직면할 수 있는 위반의 순간에 나는 과연 어떻게 해야 길할 수 있을까.
호랑이꼬리를 밟으니 흉하다
천택리괘에 등장하는 세 번의 리호미 중에, 두 번째 리호미는 육삼효에 등장한다. 육삼의 효사는 “애꾸눈이 남들처럼 보고, 절름발이가 남들처럼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호랑이 꼬리를 밟아서 사람을 무니 흉하고, 무인이 대군이 된다(육삼 묘능시 파능리 리호미 질인 흉 무인 위우대군, 六三 眇能視 跛能履 履虎尾 咥人 凶 武人 爲于大君).”이다. 이때 묘(眇)는 애꾸눈, 파(跛)는 절름발이이다. 삼효는 하괘의 맨 윗자리이고 원래 양이 있어야 할 자리인데 천택리괘에서는 음이 자리잡고 있다. 이것을 바로 애꾸눈과 절름발이로 표현한 것이다. 애꾸눈과 절름발이로 표현한 것은 자리에 맞지 않는 사람이나 시기를 가리키는 것이다. 요즘 이런 식의 표현은 곧장 장애인 비하로 취급되어 지탄을 받는다. 그러나 주역은 애꾸눈과 절름발이를 ‘정상에 미치지 못하는 모자람’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체적인 결함이 장애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지나친 ‘오만’이나 ‘자기과시’가 장애라는 것이다. 오만과 자기과시의 결과, 자기자신만 위기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 어렵게 만든다. 주역이 리호미로서 경계하는 것은 현재의 위치나 상황을 자세히 돌아보지 않을 때 생길 수 있는 이같은 위기의 가능성이다.
호랑이꼬리를 밟았는데도 길하다
구사에 마지막 리호미가 나온다. 구사의 효사는 “호랑이 꼬리를 밟으니, 두려워하고 조심하면 마침내 길할 것이다(구사 리호미 색색 종길 九四 履虎尾 愬愬 終吉).”라고 해석한다. 육삼과 마찬가지로 호랑이 꼬리를 밟았는데 이번에는 길하다고 한다. 색색(愬愬)(혹은 ‘삭삭’으로도 읽는다)은 ‘두려워하다’는 뜻의 색(愬)이라는 글자를 거듭해서 그 모습을 강조한다. 그러니까 호랑이 꼬리를 밟았는데도 극도로 조심하면 길하다는 것이다. 극도로 조심하는 것은 위태로운 순간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는 뜻일까. 그렇지 않다. 구사는 상체의 첫 자리이자, 건괘의 아랫자리이다. 하체에서 상체로 국면이 바뀌었다는 뜻이니, 실천의 방법도 달라진다. 원래 음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 양이 자리잡았으니까 그 기운이 이미 강하다. 그러므로 여기서 ‘색색’은 강한 힘을 컨트롤하라는 주문이다. 즉 속도를 내는 힘이 아니라 브레이크를 밟아 속도를 조절하는 힘이 중요하다. 구사는 다행히 그런 능력이 있으니(속도나 힘을 조절함으로써) 길한 결과를 얻게 된다.
리호미에는 고정불변의 형식이 없다
리호미는 예의 실천이고, 예는 ‘천도(天道)를 따르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그 예를 따르며 사회를 이루고 살아간다. 물론 이것은 시대적으로 각기 다른 형식으로 드러난다. 귀하고 천한 신분이 나뉘어 있던 조상들의 사회에서 예는 바로 그 신분에 맞는 규범을 따르는 것이 곧 천도였다. 신분질서가 사라진 오늘날에는 예를 찾는 것도, 그 예를 실천하는 것도 어렵다. 고정불변한 법칙으로 주어지면 차라리 편하게 따르면 될텐데, 알다시피 일상에는 늘 변수가 따른다. 그래서 인간의 실천은 호랑이 꼬리를 밟는 것처럼 진땀 빼게 만드는 긴장의 연속이다. 길흉은 그 변수의 등장에 따라 변용되는 인간실천의 결과이다. 어제는 길이었지만 오늘은 흉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삶의 변용이 요구되는 지점에서 우리는 그 방향타가 되어줄만한 존재를 찾는다. 책을 읽거나 스승을 만나 그 가르침을 뒤따라 가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그것도 그렇게 쉽지 않다. 이전에는 분명한 길이었을지 몰라도, 늘 다른 변수를 가진 리호미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인간의 삶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는 최근 불가피하게 한 조직의 대표를 맡게 됐다. 능력도 열정도 선임대표에 미치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가 다져놓은 길을 충실히 따라가리라 다짐하지만,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나는 매번 뭔가를 결정해야 하고 매번 뭔가 새로운 선택을 요구받는다. 이때 내가 혹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내맘대로 보인다고 믿고, 해낼 수 없는 것을 내맘대로 서둘러 앞서가려다 육삼의 리호미가 되는 것은 아닌지, 육삼의 리호미는 나를 흔들어 깨운다.
또 하나 명심할 것은 이렇게 내가 밟아가는 길은 나혼자 밟고 지나가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나의 뒤를 따라 그 길을 밟을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한 걸음, 한 걸음 함부로 내디딜 수 있겠는가. 천택리괘의 리호미처럼 조심하고 또 조심할 일이다.
“눈덮인 들판을 걸어갈때는(踏雪野中去)
어지러이 걷지 말라(不須胡亂行)
오늘 나의 발자국은(今日我行跡)
뒷사람들의 이정표가 되리라(遂作後人程)”
- 서산대사의 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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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주역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처음 댓글을 달아봅니다.
늘 처음은 참 어렵습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삶의 역동.
주역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네요.
어려운 건 제가 글을 잘 못쓰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역이야기가 재미있다고 하시니 감사합니다~
좀더 분발할께요.
무엇인가의 뒤를 따르는데, 그 뒤를 또 따르는게 있을거라는 마무리가 인상적이네요
미처 생각못했던 부분인데, 봄날쌤의 현장에서 나오는 생생한 배움이군요
호랑이 꼬리는 밟지도, 밟지 않지도 말아야겠군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