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카메오 열전 9회] 세상을 피하는 선비들의 지혜

진달래
2022-11-18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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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터는 어디 있는가

 

장저와 걸익이 나란히 밭을 갈고 있었다. 공자께서 그곳을 지나가다 자로에게 나루터를 묻게 하셨다. 장저가 말했다. “저 수레에서 고삐를 잡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자로가 말했다. “공구이십니다.”

장저가 말했다. “저 분이 노나라 공구인가?”

자로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장저가 말했다. “그 분은 나루터를 알 것이다.”

자로가 걸익에게 나루터를 물었다. 걸익이 말했다. “그대는 누구인가?”

자로가 말했다. “중유라고 합니다.”

걸익이 말했다. “그대가 바로 노나라 공구의 제자인가?”

자로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걸익이 말했다. “강물이 도도히 흘러가듯 천하가 모두 그러하다. 누가 그것을 바꾸겠는가? 또한 그대는 사람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기보다는 차라리 세상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리고는 곰방메로 흙 덮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자로가 돌아와 이 일을 말씀드렸다. 공자께서 실망스러운 듯 말씀하셨다. “새와 짐승과는 함께 무리를 지을 수 없다. 내가 사람의 무리와 함께 하지 않으면 누구와 함께 하겠느냐? 천하에 도가 있다면, 내가 너희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長沮·桀溺耦而耕 孔子過之 使子路問津焉 長沮曰 夫執輿者爲誰 子路曰 爲孔丘 曰 是魯孔丘與 曰 是也 曰 是知津矣 問於桀溺 桀溺曰 子爲誰 曰 爲仲由 曰 是魯孔丘之徒與 對曰 然 曰 滔滔者天下皆是也 而誰以易之 且而與其從辟人之士也 豈若從辟世之士哉 耰而不輟 子路行以告 夫子憮然曰 鳥獸不可與同羣 吾非斯人之徒與而誰與 天下有道 丘不與易也)『논어』「미자,6」

 

초(楚)나라를 떠나 제자들과 위(衛)나라로 돌아가던 공자 일행은 길을 잃었다. 공자는 하는 수 없이 근처 밭을 갈고 있던 농부들에게 길을 묻기로 했다. 자로가 농부들에게 다가가 나루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다. 그들은 멀리 수레를 타고 있던 공자와 그의 제자들을 흘끗 보고는 정작 나루의 위치는 알려주지 않고 말했다. “그 분은 나루터를 알 것이다.” 뜬금없어 보이는 이 대답으로 후세 사람들은 ‘문진(問津/나루터를 묻다)’을 ‘도(道)를 묻다’는 의미로 쓰게 되었다. 그러나 “그 분은 나루터를 알 것이다.”라고 한 이 대답은 한편으로 공자를 조롱하는 의미로 읽기도 한다.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다고 하는 공자이니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지 않겠나.”

자로와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 장저와 걸익은 평범한 농부가 아니다. 이들은 걸익의 표현대로 “피세지사(辟世之士)”다. 즉 혼란한 세상을 피해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선비들, 흔히 ‘은자(隱者)’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장저와 걸익은 공자에게 이미 도가 사라진 세상의 흐름을 바꾸기 어려우니 혼자 그렇게 동동거리며 애쓰지 말고 자기들과 더불어 ‘세상을 피해 사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한다.

걸익의 말에 의하면 공자는 “피인지사(辟人之士)”다. 공자는 정치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자 노나라를 떠났고,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며 자신을 써줄 군주를 찾았다. 불러주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무작정 달려가지 않고 제대로 정치를 할 만한 사람을 찾아다녔다. 말 그대로 ‘사람을 가려서 벼슬을 구하는 선비’다. 자로가 이들의 말을 공자에게 전하자 공자는 “천하에 도(道)가 있다면 내가 굳이 이렇게 세상을 바꾸려 돌아다니겠는가?”라고 답한다.

 

 

정치는 위태롭다

 

『논어』 「미자」편에는 이런 은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특히 장저·걸익의 앞뒤로, 세 편이 나란히 공자가 만난 은자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초나라의 미치광이 접여가 노래를 부르면서 공자의 앞을 지나갔다.

“봉황이여! 봉황이여! 어찌하여 덕이 그토록 쇠하였느냐?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지만, 다가올 일은 따를 수 있다네. 그만두어라! 그만두어라! 오늘날 정치하는 사람은 위태하구나!”

공자께서 수레에서 내려 그와 함께 말하고자 하셨다. 접여가 빠른 걸음으로 피하니 그와 함께 말하지 못하셨다. (楚狂接輿歌而過孔子曰 鳳兮 鳳兮 何德之衰 往者不可諫 來者猶可追 已而 已而 今之從政者殆而 孔子下 欲與之言 趨而辟之 不得與之言) 「미자,5」

 

공자와 같은 사(士)계층으로 지칭되는 이들은 관직에 나아가 자기의 능력을 펼치는 것을 목표로 삼은 사람들이다. 무릇 공부를 한다는 것은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시대의 분위기에서 벼슬을 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기도 했다.

춘추시대 말기에는 제후들을 시해하는 대부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여기에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른 나라로 도망을 가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양화나 공산불뉴와 같은 가신(家臣)들의 반란도 자주 있었다. 이런 일들은 때로는 개인의 욕심에 의해서 생기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릇된 일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명분이 있건 없건 그 사이에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일이 생기는 것은 모두 같았다.

초나라에서 만난 광접여는 바로 이런 사태를 경고하는 것이다. 공자는 어지러운 세상에 질서(道)를 다시 세우는 것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고 자기를 알아주는 군주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광접여는 공자의 그런 행위 자체가 이미 위험하다고 보았다. 이들이 보기에는 세상을 구하겠다고 하는 일이 오히려 세상을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으며, 제 한 목숨도 부지하기 어려운 지경에 놓이게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섣불리 출사(出仕)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 이들은 이전의 사(士)들이 가지고 있던 삶의 방식을 뒤집어서 새로운 생활양식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출사하지 않은 삶을 추구한다고 해서 어디 산 속에 들어가 세상과 연을 끊고 사는 것은 아니다. 높은 벼슬이나 명성을 구하지 않는 것뿐이다.

 

오곡은 분간할 수 있어야 선생이지

 

자로가 공자를 따라가다 뒤쳐졌는데, 한 노인을 만났다. 그는 지팡이에 삼태기를 매달아 어깨에 메고 있었다. 자로가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장께서는 저희 선생님을 보셨습니까?”

노인이 말했다. “팔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고, 오곡도 분간하지 못하면서, 누구를 선생이라 하느냐?” 지팡이를 세워 놓고 김을 맸다. 자로는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서 있었다. 노인은 자로를 하룻밤 묵게 해주었다. 닭을 잡고 기장밥을 지어 먹이며, 자신의 두 아들을 인사시켰다.

다음날 자로가 돌아와 이 일을 말씀드렸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은자로구나.”

자로로 하여금 되돌아가 만나보라고 하셨다. 가보니 이미 떠나고 없었다. 자로가 말했다.

“벼슬하지 않는 것은 의가 아니다. 어른과 아이 사이에도 예절을 없앨 수 없는데,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의를 어떻게 없앨 수 있겠는가? 이것은 자신의 몸을 깨끗이 하고자 하여 인륜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군자가 벼슬하는 것은 그 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도가 행해지지 않음은 이미 알고 계시다.” (子路從而後 遇丈人 以杖荷蓧 子路問曰 子見夫子乎 丈人曰 四體不勤 五穀不分 孰爲夫子 植其杖而芸 子路拱而立 止子路宿 殺雞爲黍而食之 見其二子焉 明日 子路行以告 子曰 隱者也 使子路反見之 至則行矣 子路曰 不仕無義 長幼之節 不可廢也 君臣之義 如之何其廢之 欲絜其身 而亂大倫 君子之仕也 行其義也 道之不行 已知之矣) 「미자,7」

 

이번엔 자로가 공자와 함께 가다가 혼자 뒤떨어지게 된 모양이다. 길을 가다 삼태기를 맨 노인(菏蓧丈人)을 만나서 혹시 공자를 보았는지 묻는다. 그런데 이 노인은 “팔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고, 오곡도 분간하지 못하면서, 누구를 선생이라 하느냐?”며 자로에게 오히려 되물었다.

『논어』에 나오는 은자들은 ‘수레 가까이에 온 미친 사람(狂接與)’처럼 ‘밭을 가는 사람’, ‘삼태기를 걸머진 노인’등의 호칭이 나중에 이름처럼 불리게 된 경우가 많다. 이를 통해 보면 은자들은 농사를 짓거나 혹은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던 듯하다. 개중에는 낮은 관직을 얻어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논어』에 자로에게 공자를 “아, 그 안 되는 일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이요!”라고 평한 성문지기 같은 이들이다. 『맹자』에 “포관격탁(抱關擊柝)” 즉 국경의 문지기나 야경꾼과 같은 낮은 벼슬을 할 수 있다고 한 것도 이러한 경우다. 아마도 이들이 전국시대를 거치며 농가(農家) 혹은 도가(道家) 등으로 불리는 지식인 그룹이 되는 것 같다.

이렇게 서민들 속에서 살아가는 은자들의 도는 고원(高遠)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도라 할 수 있다. 자로가 만난 노인의 ‘오곡도 분간하지 못하는 이가 어떻게 선생이 될 수 있냐’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 나왔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어떤 사상이나 이상이 아니라, 매일 매일 자기가 하는 일 속에서 만나는 도이다.

 

물이 깊으면 옷을 벗고 건너고 얕으면 옷을 걷고 건너면 그만이다.

 

이런 은자들의 삶과 공자의 삶이 사뭇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이 결과적으로 추구한 것은 ‘잘 사는 것’이었다. 혼란한 시대를 현명하게 살아내려는 각자의 방식이 있었을 뿐이다. 게다가 공자 말년의 모습은 은자들의 삶과 비슷해 보인다. 주유를 끝내고 노나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공자에게는 관직에 나갈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에 공자는 제자들을 기르고 문헌을 정리하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았다.

아마도 주유 중에 만난 이 은자들이 출사하지 못한 공자에게 세상을 사는 또 다른 지혜를 일깨워 준 것은 아닐까. 위나라에서 공자의 집 앞을 지나던 한 은자는 악기를 연주하는 소리만 듣고도 공자의 심중을 헤아렸다.

 

공자께서 위나라에서 경쇠를 두드리며 연주했다. 삼태기를 메고 공자의 집 문 앞을 지나던 사람이 말했다. “마음이 남아있구나, 경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조금 있다가 말했다. “시끄럽구나, 경쇠 소리가! 자기를 알아주지 않으면 그만 둘 뿐이다. 물이 깊으면 옷을 벗고 건너고 얕으면 옷을 걷고 건너면 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과감하구나! 어려울 것이 없겠구나.” (子擊磬於衛 有荷蕢而過孔氏之門者 曰 有心哉 擊磬乎 旣而曰 鄙哉 硜硜乎 莫己知也 斯已而已矣 深則厲 淺則揭 子曰 果哉 末之難矣) 「헌문,42」

 

때로는 애를 쓰는 것만이 최선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공자가 “참 과감하군요. 당신에게는 어려울 게 없겠네요.”라고 한 말처럼 우리는 어떤 일에 부딪혔을 때 쉽게 마음을 놓거나 그에 맞는 방법을 찾기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나는 은자들의 말에 대한 공자의 답에 늘 얕은 탄식이 배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이들의 말에서 우리는 늘 실패할 것 같은 일 앞에서도 좌절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물이 깊으면 옷을 벗고 건너고, 얕으면 바지를 걷고 건너면 되지!” 

 

 

 

댓글 3
  • 2022-11-18 14:15

    아마도 주유 중에 만난 이 은자들이 출사하지 못한 공자에게 세상을 사는 또 다른 지혜를 일깨워 준 것은 아닐까
    : ㅋ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 안 되는 일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인 공자를 보고 은자들이 세상을 피해 사는
    자신들의 논리를 강화할 수 있었다는 측면으로요~~ 그런 면에서 피해버리는 사람보다 피할 수도 없고 안 피할 수도 없는 곤란 속에서 전전긍긍하는 공자님의 이미지가 저는 더 와닿네요^^

  • 2022-11-29 11:42

    “물이 깊으면 옷을 벗고 건너고, 얕으면 바지를 걷고 건너면 되지!”

    이건 기억해둘게요^^ 잘 읽었습니다.

  • 2022-12-02 00:14

    아, 저는 왠지 팔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고,
    오곡도 잘 분간하는 분을 선생으로 모시고 싶은 모양입니다.
    어쩌죠?
    잘 읽었습니다~

논어 카메오 열전
애공(노나라 임금)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백성이 복종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합니다. 부정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정직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哀公問曰 何爲則民服 孔子對曰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위정,19」   공자 말년의 군주   공자가 14년의 주유를 끝내고 노(魯)나라에 돌아왔다. 이제 막 약관의 나이를 지나고 있던 애공(哀公)은 68세의 공자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의 옷차림은 유자(儒者)들의 복장인가요?” 공자가 대답했다. “제가 어려서 노나라에 있어서 소매통이 넓은 노나라의 옷을 입었습니다. 커서는 송나라에 있어서 송나라의 장보관을 썼습니다. 제가 듣기에 군자는 널리 여러 곳을 다니며 배우지만 고향의 옷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유자들이 복장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魯哀公問於孔子曰 夫子之服 其儒服與 」孔子對曰 丘少居魯 衣逢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 丘聞之也 君子之學也博 其服也鄉 丘不知儒服)   이는 『예기(禮記)』 「유행(儒行)」의 첫 장면으로 이후, 애공이 유자들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묻고 공자가 이에 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애공과 공자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이런 글의 형식은 일종의 글쓰기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애공과 공자가 만나 실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주를 단 정현(鄭玄,127년~200년)은 이때를 공자가 주유를 막 끝내고 노나라에 귀국한 직후라고 보았다. 당시 공자는 성공한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명망 있는 인사였다. 그런데 공자를 만나자마자 애공이 처음 물은 것이 그의 옷차림이라니. 이를 통해 애공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나름 상상해 볼 여지가 있는 듯하다. 애공(哀公)의 이름은 장(將)이다. 혹 장(蔣)이라고도 한다. 정공(定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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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2024.02.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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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카메오 열전
제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 제경공이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진실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아들이 아들답지 못하다면, 비록 곡식이 있더라도 제가 그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齊景公問政於孔子 孔子對曰 君君 臣臣 父父 子子 公曰 善哉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得而食諸) 「안연,11」   공자가 만난 제 경공   제나라 26대 군주인 경공(景公/재위 기원전 548~기원전490)은 대부인 최저에게 시해된 장공(莊公)의 이복동생으로 장공이 시해된 후 최저에 의해 옹립되었다. 최저의 권력은 끝이 없을 것 같았지만 얼마 뒤 그는 그의 측근인 경봉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경봉 역시 얼마 못가 그의 수하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 뒤에 제나라의 권력은 네 집안, 국(國)씨, 고(高)씨, 포(鮑)씨, 전(田)씨가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안정되게 되었다. 공자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제 경공은 공자와 세 번 정도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공자가 30대 초반일 때 노나라에 온 제 경공과 안자를 만났다고 한다. 다음에는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로 가 경공을 만났다. 마지막으로 50대에 이르러 대사구의 직책을 맡게 된 공자가 제 경공과 노 정공의 회담을 주관하면서 만나게 되었다. 『논어』에도 제 경공에 대한 기록이 세 차례 보인다. 그 중 두 개가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에 갔을 때, 경공을 만나는 장면이다. 공자를 만난 제 경공은 그에게 ‘정치’에 대해 물어본다. 이 때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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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2023.1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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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장문중(노나라 대부)이 큰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기둥머리에는 산을 조각하고 동자기둥에는 마름풀을 그렸으니,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子曰  臧文仲居蔡  山節藻梲  何如其知也) 『논어』「공야장,17」     『논어(論語)』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들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다. 더불어 당대 혹은 선대의 유명한 사람들도 많이 언급 되는데 생각보다 노(魯)나라 사람들이 잘 나오지 않는다. 공자 당대에 권력자였던 삼환(三桓)을 제외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노나라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논어』에 두 번 언급되는 장문중은 노나라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사람인 듯하다. 하지만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읽기 전까지 장문중이 노나라의 대부였다는 것 이외에 거의 아는 것도 없었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도 없었다. 게다가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장식을 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썩지 않는 세 가지, 삼불후(三不朽)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여러 가수들이 다양한 장르의 명곡을 재해석하여 부르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서 불후(不朽)는 ‘썩지 않는’이라는 뜻으로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불후라는 말은 『춘추좌전』에서 유래했는데 노나라 양공(襄公) 24년, 숙손표가 진(晉)나라의 범선자와 나눈 대화에 등장한다. 범선자가 사람이 죽어도 썩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숙손표가 덕을 세우는 것(立德)과 공을 세우는 것(立功), 말을 세우는 것(立言) 세 가지가 오래 되어도 폐해지지 않으니 불후라고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후대에는 이 세 가지를 ‘삼불후(三不朽)’라고 칭하였다. 이 때 숙손표는 불후의 예로 장문중을 들었다.   “우리 노나라 선대부 중에 장문중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가 남긴...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장문중(노나라 대부)이 큰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기둥머리에는 산을 조각하고 동자기둥에는 마름풀을 그렸으니,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子曰  臧文仲居蔡  山節藻梲  何如其知也) 『논어』「공야장,17」     『논어(論語)』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들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다. 더불어 당대 혹은 선대의 유명한 사람들도 많이 언급 되는데 생각보다 노(魯)나라 사람들이 잘 나오지 않는다. 공자 당대에 권력자였던 삼환(三桓)을 제외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노나라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논어』에 두 번 언급되는 장문중은 노나라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사람인 듯하다. 하지만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읽기 전까지 장문중이 노나라의 대부였다는 것 이외에 거의 아는 것도 없었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도 없었다. 게다가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장식을 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썩지 않는 세 가지, 삼불후(三不朽)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여러 가수들이 다양한 장르의 명곡을 재해석하여 부르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서 불후(不朽)는 ‘썩지 않는’이라는 뜻으로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불후라는 말은 『춘추좌전』에서 유래했는데 노나라 양공(襄公) 24년, 숙손표가 진(晉)나라의 범선자와 나눈 대화에 등장한다. 범선자가 사람이 죽어도 썩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숙손표가 덕을 세우는 것(立德)과 공을 세우는 것(立功), 말을 세우는 것(立言) 세 가지가 오래 되어도 폐해지지 않으니 불후라고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후대에는 이 세 가지를 ‘삼불후(三不朽)’라고 칭하였다. 이 때 숙손표는 불후의 예로 장문중을 들었다.   “우리 노나라 선대부 중에 장문중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가 남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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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자(제나라 대부 진항)가 간공을 시해했다. 공자께서 목욕재계하고 조정에 나가 애공에게 알렸다. “진항이 그의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그를 토벌하십시오.” 애공이 말했다. “세 대부들에게 말하시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임금께서는 세 대부들에게 말하라 하시는구나.” 공자께서 세 대부들에게 가서 말했으나 모두 안 된다고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陳成子弑簡公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恆弑其君 請討之 公曰 告夫三子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君曰 告夫三子者 之三子告 不可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논어> 헌문-22   내가 동양 고전을 처음 읽었을 때 겪은 어려움 중 하나는 한 사람이 여러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진성자(陳成子)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는데, 여기는 진성자라고 되어 있지만 대체로 전성자(田成子)라고 하고, 진항(陳恒), 전항(田恒), 혹 전상(田常)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성자(成子)는 그의 시호이며, 이름이 항(恒)인데 『사기』에는 상(常)으로도 되어 있다. 진성자 혹은 전성자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이들이 진(陳)나라에서 살다가 제(齊)나라로 이주하여 성을 전(田)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강(姜)씨의 제나라에서 전(田)씨의 제나라로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 「세가(世家)」는 춘추전국시대 제후국들의 역사를 쓰고 있다. 그러니까 노나라의 역사는 「노세가」에 진나라는 「진세가」를 살펴보면 된다. 그런데 제나라의 경우 「제세가」로 되어 있지 않고 「제태공세가」와 「전경중완세가」로 나누어져 있다. 제나라 군주의 자리가 강태공의 강씨에서 바로 진성자, 아니 전성자의 전씨로 바뀌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陳)나라에서 처음 제나라로 이주한 이는 진완(陳完)이다. 완은 원래 진나라의 공족(公族)이었다. 진나라는 순임금의 후예들에게 봉해...
진성자(제나라 대부 진항)가 간공을 시해했다. 공자께서 목욕재계하고 조정에 나가 애공에게 알렸다. “진항이 그의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그를 토벌하십시오.” 애공이 말했다. “세 대부들에게 말하시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임금께서는 세 대부들에게 말하라 하시는구나.” 공자께서 세 대부들에게 가서 말했으나 모두 안 된다고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陳成子弑簡公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恆弑其君 請討之 公曰 告夫三子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君曰 告夫三子者 之三子告 不可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논어> 헌문-22   내가 동양 고전을 처음 읽었을 때 겪은 어려움 중 하나는 한 사람이 여러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진성자(陳成子)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는데, 여기는 진성자라고 되어 있지만 대체로 전성자(田成子)라고 하고, 진항(陳恒), 전항(田恒), 혹 전상(田常)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성자(成子)는 그의 시호이며, 이름이 항(恒)인데 『사기』에는 상(常)으로도 되어 있다. 진성자 혹은 전성자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이들이 진(陳)나라에서 살다가 제(齊)나라로 이주하여 성을 전(田)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강(姜)씨의 제나라에서 전(田)씨의 제나라로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 「세가(世家)」는 춘추전국시대 제후국들의 역사를 쓰고 있다. 그러니까 노나라의 역사는 「노세가」에 진나라는 「진세가」를 살펴보면 된다. 그런데 제나라의 경우 「제세가」로 되어 있지 않고 「제태공세가」와 「전경중완세가」로 나누어져 있다. 제나라 군주의 자리가 강태공의 강씨에서 바로 진성자, 아니 전성자의 전씨로 바뀌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陳)나라에서 처음 제나라로 이주한 이는 진완(陳完)이다. 완은 원래 진나라의 공족(公族)이었다. 진나라는 순임금의 후예들에게 봉해...
진달래 2023.07.11 |
조회 293
논어 카메오 열전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심하도다, 나의 쇠함이여! 오래되었구나, 내 다시 꿈속에서 주공을 뵙지 못한 것이.”(子曰 甚矣吾衰也 久矣吾不復夢見周公) 『논어』「술이,5」   동양의 문화주의는 흔히 공자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공자는 이 문화를 주공(周公)으로부터 이었다고 했다. 공자는 늘 주공을 흠모했다고 전해지는 데, 이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논어(論語)』에 나오는 이 문장이 아닌가 싶다. 공자는 젊었을 때부터 주공의 도(道)를 따르고 배우려고 힘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공자는 꿈에서 주공을 뵐 수 있었나 보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자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꾸는 횟수가 점점 줄었다. 위 문장은 공자가 이 때의 심정을 토로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논어집주』의 주(注)에는 주자와 이천의 주가 함께 있는데, 두 글이 비슷한데 다른 것이 흥미롭다. 주자는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꿀 수 없게 된 것이 늙어서 주공의 도를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에 반해 이천은 마음은 늙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나 도를 행하는 것은 몸이기 때문에 공자가 늙어서 도를 행하는 것도 힘들고 주공에 대한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꿈에서까지 주공을 생각한 공자의 이러한 모습은 후대에 『여씨춘추』와 같은 책에 이르면 공자가 꿈에서 주공을 직접 만나 도를 배웠다는 이야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주공은 어떤 사람일까   주공의 이름은 단(旦)이다.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의 동생이다. 무왕이 은(殷)나라를 정벌할 때의 공신(功臣)이다. 『사기』 「주본기」에 의하면 무왕이 즉위한 후 태공망(강태공)을 사(師)로 삼고 주공을 보(輔)로 삼았다고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심하도다, 나의 쇠함이여! 오래되었구나, 내 다시 꿈속에서 주공을 뵙지 못한 것이.”(子曰 甚矣吾衰也 久矣吾不復夢見周公) 『논어』「술이,5」   동양의 문화주의는 흔히 공자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공자는 이 문화를 주공(周公)으로부터 이었다고 했다. 공자는 늘 주공을 흠모했다고 전해지는 데, 이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논어(論語)』에 나오는 이 문장이 아닌가 싶다. 공자는 젊었을 때부터 주공의 도(道)를 따르고 배우려고 힘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공자는 꿈에서 주공을 뵐 수 있었나 보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자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꾸는 횟수가 점점 줄었다. 위 문장은 공자가 이 때의 심정을 토로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논어집주』의 주(注)에는 주자와 이천의 주가 함께 있는데, 두 글이 비슷한데 다른 것이 흥미롭다. 주자는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꿀 수 없게 된 것이 늙어서 주공의 도를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에 반해 이천은 마음은 늙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나 도를 행하는 것은 몸이기 때문에 공자가 늙어서 도를 행하는 것도 힘들고 주공에 대한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꿈에서까지 주공을 생각한 공자의 이러한 모습은 후대에 『여씨춘추』와 같은 책에 이르면 공자가 꿈에서 주공을 직접 만나 도를 배웠다는 이야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주공은 어떤 사람일까   주공의 이름은 단(旦)이다.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의 동생이다. 무왕이 은(殷)나라를 정벌할 때의 공신(功臣)이다. 『사기』 「주본기」에 의하면 무왕이 즉위한 후 태공망(강태공)을 사(師)로 삼고 주공을 보(輔)로 삼았다고 한다....
진달래 2023.04.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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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카메오 열전
공자께서 계씨에 대해 말씀하셨다. “자기 집 뜰에서 팔일무(천자 앞에서 추는 춤)를 추니 이런 일까지 한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팔일, 1」   공자가 살던 당시에 노(魯)나라에는 삼환(三桓)이라고 부르는 세 대부 집안이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노 환공(桓公/前712~前694)의 후손들로 맹손(孟孫), 숙손(叔孫), 계손(季孫)씨 집안을 이른다. 맹(孟), 숙(叔), 계(季)는 형제들의 순서를 말하는 것으로 맹은 맏이, 숙은 둘째, 계는 막내의 뜻이다. 어찌 보면 한 집안 사람들인 이들은 때로는 서로 힘겨루기를 하지만 대부분 서로를 도와가며 노나라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이들의 힘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공자 당대의 군주였던 소공(昭公/前542~前510)은 계씨를 정벌하려다 오히려 삼환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공자는 이러한 상황을 도(道)에 어긋난다고 여겼다.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진 것도 이렇듯 세상의 질서가 무너져서라고 생각했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 그래서 공자는 정치는 무릇 정명(正名), 즉 이름을 바로 잡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논어』에 등장하는 삼환은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대표적인 인물들로 그려진다.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팔일무(八佾舞)는 천자가 연회를 베풀 때 추는 춤이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각 신분에 따라 춤의 종류나 춤을 추는 무희의 수가 정해져 있었다. 흔히 팔일무는 여덟 명씩 여덟 줄을 맞추어 총 64명의 무희가 춤을 추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아래로 무희의 숫자가 줄어드는데 제후는 육일무(六佾舞), 대부는 사일무(四佾舞)를 출 수 있었다. 계씨는 대부이므로 예(禮)에 맞게 하려면 사일무를 추어야 했다....
공자께서 계씨에 대해 말씀하셨다. “자기 집 뜰에서 팔일무(천자 앞에서 추는 춤)를 추니 이런 일까지 한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팔일, 1」   공자가 살던 당시에 노(魯)나라에는 삼환(三桓)이라고 부르는 세 대부 집안이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노 환공(桓公/前712~前694)의 후손들로 맹손(孟孫), 숙손(叔孫), 계손(季孫)씨 집안을 이른다. 맹(孟), 숙(叔), 계(季)는 형제들의 순서를 말하는 것으로 맹은 맏이, 숙은 둘째, 계는 막내의 뜻이다. 어찌 보면 한 집안 사람들인 이들은 때로는 서로 힘겨루기를 하지만 대부분 서로를 도와가며 노나라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이들의 힘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공자 당대의 군주였던 소공(昭公/前542~前510)은 계씨를 정벌하려다 오히려 삼환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공자는 이러한 상황을 도(道)에 어긋난다고 여겼다.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진 것도 이렇듯 세상의 질서가 무너져서라고 생각했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 그래서 공자는 정치는 무릇 정명(正名), 즉 이름을 바로 잡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논어』에 등장하는 삼환은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대표적인 인물들로 그려진다.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팔일무(八佾舞)는 천자가 연회를 베풀 때 추는 춤이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각 신분에 따라 춤의 종류나 춤을 추는 무희의 수가 정해져 있었다. 흔히 팔일무는 여덟 명씩 여덟 줄을 맞추어 총 64명의 무희가 춤을 추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아래로 무희의 숫자가 줄어드는데 제후는 육일무(六佾舞), 대부는 사일무(四佾舞)를 출 수 있었다. 계씨는 대부이므로 예(禮)에 맞게 하려면 사일무를 추어야 했다....
진달래 2023.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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