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카메오 열전 8회] 섭공과 공자가 정직(直)에 대해 논하다

진달래
2022-09-18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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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공이 공자에게 말했다. “우리 마을에 정직한 사람이 있는데, 그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그 일을 증언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우리 마을의 정직한 사람은 그와 다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숨겨주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숨겨줍니다. 정직은 바로 그 가운데 있습니다.”

(葉公語孔子曰 吾黨有直躬者 其父攘羊 而子證之 孔子曰 吾黨之直者異於是 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矣) 『논어』 「자로」18

 

마지막 유랑지

 

공자는 노(魯)나라에서 쫓겨난 후 자기를 등용해줄 군주를 찾아 이 나라 저 나라를 주유했다. 첫 번째로 도착한 위(衛)나라에 잠깐 희망을 가졌으나, 곧 후계 계승 문제로 시끄러워지자 공자는 제자들과 함께 남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진(陳)나라와 채(蔡)를 지나며 공자는 초(楚)나라 소왕(昭王)이 만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초나라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공자는 섭공을 만났다.

섭공은 『논어』에 세 번 등장한다. 한 번은 자로에게 공자는 어떤 사람이냐고 묻고, 다음엔 공자에게 정치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섭공이 공자와 ‘정직(直)’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한다. ‘정직(直)’에 대한 공자와 섭공의 이 대화는 이후 『논어(論語)』 안에서도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 중의 하나로 꼽힌다.

섭공과 만난 공자는 그 길로 초나라에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공자는 초나라에 들어가지 못했다. 초 소왕이 전투 중에 갑자기 죽었고 이후 초나라 정세가 급격히 불안정해졌기 때문이다. 공자는 다시 발길을 북쪽으로 돌렸다. 공자의 그의 제자들은 위나라로 가던 중에 노나라에서 돌아와도 좋다는 명을 받고, 14년의 긴 유랑 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

공자는 긴 유랑 생활 중에 현실정치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지를 굽힌 적이 없었다. 매번 그의 의지가 꺾이고, 기회를 잃어도 다시 새로운 군주를 찾아 나서곤 했다. 그런데 초 소왕과의 만남이 실패하고 공자는 “돌아가자, 돌아가자(歸與 歸與)”라며 노나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이 때 공자의 나이가 63세였다. 아마도 공자는 그의 이상이 자기 생전에는 이제 실현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초나라는 그렇게 공자가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었던 곳이었지만 끝내 가보지 못했던 곳으로 남았다.

그런데 공자가 이렇게 초나라에 들어가려고 했던 일은 후대에 정말 공자가 초나라에 가려고 했었는지, 혹은 초나라 국경을 넘었는지 아닌지를 가지고 여러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는 시기적으로 공자가 채나라를 지나가고 있을 때, 초나라가 채나라와 싸우고 있었고, 섭공이 채나라에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만남이 이 때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춘추시대에 초나라를 형(荊) 땅으로 낮추어 부르며, 중원의 다른 국가들과 구별하여, 오랑캐로 낮추어 보는 시선이 깔려있다. 공자가 초나라에 가려고 했다, 안 했다를 두고 설왕설래 하는 데는 마치 공산불뉴나 필힐이 공자를 불렀을 때 설마 공자가 그들과 정말 함께 일을 하려고 했을까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것과 같은 맥락이 있다.

 

춘추시대 지도 / 위키디피아

 

섭공은 누구인가

 

섭공(葉公)은 초나라 대부로 이름은 심제량(沈諸梁)이고 자는 자고(子高)이다. 섭 땅을 다스리고 있어서 섭공이라고 불렸다. 대부인데도 섭공이라고 칭한 것은 주(周)나라의 봉국(封國)이 아닌 초나라가 군주를 스스로 왕(王)으로 칭하고 대부도 공(公)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논어』에 세 번이나 언급되었기 때문에 나름 중요 인물인 듯한데 『맹자』에는 섭공에 대한 언급이 없고, 『장자』 「인간세」 편에 섭공이 나온다.

『춘추좌전』을 보면 섭공은 초 소왕이 죽은 후에 일어난 ‘백공의 난’을 평정하고, 나라를 안정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백공(伯公)은 초 소왕의 조카로 그의 아버지가 태자 건(建)이다. 태자 건이 모함을 받아 쫓겨나 정나라에서 죽임을 당한 후 초 소왕이 즉위했고 백공은 진(晉)나라에 머물고 있었다. 이를 불쌍하게 여긴 영윤(令尹) 자서(子西)가 백공을 초나라로 불러들이려고 했다. 이 때 섭공은 백공의 성정(性情)이 난폭함을 들어 반대했다. 하지만 자서가 결국 백공을 초나라로 돌아오게 했고, 섭공은 그 길로 조정을 떠나 섭 땅으로 갔다고 한다.

소왕의 아들인 혜왕(惠王)이 즉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백공이 난을 일으켜서 혜왕을 가두고 영윤 자서와 사마(司馬) 자기(子綦) 등을 죽였다. 섭공은 그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일으켜 도성으로 달려갔고 난을 진압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섭공은 영윤과 사마의 두 관직을 겸직하여 조정을 안정시켰다. 나라가 안정이 된 후에는 영윤과 사마의 자리를 자서와 자기의 아들들에게 물려주고 섭 땅으로 돌아가 노년을 보냈다고 한다.

『논어』에서 볼 수 있는 섭공은 자기가 사는 마을에서는 아버지의 죄도 고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 할 만큼 원칙적이고 꽉 막힌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좌전』의 에피소드들은 그가 매우 유연한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가령 섭공이 난을 평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가는데 막 도성으로 들어가려는 섭공을 보고 누가 말했다. “그대는 어찌 투구를 쓰지 않았습니까? 나라 사람들이 그대를 마치 자애로운 부모를 바라보듯 하고 있습니다. 도적의 화살이 만약 그대를 다치게 한다면 이는 백성의 소망을 끊어버리는 것이 됩니다. 이와 같거늘 어찌 투구를 쓰지 않습니까?” 이리하여 섭공이 투구를 쓰고 나갔다. 얼마 가지 않아 또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어찌 투구를 쓰고 계십니까? 나라 사람들은 그대를 마치 수확을 기다리듯이 날마다 그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대의 얼굴을 본다면 마음에 안정을 얻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는 죽지 않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사람마다 모두 분발하여 그대의 이름을 내걸고 나라 안을 다니면서 자랑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대는 투구로 얼굴을 가려 백성의 소망을 끊고 있으니 역시 심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섭공이 이번에는 투구를 벗고 나아갔다고 한다.

물론 백공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을 보면 그가 매우 단호하고 용의주도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섭공은 백공이 난을 일으키리라는 것을 이미 알았음에도 섣불리 군대를 일으키지 않고, 백공이 결정적인 실수를 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자기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조정에서 떠난다거나, 최고 권력의 자리에서 흔쾌히 물러날 줄 아는 그의 모습은 대체로 권력을 자리를 두고 다투는 일이 흔했던 당시에 흔치 않은 인품을 지닌 인물인 듯하다.

 

공자와 다른 섭공의 정직()

 

섭공이 자로에게 공자가 어떤 사람이냐(葉公問孔子於子路)고 묻는다거나 공자에게 정치란 무엇이냐(葉公問政)를 묻는 것, 이는 왜 이런 질문이 오갔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공자를 처음 만나는데 그 제자에게 스승에 대해서 미리 물어볼 수 있고, 다른 나라 대부나 제후들도 공자를 만나면 대부분 정치가 무엇이냐고 묻기 때문이다. 그런데 섭공이 공자와 “우리 마을에서 정직하다는 것은 …”이라며 주고받는 대화는 무슨 맥락에서 오고 간 것인지를 알기 어렵다.

섭공이 말하는 정직한 사람은 숨김이 없는 사람이다. 아버지와 같이 가까운 사이에서도 죄를 숨겨 주지 않을 정도로, 요즘 식으로 말하면 공정(公正)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공자는 이에 아버지의 죄를 숨겨주는 사람이 오히려 정직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공자는 부모와 자식 혹은 형제 사이는 천륜(天倫)으로 맺어진 관계이므로 서로 고발하고 죄를 증언하는 등의 일은 효제(孝悌)에 어긋나는 행동이라고 여겼다. 자기 부모를 친하게 여기는 마음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를 따르는 것이 정직(直)이지 고발하는 것이 정직(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말은 후대에도 계속 영향을 미쳐서 지금도 친족관계에서는 범죄 은닉죄가 해당되지 않는다.

그런데 섭공은 왜 공자에게 이런 말을 했을까? 섭공의 이 말은 두 가지 입장에서 살펴 볼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법가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공자가 살았던 때는 ‘성문법’이 막 등장하기 시작하던 때이다. ‘법’이라는 것은 친소(親疎)의 차등을 두지 않으며, 귀족이나 평민에게 두루 적용되는 것을 전제한다. 따라서 섭공이 자기 마을의 ‘정직한 이’를 아버지의 죄도 숨기지 않는 것으로 본다는 것은 그의 정치적 입장이 법가(法家)에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공자가 당시 성문법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을 섭공과의 대화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초나라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공자가 주유하던 위(衛)나라, 진(陳)나라, 송(宋)나라 등과 공자의 고국인 노(魯)나라, 그리고 그 주변의 나라들은 흔히 중원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황하유역을 기반으로 한 주(周)나라의 봉국(封國)들이다. 이들은 주나라의 질서 즉 주례(周禮)를 바탕으로 공통의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비해 초나라나 오(吳)나라, 월(越)나라와 같이 양자강을 끼고 발흥한 남쪽의 나라들은 주나라의 영향 아래에 있지 않았고 따라서 주례의 질서에 편입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자유롭게 왕(王)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었고, 아마도 효(孝), 제(悌)와 같은 가치관도 달랐을 것이다. 정직(直)에 대한 공자와 섭공의 다른 해석은 효제와 같은 인륜(人倫)의 질서를 바탕으로 하는 북방의 나라들과 이런 바탕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남방 국가들의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두 세계의 만남

 

한편으로 이렇게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초나라에서 공자를 만나고 싶어 했다는 것은 변방의 국가로 오랑캐와 다름없는 대접을 받던 남방 국가들의 지위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들이 가진 높은 생산성과 철을 다루는 뛰어난 기술 등은 중원의 국가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이제 중원의 국가들은 더 이상 그들을 오랑캐로 취급 할 수 없었다. 노나라에서는 오나라 여자를 비(妃)로 맞아 이들과 우호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거기에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던 초나라의 경우 전국시대에 이르면서 전국 7웅의 하나로 당당히 편입되기에 이른다. 공자가 만나고자 했던 초 소왕은 공자가 당대 제후들 중에 가장 후한 평가를 남긴 군주이다. 소왕이 점을 쳐서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신하들의 의견을 거절했다는 것을 듣고, 공자가 “초 소왕은 대의를 통달하고 있으니 나라를 잃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공자와 초 소왕과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섭공과 나눈 이 짧은 대화를 통해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조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버지의 죄를 숨겨주는 것이 정직(直)한 것이라는 공자의 말은 근 2,000년 동안 동양 사회의 이상적인 가치관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지금 이 문장을 읽고 우리는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아버지나 아들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숨겨 주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누구라도 죄를 지었다면 그에 합당하게 벌을 받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닐까? 예전에 세미나를 함께 했던 친구들과도 이 문제에 대해서 한참 이야기를 했지만 시원하게 결론을 내진 못했다. 부모 자식 간에 효(孝)라는 가치를 내세우면 부모의 죄를 자식이 드러내는 일은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한 편으로 죄를 숨겨주어서 더 큰 죄를 짓게 하는 것도 안 될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섭공과 공자의 대화를 보고 있다 보니 이 두 사람의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의 말이 옳고 그른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정직(直)’에 대해 논의했다는 것 자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요즘처럼 다양한 가치관과 문화적 배경들이 얽혀있는 사회에서는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따지기에 앞서 서로 다른 입장에 대한 열린 논의가 필요하다.

“어떤 사람을 정직한 사람으로 볼 것인가?”

댓글 2
  • 2022-09-30 12:14

    논어에서 이 에피소드가 유명한 것은 정직에 대한 두 사람의 입장 차이 때문일텐데요,

    아버지가 양을 훔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들 입장에서 '무조건' 숨겨준다는가,

    혹은 '무조건' 증언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논어의 이 문장을 현재 우리는 '무조건'으로 읽고 있지 않은가.. 이런 의심도 들고요~

    어떤 조건에서 고발을 하고 숨겨주었나? 이것을 차근차근 짚어보면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이 있을 것도 같네요^^

  • 2022-10-08 11:47

    섭공과 공자의 정직에 관한 견해차는 춘추말의 사회변화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법과 제도가 가족의 울타리안으로까지 들어오기 시작했다고도 보여지고요. 요즘 친족상도례 규정을 고치네마네 하는데 가족간의 문제도 법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현실이 씁쓸하네요.

논어 카메오 열전
애공(노나라 임금)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백성이 복종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합니다. 부정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정직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哀公問曰 何爲則民服 孔子對曰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위정,19」   공자 말년의 군주   공자가 14년의 주유를 끝내고 노(魯)나라에 돌아왔다. 이제 막 약관의 나이를 지나고 있던 애공(哀公)은 68세의 공자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의 옷차림은 유자(儒者)들의 복장인가요?” 공자가 대답했다. “제가 어려서 노나라에 있어서 소매통이 넓은 노나라의 옷을 입었습니다. 커서는 송나라에 있어서 송나라의 장보관을 썼습니다. 제가 듣기에 군자는 널리 여러 곳을 다니며 배우지만 고향의 옷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유자들이 복장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魯哀公問於孔子曰 夫子之服 其儒服與 」孔子對曰 丘少居魯 衣逢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 丘聞之也 君子之學也博 其服也鄉 丘不知儒服)   이는 『예기(禮記)』 「유행(儒行)」의 첫 장면으로 이후, 애공이 유자들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묻고 공자가 이에 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애공과 공자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이런 글의 형식은 일종의 글쓰기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애공과 공자가 만나 실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주를 단 정현(鄭玄,127년~200년)은 이때를 공자가 주유를 막 끝내고 노나라에 귀국한 직후라고 보았다. 당시 공자는 성공한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명망 있는 인사였다. 그런데 공자를 만나자마자 애공이 처음 물은 것이 그의 옷차림이라니. 이를 통해 애공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나름 상상해 볼 여지가 있는 듯하다. 애공(哀公)의 이름은 장(將)이다. 혹 장(蔣)이라고도 한다. 정공(定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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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2024.02.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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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 제경공이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진실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아들이 아들답지 못하다면, 비록 곡식이 있더라도 제가 그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齊景公問政於孔子 孔子對曰 君君 臣臣 父父 子子 公曰 善哉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得而食諸) 「안연,11」   공자가 만난 제 경공   제나라 26대 군주인 경공(景公/재위 기원전 548~기원전490)은 대부인 최저에게 시해된 장공(莊公)의 이복동생으로 장공이 시해된 후 최저에 의해 옹립되었다. 최저의 권력은 끝이 없을 것 같았지만 얼마 뒤 그는 그의 측근인 경봉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경봉 역시 얼마 못가 그의 수하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 뒤에 제나라의 권력은 네 집안, 국(國)씨, 고(高)씨, 포(鮑)씨, 전(田)씨가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안정되게 되었다. 공자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제 경공은 공자와 세 번 정도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공자가 30대 초반일 때 노나라에 온 제 경공과 안자를 만났다고 한다. 다음에는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로 가 경공을 만났다. 마지막으로 50대에 이르러 대사구의 직책을 맡게 된 공자가 제 경공과 노 정공의 회담을 주관하면서 만나게 되었다. 『논어』에도 제 경공에 대한 기록이 세 차례 보인다. 그 중 두 개가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에 갔을 때, 경공을 만나는 장면이다. 공자를 만난 제 경공은 그에게 ‘정치’에 대해 물어본다. 이 때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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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2023.1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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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카메오 열전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장문중(노나라 대부)이 큰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기둥머리에는 산을 조각하고 동자기둥에는 마름풀을 그렸으니,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子曰  臧文仲居蔡  山節藻梲  何如其知也) 『논어』「공야장,17」     『논어(論語)』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들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다. 더불어 당대 혹은 선대의 유명한 사람들도 많이 언급 되는데 생각보다 노(魯)나라 사람들이 잘 나오지 않는다. 공자 당대에 권력자였던 삼환(三桓)을 제외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노나라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논어』에 두 번 언급되는 장문중은 노나라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사람인 듯하다. 하지만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읽기 전까지 장문중이 노나라의 대부였다는 것 이외에 거의 아는 것도 없었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도 없었다. 게다가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장식을 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썩지 않는 세 가지, 삼불후(三不朽)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여러 가수들이 다양한 장르의 명곡을 재해석하여 부르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서 불후(不朽)는 ‘썩지 않는’이라는 뜻으로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불후라는 말은 『춘추좌전』에서 유래했는데 노나라 양공(襄公) 24년, 숙손표가 진(晉)나라의 범선자와 나눈 대화에 등장한다. 범선자가 사람이 죽어도 썩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숙손표가 덕을 세우는 것(立德)과 공을 세우는 것(立功), 말을 세우는 것(立言) 세 가지가 오래 되어도 폐해지지 않으니 불후라고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후대에는 이 세 가지를 ‘삼불후(三不朽)’라고 칭하였다. 이 때 숙손표는 불후의 예로 장문중을 들었다.   “우리 노나라 선대부 중에 장문중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가 남긴...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장문중(노나라 대부)이 큰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기둥머리에는 산을 조각하고 동자기둥에는 마름풀을 그렸으니,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子曰  臧文仲居蔡  山節藻梲  何如其知也) 『논어』「공야장,17」     『논어(論語)』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들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다. 더불어 당대 혹은 선대의 유명한 사람들도 많이 언급 되는데 생각보다 노(魯)나라 사람들이 잘 나오지 않는다. 공자 당대에 권력자였던 삼환(三桓)을 제외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노나라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논어』에 두 번 언급되는 장문중은 노나라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사람인 듯하다. 하지만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읽기 전까지 장문중이 노나라의 대부였다는 것 이외에 거의 아는 것도 없었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도 없었다. 게다가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장식을 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썩지 않는 세 가지, 삼불후(三不朽)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여러 가수들이 다양한 장르의 명곡을 재해석하여 부르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서 불후(不朽)는 ‘썩지 않는’이라는 뜻으로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불후라는 말은 『춘추좌전』에서 유래했는데 노나라 양공(襄公) 24년, 숙손표가 진(晉)나라의 범선자와 나눈 대화에 등장한다. 범선자가 사람이 죽어도 썩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숙손표가 덕을 세우는 것(立德)과 공을 세우는 것(立功), 말을 세우는 것(立言) 세 가지가 오래 되어도 폐해지지 않으니 불후라고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후대에는 이 세 가지를 ‘삼불후(三不朽)’라고 칭하였다. 이 때 숙손표는 불후의 예로 장문중을 들었다.   “우리 노나라 선대부 중에 장문중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가 남긴...
진달래 2023.10.01 |
조회 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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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자(제나라 대부 진항)가 간공을 시해했다. 공자께서 목욕재계하고 조정에 나가 애공에게 알렸다. “진항이 그의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그를 토벌하십시오.” 애공이 말했다. “세 대부들에게 말하시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임금께서는 세 대부들에게 말하라 하시는구나.” 공자께서 세 대부들에게 가서 말했으나 모두 안 된다고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陳成子弑簡公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恆弑其君 請討之 公曰 告夫三子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君曰 告夫三子者 之三子告 不可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논어> 헌문-22   내가 동양 고전을 처음 읽었을 때 겪은 어려움 중 하나는 한 사람이 여러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진성자(陳成子)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는데, 여기는 진성자라고 되어 있지만 대체로 전성자(田成子)라고 하고, 진항(陳恒), 전항(田恒), 혹 전상(田常)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성자(成子)는 그의 시호이며, 이름이 항(恒)인데 『사기』에는 상(常)으로도 되어 있다. 진성자 혹은 전성자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이들이 진(陳)나라에서 살다가 제(齊)나라로 이주하여 성을 전(田)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강(姜)씨의 제나라에서 전(田)씨의 제나라로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 「세가(世家)」는 춘추전국시대 제후국들의 역사를 쓰고 있다. 그러니까 노나라의 역사는 「노세가」에 진나라는 「진세가」를 살펴보면 된다. 그런데 제나라의 경우 「제세가」로 되어 있지 않고 「제태공세가」와 「전경중완세가」로 나누어져 있다. 제나라 군주의 자리가 강태공의 강씨에서 바로 진성자, 아니 전성자의 전씨로 바뀌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陳)나라에서 처음 제나라로 이주한 이는 진완(陳完)이다. 완은 원래 진나라의 공족(公族)이었다. 진나라는 순임금의 후예들에게 봉해...
진성자(제나라 대부 진항)가 간공을 시해했다. 공자께서 목욕재계하고 조정에 나가 애공에게 알렸다. “진항이 그의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그를 토벌하십시오.” 애공이 말했다. “세 대부들에게 말하시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임금께서는 세 대부들에게 말하라 하시는구나.” 공자께서 세 대부들에게 가서 말했으나 모두 안 된다고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陳成子弑簡公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恆弑其君 請討之 公曰 告夫三子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君曰 告夫三子者 之三子告 不可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논어> 헌문-22   내가 동양 고전을 처음 읽었을 때 겪은 어려움 중 하나는 한 사람이 여러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진성자(陳成子)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는데, 여기는 진성자라고 되어 있지만 대체로 전성자(田成子)라고 하고, 진항(陳恒), 전항(田恒), 혹 전상(田常)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성자(成子)는 그의 시호이며, 이름이 항(恒)인데 『사기』에는 상(常)으로도 되어 있다. 진성자 혹은 전성자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이들이 진(陳)나라에서 살다가 제(齊)나라로 이주하여 성을 전(田)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강(姜)씨의 제나라에서 전(田)씨의 제나라로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 「세가(世家)」는 춘추전국시대 제후국들의 역사를 쓰고 있다. 그러니까 노나라의 역사는 「노세가」에 진나라는 「진세가」를 살펴보면 된다. 그런데 제나라의 경우 「제세가」로 되어 있지 않고 「제태공세가」와 「전경중완세가」로 나누어져 있다. 제나라 군주의 자리가 강태공의 강씨에서 바로 진성자, 아니 전성자의 전씨로 바뀌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陳)나라에서 처음 제나라로 이주한 이는 진완(陳完)이다. 완은 원래 진나라의 공족(公族)이었다. 진나라는 순임금의 후예들에게 봉해...
진달래 2023.07.11 |
조회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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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심하도다, 나의 쇠함이여! 오래되었구나, 내 다시 꿈속에서 주공을 뵙지 못한 것이.”(子曰 甚矣吾衰也 久矣吾不復夢見周公) 『논어』「술이,5」   동양의 문화주의는 흔히 공자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공자는 이 문화를 주공(周公)으로부터 이었다고 했다. 공자는 늘 주공을 흠모했다고 전해지는 데, 이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논어(論語)』에 나오는 이 문장이 아닌가 싶다. 공자는 젊었을 때부터 주공의 도(道)를 따르고 배우려고 힘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공자는 꿈에서 주공을 뵐 수 있었나 보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자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꾸는 횟수가 점점 줄었다. 위 문장은 공자가 이 때의 심정을 토로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논어집주』의 주(注)에는 주자와 이천의 주가 함께 있는데, 두 글이 비슷한데 다른 것이 흥미롭다. 주자는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꿀 수 없게 된 것이 늙어서 주공의 도를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에 반해 이천은 마음은 늙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나 도를 행하는 것은 몸이기 때문에 공자가 늙어서 도를 행하는 것도 힘들고 주공에 대한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꿈에서까지 주공을 생각한 공자의 이러한 모습은 후대에 『여씨춘추』와 같은 책에 이르면 공자가 꿈에서 주공을 직접 만나 도를 배웠다는 이야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주공은 어떤 사람일까   주공의 이름은 단(旦)이다.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의 동생이다. 무왕이 은(殷)나라를 정벌할 때의 공신(功臣)이다. 『사기』 「주본기」에 의하면 무왕이 즉위한 후 태공망(강태공)을 사(師)로 삼고 주공을 보(輔)로 삼았다고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심하도다, 나의 쇠함이여! 오래되었구나, 내 다시 꿈속에서 주공을 뵙지 못한 것이.”(子曰 甚矣吾衰也 久矣吾不復夢見周公) 『논어』「술이,5」   동양의 문화주의는 흔히 공자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공자는 이 문화를 주공(周公)으로부터 이었다고 했다. 공자는 늘 주공을 흠모했다고 전해지는 데, 이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논어(論語)』에 나오는 이 문장이 아닌가 싶다. 공자는 젊었을 때부터 주공의 도(道)를 따르고 배우려고 힘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공자는 꿈에서 주공을 뵐 수 있었나 보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자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꾸는 횟수가 점점 줄었다. 위 문장은 공자가 이 때의 심정을 토로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논어집주』의 주(注)에는 주자와 이천의 주가 함께 있는데, 두 글이 비슷한데 다른 것이 흥미롭다. 주자는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꿀 수 없게 된 것이 늙어서 주공의 도를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에 반해 이천은 마음은 늙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나 도를 행하는 것은 몸이기 때문에 공자가 늙어서 도를 행하는 것도 힘들고 주공에 대한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꿈에서까지 주공을 생각한 공자의 이러한 모습은 후대에 『여씨춘추』와 같은 책에 이르면 공자가 꿈에서 주공을 직접 만나 도를 배웠다는 이야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주공은 어떤 사람일까   주공의 이름은 단(旦)이다.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의 동생이다. 무왕이 은(殷)나라를 정벌할 때의 공신(功臣)이다. 『사기』 「주본기」에 의하면 무왕이 즉위한 후 태공망(강태공)을 사(師)로 삼고 주공을 보(輔)로 삼았다고 한다....
진달래 2023.04.26 |
조회 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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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께서 계씨에 대해 말씀하셨다. “자기 집 뜰에서 팔일무(천자 앞에서 추는 춤)를 추니 이런 일까지 한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팔일, 1」   공자가 살던 당시에 노(魯)나라에는 삼환(三桓)이라고 부르는 세 대부 집안이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노 환공(桓公/前712~前694)의 후손들로 맹손(孟孫), 숙손(叔孫), 계손(季孫)씨 집안을 이른다. 맹(孟), 숙(叔), 계(季)는 형제들의 순서를 말하는 것으로 맹은 맏이, 숙은 둘째, 계는 막내의 뜻이다. 어찌 보면 한 집안 사람들인 이들은 때로는 서로 힘겨루기를 하지만 대부분 서로를 도와가며 노나라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이들의 힘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공자 당대의 군주였던 소공(昭公/前542~前510)은 계씨를 정벌하려다 오히려 삼환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공자는 이러한 상황을 도(道)에 어긋난다고 여겼다.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진 것도 이렇듯 세상의 질서가 무너져서라고 생각했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 그래서 공자는 정치는 무릇 정명(正名), 즉 이름을 바로 잡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논어』에 등장하는 삼환은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대표적인 인물들로 그려진다.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팔일무(八佾舞)는 천자가 연회를 베풀 때 추는 춤이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각 신분에 따라 춤의 종류나 춤을 추는 무희의 수가 정해져 있었다. 흔히 팔일무는 여덟 명씩 여덟 줄을 맞추어 총 64명의 무희가 춤을 추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아래로 무희의 숫자가 줄어드는데 제후는 육일무(六佾舞), 대부는 사일무(四佾舞)를 출 수 있었다. 계씨는 대부이므로 예(禮)에 맞게 하려면 사일무를 추어야 했다....
공자께서 계씨에 대해 말씀하셨다. “자기 집 뜰에서 팔일무(천자 앞에서 추는 춤)를 추니 이런 일까지 한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팔일, 1」   공자가 살던 당시에 노(魯)나라에는 삼환(三桓)이라고 부르는 세 대부 집안이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노 환공(桓公/前712~前694)의 후손들로 맹손(孟孫), 숙손(叔孫), 계손(季孫)씨 집안을 이른다. 맹(孟), 숙(叔), 계(季)는 형제들의 순서를 말하는 것으로 맹은 맏이, 숙은 둘째, 계는 막내의 뜻이다. 어찌 보면 한 집안 사람들인 이들은 때로는 서로 힘겨루기를 하지만 대부분 서로를 도와가며 노나라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이들의 힘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공자 당대의 군주였던 소공(昭公/前542~前510)은 계씨를 정벌하려다 오히려 삼환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공자는 이러한 상황을 도(道)에 어긋난다고 여겼다.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진 것도 이렇듯 세상의 질서가 무너져서라고 생각했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 그래서 공자는 정치는 무릇 정명(正名), 즉 이름을 바로 잡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논어』에 등장하는 삼환은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대표적인 인물들로 그려진다.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팔일무(八佾舞)는 천자가 연회를 베풀 때 추는 춤이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각 신분에 따라 춤의 종류나 춤을 추는 무희의 수가 정해져 있었다. 흔히 팔일무는 여덟 명씩 여덟 줄을 맞추어 총 64명의 무희가 춤을 추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아래로 무희의 숫자가 줄어드는데 제후는 육일무(六佾舞), 대부는 사일무(四佾舞)를 출 수 있었다. 계씨는 대부이므로 예(禮)에 맞게 하려면 사일무를 추어야 했다....
진달래 2023.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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