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카메오 열전 8회] 섭공과 공자가 정직(直)에 대해 논하다
진달래
2022-09-18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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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공이 공자에게 말했다. “우리 마을에 정직한 사람이 있는데, 그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그 일을 증언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우리 마을의 정직한 사람은 그와 다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숨겨주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숨겨줍니다. 정직은 바로 그 가운데 있습니다.”
(葉公語孔子曰 吾黨有直躬者 其父攘羊 而子證之 孔子曰 吾黨之直者異於是 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矣) 『논어』 「자로」18
마지막 유랑지
공자는 노(魯)나라에서 쫓겨난 후 자기를 등용해줄 군주를 찾아 이 나라 저 나라를 주유했다. 첫 번째로 도착한 위(衛)나라에 잠깐 희망을 가졌으나, 곧 후계 계승 문제로 시끄러워지자 공자는 제자들과 함께 남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진(陳)나라와 채(蔡)를 지나며 공자는 초(楚)나라 소왕(昭王)이 만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초나라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공자는 섭공을 만났다.
섭공은 『논어』에 세 번 등장한다. 한 번은 자로에게 공자는 어떤 사람이냐고 묻고, 다음엔 공자에게 정치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섭공이 공자와 ‘정직(直)’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한다. ‘정직(直)’에 대한 공자와 섭공의 이 대화는 이후 『논어(論語)』 안에서도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 중의 하나로 꼽힌다.
섭공과 만난 공자는 그 길로 초나라에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공자는 초나라에 들어가지 못했다. 초 소왕이 전투 중에 갑자기 죽었고 이후 초나라 정세가 급격히 불안정해졌기 때문이다. 공자는 다시 발길을 북쪽으로 돌렸다. 공자의 그의 제자들은 위나라로 가던 중에 노나라에서 돌아와도 좋다는 명을 받고, 14년의 긴 유랑 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
공자는 긴 유랑 생활 중에 현실정치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지를 굽힌 적이 없었다. 매번 그의 의지가 꺾이고, 기회를 잃어도 다시 새로운 군주를 찾아 나서곤 했다. 그런데 초 소왕과의 만남이 실패하고 공자는 “돌아가자, 돌아가자(歸與 歸與)”라며 노나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이 때 공자의 나이가 63세였다. 아마도 공자는 그의 이상이 자기 생전에는 이제 실현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초나라는 그렇게 공자가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었던 곳이었지만 끝내 가보지 못했던 곳으로 남았다.
그런데 공자가 이렇게 초나라에 들어가려고 했던 일은 후대에 정말 공자가 초나라에 가려고 했었는지, 혹은 초나라 국경을 넘었는지 아닌지를 가지고 여러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는 시기적으로 공자가 채나라를 지나가고 있을 때, 초나라가 채나라와 싸우고 있었고, 섭공이 채나라에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만남이 이 때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춘추시대에 초나라를 형(荊) 땅으로 낮추어 부르며, 중원의 다른 국가들과 구별하여, 오랑캐로 낮추어 보는 시선이 깔려있다. 공자가 초나라에 가려고 했다, 안 했다를 두고 설왕설래 하는 데는 마치 공산불뉴나 필힐이 공자를 불렀을 때 설마 공자가 그들과 정말 함께 일을 하려고 했을까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것과 같은 맥락이 있다.
춘추시대 지도 / 위키디피아
섭공은 누구인가
섭공(葉公)은 초나라 대부로 이름은 심제량(沈諸梁)이고 자는 자고(子高)이다. 섭 땅을 다스리고 있어서 섭공이라고 불렸다. 대부인데도 섭공이라고 칭한 것은 주(周)나라의 봉국(封國)이 아닌 초나라가 군주를 스스로 왕(王)으로 칭하고 대부도 공(公)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논어』에 세 번이나 언급되었기 때문에 나름 중요 인물인 듯한데 『맹자』에는 섭공에 대한 언급이 없고, 『장자』 「인간세」 편에 섭공이 나온다.
『춘추좌전』을 보면 섭공은 초 소왕이 죽은 후에 일어난 ‘백공의 난’을 평정하고, 나라를 안정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백공(伯公)은 초 소왕의 조카로 그의 아버지가 태자 건(建)이다. 태자 건이 모함을 받아 쫓겨나 정나라에서 죽임을 당한 후 초 소왕이 즉위했고 백공은 진(晉)나라에 머물고 있었다. 이를 불쌍하게 여긴 영윤(令尹) 자서(子西)가 백공을 초나라로 불러들이려고 했다. 이 때 섭공은 백공의 성정(性情)이 난폭함을 들어 반대했다. 하지만 자서가 결국 백공을 초나라로 돌아오게 했고, 섭공은 그 길로 조정을 떠나 섭 땅으로 갔다고 한다.
소왕의 아들인 혜왕(惠王)이 즉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백공이 난을 일으켜서 혜왕을 가두고 영윤 자서와 사마(司馬) 자기(子綦) 등을 죽였다. 섭공은 그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일으켜 도성으로 달려갔고 난을 진압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섭공은 영윤과 사마의 두 관직을 겸직하여 조정을 안정시켰다. 나라가 안정이 된 후에는 영윤과 사마의 자리를 자서와 자기의 아들들에게 물려주고 섭 땅으로 돌아가 노년을 보냈다고 한다.
『논어』에서 볼 수 있는 섭공은 자기가 사는 마을에서는 아버지의 죄도 고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 할 만큼 원칙적이고 꽉 막힌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좌전』의 에피소드들은 그가 매우 유연한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가령 섭공이 난을 평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가는데 막 도성으로 들어가려는 섭공을 보고 누가 말했다. “그대는 어찌 투구를 쓰지 않았습니까? 나라 사람들이 그대를 마치 자애로운 부모를 바라보듯 하고 있습니다. 도적의 화살이 만약 그대를 다치게 한다면 이는 백성의 소망을 끊어버리는 것이 됩니다. 이와 같거늘 어찌 투구를 쓰지 않습니까?” 이리하여 섭공이 투구를 쓰고 나갔다. 얼마 가지 않아 또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어찌 투구를 쓰고 계십니까? 나라 사람들은 그대를 마치 수확을 기다리듯이 날마다 그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대의 얼굴을 본다면 마음에 안정을 얻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는 죽지 않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사람마다 모두 분발하여 그대의 이름을 내걸고 나라 안을 다니면서 자랑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대는 투구로 얼굴을 가려 백성의 소망을 끊고 있으니 역시 심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섭공이 이번에는 투구를 벗고 나아갔다고 한다.
물론 백공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을 보면 그가 매우 단호하고 용의주도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섭공은 백공이 난을 일으키리라는 것을 이미 알았음에도 섣불리 군대를 일으키지 않고, 백공이 결정적인 실수를 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자기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조정에서 떠난다거나, 최고 권력의 자리에서 흔쾌히 물러날 줄 아는 그의 모습은 대체로 권력을 자리를 두고 다투는 일이 흔했던 당시에 흔치 않은 인품을 지닌 인물인 듯하다.
공자와 다른 섭공의 정직(直)
섭공이 자로에게 공자가 어떤 사람이냐(葉公問孔子於子路)고 묻는다거나 공자에게 정치란 무엇이냐(葉公問政)를 묻는 것, 이는 왜 이런 질문이 오갔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공자를 처음 만나는데 그 제자에게 스승에 대해서 미리 물어볼 수 있고, 다른 나라 대부나 제후들도 공자를 만나면 대부분 정치가 무엇이냐고 묻기 때문이다. 그런데 섭공이 공자와 “우리 마을에서 정직하다는 것은 …”이라며 주고받는 대화는 무슨 맥락에서 오고 간 것인지를 알기 어렵다.
섭공이 말하는 정직한 사람은 숨김이 없는 사람이다. 아버지와 같이 가까운 사이에서도 죄를 숨겨 주지 않을 정도로, 요즘 식으로 말하면 공정(公正)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공자는 이에 아버지의 죄를 숨겨주는 사람이 오히려 정직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공자는 부모와 자식 혹은 형제 사이는 천륜(天倫)으로 맺어진 관계이므로 서로 고발하고 죄를 증언하는 등의 일은 효제(孝悌)에 어긋나는 행동이라고 여겼다. 자기 부모를 친하게 여기는 마음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를 따르는 것이 정직(直)이지 고발하는 것이 정직(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말은 후대에도 계속 영향을 미쳐서 지금도 친족관계에서는 범죄 은닉죄가 해당되지 않는다.
그런데 섭공은 왜 공자에게 이런 말을 했을까? 섭공의 이 말은 두 가지 입장에서 살펴 볼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법가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공자가 살았던 때는 ‘성문법’이 막 등장하기 시작하던 때이다. ‘법’이라는 것은 친소(親疎)의 차등을 두지 않으며, 귀족이나 평민에게 두루 적용되는 것을 전제한다. 따라서 섭공이 자기 마을의 ‘정직한 이’를 아버지의 죄도 숨기지 않는 것으로 본다는 것은 그의 정치적 입장이 법가(法家)에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공자가 당시 성문법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을 섭공과의 대화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초나라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공자가 주유하던 위(衛)나라, 진(陳)나라, 송(宋)나라 등과 공자의 고국인 노(魯)나라, 그리고 그 주변의 나라들은 흔히 중원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황하유역을 기반으로 한 주(周)나라의 봉국(封國)들이다. 이들은 주나라의 질서 즉 주례(周禮)를 바탕으로 공통의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비해 초나라나 오(吳)나라, 월(越)나라와 같이 양자강을 끼고 발흥한 남쪽의 나라들은 주나라의 영향 아래에 있지 않았고 따라서 주례의 질서에 편입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자유롭게 왕(王)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었고, 아마도 효(孝), 제(悌)와 같은 가치관도 달랐을 것이다. 정직(直)에 대한 공자와 섭공의 다른 해석은 효제와 같은 인륜(人倫)의 질서를 바탕으로 하는 북방의 나라들과 이런 바탕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남방 국가들의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두 세계의 만남
한편으로 이렇게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초나라에서 공자를 만나고 싶어 했다는 것은 변방의 국가로 오랑캐와 다름없는 대접을 받던 남방 국가들의 지위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들이 가진 높은 생산성과 철을 다루는 뛰어난 기술 등은 중원의 국가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이제 중원의 국가들은 더 이상 그들을 오랑캐로 취급 할 수 없었다. 노나라에서는 오나라 여자를 비(妃)로 맞아 이들과 우호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거기에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던 초나라의 경우 전국시대에 이르면서 전국 7웅의 하나로 당당히 편입되기에 이른다. 공자가 만나고자 했던 초 소왕은 공자가 당대 제후들 중에 가장 후한 평가를 남긴 군주이다. 소왕이 점을 쳐서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신하들의 의견을 거절했다는 것을 듣고, 공자가 “초 소왕은 대의를 통달하고 있으니 나라를 잃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공자와 초 소왕과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섭공과 나눈 이 짧은 대화를 통해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조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버지의 죄를 숨겨주는 것이 정직(直)한 것이라는 공자의 말은 근 2,000년 동안 동양 사회의 이상적인 가치관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지금 이 문장을 읽고 우리는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아버지나 아들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숨겨 주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누구라도 죄를 지었다면 그에 합당하게 벌을 받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닐까? 예전에 세미나를 함께 했던 친구들과도 이 문제에 대해서 한참 이야기를 했지만 시원하게 결론을 내진 못했다. 부모 자식 간에 효(孝)라는 가치를 내세우면 부모의 죄를 자식이 드러내는 일은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한 편으로 죄를 숨겨주어서 더 큰 죄를 짓게 하는 것도 안 될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섭공과 공자의 대화를 보고 있다 보니 이 두 사람의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의 말이 옳고 그른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정직(直)’에 대해 논의했다는 것 자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요즘처럼 다양한 가치관과 문화적 배경들이 얽혀있는 사회에서는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따지기에 앞서 서로 다른 입장에 대한 열린 논의가 필요하다.
“어떤 사람을 정직한 사람으로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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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에서 이 에피소드가 유명한 것은 정직에 대한 두 사람의 입장 차이 때문일텐데요,
아버지가 양을 훔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들 입장에서 '무조건' 숨겨준다는가,
혹은 '무조건' 증언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논어의 이 문장을 현재 우리는 '무조건'으로 읽고 있지 않은가.. 이런 의심도 들고요~
어떤 조건에서 고발을 하고 숨겨주었나? 이것을 차근차근 짚어보면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이 있을 것도 같네요^^
섭공과 공자의 정직에 관한 견해차는 춘추말의 사회변화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법과 제도가 가족의 울타리안으로까지 들어오기 시작했다고도 보여지고요. 요즘 친족상도례 규정을 고치네마네 하는데 가족간의 문제도 법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현실이 씁쓸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