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카메오 열전 7회] 남자(南子)는 왜 공자를 만났을까

진달래
2022-07-26 06:56
542
  1. 남자(南子)와 공자의 만남

 

공자께서 남자(위영공의 부인)를 만나자, 자로가 기뻐하지 않았다. 공자께서 맹세하며 말씀하셨다. “내가 잘못된 짓을 했다면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다!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다!”(子見南子 子路不說 夫子矢之曰 予所否者 天厭之 天厭之)(옹야,26)

 

남자(南子)는 위나라 영공(靈公)의 부인으로 송(宋)나라 사람이다. 춘추시대 군주의 부인을 부를 때는 자기 나라의 성을 붙여서 불렀는데 예를 들어 애강(哀姜)의 강(姜)은 제(齊)나라의 성으로 제나라 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남자(南子)의 자(子)는 송나라 성(姓)이다.

위(衛)나라는 『논어』에서 노(魯)나라 만큼이나 중요하게 등장하는 곳으로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 14년간의 주유 생활 중 거의 베이스캠프와 같은 의미를 지닌 곳이다. 공자가 머물렀을 당시 위나라 영공은 나이가 많았다. 영공의 후비였던 남자(南子)는 노쇠한 남편을 대신해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그러니 어찌 보면 군주만큼 권력을 가진 남자(南子)가 위나라에서 등용되기를 원하는 공자를 만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에는 벼슬을 구하는 사(士)라면 당연히 그 나라에 힘 있는 귀족에게 줄을 대어 군주를 만났기 때문이다. 공자가 영공을 만난 것과 남자(南子)를 만난 것은 별반 다르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를 자로가 싫어했다고 하고, 거기다 공자가 “내가 잘못된 짓을 했다면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다.(予所否者 天厭之)”라고 했다고 하니 이게 무슨 일인지 궁금해진다. 공자 후대의 사람들도 그랬던 것 같다. 『논어』에 남은 이 한 문장은 이후 수많은 추측들을 불러 일으켰고, 그렇게 공자와 남자(南子)의 만남은 공자 일생에 가장 흥미로운 스캔들이 되었다.

 

영화 <공자> 중에서

 

  1. 자로가 싫어한 첫 번째 이유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 주유를 하고 있는 중에 위(衛)나라에 도착하여 거백옥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위 영공에게는 남자(南子)라는 부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사람을 시켜 공자에게 일렀다. “사방의 군자들은 우리 군주와 친하게 사귀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그 부인을 만납니다. 우리 부인께서 뵙기를 원합니다.” 공자는 사양하다가 나중에는 부득이 가서 만났다. 부인은 휘장 안에 있었다. 공자가 문에 들어가 북쪽을 향해 절을 하자, 부인도 휘장 안에서 답례했는데 이때 허리에 찬 구슬 장식이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냈다. 돌아와서 공자가 말했다. “나는 원래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부득이해서 만났으니 예로 답해야겠다.” 자로는 역시 기뻐하지 않았다. 공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만일 잘못했다면 하늘이 나를 버릴 것이다. 하늘이 나를 버릴 것이다!”(反乎衛 主蘧伯玉家 靈公夫人有南子者 使人謂孔子曰 「四方之君子不辱欲與寡君為兄弟者 必見寡小君 寡小君願見」孔子辭謝 不得已而見之 夫人在絺帷中 孔子入門 北面稽首 夫人自帷中再拜,環珮玉聲璆然 孔子曰「吾鄉為弗見 見之禮答焉 」子路不說 孔子矢之曰「予所不者 天厭之天厭之」)『사기』「공자세가」

 

자로가 공자와 남자(南子)의 만남을 싫어한 이유로 가장 흔히 여기는 것은 ‘남자(南子)가 음란한 여자’였다는 것이다. 「공자세가」에서 사마천은 남자(南子)가 공자에게 만나기를 청했는데 공자가 여러 번 거절하였고 나중에 어쩔 수 없이 만났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권력자에게 유세를 하기 위한 만남이라면 군주의 부인인 남자가 굳이 이렇게 여러 번 청하지도 않았을 테고, 공자 입장에서도 계속 거절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는 공자와 남자(南子)가 만나는 장면에 ‘허리에 찬 구슬 장식이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냈다(環珮玉聲璆然)’는 등의 묘사와 함께 에로틱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사마천이 이렇게 공자와 남자(南子)의 만남을 쓴 이유는 아마도 남자(南子)와 송조(宋朝)의  스캔들 때문일 것이다. 송조(宋朝)는 송나라의 공자로 남자(南子)가 영공과 결혼하기 이전부터 연인 사이였다고 알려졌다. 남자(南子)는 결혼 후 영공에게 졸라서 송조를 위나라로 불러들였고, 이 두 사람의 관계는 공공연한 것이어서 송나라에서는 저잣거리에서 노래로 불려 질 정도였다고 한다.

 

“이미 당신의 암퇘지로 정했는데 어찌하여 우리의 아름다운 수퇘지를 돌려보내지 않는가.”(旣定爾婁豬 盍歸吾艾豭)

 

여기에서 암퇘지는 남자(南子)를 아름다운 수퇘지는 송조를 뜻한다. 또 송조는 춘추시대의 잘생긴 남자로 이름을 날렸다. 그런데 송나라를 지나 던 위나라 태자 괴외(蒯聵)가 이 노래를 듣고 너무 부끄러워 남자(南子)를 죽이려고 했다. 남자(南子)는 영공의 부인이므로 괴외에게는 새어머니인 셈이다. 그러니 자식이 어머니를 죽이려고 한 것이다. 괴의의 계획은 실패하고 영공에 의해서 괴외는 위나라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러니까 이런 스캔들 속에 있던 남자(南子)를 공자가 만나는 일을 자로가 싫어했다는 것이다. 자로만 싫어했을까. 자로처럼 생각한 이후 주석가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공자를 비호한다. ‘당시 군주의 부인을 만나는 것이 예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났다.’, ‘남녀가 만나지 않는 것이 예인데 공자가 남자를 만난 것은 권도(權道)이니, 이유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남자가 공자를 만난 것은 영공에게 도(道)를 행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등등. 심지어 북송때 어느 주석가는 남자(南子)가 영공의 부인이 아니라 남괴라는 사람이라는 설을 내놓기도 했다. 노나라 비땅의 읍재인데 계씨에게 반란을 일으키려고 공자를 만났고, 이 때 공자가 그에게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어서 만났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주자(朱子)는 남자(南子)에게 “음란한 행실이 있었다(有淫行)”라고 주를 달았고 이것은 거의 정설처럼 굳어져 내려왔다.

 

  1. 자로가 싫어한 또 다른 이유

 

그런데 아무리 공자가 당시 유명한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공자세가」에 나온 대로 남자(南子)가 굳이 공자와의 만남을 여러 번 청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런 질문을 가지고 보니 다산 정약용의 『논어고금주』에 나오는 해석이 눈에 띠었다. 다산은 춘추시대에는 덕(德)을 어지럽힌 여인들이 많은데 유독 남자(南子)만이 음란하다고 칭하면서 공자와 남자의 만남을 비호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하였다. 다산은 또 사마천이 공자가 위나라에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 남자(南子)를 만났다고 했으나 그 때는 괴외가 남자(南子)를 죽이려고 했던 때로 이렇듯 어수선한 때 두 사람이 만났을리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두 사람의 만남을 영공이 죽고 난 직후라고 보았다.

영공은 태자 괴외를 쫓아낸 후 3년 뒤에 죽었다. 괴외를 내쫓고 영공과 남자(南子)는 영공의 다른 아들인 자영(子郢)을 후계자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자영은 사양하고 괴외의 아들인 첩(輒)을 추천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영공이 죽고 남자(南子)는 첩(輒)을 즉위시켰으니 그가 출공(出公)이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듣고 쫓겨나 진(晉)나라에 몸을 의탁하고 있던 괴외가 자기가 영공의 자리를 이을 후계자임을 주장하며 위나라로 돌아오려고 했다. 이 때 『사기』와 『춘추좌전』 등의 기록을 보면 위나라 사람들이 그의 귀국을 막았다고 한다. 다산은 공자와 남자(南子)와의 만남이 이 시기, 어디쯤이라고 보고 두 사람이 만난 목적이 바로 영공이 죽고 난 후 후계자를 세우는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서라고 보았다. 그리고 자로가 공자와 남자(南子)의 만남을 싫어한 이유를 공자와 정치적 견해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본다.

공자는 출공이 즉위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공자는 정명(正名)을 중요하게 여겼다. 따라서 자식인 출공이 아버지 괴외를 나라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자식답지 않은 일이고, 이미 아들이 군주에 자리에 올랐는데 이를 뺏으려하는 괴외도 아버지답지 못하다고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출공이 즉위하면 후에 위나라에 혼란이 닥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로는 이미 아버지에게 쫓겨난 괴외가 후계자가 되는 것은 불가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출공의 즉위를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자로가 공자와 남자(南子)의 만남을 싫어한 것은 자기와 정치적 입장이 다른 공자가 남자(南子)에게 어떤 영향을 주지 않을까하는 염려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산은 공자가 “내가 잘못된 짓을 했다면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다.(予所否者 天厭之)”라고 한 말은 뻔히 위나라에 난(亂)이 일어날 수 있음을 알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토로한 말이라고 보았다.

 

  1. 남자(南子)는 정말 음란한 여자일까

 

태자 괴외는 정말로 단지 남자(南子)에 대한 소문이 부끄러워서 죽이려고 했을까? 『춘추좌전』을 보면 괴외가 남자(南子)를 죽이려고 한 사건 바로 전에, 남자(南子)의 일당을 제거하려던 위나라 대부 공숙수(公叔戍)가 영공에게 쫓겨나 노나라로 달아나는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기록에는 그 사건 이후에 영공은 송조를 위나라로 불러들였고, 이후 괴외는 송조와의 스캔들을 빌미로 남자를 죽이려 하였다. 이 일들은 모두 영공이 죽기 3년 전쯤의 일이다. 이런 일들을 보면 남자(南子)와 괴외는 후계 문제로 세력 다툼이 있었고, 결국 괴외가 패하여 쫓겨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딱히 자기 아들을 후계자로 삼고자 한 것도 아닌 남자(南子)가 굳이 괴외를 물리친 이유는 뭘까? 아마도 이는 괴외의 성정(性情)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출공이 즉위한 지 12년이 되던 해에 괴외는 결국 난을 일으켜 장공(莊公)이 되었다. 그런데 즉위한 지 3년 만에 다시 쫓겨나는 것으로 보아 괴외는 군주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 듯하다. 『사기』에 의하면 괴외는 즉위한 후에 자기가 나라 밖에 있을 때 대부들이 인사를 오지 않은 것에 앙심을 품고 많은 사람들을 죽이려고 했다. 또 어느 부락 추장 아내의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잘라서 자기 부인의 가발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결국 괴외가 쫓겨났을 때 하필 그 부락으로 도망을 가서 결국 죽임을 당했다고 했다. 괴외의 이런 결말을 보면 남자(南子)의 예측이 탁월했던 것으로 보인다.

송조와의 스캔들 역시 앞서의 내용으로 보자면 위나라에서 자기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친정인 송나라 사람들을 불러들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단순히 연인인 송조를 불러들인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남자(南子)가 괴외를 물리친 이유도 공자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녀 역시 위나라에 닥쳐올 혼란을 줄이기 위해서인 듯 보이기 때문이다.

 

 

  1. 다시 보는 남자(南子)

 

『춘추좌전』이나 『사기』의 남자(南子)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음란하다(淫)’는 글자는 볼 수 없다. 남자(南子)에게 ‘음란하다(淫)’는 글자가 처음 보이는 곳은 『열녀전(列女傳)』이 아닌가 싶다. 남자(南子)는 『열녀전』 속 「얼폐전(孼嬖傳)」에 12번째 이야기로 ‘위나라를 어지럽힌 두 여인(衛二亂女)’에 나온다. 길지 않은 글인데 마지막에 남자(南子)에 대한 평을 남기면서 ‘남자가 음란한 성품이 있다.(南子感淫)’라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열녀전』은 한나라 때 유향이 지은 것이고, 그 중 「얼폐전」에는 15명의 여자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흔히 ‘나라를 망하게 한 여자들’의 이야기로 본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여자들은 대체로 음란한 행동(淫行)을 하고, 권력욕으로 당시의 예법이나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들의 면모를 잘 살펴보면 똑똑하고 정치적 수완이 있어서 정치권력에 깊게 개입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춘추시대 군주의 결혼은 일종의 국가 간의 동맹이었다. 그러니까 남자(南子)가 위나라에서 권력을 행사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당시 위나라에 송나라 세력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이는 괴외가 남자(南子)를 죽이려고 한 것 역시 위나라 토박이 세력과 송나라 세력이 서로를 견제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 기록에는 대부분 이렇게 여자 쪽 세력이 커지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있다. 권력을 가진 여자들은 대체로 음란한 여자, 혹은 패악을 부리는 여자로 기록되었고, 그녀들의 정치적 역량은 지워졌다.

공자와 남자(南子)가 실제 어떻게 만났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만남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남자(南子)는 음란한 여인으로 혹은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여인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남자(南子)를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음란한 여인으로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남자(南子)를 보다보니 남녀평등 시대를 살면서도 여전히 여성의 정치적 역량을 평가하는데 인색한 우리의 모습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댓글 8
  • 2022-07-26 08:35

    맨 마지막 문장이 맘에 드네요.

    南子는, 정말 다시 발굴되어야 하는 이야기이고 캐릭터인듯.

    (춘추전국시대에에 南子 말고 역사적 인물인 여성이 또 누가 있을까요?)

    • 2022-08-05 09:52

      뭐, 잘 모르지만 노나라 문강에 대해서는 한 번 알아보고 싶은 생각은 있습니다. 

      오빠인 제나라 양공과 바람나 남편인 노나라 환공을 죽게 했다는 부분만 부각되었는데 

      남편이 죽고 문강의 아들이 왕위를 잇는 것도 그렇고 노나라에서 쫒겨나지도 않는 것도 그렇고 (제나라와 국경지대로 옮겨가긴 했지만) 뭔가 더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 2022-07-26 13:36

    문득, 한 번만 대강 알 거라면 차라리 모르는 게 낫다.. 편견을 만들 바에야.... 하는 생각이 드네여.  

    공부 안하겠단 변명처럼 들리나요?  

    아니구요..ㅋ

    이리 저리 읽으면서 여러 갈래의 길을 열어놔야죠.  인색해지지 않으려면 !!

  • 2022-07-28 09:14

    여성의 정치력 능력에 대한 평가가 박하다!! 는 구절이 인상적이네요.

  • 2022-07-31 22:31

    와 이렇게 보니 남자도 <열녀전>에 위험을 예측한 현명한 여자 중 한명이 되었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 2022-08-14 09:53

    저는 에세이 쓸때 남자를 '비선실세 여인' 이라는 표현으로 쉽고 재밌게(?) 퉁~쳐버렸었는데.

    진달래샘의 남자에 대한 복합적 설명을 읽으니 상당히 흥미롭네요.

    암튼 남자가 실세였던건 확실하고,

    혼란한 정계에서 고도의 정치술이든, 권모술수든, 능수능란했구나 싶은데

    '음란한 여자'였다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니니 아쉽긴 하네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 2022-08-14 10:00

    그나저나 <논어>를 조금이라도 공부했기에 글을 이해하며 읽었어요;;;;;

    논어를  전혀 모르던 작년 이었다면 아마 읽지 않고 패스 했을거예요.

    춘추시대 국가, 역사를 전혀 몰랐으니까요.ㅎㅎ

  • 2022-08-14 13:41

    저도 논어 공부 쬐끔했다고... 이 글이 재밌게 읽혔어요.
    우와~  신기하군요! ^^
    잘 읽었습니다. 

논어 카메오 열전
애공(노나라 임금)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백성이 복종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합니다. 부정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정직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哀公問曰 何爲則民服 孔子對曰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위정,19」   공자 말년의 군주   공자가 14년의 주유를 끝내고 노(魯)나라에 돌아왔다. 이제 막 약관의 나이를 지나고 있던 애공(哀公)은 68세의 공자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의 옷차림은 유자(儒者)들의 복장인가요?” 공자가 대답했다. “제가 어려서 노나라에 있어서 소매통이 넓은 노나라의 옷을 입었습니다. 커서는 송나라에 있어서 송나라의 장보관을 썼습니다. 제가 듣기에 군자는 널리 여러 곳을 다니며 배우지만 고향의 옷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유자들이 복장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魯哀公問於孔子曰 夫子之服 其儒服與 」孔子對曰 丘少居魯 衣逢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 丘聞之也 君子之學也博 其服也鄉 丘不知儒服)   이는 『예기(禮記)』 「유행(儒行)」의 첫 장면으로 이후, 애공이 유자들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묻고 공자가 이에 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애공과 공자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이런 글의 형식은 일종의 글쓰기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애공과 공자가 만나 실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주를 단 정현(鄭玄,127년~200년)은 이때를 공자가 주유를 막 끝내고 노나라에 귀국한 직후라고 보았다. 당시 공자는 성공한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명망 있는 인사였다. 그런데 공자를 만나자마자 애공이 처음 물은 것이 그의 옷차림이라니. 이를 통해 애공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나름 상상해 볼 여지가 있는 듯하다. 애공(哀公)의 이름은 장(將)이다. 혹 장(蔣)이라고도 한다. 정공(定公)의...
애공(노나라 임금)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백성이 복종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합니다. 부정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정직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哀公問曰 何爲則民服 孔子對曰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위정,19」   공자 말년의 군주   공자가 14년의 주유를 끝내고 노(魯)나라에 돌아왔다. 이제 막 약관의 나이를 지나고 있던 애공(哀公)은 68세의 공자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의 옷차림은 유자(儒者)들의 복장인가요?” 공자가 대답했다. “제가 어려서 노나라에 있어서 소매통이 넓은 노나라의 옷을 입었습니다. 커서는 송나라에 있어서 송나라의 장보관을 썼습니다. 제가 듣기에 군자는 널리 여러 곳을 다니며 배우지만 고향의 옷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유자들이 복장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魯哀公問於孔子曰 夫子之服 其儒服與 」孔子對曰 丘少居魯 衣逢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 丘聞之也 君子之學也博 其服也鄉 丘不知儒服)   이는 『예기(禮記)』 「유행(儒行)」의 첫 장면으로 이후, 애공이 유자들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묻고 공자가 이에 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애공과 공자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이런 글의 형식은 일종의 글쓰기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애공과 공자가 만나 실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주를 단 정현(鄭玄,127년~200년)은 이때를 공자가 주유를 막 끝내고 노나라에 귀국한 직후라고 보았다. 당시 공자는 성공한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명망 있는 인사였다. 그런데 공자를 만나자마자 애공이 처음 물은 것이 그의 옷차림이라니. 이를 통해 애공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나름 상상해 볼 여지가 있는 듯하다. 애공(哀公)의 이름은 장(將)이다. 혹 장(蔣)이라고도 한다. 정공(定公)의...
진달래 2024.02.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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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 제경공이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진실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아들이 아들답지 못하다면, 비록 곡식이 있더라도 제가 그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齊景公問政於孔子 孔子對曰 君君 臣臣 父父 子子 公曰 善哉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得而食諸) 「안연,11」   공자가 만난 제 경공   제나라 26대 군주인 경공(景公/재위 기원전 548~기원전490)은 대부인 최저에게 시해된 장공(莊公)의 이복동생으로 장공이 시해된 후 최저에 의해 옹립되었다. 최저의 권력은 끝이 없을 것 같았지만 얼마 뒤 그는 그의 측근인 경봉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경봉 역시 얼마 못가 그의 수하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 뒤에 제나라의 권력은 네 집안, 국(國)씨, 고(高)씨, 포(鮑)씨, 전(田)씨가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안정되게 되었다. 공자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제 경공은 공자와 세 번 정도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공자가 30대 초반일 때 노나라에 온 제 경공과 안자를 만났다고 한다. 다음에는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로 가 경공을 만났다. 마지막으로 50대에 이르러 대사구의 직책을 맡게 된 공자가 제 경공과 노 정공의 회담을 주관하면서 만나게 되었다. 『논어』에도 제 경공에 대한 기록이 세 차례 보인다. 그 중 두 개가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에 갔을 때, 경공을 만나는 장면이다. 공자를 만난 제 경공은 그에게 ‘정치’에 대해 물어본다. 이 때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제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 제경공이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진실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아들이 아들답지 못하다면, 비록 곡식이 있더라도 제가 그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齊景公問政於孔子 孔子對曰 君君 臣臣 父父 子子 公曰 善哉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得而食諸) 「안연,11」   공자가 만난 제 경공   제나라 26대 군주인 경공(景公/재위 기원전 548~기원전490)은 대부인 최저에게 시해된 장공(莊公)의 이복동생으로 장공이 시해된 후 최저에 의해 옹립되었다. 최저의 권력은 끝이 없을 것 같았지만 얼마 뒤 그는 그의 측근인 경봉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경봉 역시 얼마 못가 그의 수하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 뒤에 제나라의 권력은 네 집안, 국(國)씨, 고(高)씨, 포(鮑)씨, 전(田)씨가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안정되게 되었다. 공자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제 경공은 공자와 세 번 정도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공자가 30대 초반일 때 노나라에 온 제 경공과 안자를 만났다고 한다. 다음에는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로 가 경공을 만났다. 마지막으로 50대에 이르러 대사구의 직책을 맡게 된 공자가 제 경공과 노 정공의 회담을 주관하면서 만나게 되었다. 『논어』에도 제 경공에 대한 기록이 세 차례 보인다. 그 중 두 개가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에 갔을 때, 경공을 만나는 장면이다. 공자를 만난 제 경공은 그에게 ‘정치’에 대해 물어본다. 이 때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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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장문중(노나라 대부)이 큰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기둥머리에는 산을 조각하고 동자기둥에는 마름풀을 그렸으니,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子曰  臧文仲居蔡  山節藻梲  何如其知也) 『논어』「공야장,17」     『논어(論語)』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들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다. 더불어 당대 혹은 선대의 유명한 사람들도 많이 언급 되는데 생각보다 노(魯)나라 사람들이 잘 나오지 않는다. 공자 당대에 권력자였던 삼환(三桓)을 제외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노나라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논어』에 두 번 언급되는 장문중은 노나라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사람인 듯하다. 하지만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읽기 전까지 장문중이 노나라의 대부였다는 것 이외에 거의 아는 것도 없었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도 없었다. 게다가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장식을 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썩지 않는 세 가지, 삼불후(三不朽)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여러 가수들이 다양한 장르의 명곡을 재해석하여 부르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서 불후(不朽)는 ‘썩지 않는’이라는 뜻으로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불후라는 말은 『춘추좌전』에서 유래했는데 노나라 양공(襄公) 24년, 숙손표가 진(晉)나라의 범선자와 나눈 대화에 등장한다. 범선자가 사람이 죽어도 썩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숙손표가 덕을 세우는 것(立德)과 공을 세우는 것(立功), 말을 세우는 것(立言) 세 가지가 오래 되어도 폐해지지 않으니 불후라고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후대에는 이 세 가지를 ‘삼불후(三不朽)’라고 칭하였다. 이 때 숙손표는 불후의 예로 장문중을 들었다.   “우리 노나라 선대부 중에 장문중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가 남긴...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장문중(노나라 대부)이 큰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기둥머리에는 산을 조각하고 동자기둥에는 마름풀을 그렸으니,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子曰  臧文仲居蔡  山節藻梲  何如其知也) 『논어』「공야장,17」     『논어(論語)』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들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다. 더불어 당대 혹은 선대의 유명한 사람들도 많이 언급 되는데 생각보다 노(魯)나라 사람들이 잘 나오지 않는다. 공자 당대에 권력자였던 삼환(三桓)을 제외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노나라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논어』에 두 번 언급되는 장문중은 노나라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사람인 듯하다. 하지만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읽기 전까지 장문중이 노나라의 대부였다는 것 이외에 거의 아는 것도 없었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도 없었다. 게다가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장식을 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썩지 않는 세 가지, 삼불후(三不朽)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여러 가수들이 다양한 장르의 명곡을 재해석하여 부르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서 불후(不朽)는 ‘썩지 않는’이라는 뜻으로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불후라는 말은 『춘추좌전』에서 유래했는데 노나라 양공(襄公) 24년, 숙손표가 진(晉)나라의 범선자와 나눈 대화에 등장한다. 범선자가 사람이 죽어도 썩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숙손표가 덕을 세우는 것(立德)과 공을 세우는 것(立功), 말을 세우는 것(立言) 세 가지가 오래 되어도 폐해지지 않으니 불후라고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후대에는 이 세 가지를 ‘삼불후(三不朽)’라고 칭하였다. 이 때 숙손표는 불후의 예로 장문중을 들었다.   “우리 노나라 선대부 중에 장문중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가 남긴...
진달래 2023.10.01 |
조회 385
논어 카메오 열전
진성자(제나라 대부 진항)가 간공을 시해했다. 공자께서 목욕재계하고 조정에 나가 애공에게 알렸다. “진항이 그의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그를 토벌하십시오.” 애공이 말했다. “세 대부들에게 말하시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임금께서는 세 대부들에게 말하라 하시는구나.” 공자께서 세 대부들에게 가서 말했으나 모두 안 된다고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陳成子弑簡公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恆弑其君 請討之 公曰 告夫三子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君曰 告夫三子者 之三子告 不可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논어> 헌문-22   내가 동양 고전을 처음 읽었을 때 겪은 어려움 중 하나는 한 사람이 여러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진성자(陳成子)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는데, 여기는 진성자라고 되어 있지만 대체로 전성자(田成子)라고 하고, 진항(陳恒), 전항(田恒), 혹 전상(田常)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성자(成子)는 그의 시호이며, 이름이 항(恒)인데 『사기』에는 상(常)으로도 되어 있다. 진성자 혹은 전성자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이들이 진(陳)나라에서 살다가 제(齊)나라로 이주하여 성을 전(田)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강(姜)씨의 제나라에서 전(田)씨의 제나라로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 「세가(世家)」는 춘추전국시대 제후국들의 역사를 쓰고 있다. 그러니까 노나라의 역사는 「노세가」에 진나라는 「진세가」를 살펴보면 된다. 그런데 제나라의 경우 「제세가」로 되어 있지 않고 「제태공세가」와 「전경중완세가」로 나누어져 있다. 제나라 군주의 자리가 강태공의 강씨에서 바로 진성자, 아니 전성자의 전씨로 바뀌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陳)나라에서 처음 제나라로 이주한 이는 진완(陳完)이다. 완은 원래 진나라의 공족(公族)이었다. 진나라는 순임금의 후예들에게 봉해...
진성자(제나라 대부 진항)가 간공을 시해했다. 공자께서 목욕재계하고 조정에 나가 애공에게 알렸다. “진항이 그의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그를 토벌하십시오.” 애공이 말했다. “세 대부들에게 말하시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임금께서는 세 대부들에게 말하라 하시는구나.” 공자께서 세 대부들에게 가서 말했으나 모두 안 된다고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陳成子弑簡公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恆弑其君 請討之 公曰 告夫三子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君曰 告夫三子者 之三子告 不可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논어> 헌문-22   내가 동양 고전을 처음 읽었을 때 겪은 어려움 중 하나는 한 사람이 여러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진성자(陳成子)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는데, 여기는 진성자라고 되어 있지만 대체로 전성자(田成子)라고 하고, 진항(陳恒), 전항(田恒), 혹 전상(田常)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성자(成子)는 그의 시호이며, 이름이 항(恒)인데 『사기』에는 상(常)으로도 되어 있다. 진성자 혹은 전성자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이들이 진(陳)나라에서 살다가 제(齊)나라로 이주하여 성을 전(田)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강(姜)씨의 제나라에서 전(田)씨의 제나라로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 「세가(世家)」는 춘추전국시대 제후국들의 역사를 쓰고 있다. 그러니까 노나라의 역사는 「노세가」에 진나라는 「진세가」를 살펴보면 된다. 그런데 제나라의 경우 「제세가」로 되어 있지 않고 「제태공세가」와 「전경중완세가」로 나누어져 있다. 제나라 군주의 자리가 강태공의 강씨에서 바로 진성자, 아니 전성자의 전씨로 바뀌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陳)나라에서 처음 제나라로 이주한 이는 진완(陳完)이다. 완은 원래 진나라의 공족(公族)이었다. 진나라는 순임금의 후예들에게 봉해...
진달래 2023.07.11 |
조회 279
논어 카메오 열전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심하도다, 나의 쇠함이여! 오래되었구나, 내 다시 꿈속에서 주공을 뵙지 못한 것이.”(子曰 甚矣吾衰也 久矣吾不復夢見周公) 『논어』「술이,5」   동양의 문화주의는 흔히 공자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공자는 이 문화를 주공(周公)으로부터 이었다고 했다. 공자는 늘 주공을 흠모했다고 전해지는 데, 이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논어(論語)』에 나오는 이 문장이 아닌가 싶다. 공자는 젊었을 때부터 주공의 도(道)를 따르고 배우려고 힘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공자는 꿈에서 주공을 뵐 수 있었나 보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자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꾸는 횟수가 점점 줄었다. 위 문장은 공자가 이 때의 심정을 토로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논어집주』의 주(注)에는 주자와 이천의 주가 함께 있는데, 두 글이 비슷한데 다른 것이 흥미롭다. 주자는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꿀 수 없게 된 것이 늙어서 주공의 도를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에 반해 이천은 마음은 늙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나 도를 행하는 것은 몸이기 때문에 공자가 늙어서 도를 행하는 것도 힘들고 주공에 대한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꿈에서까지 주공을 생각한 공자의 이러한 모습은 후대에 『여씨춘추』와 같은 책에 이르면 공자가 꿈에서 주공을 직접 만나 도를 배웠다는 이야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주공은 어떤 사람일까   주공의 이름은 단(旦)이다.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의 동생이다. 무왕이 은(殷)나라를 정벌할 때의 공신(功臣)이다. 『사기』 「주본기」에 의하면 무왕이 즉위한 후 태공망(강태공)을 사(師)로 삼고 주공을 보(輔)로 삼았다고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심하도다, 나의 쇠함이여! 오래되었구나, 내 다시 꿈속에서 주공을 뵙지 못한 것이.”(子曰 甚矣吾衰也 久矣吾不復夢見周公) 『논어』「술이,5」   동양의 문화주의는 흔히 공자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공자는 이 문화를 주공(周公)으로부터 이었다고 했다. 공자는 늘 주공을 흠모했다고 전해지는 데, 이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논어(論語)』에 나오는 이 문장이 아닌가 싶다. 공자는 젊었을 때부터 주공의 도(道)를 따르고 배우려고 힘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공자는 꿈에서 주공을 뵐 수 있었나 보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자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꾸는 횟수가 점점 줄었다. 위 문장은 공자가 이 때의 심정을 토로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논어집주』의 주(注)에는 주자와 이천의 주가 함께 있는데, 두 글이 비슷한데 다른 것이 흥미롭다. 주자는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꿀 수 없게 된 것이 늙어서 주공의 도를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에 반해 이천은 마음은 늙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나 도를 행하는 것은 몸이기 때문에 공자가 늙어서 도를 행하는 것도 힘들고 주공에 대한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꿈에서까지 주공을 생각한 공자의 이러한 모습은 후대에 『여씨춘추』와 같은 책에 이르면 공자가 꿈에서 주공을 직접 만나 도를 배웠다는 이야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주공은 어떤 사람일까   주공의 이름은 단(旦)이다.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의 동생이다. 무왕이 은(殷)나라를 정벌할 때의 공신(功臣)이다. 『사기』 「주본기」에 의하면 무왕이 즉위한 후 태공망(강태공)을 사(師)로 삼고 주공을 보(輔)로 삼았다고 한다....
진달래 2023.04.26 |
조회 340
논어 카메오 열전
공자께서 계씨에 대해 말씀하셨다. “자기 집 뜰에서 팔일무(천자 앞에서 추는 춤)를 추니 이런 일까지 한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팔일, 1」   공자가 살던 당시에 노(魯)나라에는 삼환(三桓)이라고 부르는 세 대부 집안이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노 환공(桓公/前712~前694)의 후손들로 맹손(孟孫), 숙손(叔孫), 계손(季孫)씨 집안을 이른다. 맹(孟), 숙(叔), 계(季)는 형제들의 순서를 말하는 것으로 맹은 맏이, 숙은 둘째, 계는 막내의 뜻이다. 어찌 보면 한 집안 사람들인 이들은 때로는 서로 힘겨루기를 하지만 대부분 서로를 도와가며 노나라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이들의 힘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공자 당대의 군주였던 소공(昭公/前542~前510)은 계씨를 정벌하려다 오히려 삼환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공자는 이러한 상황을 도(道)에 어긋난다고 여겼다.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진 것도 이렇듯 세상의 질서가 무너져서라고 생각했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 그래서 공자는 정치는 무릇 정명(正名), 즉 이름을 바로 잡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논어』에 등장하는 삼환은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대표적인 인물들로 그려진다.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팔일무(八佾舞)는 천자가 연회를 베풀 때 추는 춤이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각 신분에 따라 춤의 종류나 춤을 추는 무희의 수가 정해져 있었다. 흔히 팔일무는 여덟 명씩 여덟 줄을 맞추어 총 64명의 무희가 춤을 추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아래로 무희의 숫자가 줄어드는데 제후는 육일무(六佾舞), 대부는 사일무(四佾舞)를 출 수 있었다. 계씨는 대부이므로 예(禮)에 맞게 하려면 사일무를 추어야 했다....
공자께서 계씨에 대해 말씀하셨다. “자기 집 뜰에서 팔일무(천자 앞에서 추는 춤)를 추니 이런 일까지 한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팔일, 1」   공자가 살던 당시에 노(魯)나라에는 삼환(三桓)이라고 부르는 세 대부 집안이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노 환공(桓公/前712~前694)의 후손들로 맹손(孟孫), 숙손(叔孫), 계손(季孫)씨 집안을 이른다. 맹(孟), 숙(叔), 계(季)는 형제들의 순서를 말하는 것으로 맹은 맏이, 숙은 둘째, 계는 막내의 뜻이다. 어찌 보면 한 집안 사람들인 이들은 때로는 서로 힘겨루기를 하지만 대부분 서로를 도와가며 노나라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이들의 힘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공자 당대의 군주였던 소공(昭公/前542~前510)은 계씨를 정벌하려다 오히려 삼환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공자는 이러한 상황을 도(道)에 어긋난다고 여겼다.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진 것도 이렇듯 세상의 질서가 무너져서라고 생각했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 그래서 공자는 정치는 무릇 정명(正名), 즉 이름을 바로 잡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논어』에 등장하는 삼환은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대표적인 인물들로 그려진다.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팔일무(八佾舞)는 천자가 연회를 베풀 때 추는 춤이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각 신분에 따라 춤의 종류나 춤을 추는 무희의 수가 정해져 있었다. 흔히 팔일무는 여덟 명씩 여덟 줄을 맞추어 총 64명의 무희가 춤을 추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아래로 무희의 숫자가 줄어드는데 제후는 육일무(六佾舞), 대부는 사일무(四佾舞)를 출 수 있었다. 계씨는 대부이므로 예(禮)에 맞게 하려면 사일무를 추어야 했다....
진달래 2023.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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