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카메오 열전 6회] 이윤,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

진달래
2022-05-29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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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루는 번지가 공자에게 인(仁)이 무엇인지 물었다. 공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愛人)’라고 알려 주었다. 번지는 다시 안다는 것(知)은 무엇인지 물었다. 공자는 ‘사람을 아는 것(知人)’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런데 번지의 얼굴을 얼핏 보니, 자기가 해 준 말이 무슨 말인지 영 감을 못 잡은 듯하였다. 공자는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여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리면, 부정한 사람을 바르게 만들 수 있다.”고 다시 한 번 말해주고 그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번지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침 지나가고 있던 자하를 불러 물어보았다. 내가 이러이러한 것을 물었더니 스승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는데 이게 무슨 뜻일까? 그 말을 듣고 자하가 말했다.

 

“훌륭한 말씀이군요! 순임금이 천하를 다스리실 때 많은 사람 중에 선발하여 고요를 등용하시니 어질지 못한 사람이 멀리 사라졌습니다. 탕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때 많은 사람 중에 선발하여 이윤을 등용하시니 어질지 못한 사람이 멀리 사라졌습니다.” (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 樊遲未達 子曰 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 樊遲退 見子夏 曰 鄕也吾見於夫子而問知 子曰 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 何謂也 子夏曰 富哉言乎 舜有天下 選於衆 擧皐陶 不仁者遠矣 湯有天下 選於衆 擧伊尹 不仁者遠矣) 『논어』 「안연,22」

 

번지가 안다는 것(知)이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 공자가 대답한 ‘사람을 안다는 것(知人)’은 『논어』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그래서인지 1편인 「학이(學而)」에는 첫 장에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다.(人不知而不慍)”라는 문장이, 마지막 장에는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다른 사람을 알지 못함을 걱정해라.(不患人之不其知 患不知人也)”는 문장이 함께 나온다. 게다가 『논어』 마지막 편인 「요왈(堯曰」은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不知言 無以知人也)”로 끝을 맺고 있다. ‘사람을 안다는 것’이 유가(儒家)에서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인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유가(儒家)에서 사람을 안다는 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는 것, 또 하나는 내가 다른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다. 이는 현실적으로 군주의 눈에 들어 관직에 나가야 했던 사(士)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뿐만 아니라 군주의 입장에서도 뛰어난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갈수록 중요해졌다. 능력이 있는 신하를 얻은 군주가 천하를 얻거나 패자(覇者)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훌륭한 군주는 반드시 훌륭한 신하와 함께 하는데 대표적으로 순임금과 고요, 탕임금과 이윤, 제 환공과 관중, 진 목공과 백리해 등등이 있다.

 

  1. 탕임금을 도운 이윤

 

이 중에서 이윤(伊尹)은 탕(湯)임금이 하(夏)나라의 마지막 왕인 걸(桀)을 정벌하고 은(殷)나라를 세울 때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이윤의 이름은 아형(阿衡)으로 유신씨(有莘氏)의 사람이다. 이윤에 대한 기록은 이곳저곳에서 조금씩 볼 수 있는데 그에 대한 견해가 달라서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쉽게 알기 어렵다. ‘사서(四書)’에서의 이윤은 탕임금을 도운 충신(忠臣)으로 대체로 이야기 되고 있는데 『여씨춘추』와 같은 곳에서 본 이윤은 또 다른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씨춘추』를 보면 먼저 이윤의 출생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그의 어머니가 이윤을 잉태하고 있을 때 꿈을 꾸었는데 신이 ‘절구에서 물이 나오면 절대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라’고 하였다. 다음날 진짜 그런 일이 일어나서 이웃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함께 도망가고 있었다. 그런데 언뜻 마을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여 돌아보았더니 그녀의 몸이 뽕나무 숲으로 변하였다. 그 뒤에 어떤 여자가 뽕나무 숲에서 갓난아기를 얻어 주인에게 데리고 갔더니 그 주인이 아기를 요리사에게 기르도록 하고 이름을 이윤이라고 지었다. 『여씨춘추』 「효행람」 발췌

 

 

아마도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이겠지만 그가 평민출신으로 비범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나중에 탕임금이 훌륭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윤은 유신씨의 딸이 탕임금에게 시집갈 때 잉신(媵臣)으로 따라갔다. 잉신은 귀족들이 결혼할 때 함께 보내는 신하 혹은 몸종을 말하는데 이윤이 이 때 솥(鼎)과 도마(俎)를 메고 갔다고 하니 요리사의 신분으로 따라간 모양이다. 그의 요리가 마음에 들었던 탕임금은 이윤을 만났고, 이윤은 음식의 맛을 예로 들어 정치를 이야기하며 왕도를 실행하도록 하였다. 그 후 함께 걸왕을 정벌하고 은나라를 세웠다.

이윤은 탕임금이 죽은 후에 그의 손자 태갑(太甲)을 즉위시킨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태자였던 태정(太丁)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탕이 죽고 난 후에 태정의 동생인 외병(外丙)이 즉위했다. 그런데 2년 뒤 외병이 죽었다. 다시 동생인 중임(中壬)이 왕이 되었는데 즉위한 지 4년 만에 또 죽었다. 이에 이윤이 태정의 아들인 태갑을 왕위에 올렸다. 그런데 태갑이 즉위하고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법령을 지키지 않고 문란한 생활을 하자, 이윤은 그를 내쫓고 동궁(桐宮)에 가두어 버렸다. 3년 동안 이윤이 섭정(攝政)을 했고, 그 사이에 태갑이 자기 죄를 뉘우치자 이윤은 정권을 돌려주었다.

『맹자』는 이런 이윤을 ‘임무를 자임한 성인(聖之任者)’으로 칭했다. 이윤은 누구든 섬기면 군주이고 부리면 백성이 되니 혼란한 때나 평화로울 때나 ‘하늘이 먼저 깨달은 자로 하여금 뒤늦게 깨닫는 자를 깨우치도록 하였다’고 하며 스스로 이런 역할을 자임(自任)했다고 여겼다. 특히 태갑을 어진 군주로 이끌기 위해 이윤이 그의 자리를 빼앗았다가 돌려준 것에 대해서 『맹자』에는 그런 일은 오로지 ‘이윤의 뜻(伊尹之志)’을 가지고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1. 요리사에서 재상으로

 

하지만 『논어』에서는 이윤이 번지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딱 한 번 등장한다. 이윤은 『맹자』에서 자주 볼 수 있는데 맹자의 말과 다르게 제자들의 질문 속에 보이는 이윤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맹자의 제자인 만장이 묻는다. “이윤이 요리사가 되어 탕임금을 만나 벼슬자리를 구했다는데 그런 일이 있습니까?” (萬章問曰 人有言 伊尹以割烹要湯 有諸) 『맹자』 「만장 상,7」

 

이윤이 요리사가 되어 탕임금을 만났다는 것은 『사기』에도 나와 있는 것으로 아마도 만장이 실제 이런 일이 있었는지 아닌지를 묻고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그러니 이는 요리사로 들어간 이윤이 탕임금을 맛있는 음식으로 꾀어내어 관직을 얻은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다. 정당한 방법으로 관리가 된 것이 아니라 요즘으로 치면 비선이나 낙하산식 등용이지 않느냐를 묻는 것이다. 맹자가 살던 전국시대에 왕의 주치의나 요리사, 환관과 같이 최측근에 있는 사람들이 권력을 쥐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에 만장이 이윤 역시 그런 류의 사람이 아니었는지 의심한 것이다. 물론 맹자는 그가 요순의 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등등의 말을 하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이윤이 관직을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이윤의 모습은 『여씨춘추』에 드물게 볼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걸왕을 염탐하러 가는 이윤이다. 탕임금이 걸왕을 정벌하려는 뜻은 오래 전에 가지고 있었지만 섣불리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이윤이 하나라의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걸왕에게 나아갔다. 이 때 탕임금은 행여 걸왕이 이윤을 의심할까봐 이윤을 향해 직접 활을 쏘았다고 한다. 마치 죄를 짓고 도망을 간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3년 동안 하나라에 있던 이윤이 돌아와 보고를 마치자, 탕임금은 그제야 정벌에 나섰다. 흥미로운 것은 이윤이 하나라에 있을 때 그를 도운 사람으로 걸왕이 가장 총애하던 말희가 등장하는 것이다. 말희가 하루는 이윤에게 걸왕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 내용이 ‘서쪽의 해와 동쪽의 해가 서로 싸워서, 서쪽의 해가 이겼다.’는 것이었다. 이를 전해들은 탕임금은 그해 심한 가뭄이 들었음에도 군대를 일으켰다.

이런 이야기들 속의 이윤은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던 충신의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인의(仁義)를 고집한다거나, 자기 뜻을 굽히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를 낮추는 일을 스스럼없이 하고 상대를 속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고, 남에게 비난 받을 만한 일도 거침없이 해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탕임금이 걸왕을 치기로 마음먹고 자기를 도와 줄 사람을 구하는데 주변에서 이윤을 추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는 힘이 세고 부끄러움을 참는 사람입니다.”(彊力忍訽) 『여씨춘추』「이속람」

 

  1. 사람을 아는 것이란

 

그런데 이윤의 이런 저런 이야기에서 중요한 점 중에 하나는 이윤을 알아 본 탕임금이 있었다는 것이다. 탕임금과 이윤의 만남에 대한 다른 이야기에서는 탕임금이 이윤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유신씨의 딸과 결혼을 하고, 이를 빌미로 이윤을 잉신으로 삼아 자기 옆으로 데리고 왔다고 한다. 또 탕임금이 이윤을 다섯 번이나 찾아간 끝에 이윤이 탕임금에게 갔다고도 한다. 자기를 알아봐주는 군주를 찾아간 이윤뿐 아니라 자기를 도와 줄 능력 있는 신하를 알아보고 그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탕임금이 있었기 때문에 은나라는 하나라의 자리를 대신 할 수 있었다. 이러한 탕임금이 가지고 있던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은 어쩌면 그가 죽고 더 빛을 발했다고 볼 수 있다. 건국 초 불안정한 정국을 안정시키고, 왕위 세습을 공고히 할 수 있도록 만든 이가 이윤이기 때문이다.

이윤 역시 그가 이런 일들을 할 수 있는 바탕에는 그의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다. 이윤의 모습이 때로는 우리가 흔히 아는 절의를 지닌 신하로, 혹은 권모술수의 대가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탕임금, 혹은 태갑이 어떤 능력을 가진 인물인지 알아보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라에 스파이로 가기도 하고, 태갑을 내쫓고 섭정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후대에 유가는 이렇듯 서로의 능력을 알아보는 군주와 신하가 만났을 때 제대로 된 정치를 펼 수 있음을 강조한다. 정치를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을 잘 쓰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은 단지 군주와 신하, 두 사람의 능력뿐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주게 되고 이것이 결국 ‘좋은 정치’로 백성들을 편안히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으로까지 연결된다. 이것이 공자가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여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리면, 부정한 사람을 바르게 만들 수 있다.”것의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윤에 대한 이런 저런 의혹들이 끊임없이 거론되는 것을 보면 단지 겉으로 보이는 언행(言行)만으로 ‘사람을 알아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깨닫게 한다. 태갑을 가두고 3년 동안 섭정한 이윤의 행동은 오랫동안 찬탈(簒奪)이라는 의혹을 받았다. 아니, 실제 그의 마음이 어땠는지, 왕의 자리를 빼앗을 정도의 권력을 쥐고 있었으면서 왜 다시 정권을 돌려주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인 듯하다. 그럼에도 이윤을 통해 곧고, 올바르고, 현명한 사람이 자리에 있음으로 드러나는 좋은 영향을 생각한다면 “정직한 사람을 등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새로운 대통령의 인선문제로 연일 시끄럽다. 어떤 사람이 자리에 오르는지가 어떤 정치를 하고자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인(知人)’이라는 말이 더 무겁게 느껴진다.

 

댓글 4
  • 2022-05-31 10:47

    '지인'이라는 말의 무게를 느껴봅니다. 지인이란 말 쓰기 쉽지 않은 말이네요

  • 2022-05-31 11:29

    <여씨춘추>를 읽어보고 싶네요.

    확실히 사기나 논어, 맹자와 다른 결의 이윤이 등장하나봐요.

    이런 차이를 우리는 어찌 해석해야 하는 걸까?

    갑자기 지적 호기심이 막 생기네유. ㅎㅎㅎ

  • 2022-05-31 16:54

    겉으로 보이는 언행에서 비롯되어 그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게 되기까지 필요한 시간을 생각해보게 되네요~

     

  • 2022-06-03 18:10

    유가외에 다른 제자백가 책을 읽는 재미는 이런데 있는것 같아요. 같은 사람인듯 아닌듯 제각기 입맛에 맞게 변주되는 느낌이랄까요 ㅎㅎ

논어 카메오 열전
애공(노나라 임금)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백성이 복종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합니다. 부정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정직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哀公問曰 何爲則民服 孔子對曰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위정,19」   공자 말년의 군주   공자가 14년의 주유를 끝내고 노(魯)나라에 돌아왔다. 이제 막 약관의 나이를 지나고 있던 애공(哀公)은 68세의 공자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의 옷차림은 유자(儒者)들의 복장인가요?” 공자가 대답했다. “제가 어려서 노나라에 있어서 소매통이 넓은 노나라의 옷을 입었습니다. 커서는 송나라에 있어서 송나라의 장보관을 썼습니다. 제가 듣기에 군자는 널리 여러 곳을 다니며 배우지만 고향의 옷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유자들이 복장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魯哀公問於孔子曰 夫子之服 其儒服與 」孔子對曰 丘少居魯 衣逢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 丘聞之也 君子之學也博 其服也鄉 丘不知儒服)   이는 『예기(禮記)』 「유행(儒行)」의 첫 장면으로 이후, 애공이 유자들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묻고 공자가 이에 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애공과 공자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이런 글의 형식은 일종의 글쓰기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애공과 공자가 만나 실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주를 단 정현(鄭玄,127년~200년)은 이때를 공자가 주유를 막 끝내고 노나라에 귀국한 직후라고 보았다. 당시 공자는 성공한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명망 있는 인사였다. 그런데 공자를 만나자마자 애공이 처음 물은 것이 그의 옷차림이라니. 이를 통해 애공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나름 상상해 볼 여지가 있는 듯하다. 애공(哀公)의 이름은 장(將)이다. 혹 장(蔣)이라고도 한다. 정공(定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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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2024.02.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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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 제경공이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진실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아들이 아들답지 못하다면, 비록 곡식이 있더라도 제가 그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齊景公問政於孔子 孔子對曰 君君 臣臣 父父 子子 公曰 善哉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得而食諸) 「안연,11」   공자가 만난 제 경공   제나라 26대 군주인 경공(景公/재위 기원전 548~기원전490)은 대부인 최저에게 시해된 장공(莊公)의 이복동생으로 장공이 시해된 후 최저에 의해 옹립되었다. 최저의 권력은 끝이 없을 것 같았지만 얼마 뒤 그는 그의 측근인 경봉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경봉 역시 얼마 못가 그의 수하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 뒤에 제나라의 권력은 네 집안, 국(國)씨, 고(高)씨, 포(鮑)씨, 전(田)씨가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안정되게 되었다. 공자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제 경공은 공자와 세 번 정도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공자가 30대 초반일 때 노나라에 온 제 경공과 안자를 만났다고 한다. 다음에는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로 가 경공을 만났다. 마지막으로 50대에 이르러 대사구의 직책을 맡게 된 공자가 제 경공과 노 정공의 회담을 주관하면서 만나게 되었다. 『논어』에도 제 경공에 대한 기록이 세 차례 보인다. 그 중 두 개가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에 갔을 때, 경공을 만나는 장면이다. 공자를 만난 제 경공은 그에게 ‘정치’에 대해 물어본다. 이 때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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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2023.1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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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카메오 열전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장문중(노나라 대부)이 큰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기둥머리에는 산을 조각하고 동자기둥에는 마름풀을 그렸으니,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子曰  臧文仲居蔡  山節藻梲  何如其知也) 『논어』「공야장,17」     『논어(論語)』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들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다. 더불어 당대 혹은 선대의 유명한 사람들도 많이 언급 되는데 생각보다 노(魯)나라 사람들이 잘 나오지 않는다. 공자 당대에 권력자였던 삼환(三桓)을 제외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노나라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논어』에 두 번 언급되는 장문중은 노나라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사람인 듯하다. 하지만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읽기 전까지 장문중이 노나라의 대부였다는 것 이외에 거의 아는 것도 없었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도 없었다. 게다가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장식을 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썩지 않는 세 가지, 삼불후(三不朽)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여러 가수들이 다양한 장르의 명곡을 재해석하여 부르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서 불후(不朽)는 ‘썩지 않는’이라는 뜻으로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불후라는 말은 『춘추좌전』에서 유래했는데 노나라 양공(襄公) 24년, 숙손표가 진(晉)나라의 범선자와 나눈 대화에 등장한다. 범선자가 사람이 죽어도 썩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숙손표가 덕을 세우는 것(立德)과 공을 세우는 것(立功), 말을 세우는 것(立言) 세 가지가 오래 되어도 폐해지지 않으니 불후라고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후대에는 이 세 가지를 ‘삼불후(三不朽)’라고 칭하였다. 이 때 숙손표는 불후의 예로 장문중을 들었다.   “우리 노나라 선대부 중에 장문중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가 남긴...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장문중(노나라 대부)이 큰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기둥머리에는 산을 조각하고 동자기둥에는 마름풀을 그렸으니,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子曰  臧文仲居蔡  山節藻梲  何如其知也) 『논어』「공야장,17」     『논어(論語)』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들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다. 더불어 당대 혹은 선대의 유명한 사람들도 많이 언급 되는데 생각보다 노(魯)나라 사람들이 잘 나오지 않는다. 공자 당대에 권력자였던 삼환(三桓)을 제외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노나라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논어』에 두 번 언급되는 장문중은 노나라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사람인 듯하다. 하지만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읽기 전까지 장문중이 노나라의 대부였다는 것 이외에 거의 아는 것도 없었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도 없었다. 게다가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장식을 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썩지 않는 세 가지, 삼불후(三不朽)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여러 가수들이 다양한 장르의 명곡을 재해석하여 부르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서 불후(不朽)는 ‘썩지 않는’이라는 뜻으로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불후라는 말은 『춘추좌전』에서 유래했는데 노나라 양공(襄公) 24년, 숙손표가 진(晉)나라의 범선자와 나눈 대화에 등장한다. 범선자가 사람이 죽어도 썩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숙손표가 덕을 세우는 것(立德)과 공을 세우는 것(立功), 말을 세우는 것(立言) 세 가지가 오래 되어도 폐해지지 않으니 불후라고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후대에는 이 세 가지를 ‘삼불후(三不朽)’라고 칭하였다. 이 때 숙손표는 불후의 예로 장문중을 들었다.   “우리 노나라 선대부 중에 장문중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가 남긴...
진달래 2023.10.01 |
조회 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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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자(제나라 대부 진항)가 간공을 시해했다. 공자께서 목욕재계하고 조정에 나가 애공에게 알렸다. “진항이 그의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그를 토벌하십시오.” 애공이 말했다. “세 대부들에게 말하시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임금께서는 세 대부들에게 말하라 하시는구나.” 공자께서 세 대부들에게 가서 말했으나 모두 안 된다고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陳成子弑簡公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恆弑其君 請討之 公曰 告夫三子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君曰 告夫三子者 之三子告 不可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논어> 헌문-22   내가 동양 고전을 처음 읽었을 때 겪은 어려움 중 하나는 한 사람이 여러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진성자(陳成子)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는데, 여기는 진성자라고 되어 있지만 대체로 전성자(田成子)라고 하고, 진항(陳恒), 전항(田恒), 혹 전상(田常)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성자(成子)는 그의 시호이며, 이름이 항(恒)인데 『사기』에는 상(常)으로도 되어 있다. 진성자 혹은 전성자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이들이 진(陳)나라에서 살다가 제(齊)나라로 이주하여 성을 전(田)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강(姜)씨의 제나라에서 전(田)씨의 제나라로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 「세가(世家)」는 춘추전국시대 제후국들의 역사를 쓰고 있다. 그러니까 노나라의 역사는 「노세가」에 진나라는 「진세가」를 살펴보면 된다. 그런데 제나라의 경우 「제세가」로 되어 있지 않고 「제태공세가」와 「전경중완세가」로 나누어져 있다. 제나라 군주의 자리가 강태공의 강씨에서 바로 진성자, 아니 전성자의 전씨로 바뀌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陳)나라에서 처음 제나라로 이주한 이는 진완(陳完)이다. 완은 원래 진나라의 공족(公族)이었다. 진나라는 순임금의 후예들에게 봉해...
진성자(제나라 대부 진항)가 간공을 시해했다. 공자께서 목욕재계하고 조정에 나가 애공에게 알렸다. “진항이 그의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그를 토벌하십시오.” 애공이 말했다. “세 대부들에게 말하시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임금께서는 세 대부들에게 말하라 하시는구나.” 공자께서 세 대부들에게 가서 말했으나 모두 안 된다고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陳成子弑簡公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恆弑其君 請討之 公曰 告夫三子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君曰 告夫三子者 之三子告 不可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논어> 헌문-22   내가 동양 고전을 처음 읽었을 때 겪은 어려움 중 하나는 한 사람이 여러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진성자(陳成子)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는데, 여기는 진성자라고 되어 있지만 대체로 전성자(田成子)라고 하고, 진항(陳恒), 전항(田恒), 혹 전상(田常)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성자(成子)는 그의 시호이며, 이름이 항(恒)인데 『사기』에는 상(常)으로도 되어 있다. 진성자 혹은 전성자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이들이 진(陳)나라에서 살다가 제(齊)나라로 이주하여 성을 전(田)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강(姜)씨의 제나라에서 전(田)씨의 제나라로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 「세가(世家)」는 춘추전국시대 제후국들의 역사를 쓰고 있다. 그러니까 노나라의 역사는 「노세가」에 진나라는 「진세가」를 살펴보면 된다. 그런데 제나라의 경우 「제세가」로 되어 있지 않고 「제태공세가」와 「전경중완세가」로 나누어져 있다. 제나라 군주의 자리가 강태공의 강씨에서 바로 진성자, 아니 전성자의 전씨로 바뀌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陳)나라에서 처음 제나라로 이주한 이는 진완(陳完)이다. 완은 원래 진나라의 공족(公族)이었다. 진나라는 순임금의 후예들에게 봉해...
진달래 2023.07.11 |
조회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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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심하도다, 나의 쇠함이여! 오래되었구나, 내 다시 꿈속에서 주공을 뵙지 못한 것이.”(子曰 甚矣吾衰也 久矣吾不復夢見周公) 『논어』「술이,5」   동양의 문화주의는 흔히 공자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공자는 이 문화를 주공(周公)으로부터 이었다고 했다. 공자는 늘 주공을 흠모했다고 전해지는 데, 이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논어(論語)』에 나오는 이 문장이 아닌가 싶다. 공자는 젊었을 때부터 주공의 도(道)를 따르고 배우려고 힘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공자는 꿈에서 주공을 뵐 수 있었나 보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자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꾸는 횟수가 점점 줄었다. 위 문장은 공자가 이 때의 심정을 토로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논어집주』의 주(注)에는 주자와 이천의 주가 함께 있는데, 두 글이 비슷한데 다른 것이 흥미롭다. 주자는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꿀 수 없게 된 것이 늙어서 주공의 도를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에 반해 이천은 마음은 늙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나 도를 행하는 것은 몸이기 때문에 공자가 늙어서 도를 행하는 것도 힘들고 주공에 대한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꿈에서까지 주공을 생각한 공자의 이러한 모습은 후대에 『여씨춘추』와 같은 책에 이르면 공자가 꿈에서 주공을 직접 만나 도를 배웠다는 이야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주공은 어떤 사람일까   주공의 이름은 단(旦)이다.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의 동생이다. 무왕이 은(殷)나라를 정벌할 때의 공신(功臣)이다. 『사기』 「주본기」에 의하면 무왕이 즉위한 후 태공망(강태공)을 사(師)로 삼고 주공을 보(輔)로 삼았다고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심하도다, 나의 쇠함이여! 오래되었구나, 내 다시 꿈속에서 주공을 뵙지 못한 것이.”(子曰 甚矣吾衰也 久矣吾不復夢見周公) 『논어』「술이,5」   동양의 문화주의는 흔히 공자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공자는 이 문화를 주공(周公)으로부터 이었다고 했다. 공자는 늘 주공을 흠모했다고 전해지는 데, 이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논어(論語)』에 나오는 이 문장이 아닌가 싶다. 공자는 젊었을 때부터 주공의 도(道)를 따르고 배우려고 힘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공자는 꿈에서 주공을 뵐 수 있었나 보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자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꾸는 횟수가 점점 줄었다. 위 문장은 공자가 이 때의 심정을 토로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논어집주』의 주(注)에는 주자와 이천의 주가 함께 있는데, 두 글이 비슷한데 다른 것이 흥미롭다. 주자는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꿀 수 없게 된 것이 늙어서 주공의 도를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에 반해 이천은 마음은 늙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나 도를 행하는 것은 몸이기 때문에 공자가 늙어서 도를 행하는 것도 힘들고 주공에 대한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꿈에서까지 주공을 생각한 공자의 이러한 모습은 후대에 『여씨춘추』와 같은 책에 이르면 공자가 꿈에서 주공을 직접 만나 도를 배웠다는 이야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주공은 어떤 사람일까   주공의 이름은 단(旦)이다.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의 동생이다. 무왕이 은(殷)나라를 정벌할 때의 공신(功臣)이다. 『사기』 「주본기」에 의하면 무왕이 즉위한 후 태공망(강태공)을 사(師)로 삼고 주공을 보(輔)로 삼았다고 한다....
진달래 2023.04.26 |
조회 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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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께서 계씨에 대해 말씀하셨다. “자기 집 뜰에서 팔일무(천자 앞에서 추는 춤)를 추니 이런 일까지 한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팔일, 1」   공자가 살던 당시에 노(魯)나라에는 삼환(三桓)이라고 부르는 세 대부 집안이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노 환공(桓公/前712~前694)의 후손들로 맹손(孟孫), 숙손(叔孫), 계손(季孫)씨 집안을 이른다. 맹(孟), 숙(叔), 계(季)는 형제들의 순서를 말하는 것으로 맹은 맏이, 숙은 둘째, 계는 막내의 뜻이다. 어찌 보면 한 집안 사람들인 이들은 때로는 서로 힘겨루기를 하지만 대부분 서로를 도와가며 노나라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이들의 힘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공자 당대의 군주였던 소공(昭公/前542~前510)은 계씨를 정벌하려다 오히려 삼환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공자는 이러한 상황을 도(道)에 어긋난다고 여겼다.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진 것도 이렇듯 세상의 질서가 무너져서라고 생각했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 그래서 공자는 정치는 무릇 정명(正名), 즉 이름을 바로 잡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논어』에 등장하는 삼환은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대표적인 인물들로 그려진다.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팔일무(八佾舞)는 천자가 연회를 베풀 때 추는 춤이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각 신분에 따라 춤의 종류나 춤을 추는 무희의 수가 정해져 있었다. 흔히 팔일무는 여덟 명씩 여덟 줄을 맞추어 총 64명의 무희가 춤을 추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아래로 무희의 숫자가 줄어드는데 제후는 육일무(六佾舞), 대부는 사일무(四佾舞)를 출 수 있었다. 계씨는 대부이므로 예(禮)에 맞게 하려면 사일무를 추어야 했다....
공자께서 계씨에 대해 말씀하셨다. “자기 집 뜰에서 팔일무(천자 앞에서 추는 춤)를 추니 이런 일까지 한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팔일, 1」   공자가 살던 당시에 노(魯)나라에는 삼환(三桓)이라고 부르는 세 대부 집안이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노 환공(桓公/前712~前694)의 후손들로 맹손(孟孫), 숙손(叔孫), 계손(季孫)씨 집안을 이른다. 맹(孟), 숙(叔), 계(季)는 형제들의 순서를 말하는 것으로 맹은 맏이, 숙은 둘째, 계는 막내의 뜻이다. 어찌 보면 한 집안 사람들인 이들은 때로는 서로 힘겨루기를 하지만 대부분 서로를 도와가며 노나라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이들의 힘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공자 당대의 군주였던 소공(昭公/前542~前510)은 계씨를 정벌하려다 오히려 삼환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공자는 이러한 상황을 도(道)에 어긋난다고 여겼다.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진 것도 이렇듯 세상의 질서가 무너져서라고 생각했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 그래서 공자는 정치는 무릇 정명(正名), 즉 이름을 바로 잡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논어』에 등장하는 삼환은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대표적인 인물들로 그려진다.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팔일무(八佾舞)는 천자가 연회를 베풀 때 추는 춤이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각 신분에 따라 춤의 종류나 춤을 추는 무희의 수가 정해져 있었다. 흔히 팔일무는 여덟 명씩 여덟 줄을 맞추어 총 64명의 무희가 춤을 추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아래로 무희의 숫자가 줄어드는데 제후는 육일무(六佾舞), 대부는 사일무(四佾舞)를 출 수 있었다. 계씨는 대부이므로 예(禮)에 맞게 하려면 사일무를 추어야 했다....
진달래 2023.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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