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가 양생이다> 4회 내가 배웠던 '학교', 파지스쿨

기린
2020-10-31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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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상에 하나뿐인 학교

 

 문탁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문탁샘이 청소년인 악어떼들을 데리고 직업 체험을 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어느 날 프로그램 전 시간이 비는 틈에 악어떼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다음 프로그램으로 뭘 하고 싶은지 묻는데 녀석들이 도통 대답을 안 했다. 답답해진 나의 음성이 커졌던지 지나가던 문탁샘은 “애들이랑 얘기 좀 해 보랬더니 싸우고 있냐?”고 했다. 싸우기까지야 싶었지만 여튼 청소년들을 상대하는 일은 나랑 맞지 않는다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다 어린이 서당에서 수업을 맡은 후, 문탁의 청소년 프로그램 전체를 기획 운영하는 ‘주권없는 학교’(이하 주학) 활동까지 겸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공동체에 있다 보면 적성운운 할 수 없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주학은 문탁에서 “학교 밖에서도 얼마든지 재미있고 유익한 배움의 장을 함께 만드는 실험”을 하려는 활동 단위였다. 당시 청소년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던 친구들로 구성되었다. 현재 학교에서 연령별로 나누는 제도를 넘고, 청소년은 공부 어른은 일이라는 분할을 거부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와 일을 함께 경험하는 활동을 비전으로 삼았다. 동시에 흔히 좋은 교육이라는 표상에 맞서 “사심 가득하고 당파성이 분명하고 주관이 뚜렷한 공부”를 표방했다.

 

 하지만 실제 주학 프로그램은 학교 수업이 없는 주말을 이용해 학생기록부에 쓸 수 있는 이력을 원하는 학생들이 주로 신청했다. 매년 학교를 떠나는 청소년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는데 그들은 어디서 시간을 보낼까? 주중에 그들이 모여서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친구도 만들고 자기 삶의 기술도 익히는 문탁의 청소년 버전을 열어보자. 문탁에서 우리가 공부했던 내용을 반영하여 커리큘럼을 짜고 학교 이름을 파지스쿨로 정했다. 당시 교실로 쓸 공간이 마을의 공유지였던 파지사유이기도 했고 기존의 인식을 깨트리며 배워나간다(破知)는 의미도 실었다. 나는 그동안 공부했던 동양고전을 원문으로 배우는 고전 담당교사로 합류했다.

 

 

 타고난 목청이 커서 싸우는 것으로 비친 탓도 있지만, 악어떼들과 마주 앉아서 무슨 공부를 하면 좋겠냐고 다그치던 나는 분명 청소년들에게 ‘친절한’ 교사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내가 공동체에 접속해서 배우고 익힌 것들을 그들에게도 전수해 보겠다는 의지, 기존의 책읽기와는 다른 고전의 원문을 과목으로 만난다는 변화 등이 새로운 도전으로 여겨졌다. 더구나 주학의 비전이 실현되면 어쩌면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학교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도 품었던 것 같다.

 

2. 교사는 어떤 수업을 지향해야 하는가

 

 공고를 내고 신청자를 기다렸지만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우리는 학교 밖 청소년들이 억지로 하는 공부가 아니고, 스스로 계획하고 실천하는 공부가 하고 싶을 것이라 예측했지만 빗나갔다. 학교에서도 공부가 하기 싫어서 그만뒀는데 여기서 또 공부한다고요? 그것도 재미라고는 없는 인문학이라니. 도통 반응이 없다가 마감 일자가 다가오면서 한 두건 문의가 오더니 결국 여섯 명의 학생이 입학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에 가지 않은 세 사람, 고등학교를 다니다 휴학 중이거나 자퇴를 한 세 사람. 그 중에 한 명은 두 번인가 수업에 왔다가 파지스쿨의 커리큘럼이 자신과 맞지 않다며 그만두었다. 결국 다섯과 함께 본격적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학생 다섯에 교사가 여섯인 학교, 정말 세상에 하나뿐인 학교가 되었다.

 

 

 나는 진달래와 함께 우리가 배웠던 『논어』를 가르치기로 했다. 한문으로 된 원문을 가르치자니 일일이 설명을 해야 했고, 배경지식도 알려주어야 했다. 어느 날 진달래가 내가 수업 시간에 말이 너무 많은 것 같다고 했다. 다 알려주겠다는 마음이 앞서서 말이 홍수처럼 쏟아져 끊이질 않았나보다. 그럼에도 막상 지적을 당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더구나 교사가 말이 많은 수업이 문제가 있다는 의견에도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그 또한 학생들이 말을 많이 해야만 ‘좋은’ 수업이라는 전제에서 비롯된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논어』 원문으로 수업을 하다보면 문장의 뜻부터 설명하게 된다. 한자는 표의문자라서 뜻이 하나가 아닐 경우가 많다. 꼭 알았으면 좋겠는 뜻을 부연설명하고 문장 전체의 맥락까지 짚어주노라면 학생들의 머리에 쥐가 나는 게 느껴진다. 그래놓고 자 질문해보자 라고 하면 멍해지는 눈동자들이 나를 향한다. 당황한 나는 뭐라도 더 설명하려고 말이 점점 많아진다. 말이 산으로 간다. 그럴 때 누군가 엉뚱한 질문이라도 해서 분위기를 전환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대부분 나는 듣는 이들에게 질문을 촉발하지 못하는 ‘무지’를 직면하게 되고, 듣는 이들은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곤혹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사이 수업은 끝나고 만다.

 

 그 와중에도 기억에 남는 순간들도 있었다. 학생들은 공자님이 스스로 하늘이 내린 문명의 수호자로 자임하는 내용을 읽더니 잘난 척 쩐다고 놀렸다. 공자님의 애제자 안연의 완전무결함에 그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귀신론을 들고 나왔을 때는 나도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청소년 인문학 축제인 향연에서 논어 한 문장으로 깨달은 것을 에세이로 발표했을 때, 가슴 뻐근한 감동도 있었다. 서로의 무지에 의지하여 가볍게 문장을 즐기고 진지하게 자신의 질문을 벼렸던 시간, 어쩌면 그것이 배우고 익히는 동안에 일어나는 기쁨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수업 시간에 교사가 말이 많다는 것과 관련해서는 다른 수업에서도 계속 문제가 제기 되었다. 그럴 때 우리는 당시 자신이 수업 시간에 느끼는 한계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기술이 부족했다. 그저 ‘좋은’ 수업은 이래야 한다는 당위에 묶여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일쑤였다. 오죽하면 다른 친구들이 당시 주학 교사들에게 너희 오늘은 안 싸웠니? 라며 안부를 물었을까.

 

3. 엄마인가 선생인가

 

 파지스쿨 수업 중에서 N프로젝트라는 수업이 있었다. 고전이나 인문에 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은 대신 무엇이든 도전해볼 수 있었다. 주제를 정하고 일정을 짜고 진행하는 과정 전체를 학생들이 스스로 해내는 수업이었다. 파지스쿨의 커리큘럼에서 가장 기대를 모았던 과목이기도 했다. 학생이 다섯이었기 때문에 다섯이 함께 하는 기획도 좋고 짝을 지어 협력하는 프로젝트면 어떻겠느냐 제안을 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모두 각자 관심분야에 대한 조사나 도전해보고 싶은 내용을 과제로 삼았다. 교사들은 각자 한 사람씩 짝을 지어 프로젝트 진행과정에 조력자 역할을 맡았다.

 

 나는 M군이 자신의 일상을 홈피에 기록하겠다는 도전 과제의 조력 담당이 되었다. M군은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면서 글쓰기 습관도 들이고 자신도 모르는 자신을 발견하고 싶다는 기획을 제출했다. 글은 요일을 정해 홈피에 게재하기로 했다. 첫 번째 글, 두 번째 글이 실리는가 했더니 점점 글이 올라오는 텀이 늘어졌다. 언제나 과제를 수행하지 못한 까닭은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과제나 알바 등에 밀려서 펑크를 내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과제를 점검하는 시간이 잔소리 시간으로 바뀌어 갔다.

 

 

 생활 습관에서도 문제가 일어났다. 멀리서 오는 학생들은 거의 지각을 안 했다. 집이 코앞인 녀석이 매번 지각을 했다. 처음엔 타이르고 다음엔 경고를 하고 마지막엔 얼굴을 붉혀도 개선의 여지가 없었다. 아무리 혼나도 그 때뿐이었다. 다른 학생들도 공동밥상의 밥당번이나 공간을 청소하는 당번일 때 연락도 없이 안 나타나기도 했다. 그럴 때 원색적으로 윽박지르는 ‘엄마’가 아니라 정확한 근거를 들어 설득하고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선생’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매번 거의 엄마가 되어 그들을 질책하는 잔소리나 늘어놓게 되었다.

 

 파지스쿨을 열 때 수업은 이틀이지만 다른 날도 공간에 나와서 문탁의 다른 활동에 접속하기를 지향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수업이 있는 이틀을 제외하면 공간에 얼씬도 않으려고 했다. 저마다 다른 일정이 있다는 사정도 있었지만, 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학생들의 ‘엄마’ 연배인 것도 한 몫을 했다. 라이프 스타일도 관심사도 심지어 섭생마저 다른 세대들과 함께 공부하고 일도 하는 실험은 애초에 불가능한 기획이었을까. 지각하지 마라, 약속했으면 지켜야지 같은 말을 잔소리로 하지 않으면서 그들과 관계 맺는 방법을 좀처럼 찾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갔다.

 

4. 또 한 번의 졸업

 

 2014년 가을 겨울 학기 신입생 모집으로 문을 연 파지스쿨은 2015년 본격적으로 학생을 모집했다. 그러나 신청하는 학생 수는 첫 해의 기록을 갱신하지 못했다. 설령 한두 명 늘어났더라도 졸업까지 하는 학생의 수는 매년 줄어들었다. 2017년에는 입학 신청자가 0명이었다. 결국 파지스쿨 교사들은 강제 휴식년에 들어갔고, 나는 파지스쿨 교사 활동을 접었다. 학생들이졸업까지 못 가는 이유는 다양했다. 건강상의 이유도 있었고 다른 진로를 찾아 떠나기도 했다. 교사가 배운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우리의 커리큘럼이 더 이상 그들의 마음을 끌지 못했던 것도 떠나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게 가장 중요한 이유 아니었을까.

 

 

 나는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12년 내내 개근상을 받았다. 당시 12년 개근상은 우등상보다 더 빛나는 상장이라고 으스댔던 기억이 선명하다. 나라고 왜 학교가기 싫은 날이 없었을까. 하지만 나는 아파도 학교에 가서 아파야 하는 것이야말로 ‘성실’의 척도인 줄 알고 꾸역꾸역 학교를 다녔다. 그 후 학교는 그 성실만으로는 견딜 수 없는 수많은 문제가 불거졌고 학교 제도 자체를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파지스쿨의 비전은 그 문제를 해결해 보자는 하나의 실험이었다. 그런데도 난 여전히 그 성실에 머물렀던 것은 아닐까. 설령 그것이 여전히 가치 있는 덕목이더라도, 그것을 구현하는 과정에서는 좀 더 유연하게 세태의 흐름을 탔어야 하지 않았을까.

 

 결국 2019년 파지스쿨은 문을 닫았다. 그런데 그 이후 청년들이 하나 둘 공동체에 어슬렁대기 시작했다. 그들은 연령에 개의치 않고 문탁의 다양한 세미나에 접속했다. 나는 학생과 교사로 만났던 새은과 니체 액팅스쿨에서 함께 세미나를 했다. 그해 축제공연을 위해 연습을 할 때, 새은은 나의 춤선생이 되었다. 새은샘이 춤의 순서도 익히지 못하고 엉거주춤하는 나에게 응원의 엄지척을 연발했을 때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는 학생이 되었다. 파지스쿨러였던 우현과는 인문약방 팟캐스트에서 녹음편집 엔지니어와 진행자로 함께 일하고 있다.

 

 서로에게 배움을 일으키고 함께 일하면서 좋은 삶을 구성해보자는 파지스쿨의 비전은 파지스쿨이 문을 닫은 후에야 이루어진 셈이다. 배움의 장은 아는 사람이 가르치는 자리에서 모르는 이들에게 전수할 때 만들어졌다. 그 자리에서는 더 많이 아는 사람의 ‘권력’이 아니라 무지를 깨트리는 ‘협력’이 펼쳐졌다. 그렇다면 ‘좋은’ 교육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구성되는 것이 아닐까. 학교를 떠나고 나서야 ‘학교’의 모습이 보였고 교사가 되어보고 나서야 어떻게 배움이 생성되는지 알게 되었다. 파지스쿨은 그렇게 또 한 번의 졸업을 경험하는 장이었다.

 

댓글 7
  • 2020-10-31 09:59

    파지스쿨의 비전은 문을 닫은 후에야... 공감가네요^^

  • 2020-10-31 12:36

    “그렇다면 ‘좋은’ 교육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구성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선생님의 통찰이 뼈를 때립니다:)

  • 2020-11-01 07:45

    지나간 후에야 알게 되는 게 았죠^^

  • 2020-11-01 11:14

    애들이랑 싸우는 모습? ㅋㅋㅋㅋ
    두 아이를 모두 맡겼던 부모로서 저는 좋았던 시간입니다.
    두 아이는? 삶이 계속되는 한 그 무엇이 될지 모르겠으나..
    지금도 그 무엇은 계속되고 있으니 용맹정진 하소서~~^^

  • 2020-11-03 09:17

    액팅의 춤이 그렇게 탄생한 것이였군요~
    엄청 유연해진 것이 명제자? 명선생! 덕분이군요!ㅋㅋㅋ

  • 2020-11-07 00:00

    파지스쿨이 있었기에 지금의 청년들과 자연스러운(?) 만남 또는 섞임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ㅎ

  • 2020-11-09 08:58

    파지스쿨에서 선생으로 좌충우돌 시간을 10000시간쯤 보낸 덕에 지금의 기린이 형준과 우현과 함께 하기를 포기하지 않는거군요
    경험치를 쌓는 것
    그래야 배우는 게 있다는 거 또 배웠어요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1. 양생에 대한 오해       양생이라는 낱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병에 걸리지 않도록 건강관리를 잘 하여 오래 살기를 꾀함”이라는 뜻이 첫 번째로 실려 있다. 즉 양생은 오래 살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도 양생과 관련한 공부를 하자고 했더니, 건강 챙기는 것도 공부해야 하느냐고 반문한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양생(養生)의 출전으로 알려진 「양생주」에서는 병이라거나 건강, 장수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다만 첫 장에 “시비선악을 넘어 중도의 도를 지키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고, 삶을 온전히 할 수 있고, 부모님을 잘 모실 수 있고, 천수를 누릴 수 있습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또한 오래 사는 것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양생이 장수를 뜻하게 된 데는 진시황의 일화가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진시황본기」에는 불로장생에 꽂힌 진시황의 이야기가 나온다.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이룬 후 천하를 순행하기 시작했는데, 제나라에 들렀을 때 서불 등의 방사들을 만나 신선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후로 진시황은 방사들을 가까이 하며 죽지 않는 신선이 될 수 있는 약을 구하려고 막대한 비용을 댔다. 그 중의 노생이라는 방사는 진인(眞人)을 소개하며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천지와 더불어 영원합니다.” 라고 했다. 「대종사」편에 나오는 진인을 가리키는 내용과 같다. 하지만 진시황은 불사약을 얻지 못했고 순행 도중에 병을 얻어 객사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한무제 역시 말년에 불로장생에 몰두하였다는 등 진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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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3.1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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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1.칠원의 관리, 장자   들꿩은 열 걸음을 걸어야 모이 한 번 쪼고 백 걸음 걸어야 물 한 모금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새장에서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먹이를 찾는 수고로움이야 없겠지만 자유롭게 살려는 본성에는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澤雉十步一啄,百步一飮,不蘄畜乎樊中. 神雖王,不善也.) 「양생주」 『낭송장자』 100쪽     『사기열전』에 의하면 장자는 몽(蒙)땅 칠원(漆園)의 관리(吏)였다고 전해진다. 현재 몽 땅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칠원이 옻나무를 심어 놓은 동산이라는 것에서는 이견이 없다. 장자가 살았던 시기에는 종이와 먹이 발명되기 전이라 대부분 죽간에 써서 기록을 남겼다. 옻나무에서 채취한 옻액을 대나무로 만든 펜으로 찍어 죽간에 썼다고 한다. 그런데 옻나무는 아무데서나 흔히 자라는 수종이 아닌데다, 씨앗의 발아율도 낮고 잔뿌리가 완전히 자리를 잡는 데도 3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런 상황이니 옻액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라도 옻나무 동산을 관리해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칠원의 관리는 중요한 직책은 아니어서 하급말단직이었을 것이라는 데도 이견은 없다.        「양생주」 3장에는 들꿩의 살이가 나온다. 꿩은 땅 위를 걷는 새로 몸이 길고 날씬하며, 발과 발가락이 발달되었으나 날개는 둥글고 짧아 멀리 날지 못한다. 먹이는 나무 열매나 풀씨 등의 식물성 먹이를 주로 섭취하는데, 작은 곤충도 먹는 잡식성이라고 한다. 먹이 대부분이 땅바닥에서 쪼아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보니, 사냥감으로 노출되기 쉬워 식용으로도 널리 애용된 조류이기도 하다. 옛 문헌에 의하면 늦봄 풀숲에 숨어서 피리로 장끼소리를 내면 꿩이 그 소리를 듣고 날아오르기도 하는데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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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3.1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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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1.포정해우   처음 소를 잡을 때는 소가 통째로만 보였습니다. 삼 년이 지나자 소의 갈라야 할 부분이 보였습니다. 지금은 소를 눈으로 보지 않고 신묘한 기운으로 대합니다. 감각기관은 활동을 멈추고 신묘한 기운이 움직이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소의 자연스러운 결에 따라, 살과 뼈 사이의 빈틈에 칼을 넣어 움직이며, 원래 나 있는 길을 따라 나아가는 것입니다. (.....) 지금 제 칼은 십구 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소를 수천 마리나 잡았지만 이 칼은 막 숫돌에서 갈아낸 듯 예리합니다. 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칼날은 더없이 얇아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것이 틈새로 들어가니 넓은 공간에서 칼이 자유자재로 놀고도 남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십구 년이 지났어도 이 칼은 막 숫돌에서 갈아낸 듯 예리합니다. <낭송장자> 84쪽     「양생주」 2장은 소를 잡는 백정 포정의 이야기다. 포정은 자신이 소를 잡는 일에 대해 기술로 한 것이 아니라 도(道)로 했다고 했다. 처음 보았을 때 통째로 보였던 소가 삼 년이 지나자 갈라야 할 부분이 보이는 변화였다. 포정은 그 시간동안 덩어리째 보이는 소를 분해하는 기술부터 습득하면서 기술에 그치지 않고 소를 이해하기에까지 나아갔다. 즉, 소의 생김새라든가 섭생, 생명의 주기 등이었다. 이를 통해 소로 태어난 생명이 살아가는 이치를 통해 도의 운행을 깨우치게 되었다. 이렇게 깨우친 도로 십구 년이나 이어진 포정의 일은 여느 백정의 일과는 다른 길(道)을 낸 것이다.         포정이 수천 마리의 소를 잡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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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3.08.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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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춤추다 배운 연독이위경   기린     연독이위경, 중도를 지키는 삶   좋은 일을 해서 명성이 나는 것도, 나쁜 일을 해서 형벌을 받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시비선악을 넘어 중도의 도를 지키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고, 삶을 온전히 할 수 있고, 부모를 잘 모실 수 있고, 천수를 누릴 수 있습니다. (爲善無近名,爲惡無近刑. 緣督以爲經,可以保身,可以全生,可以養親,可以盡年._낭송장자 78쪽)     위 문장은 지식을 위한 지식을 좇는 위험을 밝힌 「양생주」 1장의 후반부 내용이다. 내편에서 선악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첫 문장인데, 장자는 선과 악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삶에서 양생의 가능성을 본다. 좋은 일이 드러나서 명성을 얻게 되면 그만큼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나쁜 일로 형벌을 받게 되면 몸을 상하게 된다. 온전한 몸을 유지해야 하는 양생에서 선도 악도 해로울 뿐이라는 것이 장자의 입장이다. 그래서 중도의 삶을 통해 시비선악을 넘을 수 있을 때, 자신과 주변까지 보살피면서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보았다.     원문을 살펴보면 중도의 삶은 연독이위경(緣督以爲經)이다. 직역하면 살피는 선으로써 날실로 삼는다 는 의미인데, 이때 날실은 아래 위로 지난다. 위진시대 곽상은 연독이위경을 “순중이위상(順中以爲常)”으로 주석하였다. 중심을 따름으로써 법도로 삼는다는 것이다. 살핀다는 의미의 독(督)을 가운데(中)로 주석을 달았다. 이러한 주석은 『황제내경』 「영추」편에서 사람에게는 여덟 개의 맥(脈)이 있는데, 그 중에서 독맥(督脈)은 중앙(中)을 흐르는 맥이라는 설명에 따른 영향이라고 한다. 독맥은 꼬리뼈 부근에서 등줄기를 따라 위로 올라가 정수리를 지나 인중에 이르는...
춤추다 배운 연독이위경   기린     연독이위경, 중도를 지키는 삶   좋은 일을 해서 명성이 나는 것도, 나쁜 일을 해서 형벌을 받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시비선악을 넘어 중도의 도를 지키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고, 삶을 온전히 할 수 있고, 부모를 잘 모실 수 있고, 천수를 누릴 수 있습니다. (爲善無近名,爲惡無近刑. 緣督以爲經,可以保身,可以全生,可以養親,可以盡年._낭송장자 78쪽)     위 문장은 지식을 위한 지식을 좇는 위험을 밝힌 「양생주」 1장의 후반부 내용이다. 내편에서 선악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첫 문장인데, 장자는 선과 악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삶에서 양생의 가능성을 본다. 좋은 일이 드러나서 명성을 얻게 되면 그만큼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나쁜 일로 형벌을 받게 되면 몸을 상하게 된다. 온전한 몸을 유지해야 하는 양생에서 선도 악도 해로울 뿐이라는 것이 장자의 입장이다. 그래서 중도의 삶을 통해 시비선악을 넘을 수 있을 때, 자신과 주변까지 보살피면서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보았다.     원문을 살펴보면 중도의 삶은 연독이위경(緣督以爲經)이다. 직역하면 살피는 선으로써 날실로 삼는다 는 의미인데, 이때 날실은 아래 위로 지난다. 위진시대 곽상은 연독이위경을 “순중이위상(順中以爲常)”으로 주석하였다. 중심을 따름으로써 법도로 삼는다는 것이다. 살핀다는 의미의 독(督)을 가운데(中)로 주석을 달았다. 이러한 주석은 『황제내경』 「영추」편에서 사람에게는 여덟 개의 맥(脈)이 있는데, 그 중에서 독맥(督脈)은 중앙(中)을 흐르는 맥이라는 설명에 따른 영향이라고 한다. 독맥은 꼬리뼈 부근에서 등줄기를 따라 위로 올라가 정수리를 지나 인중에 이르는...
기린 2023.06.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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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양생을 위한 지식 기린         양생(養生)을 탐구하는 기획 세미나를 4년째 하고 있다. 그간 양생과 관련해서 동서양의 다양한 텍스트들을 읽었다. 구체적으로 양생을 정의하는 텍스트도 있었고, 현재 사회를 움직이는 여러 담론을 통해 내 삶과의 연관성을 탐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양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여전히 막연하다. 양생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언어를 찾아보고 싶었다.     양생(養生)의 원출전은 『장자』 내편 중 「양생주」편이다. 직역을 하면 삶을 기른다, 가꾼다 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태어난 생명을 둘러싼 모든 보살핌을 포함하여 삶을 지속하게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생명을 보살피기 위해서는 영양도 섭취해 주어야 하고, 자신이 속한 세계를 알아가는 지식활동을 통해 외부로부터 안전을 보장해주기도 해야 한다. 그런데 「양생주」 첫 장에서는 지식의 위험에 대해 논하고 있다. 양생과 지식의 관계에 어떤 위험이 있을까? 나아가 양생을 위한 지식은 어떻게 터득하는 것일까?     삶을 위태롭게 하는 지식     우리의 삶에는 끝이 있지만 지식에는 끝이 없습니다.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을 좇는 일은 위험합니다. 그러니 지식을 좇는다면 삶이 위태로워질 뿐입니다.(吾生也有涯,而知也無涯.以有涯隨無涯,殆已.已而爲知者,殆而已矣.「양생주」 1장_낭송장자)       삶을 잘 가꾸기 위해서 지식이 필요하다. 유한한 삶을 이해하고 그 삶에서도 살아가야 할 가치를 찾기 위해서다. 곧 삶을 위한 지식이다. 하지만 지식은 삶만을 위해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태어나 차츰차츰 자신이 속한 세계를 파악해나간다. 그 세계에 대해 지식이 쌓일수록 삶을 잘...
양생을 위한 지식 기린         양생(養生)을 탐구하는 기획 세미나를 4년째 하고 있다. 그간 양생과 관련해서 동서양의 다양한 텍스트들을 읽었다. 구체적으로 양생을 정의하는 텍스트도 있었고, 현재 사회를 움직이는 여러 담론을 통해 내 삶과의 연관성을 탐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양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여전히 막연하다. 양생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언어를 찾아보고 싶었다.     양생(養生)의 원출전은 『장자』 내편 중 「양생주」편이다. 직역을 하면 삶을 기른다, 가꾼다 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태어난 생명을 둘러싼 모든 보살핌을 포함하여 삶을 지속하게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생명을 보살피기 위해서는 영양도 섭취해 주어야 하고, 자신이 속한 세계를 알아가는 지식활동을 통해 외부로부터 안전을 보장해주기도 해야 한다. 그런데 「양생주」 첫 장에서는 지식의 위험에 대해 논하고 있다. 양생과 지식의 관계에 어떤 위험이 있을까? 나아가 양생을 위한 지식은 어떻게 터득하는 것일까?     삶을 위태롭게 하는 지식     우리의 삶에는 끝이 있지만 지식에는 끝이 없습니다.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을 좇는 일은 위험합니다. 그러니 지식을 좇는다면 삶이 위태로워질 뿐입니다.(吾生也有涯,而知也無涯.以有涯隨無涯,殆已.已而爲知者,殆而已矣.「양생주」 1장_낭송장자)       삶을 잘 가꾸기 위해서 지식이 필요하다. 유한한 삶을 이해하고 그 삶에서도 살아가야 할 가치를 찾기 위해서다. 곧 삶을 위한 지식이다. 하지만 지식은 삶만을 위해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태어나 차츰차츰 자신이 속한 세계를 파악해나간다. 그 세계에 대해 지식이 쌓일수록 삶을 잘...
기린 2023.04.11 |
조회 407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공동체 밥상을 책임지겠어!    2017년 말 워크샵에서 다음 해의 공동체 주방을 운영하는 매니저 활동을 하겠다고 밝혔다. 같이 할 파트너를 찾던 어느 날, 공부방에서 당시 공동체 주방이었던 주술밥상 매니저와 마주쳤다. 회계 등등의 인수인계 잡무와 내년 운영 계획 등이 오가는데 분위기가 점점 예민해졌다. 결국은 언성이 높아졌다.   친구: 그럼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그동안 여섯이나 했다는 거야?! 나: 같이 하겠다는 사람이 없잖아! 그럼 혼자서라도 해야지!   우리 둘은 씩씩거리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친구가 다시 말을 걸었고 함께 차를 마시면서 서로의 입장에 대해 이야기 했다. 친구는 기존의 매니저 여섯 중에 할 수 있는 사람을 좀 더 물색해보자고 했다. 이미 그들의 의사를 타진해 보았던 나는 다들 부담스러워했다고 전했다. 우리는 그날 나와 함께 공동체 밥상을 맡을만한 마땅한 사람이 없는 상황, 그것을 어떻게 봐야할지 적절한 말도 찾지 못하고 착잡한 마음으로 헤어졌다.    2016년 공동체 밥상이 파지사유로 내려오면서 ‘주술밥상’ 시대가 열렸다. 주술밥상은 공동체의 밥상과 단품요리를 만드는 찬방을 함께 운영해 보겠다고 했다. 음식을 잘 하는 친구들과 기획력 있는 친구까지 합심해서 예술작품 같은 요리로 대박을 내보자는 야심찬 밥상의 출현이었다. 그리고 2018년 봄 나는 그 주방을 운영하는 주체가 되겠다고 나섰다. 그 과정에서 저런 사단이 났다.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고 잘 해보자는 마음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 날 우리는 제각각 마음이 좀 상했다. 나는 그 친구와 헤어져...
공동체 밥상을 책임지겠어!    2017년 말 워크샵에서 다음 해의 공동체 주방을 운영하는 매니저 활동을 하겠다고 밝혔다. 같이 할 파트너를 찾던 어느 날, 공부방에서 당시 공동체 주방이었던 주술밥상 매니저와 마주쳤다. 회계 등등의 인수인계 잡무와 내년 운영 계획 등이 오가는데 분위기가 점점 예민해졌다. 결국은 언성이 높아졌다.   친구: 그럼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그동안 여섯이나 했다는 거야?! 나: 같이 하겠다는 사람이 없잖아! 그럼 혼자서라도 해야지!   우리 둘은 씩씩거리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친구가 다시 말을 걸었고 함께 차를 마시면서 서로의 입장에 대해 이야기 했다. 친구는 기존의 매니저 여섯 중에 할 수 있는 사람을 좀 더 물색해보자고 했다. 이미 그들의 의사를 타진해 보았던 나는 다들 부담스러워했다고 전했다. 우리는 그날 나와 함께 공동체 밥상을 맡을만한 마땅한 사람이 없는 상황, 그것을 어떻게 봐야할지 적절한 말도 찾지 못하고 착잡한 마음으로 헤어졌다.    2016년 공동체 밥상이 파지사유로 내려오면서 ‘주술밥상’ 시대가 열렸다. 주술밥상은 공동체의 밥상과 단품요리를 만드는 찬방을 함께 운영해 보겠다고 했다. 음식을 잘 하는 친구들과 기획력 있는 친구까지 합심해서 예술작품 같은 요리로 대박을 내보자는 야심찬 밥상의 출현이었다. 그리고 2018년 봄 나는 그 주방을 운영하는 주체가 되겠다고 나섰다. 그 과정에서 저런 사단이 났다.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고 잘 해보자는 마음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 날 우리는 제각각 마음이 좀 상했다. 나는 그 친구와 헤어져...
기린 2021.0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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