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 헤이 유교걸 5회] 연애의 딜레마에 빠지다

고은
2021-03-03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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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 헤이 유교걸]은 길드다 김고은의 북&톡 연재글입니다.

한때 유교를 사회악이라고 생각했던 20대 청년이 <논어>를 읽으며 유교걸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습니다.

 

 

 

 

  연애의

  딜레마에

  빠지다

 

 

 

 

 

 

 

연애의 딜레마

 

   거의 6년 만에 솔로가 되었다. 간만에 솔로가 되니 ‘이제 연애 그만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든다. 전 애인과는 좋은 시간을 보냈지만, 그렇다고 연애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한 명과의 관계에 몰두하는 일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연애할 때면 애인과 하나가 되고 싶다는 강렬한 마음에 휩싸이고, 연인관계가 다른 관계보다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생긴다. 다른 이와 깊은 관계를 맺을 시 그 상대가 나의 성적 지향성에 부합한다면 바람피우는 일이 된다. (나의 경우엔 내 애인의 성별에 크게 개의치 않으니 사랑하는 내 동성 친구들과의 관계까지 애매해진다) 물론 다른 관계를 열심히 배타적으로 만들어도 애인과 하나가 될 수는 없다. 다투거나 같은 일에 의견이 갈릴 때면 상대와 합일될 수 없음을 체감하면서 외로움이 급격하게 밀려온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연애는 대개 낯선 존재들 사이에서 안정감을 줄 내 편을 찾기 위해,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서 혼자라는 느낌을 받지 않기 위해 시작된다. 외롭지 않기 위해 시작한 연애가 외로움을 만들고,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별을 했다가도 다시 외로워지지 않기 위해 연애를 한다. 몇 번이고 반복되는 연애의 딜레마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했다. 그 실마리는 내가 경험하는 독점적 연애, 로맨틱한 연애의 ‘ㅇ’자 도 모를 것 같은 공자가 중요하게 여긴 ‘仁(인)’에 있었다.

 

▲연애의 딜레마

 

 

 

 

 

 

정체가 묘연한 仁

 

   仁은 공자가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기 시작했고*, 덕분에 오늘날 동양고전을 잘 모르는 사람이 알 정도로 유명한 개념이 되었다. 그러나 고백하자면 나는 오래도록 仁을 이해하지 못했다. 『논어』를 들여다봐도 쉽게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공자는 어떤 개념도 특정해서 설명해준 적이 없거니와, 仁에 대해서는 더욱 말을 아꼈다고 한다**. 개념을 풀어낸 사전을 찾아보아도 그 뜻이 불명확하게 느껴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한자 사전에 적힌 “어질다”는 말은 무슨 뜻이며, 『중국사상문화사전』(미조구치 유조 외)에 쓰인 “애정 혹은 연민”은 무얼 의미한단 말인가. ‘언젠간 알게 되겠지’ 하며 뒷전으로 미뤄뒀었는데, 연애 딜레마를 고민하던 차에 갑자기 자공이 공자에게 仁에 관해 물은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子貢曰 : "如有博施於民而能濟衆, 何如? 可謂仁乎?"
자공이 말했다. “만일 백성에게 은혜를 널리 베풀어 많은 사람을 구제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인이라 할 만합니까?” (6:28)

 

 

▲자공

 

   질문을 주고받는 낌새를 보아하니 자공도 仁을 묘연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는 나와 별반 차이가 없는 듯하다. 내가 仁을 훌륭한 성품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처럼 자공 역시 仁을 쉽게 도달할 수 없는 엄청난 능력이라 여겼다. 굳이 따지자면 자공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공자는 자공의 접근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완벽한 것을 기준으로 잡고 시작하면 도달하지 못할 목표라고 쉽게 포기하거나, 방향을 잘못 잡아 허황된 꿈을 꿀 위험이 있다. 공자는 자공의 말을 옛날 옛적 훌륭한 임금이라 칭송받는 성인들도 해내지 못할 것이라며 자르고는 자공의 눈높이에 맞는 이야기를 해준다.

 

子曰 : "何事於仁? 必也聖乎! 堯舜其猶病諸! 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인하다고만 하겠는가? 반드시 성인일 것이다! 요임금과 순임금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근심하셨다! 어진 사람[仁者]은 자신이 서고자 하는 것으로 남도 서게 하고, 자신이 통달하고자 하는 것으로 남도 통달하게 한다.” 

 

   공자는 자공에게 성인이 아닌 보통의 인간도 仁을 행하며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공자의 말도 만만치 않다. 내가 움직이면 다른 사람도 움직인다는, 다른 존재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나부터 움직이라는 말은 나에게도 적용이 가능한 걸까? 이질적인 존재가 수두룩한 가운데, 한 명뿐인 애인하고도 하나가 되지 못하고,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벅찬 게 나의 현실인데…. 자공은 공자의 이 같은 확신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해졌다.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인보다 더 높이는 것이 없다. (子曰…好仁者 無以尙之…) …”(4:6)

** “공자께서는 이익과 운명 그리고 인에 대해서는 드물게 말씀하셨다.(子罕言利與命與仁.)”(9:1)

 

 

 

 

 

 

仁도 연애도 순환의 문제

 

   당시 仁은 종종 쓰이던 단어로 시와 의학서에서 등장하기도 한다. 그중 옛 의학서에서는 손발이 마비되는 것을 仁하지 못한 것(不仁)이라 표현했다. 손발의 저림은 체했을 때나 급격한 빈혈이 왔을 때처럼 순환이 원활하지 않은 경우 발생한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仁이란 마비나 고립과 거리가 먼, 순환이 잘 되는 것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이때 순환이 잘 된다는 것은 단순히 좋은 건강상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순환은 내 몸 안에서만 독자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몸 안의 세포들부터 외부의 세균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니, 나 역시 다른 존재들과 연결된 상태일 때야 원활한 순환이 가능하다.

 

   이전에 사용되었던 맥락을 따라 다시 보니 仁에 대한 조금 감이 잡히는 듯했다. 仁은 사람이라면, 아니 생명이라면 누구나 나 이외의 존재들과 연결된 채 살아가고자 하는 실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렇게 보면 仁과 연애에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연애도 仁만큼이나 어떤 존재와 연결되기를 바라는 일이다. 합일을 향한 의지와 다른 관계를 배타적으로 만드는 연애의 과정이 그것을 보여준다. 합일의 불가능함을 깨달았을 때 들이닥치는 외로움은 다른 존재와 연결되지 못했다는 절망에 가깝다. 연애의 문제는 실존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仁과 연애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연애가 다른 관계를 차치하고 단둘이서 연결되기를 바라는 것이라면, 仁은 만물과 연결될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공자가 仁을 중요한 가치로 여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논어』에 주석을 단 주희는 이렇게 설명한다. “仁은 천지만물을 하나로 여겨서 자기가 아님이 없을 뿐이다.”(仁者, 以天下萬物, 爲一體, 莫非己也.) 순환이 정말 잘 되면 온 세상과 통한다. 따라서 仁한 사람은 아무리 독단적으로 보이는 행동이라도 내 한 몸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의 일은 좁게는 나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의 일이고 더 넓게는 얼굴도 알지 못한 타인과 인간 외 존재의 일이다. 시설에 갇힌 장애인, 가장 음지에 있는 노숙자, 먼 나라 난민, 공장식 축산으로 길러지는 가축, 기후위기를 맞이한 지구를 자신과 같이 여길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연애가 구원처는 아니지만, 현장이 될 수는 있다.

 

   그간 꾸준히 연애를 해왔으면서도 연애를 답답하게 느꼈던 이유를 나는 여기서 찾을 수 있었다. 오래도록 연애를 하면 세상에서 고립되지 않을 거라고, 연애가 관계의 중추라고 생각했다. 몇 번의 연애가 끝나고 20대 후반이 되고 난 뒤에야 연애가 고립에서 벗어나게 해줄 구원처가 아님을 알게 됐다. 도리어 요즘엔 내 옆에 사랑하는 애인의 자리뿐만 아니라 퇴직한 아빠, 아픈 강아지, 식탁에 오르는 돼지, 거리에서 사라진 장애인과 같은 이들의 자리도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어쩌면 내가 느꼈던 답답함은 연애를 근절하고 싶다는 생각이라기보단, 단둘만의 관계로는 세상과 연결된 몸이 될 수 없음을 느꼈던 일에 가까웠던 게 아닐까?

 

   내게 연애를 할까, 하지 않을까 하는 문제가 이전만큼 중요하지 않아진 때가 온 것일지도 모른다. 연애에 쏠린 고민의 무게를 조금 덜어내고 공자가 말하는 仁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본다. 어떻게 하면 만물과 연결될 수 있을까? 자공의 질문에 대한 공자의 대답은 仁-능력을 기르는 방법을 귀띔해주는 것으로 끝난다.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
“가까이 자신에게서 취하여 남을 헤아린다면 인(仁)을 하는 방법이라고 할 만하다.”

 

   내가 곧 만물과 같다는 것을 알기는 쉽지 않다. 대신 만물도 나와 같을 수 있다는 것은 반추를 통해 알 수 있다. 내가 뭔가를 원한다면 어떤 사람은 다른 것을 원할 수도 있고, 내가 아프다면 어떤 존재 역시 아플 수 있다. 이때 나의 경험은 나를 굳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나를 벗어나 다른 존재들과 연결될 수 있게 해주는 단서가 된다. 그러니 어떤 관계가 누군가와 특별히 밀접하다고 곧 不仁은 아니다. 仁-능력이 내가 가진 단서들로부터 길러진다는 것은 仁이 구체적이고 소소한 일상의 영역에 있음을 의미한다. 仁이란 보이든 일상에서 만물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체감하며 동시에 그것을 일상에서 구현해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둘만의 관계에 매몰되지 않고 관계를 통해 반추하고 다른 관계로 확장할 수 있다면 연애 역시 仁-능력을 키울 수 있는 단서가, 仁을 발현하는 현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구원처 아닌 현장

 

 

 

 

 

댓글 7
  • 2021-03-04 01:05

    仁이 혹시 사람 인+두 이자의 결합인가요??? 헉.

    • 2021-03-17 13:51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 2021-03-04 19:36

    연애를 저렇게 어렵게 해서야 원 쯧쯧
    仁 따위 집어치우고 연애를 풍선처럼 가볍게~ 감자칩 처럼 바삭하게~ 해 보아요.

    • 2021-03-05 05:35

      봉옥언니 연애의 달인!!!!

    • 2021-03-06 21:24

      ㅋㅋ 네 유념하겠습니다!

  • 2021-03-09 20:41

    연애가 일부일처 혼인관계의 prequel 프리퀄 같은 거군요... 흐음...

  • 2021-03-16 23:32

    仁이랑 연예랑 연결시킨 게 재밌네요.

    연예가 무거워 질 때 仁을 떠올리는 것도 좋을 거 같아요.

    암튼 관계에 대한 얘기니깐.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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