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영화인문학 시즌2> 3주차 : 내.신.평.가 #3 YOUNG AHMED(소년 아메드 2020)

코난(김태승)
2022-10-02 11:17
267

개봉 : 2020.07.30.
국가 : 벨기에, 프랑스
감독 : 장 파에르 다르덴, 뤽 다른덴

내가 선택한 내신평가의 장면은 아메드가 신의 이름으로 이네스 선생을 처단하기 위해 

"신은 위대하시다"를 외치며 이네스 선생에게 달려드는 장면이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기를 위해 노력해주는 선생님과의 악수도,  불경하다는 이유로 또래 여자친구와의 스킨쉽에 괴로워하는, 죽음이 무엇인지 사람을 죽인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는 13살의 어린 소년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깊고 절대적인 신념을 가진 아메드의 행동을 보면서 영화를 보는 동안 무서움을 느꼈다.

 

인터넷과 YOUTUBE가 발달된 지금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고 더욱 무서운 것은 AI, 맞춤형 서비스라는 이름으로 예전에 보았거나 검색했던 정보를 이용해 관련 컨텐츠를 계속해서 보여주며 마치 그것들이 진리인 듯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있는것은 아닐까? 그러한 결과로 진보와 보수의 양극단을 달리고 있는 우리의 지금 모습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에 2층에서 떨어진 아메드가 엄마를 불렀던 장면과 이네스 선생에게 사과를 했던 장면에서는 극한에 다다른 어린소년이인간으로서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준  것이 아직은 잘못된 신념과 사상에 대하여 변화될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라고 생각된다.

 

 

 

.

댓글 4
  • 2022-10-02 19:57

    #세번째영화  소년 아메드>

    다르덴의 다른^^ 영화<아들>  카메라는

    비추는 대상의 뒷모습 , 움직임만으로도

    내면을 보고 심리를 따라 갈수 있었다.

    그런데,

    아메드를 졸졸 따라다니는 <소년 아메드> 카메라는

    정작 아메드의 속내를 없다.

    다큐적 장기를 자랑하던  다르덴의 카메라는

    갑자기 드러냄의 한계를 드러내고,

    나는 아메드의 생각을 읽어낼수가 없었다.

    그래서 영화속 인물의 감정 동화에 특화된 나는

    아메드에게 거리를 두게 되었다.

    감독들은 장기를 발휘하던 카메라의 한계를

    의도적으로 보여주면서 오히려!

    현실의 비가시화된 문제를 보여주려던 걸까???

     

    얼마전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지역모임에서

    진행한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이 있다.

    과정중에 영화 <4> 간추린 장면을 보고

    책임의 파이를 그려보는 시간이 있었다.

    먼저, 각자가  영화에서 문제의 책임 파이를 그려 보고 다함께 얘기를 나눈 ,

    다시 각자의 개인 경험에 비추어 책임 파이를 그렸다.

    속내를 나눈 후에

    참여자들이 꼽은 책임 파이의 절반 정도를

    불평등의 사회 구조( 또는 신자유주의식 경쟁을 부르짖는 정부, 혐오를 조장하고 속삭이는 미디어의 횡포등) 차지했다.

    사건에 직접 연루된 나와 가족 등의 개인적인 책임 말고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진 않는 구조적인 책임 존재들이 오히려 우리 내부에 치밀하게 관여하지 않는가.

    다큐 소셜 딜레마> 보면

    소셜네트워크안에 포획된 우리, 특히 아이들은

    정말 순식간에 무너져내린다.

    어제까지 관심 있던 이성 친구를 대해서

    게시물에 하트를 날릴지

    아니면 직접 말을 걸지 고민하던 아이가,

    과격한 백인우월주의 단체의 선동적인 동영상에 빠져들면서 무력시위에 휘말릴 뻔한 과정은

    말그대로 아찔하다.

    가까이의 신당동 살인처럼 우리는

    도저히 파악할수 없는 공포의 테러 앞에

    몸으로 놓여있다.

    종교적 근본주의자들, 혐오론자들, 광신도들

    세계화와  문화와 자본의 식민지화가

    쓸고간 자리에 그것들이 싹을 틔운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과잉이

    그런 테러나 혐오를 키워내는 아닐까?

    자본의 과잉, 미디어의 과잉, 단선적 관계의 과잉, 정체화의 과잉, 이미지의 과잉, 낙인의 과잉

     

    먹고 씻고 기도하고 글씨를 쓰고,

    그리고 무기를 다루던 아메드의 통통한 <손.

    엄마를 외치던 아메드의 >

    나의 마음이 멈춘다.

     

    손바닥 뒤집듯 너무 쉽게,

    일상과 테러, 피해자와 가해자, 억압과 폭력은

    뒤바뀌고 뒤섞인다.

    당연한 모순마저 희미해진다.

    불안을 삼키며 불안을 키운다.

  • 2022-10-03 19:44

     

     

     

      이슬람 원리주의는 아메드를 살아가게  만드는 강력한 진실이다. 누군가에게 진짜라고 여겨지는 것을 쉽게 가짜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설령 그것이 말도 안되는 팩트 위에 기반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네스 선생님은 아메드가 거짓된 것을 믿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아메드에게 그런 이네스 선생님은 자신이 순전한  무슬림으로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배교자’ 일 뿐이다.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것은 아메드와 같은 원리주의자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아메드가 그대로 원리주의의 길을 가도록 놔둬야 할까?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에서는 아메드는 좀처럼 웃지 않는 소년이다. 그는 사춘기 소년 답지 않게 늘 엄숙하고 근엄하고 진지하며 다른 가족들에게도 그런 삶을 살아갈 것을 요구한다.  그런 아메드가 유일하게 희미한 미소를 보일 때가 있는데 그건 바로 루이즈가 아메드의 볼을 간지럽힐 때다.  그때 나는 아메드가 자신을 웃게 한 그 감정으로  좀 더 달려가길 바랬지만, 아메드는 그러한 감정을 느낀 자신의 모습에 대해 다시 심각한 얼굴이 되어 회개하기 시작한다. 

       영화 안과 밖 모두의 사람들이 아메드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그가 ‘잘못된 원리주의’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잘못’이란 어쩌면 아메드가 진실로 여기고 있는 것들이 아메드를 웃지 못하는 소년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어린 동물들이 전해주는 부드러움, 사람들의 호의, 여자친구의 키스. 어린 소년을 웃게 할 수 있는 것이 세상에  많은데, 그 모든 것을 등지고 심각한 얼굴로 죽음을 향해 달려 가는 모습을 보면서 드는 안타까움의 정서를 우리는 ‘잘못하고 있다’ 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것이 진짜냐고 묻는 다면 그건 가려내기 어려울 테지만, 엄숙함에서 오는 정서들과 웃음에서 오는 명랑함 중에 어떤 것을 더 좋아하냐고 묻는 다면 많은 사람들이 명랑함을 선택할 것이다.  웃을 수 있는 순간이 사람을 낙천적으로 만들고 살아 있는 게 기쁘다는 정서를 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탓에 마무리가 좀 어수선 하다. 그러나 독재나, 종교적 원리주의, 파시즘, 혐오와 같은 것들이 슬픔과 엄숙함, 분노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는 것이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 

  • 2022-10-07 20:08

    소년 아메드 내신평가

     

    마지막 장면 아메드가 2층에서 떨어져 움직이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이 죽이려던 이네스 선생님께 도움을 청한다.

     

    극단주의에 빠지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게해주는 영화. 하지만 주인공이 어른이 아닌 소년이기에 변화의 가능성을 기대.

     

    아메드의 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은 영화를 보는 내내 안타깝게 했다. 하지만 신은 아메드가 더 큰 죄를 짓지 않도록 그를 떨어뜨리셨다. 몸을 움직이지 못 할 정도로 크게 다쳤지만 얼마나 감사한지.. 이네스 선생님께 도움을 청하는 아메드의 모습에서 두 사람과의 관계 또한 회복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너무 과장된 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지금 겪는 불행이 오히려 축복임을 막연하게나마 느끼게 해 주었다고 할까. 

     

  • 2022-10-09 13:53

    내신평가#3  <소년 아메드>

     

    소년에게 종교의식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의무다.

    그건 종교에 대한 그의 믿음에서 우러나온다.

     

    종교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의 문제다.

    따라서 종교는 지극히 개인적인 믿음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서로 다른 것을 믿는 다는 것이 서로를 죽이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건 믿음의 문제를 핑계삼아 속세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편에 불과하다.

     

    소년은 코란을 방편삼아 자신의 선생님에게도 칼을 들이댄다. 

     

    그리고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또한 변화하기도 한다.

    믿음은 원래부터 흔들리게 되어 있다.

    신의 양태들, 즉 자연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란 없다.

    설령 그것이 정신적인 부분이라 하더라도, 신체의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소년은 교정시설에 탈출해 두 번째 칼을 선생님에게 들이댄다.

     

    땅으로 추락한 소년의 몸은 이제 죽기 직전에 이른다.

    그에 따라 소년의 믿음도 달라진다.  

    나의 구원을 위해 누군가를 죽이기 보다는 내가 살기 위해 구원의 손길을 요청한다. 

     

    영화는 소년의 죽음을 보여주지 않고 끝이 난다.

    무엇을 믿을 지는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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