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오브 죽음 4회]자유죽음

김윤경
2022-10-13 13:51
501

자유죽음을 택함으로써 강제된 죽음을 피하다

-자유죽음(장 아메리,위즈덤하우스,2022)

 

 

 

장 아메리, 그의 저작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무겁다. 몇 달 동안 장 아메리라는 인물을 접해보니, 그의 인생을 알아보고 나서 그의 글을 읽어야지 그의 저작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인생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어둡고 무거움이 그의 진정성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저항그 자체였다

장 아메리의 일생은 ‘저항’이란 단어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1935년 9월 뉘른베르크 법이 발표되자 아메리는 독일이 모든 유대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고 판단했다. 1938년 오스트리아가 나치의 제3제국으로 합병되어 26살 젊은 청년인 그는 프랑스어를 쓰는 벨기에로 망명했다. 어머니의 반대에도 결혼한 유대인의 젊은 아내와 함께였다. 그러나 벨기에에서는 오히려 ‘적성 외국인(독일인)’이라는 이유로 추방당해 프랑스 남부로 송환됐다. 그는 1941년 이곳에서 탈주해 다시 벨기에로 돌아와 레지스탕스 활동에 광범위하게 참여했다. 1943년 나치에게 붙잡힌 뒤 브레인동크 요새에서 잔혹한 고문을 당했다. 그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신과 같은 권력을 가진 고문 가해자가 자신의 몸뚱이에 가한 고통은 그에게 평생 사라지지 않는 수치심을 남겼다. 고문의 체험으로 아메리는 세계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고, 그 신뢰를 다시는 회복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죄와 속죄의 저편』(도서출판 길,2012)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고문에 시달렸던 사람은 이 세상을 더 이상 고향처럼 느낄 수 없다. 절멸의 수치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부분적으로는 첫 번째 구타에서, 그러나 전체 범위에서는 결국 고문 속에서 무너진 세계에 대한 신뢰는 다시 얻어지지 않는다. (91)

 

그 이후 게슈타포는 그를 정치범에서 유대인으로 강등하여 아우슈비츠로 보냈다. 특별한 기술이 없었으므로, 아메리는 가혹한 육체노동을 배정받았다. 또 부헨발트로 이송되었다가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로 옮겨졌다. 아우슈비츠에서 인상 깊었던 일화가 있다. 수감자 십장인 유스첵이 사소한 일로 그의 얼굴을 때렸다. 그 순간 그는 그동안 그가 사회에 저항해왔던 오래된 방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방법을 깨달았다. 공개적인 반란 행위로 십장인 유스첵의 얼굴을 갈겼던 것이다. 곧 제압되어 처참하게 얻어맞았지만 그는 그런 자신에게 만족했다. 반란을 위해 힘을 줄 때 그는 ‘신체적’이었고 그것이 그의 존엄성이었다. 수용소에서 그는 지식인으로서의 지성과 정신의 무력함을 느꼈고 신체만이 자아의 모든 것이고, 우리 전 운명이 되는 것임을 자각하게 됐다.

 

1945년 4월 말,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자 벨기에 브뤼셀에서 지내며 스위스에서 발행되는 독일어 신문의 문화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1955년 ‘장 아메리’라는 예명을 쓰기 시작했는데 Amery는 Mayer의 철자를 뒤집어 만든 것이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그의 저항의 표현이었던 것 같다. 또한 그러한 저항은 자신의 글과 작품이 독일에서 출간되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는 것으로도 표현했다. 그러나 한 독일인의 젊은 작가[헬무트 하이센뷔텔]와의 만남으로 그런 거부는 끝이 났다. 독일인 젊은 작가가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로 용서를 구했던 것이다. 아메리는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인간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라고! 나는 내 귀중한 인생을 위해 싸운 것이라고!(267) 이후 둘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그 친구는 적극적으로 아메리를 독일에 소개했다. 덕분에 최악의 가난을 피하고 글을 쓰며 정갈한 삶을 살 수 있었다.

 

1966년 강제수용소 경험을 성찰한 『죄와 속죄의 저편』을 발표하고 1976년 『자유죽음』을 출간했다. 1978년 『자유죽음』의 북토크를 하기 위해 머문 잘츠부르크의 한 호텔에서 수면제를 과다 복용해 ‘자유 죽음’을 택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고유한 몸으로서 인생에 되받아치는 저항을 한 것이다.

 

에셰크‘No’라고 말하며 맞서다

『자유죽음』에서 가장 인상 깊은 개념이 ‘에셰크(e’chec)’이다. 책에 있는 각주 설명으로는 체스를 둘 때 외통수에 걸린 것을 나타내는 단어라고 한다. 돌이킬 수 없이 실패하고 만 것을 적시하는 단어이다. 아메리는 그 ‘건조한 음색’이 마치 도끼날을 맞은 것처럼 뚝 부러지는 분위기를 맛보게 하는데, 되돌릴 수 없는 총체적인 실패의 안타까움을 이보다 더 잘 드러내는 단어는 없다면서 ‘에셰크’를 운명적인 단어라고 한다. 나는 이 에셰크란 단어의 설명을 보고 책 전체에서 언급하고 있는 ‘벽’이 떠오른다.

 

아메리는 자살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으로 ‘뛰어내리기 직전의 상황’을 말한다. 뛰어내리기 직전의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처해있는 자기만의 상황, 이른바 ‘인생 상황’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무어라 말해도 절대 완벽하게 전달할 수 없다. 그것은 사면의 벽들이 점점 좁혀져 오는 좁은 공간 안에 갇혀 있는 것만 같은 상황이다. 머리는 벽들에 마구 부딪혀 마침내 얇아지고 깨진 그 두개골로 벽을 통과해 나온다. 그 벽은 욕지기 나는 인생, 구토를 일으키는 인생 자체의 구질구질함이다. 또 그 벽은 인생의 논리, 생명의 논리이기도 한데 그 모든 상황을 이겨내고 어떻게든 살아내라는 것이다.

 

자살을 결심했거나 자살을 이미 실행한 사람은 자신의 자발적인 능동성으로 자기에게 점점 다가오는 벽에 스스로 머리를 부딪히며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 것이다. 그들은 존재를 강타하며 파괴하는 ‘에셰크’에 인간성과 존엄성을 방패 삼아 맞선다. 그들은 ‘No,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유죽음은 바로 ‘에셰크’에 대한 대답으로, ‘에셰크’를 담고 있는 인생을 겨눈 저항으로서 있다. ‘에셰크’의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반자연적이기 때문에, 자연적인 죽음, 곧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자유죽음을 택하는 것이다. 살아야만 하기 때문에 살아야 하는 인생이라는 것은 없다.

 

뛰어내리기 직전의 그 공간 바깥에서 그들을 관찰하는 사람들이나, 자살 심리학은 근엄한 얼굴로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왜 그러느냐고 타이른다. 과학은 ‘하잘것없는 동기’라는 표현을 쓰리라. 그러나 누가 감히 이를 두고 비웃음을 흘리거나 훈계해도 좋을까? 아메리는 결코 그래서는 안되며, 이에 대해 더불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어둠 안으로 들어와 본 경험을 가진 사람일 뿐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는 자살을 부추기거나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살 당사자의 상황을 당연한 듯 외면하면서, 죽음 이후에는 그래도 끝까지 살아야만 한다고 자살자를 윤리적으로 낙인찍거나 훈계하려는 입장을 비난하는 것이다. 그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자유는 온전히 우리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자살할 뜻을 품은 사람을 둘러싼 정황은 좋지 않다. 이미 자살을 저질러 버린 사람의 상황도 최선의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그들의 선택과 행위 앞에 경의를 표해야만 한다. 그들을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는 데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더욱이 그들 앞에서 우쭐대며 무시하는 행동은 보이지 말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따질 수 있지 않은가. 누가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조리 있게 따지고 들 수 있지 않은가. 이처럼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자유로운 선택으로 우리를 떠나간 사람 앞에 차분하고 침착한 태도로 머리를 숙이고 왜 우리를 버렸냐며 조리 있게 따지는 일이다. (265)

 

나는 지난 몇 달 동안 아메리를 만나면서 아메리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었고 또 그의 따뜻한 마음을 느꼈다. 『자유죽음』을 읽는 내내 니체의 ‘영원회귀’가 생각났다. 니체의 ‘영원회귀’와 장 아메리의 ‘자유죽음’은 전혀 다른 것 같으면서 왜 또 비슷한 느낌이 드는 것일까?

댓글 6
  • 2022-10-13 16:40

    윤경쌤 글 잘 읽었습니다..  아메리를 윤경쌤 통해서 보게 되니, 내용의 무게감과는 별개로 반가운 마음이......

    • 2022-10-14 05:29

      ^^ 감사합니다. 미정쌤 첫 댓글 달아주시공

      나이듦 셈나의 의리가 느껴집니다.

  • 2022-10-14 11:11

    돌아갈 고향이 없는 삶,

    무너진 세상에서 만난 친구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나의 신체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윤경샘, 글 감사히 읽었어요. 

  • 2022-10-14 14:31

    자유죽음!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어떤 결론에 이르든 간에 이제 피할 수 없는 물음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 2022-10-15 16:24


    어둠은 소쿠리로 퍼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정말 그렇다는 생각을 했어요. 새로운 해가 뜰 때까지 기다릴 밖에.. 그러나 내게 어둠이 물러서지 않다는면 그 속에서 눈 감는 것도 선택이라고 받아들여져야 할 거 같아요. 삶만이 강요되는 것도 폭력이지 않을까, 주입된 사고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 2022-10-17 09:20

    아메리의 자유는 저항과 같은 말 같습니다. 저항의 삶을 살다 간 루쉰도 생각납니다. 대신 루쉰에겐 부득이함도 있었던 것 같아요. 아메리책을 읽지 않아서 그의 자유에 백프로 공감은 못보내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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