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하는새벽> -어바웃 (비인간)동물 <습지주의자> 필사를 마치고

보리
2022-06-16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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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잠기고 반쯤 드러난, 생명과 죽음이 서로 용해되는, 섬세하고 풍요로우며 뿌옇고 불가해한,

유동적 지성과 역동적 감성을 상징하는 이 모든 것과 그 이상인 습지.”

 

 

 

앞 장엔 ‘나’로 시작하며 영화감독으로 양서류 생태 통로에 관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작업을 하는 과정을 1인칭 소설처럼 쓰고 다음 무대엔 ‘반쯤 잠긴 무대’를 주제로 팟캐스트의 진행자가 습지에 대한 사랑을 맘껏 소개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소설 형식의 ‘나’는 양서류와 생태 통로를 통해 서서히 습지에 스며들게 하고 팟캐스트는 이래도 습지를 모르겠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느껴보라고 직접 대놓고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작가는 생태학자이며 생명 다양성 재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습하면서도 마르고, 말랑말랑하면서도 단단합니다. 물과 땅이라는 지구의 가장 대표적이면서도 상호 이질적인 물질들이 마법처럼 공존하는 곳입니다. 물과 기름처럼 끝내 섞이지 않는 어색한 대면을 하지 않고, 놀라운 사교성을 발휘해 합작해 낸 상호적 관계입니다. 28p

 

툭하면 노는 땅또는 허허벌판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심지어는 매립하기 위해 존재하는 무엇으로 치는 경향마저 있습니다. 실제로 수많은 습지가, 특히 서해안 갯벌의 눈부신 보물 같은 지역들이 그냥 살처분을 받아 저 밑에 묻혀 버렸죠. 54p

 

물이 흐르고 넘치고 쏟아지고 고이고 다시 마르고. 또 다시 젖고. 이것은 위대한 자연의 물놀이입니다. 이로 인해 물과 영양분이 재분배되고 새로운 삶들이 시작됩니다. 이 멋지고 경이로운 물놀이로 인해 아름다운 서식지, 습지가 탄생합니다. 99p

 

나의 이동을 이토록 편리하게 도모해 주는 이 시설이 그들에게는 완전한 차단을 의미하는 장벽이라는 그 극명한 대조가 불현듯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한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왜 그들은 길을 건너야만 하는 것일까? 굳이 그렇게 돌아다녀야 하나? 108p

 

개구리 한 마리가 연못에서 나오고 있었다. 오늘의 작품은 이 느닷없는 퇴장으로 급히 막을 내렸다. 개구리는 둔덕을 향하고 있었다. 둔덕 너머로는 길이 있었다. 문제의 길. 바로 이렇게 일어나는 것이었구나, 개구리가 길을 건너는 일이. 그냥 저렇게 나와서 가다 보면 들를 만한 무대가 널렸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전혀 다른 무대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까. 114p

 

습지는 물과 흙의 움직임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지만 그 역동성으로 인해 결코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습니다. 습지는 역동적으로 일관됩니다. 197p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동물은 그저 먹기 좋은 것이 아니라, 생각하기에 좋은 존재이다” 234p

 

독특하고 다양한 종이 살려면 아주 비옥한 곳에서부터 아주 열악한 곳까지 광범위한 옵션의 서식지가 제공되어야 합니다. 이런 넓은 서식지 스펙트럼을 구비 하며 끝없이 탈바꿈하는 세계, 다름 아닌 습지입니다. 물과 영양분을 섞고 재분배하고 무수한 교란 작용과 더불어 춤추는 습지는 그 과정을 통해 비옥함과 열악함의 모자이크를 계속하여 직조해 나갑니다. 잘 나가는 자와 별로 그렇지 못한 자가 공존하는 곳. 개성이 넘치고 개인 각자가 다 소중한 여러분에게 필요한 그런 세상이 아니겠습니까. 양지 바르지 못하고 음한 곳이라 치부되는 습지가 창조하는 세상이기도 합니다. 248p

 

흘려 듣기. 그럼 여러분 하나하나가 사람 습지가 되는 것입니다. 흘러 들어왔다 다시 흘러 나가는 것 사이에 있는, 잠시 동안의 머무름. 29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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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쓴다는 것이 넘쳐버린 느낌입니다. 습지라고 하는 곳에 익숙하지 않았고 그 속의 생물들과는 더더욱 친하지 않았던 사람이지만 습지에 가보고 싶게 만드는 책이었습니다. 양서류 생태 통로에 관한 영화를 만드는 설정에서 우리 아파트 앞 공원에 생태 통로라는 동굴 같은 것이 4개나 있어 산책할 때마다 야생동물이 이용할까 생각했는데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1년간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지 몇 번의 리모델링을 거치면서 여전히 공사 중인 상태입니다. 잘 이용할 수 있는 통로로 거듭나길 기대해 봅니다.

 

 

 

 

 

 

습지 생물로 ‘깔따구’라는 곤충에 대하여 읽을 때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참사(?)를 겪고  확실히 깔따구를 알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인공연못에 살던 곤충 중에서 깔따구가 무슨 일인지 아파트 방충망에 까맣게 달라붙고 작은 것은 방충망을 뚫고 들어와 놀라게 했습니다. 미세 방충망 공구를 해서 설치를 하고 연못물은 다 빼고 방역을 해야 한다고 한바탕 소동을 했습니다. 그들의 서식지 가까이에 아파트가 없었다면 수천 마리가 불빛을 보고 날아와서 죽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뒤로는 벌레들이 다시 오진 않아서 하룻밤의 꿈처럼 지나가 버려 더 이상한 현상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상 기후나 환경 오염으로 곤충을 포함한 동물들과 우리 모두에게 위기로 다가오는 순간들이 더 많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아침... 부산한 흔적들을 치우고 차한잔과 혼자 식탁에 앉아 책을 보며 필사하는 시간은 명상과 같은 시간입니다. 한 번 읽고 다시 넘기며 필사할 문장들을 고르기 위해 고민하며 책을 몇 번이나 다시 보게 되는 것 같아 필사한 책들은 더 기억에 남게 됩니다. <습지주의자> 같은 좋은 책을 필사하게 되어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댓글 3
  • 2022-06-16 08:12

    와, <습지주의자> 끝내셨군요.

    저도 이 책의 구성이 참 신기했어요. 반쯤 읽다가 세미나 시작하고 필사는 <두더지잡기>부터 시작했는데

    이제 <습지주의자>도 다시 처음부터 정주행!!

  • 2022-06-16 13:38

    아 방충망에 붙은 애들이 깔따구에요?

    세미나시간에 잘못 알아들었네요.

    전 깔다구가 땅강아지같이 꽤 크고 친근한 곤충인줄 알았어요. ㅠㅠ

  • 2022-06-16 21:14

    보리님의 글도 

    물먹은 도화지에 번진 물감처럼

    마음에 스며들어요.^^

    저는 아직 ‘습지주의자’를 부지런히 읽지 못해서

    초반을 보고 있어요. 

    무대부분도 참 좋은데,

    앞부분( 소설처럼 씌여진)에 공감되는 생각들이 많고

    때로는 삐딱한 작가의 관점이 맘에 들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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