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치약국에 놀러와 5회 고혈압/당뇨/고지혈증편> 후기

김지연
2023-05-05 15:53
258

얼마 전 목동에 사는 동생 내외와 저녁을 먹다가, 그 동네 학구열 얘기를 들었다. 동생 내외는 조카 둘을 학교에 보내고 가정학습지 하나 정도를 구독하는 식으로 교육한다. 그러나 소위 극성스러운 목동 학부모들은 대개 의대 진학을 목표로 초등학생 때부터 사교육에 올인하며 입시를 준비한다고 한다. MZ세대 중심으로 가치관과 라이프스타일이 달라진 시대라더니... 아직도 의사는 사회적 지위와 큰 수입이 보장되는 선호 직업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지금이 21세기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이 책의 제목은 <병든 의료>, 원제는 <Can medicine be cured?>이다. 건강하기 위해 환자가 되기를 강요받는 시대, 의료에서 “의(science)”에만 방점을 찍고 “료(care)”는 소멸된 시대에 의료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었다. 노동자의 날에 급히 읽어서 이해가 부족한 부분이 많았는데, 문탁 샘, 요요 샘, 정의와미소 샘의 시의적절한 인용과 질문, 약사 둥글레 샘과 의사 한수 샘의 전문가적 경험과 견해, 겸목 샘과 봄날 샘의 경험과 의견을 들으며, 마침내(!) 저자의 의도와 맥락을 이해할 수 있었다. ^^

 

이 책의 절반은 크게 3가지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첫째, 공리주의에 기초한 근거 기반 의학의 발전으로 의료는 의학으로 탈바꿈하며 거대하고 나쁜 비밀을 갖게 되었다. 왜곡된 인센티브, 경력주의, 상업주의와의 결탁이 다양한 임상 실험으로 이어져 100명 중 1명에게 성공한 것을 치료 효과를 높였다고, 5일 걸리던 치료를 3일 만에 해냈다는 식의 데이터 쓰레기를 만들고 있다. 이에 따라 정작 상처와 질병으로 고통받는 소수의 사람들은 소외되고 있다. 둘째, 사람이 오래 살게 되면서 고혈압/당뇨/고지혈증과 같은 만성 질환이 늘고 있는데, 이 질병들은 돌봄(Care)으로 해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과 합을 이뤄 급성 질환과 마찬가지로 치료 대상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셋째, 의료가 산업화 되면서 시장 개척과 성장을 목표로 삼으면서 케미컬 기법으로 충분히 치료 가능한 질병을 바이오 기법으로 다시 치료하는 식의 또 다른 “사업 양산”이 반복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주객전도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의료는 환자가 아니라 사업을 위해 연구된다. 임상보다 연구가 중요해지면서, 현장의 전문가는 소외되고 환자는 일상 습관까지 친절하게 물어보며 질병의 맥락을 파악하던 의사를 잃고 있다. 돌봄이 주(主)가 되고 치료는 부(附)가 되어야 하는데, 치료가 주(主)가 되고 돌봄은 부(附)가 되고 있다. 가성비 좋은 명약보다 수익을 보장하는 브랜드 약품이 잘 팔린다. 의료의 패러다임이 “아픔의 치료”에서 “예방과 진단”으로 이동하고, 이에 따라 건강 관리 정보가 과잉 양산되면서 제약회사와 식품회사의 수익만 늘고 있다. 온 세상이 삶을 위해 건강해지기보다 건강 자체를 목표로 살아가는 듯하다.

 

전자제품을 다루는 우리 회사도 이 물결을 그대로 타고 있다. 피지컬/멘탈 관리에 돈 쓰는 소비 행태가 덤벨 경제 또는 힐링 경제라는 메가 트렌드로 자리잡으며, 헬스케어가 미래 수익을 보장하는 성장 동력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냉장고, 세탁건조기, 식기세척기, 공기청정기, 전자오븐레인지, 정수기는 물론이고 스마트홈과 TV 사업을 연구할 때도 건강 관리 기능을 추가하는 것은 기본이다. 예를 들면, 영양 소실을 방지하는 식재료 저장과 조리, 세균까지 관리하는 세척과 건조, 신체 움직임을 센싱하여 정확한 운동법을 보여주는 TV, 일정과 상태에 따라 운동법과 식사법을 안내하는 스마트앱, 적당량 음용량을 알려주는 정수기 등이다.

 

세미나를 하며, 고객과 트렌드를 연구해서 사업을 제안하는 내 일이 의료와 환자, 그리고 고령화되고 있는 수많은 사람의 삶을 소외시키는 데에 한몫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나는 어떻게 일해야 할까? 전자제품으로 무언가를 치료하기보다 건강한 생활 관리에 집중할 수 있는 사업을 발굴하는 것? 우리 회사는 소비자 대상 사업뿐만 아니라 기업 대상 사업도 하니, 건강에 관해서는 소비자 대상 제품보다 약국과 병원 산업이 제대로 운영될 수 있는 솔루션에 집중하자고 제안하는 것? 책의 절반을 마저 읽고, 다음 세미나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더 깊이 생각해봐야겠다. ^^

댓글 2
  • 2023-05-05 16:33

    맞아요! 가전도 디자인과 기능이 추가되면서 너무 고가가 됐어여!!! 신제품 가격 보고 놀랐어요. 이제 삼성이나 LG는 너무 비싸서 뭐든 중국산 사야 할 것 같아 심란해요.... 심란함과 심각함을 다음 셈나때는 좀 누그러뜨릴 수 있을까요? 이런 심란함을 OTT 시청으로 해소하는 것도 찌증나요. T.T

  • 2023-05-05 23:21

    건강이 가장 핫한 상품이자 비지니스가 되어버린 세상, 어떻게 살아야 할까.
    <병든 의료>를 읽으며 우리가 정말 어려운 문제 앞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 너무 오래 살거잖아요.ㅠㅠ
    지연샘의 일과 관련된 고민도 의료화된 삶의 조건이 모든 곳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걸 다시 확인하게 해줍니다.
    책의 뒷부분에서 더 현실에 밀착된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심란함과 심각함, 피해갈 수 없을 것 같다고 각오하며 읽어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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