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오브 대사증후군①]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

인디언
2023-05-03 10:44
357

한 끼 밥을 준비한다는 것은......

-김서령의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푸른역사, 2019년)를 읽고

 

 

 

 

간단히 먹자. 아이들이 아직 어렸을 적, 퇴근 후 급하게 저녁을 준비하는데 남편이 말했다. 딴에는 저녁 준비하느라 너무 힘들게 하지 말라고 한 말이겠지만 난 살짝 부아가 났다. 한 끼 식사 준비가 간단한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그날 밤에 나는 남편에게 이메일을 썼다. “자 지금부터 간단하게 먹어보자. 무얼 먹을지 메뉴를 정한다. 장을 보러 가서 이것저것 재료를 산다. 재료를 다듬고 씻고 썰고... 양념도 준비해야지. 파 다듬어 썰고 마늘 까서 다지고... 블라블라... 그릇에 담아 상을 차린다.” 거의 A4 한 장을 다 채워서 한두 가지 반찬 준비하는 과정을 낱낱이 썼던 것 같다. 남편의 답은 “음......” 이었다. 그 후로 남편이 음식 준비하는 나에게 간단히 먹자는 말은 안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이라면 ‘간단히 먹자’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주재료와 부재료, 양념까지 준비되어 불에 올리기만 하면 되는 밀키트라는 것이 거의 모든 메뉴로 준비되어 내가 먹고 싶은 아침 시간이라도 집까지 배달되는 세상이니 말이다. 장 보고 다듬고 씻고 썰고 하는 과정이 생략된다면? 많이 간단해진다. 그런데도 나는 그건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고 이런 내가 음식에 집착하는 건가 싶어 혼란스럽기도 하다.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는 이런 나의 혼란한 마음에 큰 위로로 다가왔다. 저자 김서령은 나와 반대로 ‘그 까짓 거, 아무거나 먹지. 먹는 게 뭐가 대수라고?’라며 나 같은 사람을 경멸했던 사람이었단다. 그런데 최근 ‘먹는 것 말고 그럼 대수로운 게 또 뭐란 말인가? 쯤으로 180도 가깝게 선회해 버렸다.’고 한다. 별 다른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고 다만 살다 보니 알게 되었다고 했지만 저자에게는 평생 먹는 것을 대수롭게 여긴 엄마가 있었다. 음식을 조리하기도 전인 다듬고 씻고 썰고 갈고 절이는 과정, 그 안에 이미 ‘그까짓 것’이라며 밀어 넣을 수가 절대로 없는, 우주와 생명에 관한 통찰과 애정과 외경이 스며있더라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마른 고추를 손으로 활활 비벼 넣는 것과 방앗간에서 빻은 고춧가루를 넣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를 엄마를 통해 발견하고, 마늘은 나무 도마 위에 나무 칼자루를 거꾸로 잡고 꽝꽝 때려 으깨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라는 것을 스스로 발견한 것이다.

 

 

읽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게 하고 가끔은 책장을 못 넘기고 깊은 생각에 잠기게 했다. 책은 세 편으로 엮여있는데 ‘아득하거나 아련’한 추억의 맛과 ‘고답하거나 의젓’한 깊은 맛들, 그리고 ‘슴슴하거나 소박’한 맛들을 우리네 삶 속에서 예민한 감각과 생생한 비유로 맛깔나게 써내려간 글들이 손에 든 책을 놓지 못하게 했다. 어떻게 이런 어휘들을 쓰지? 정말 딱 맞는 비유네. 어쩜 이렇게 미세한 것까지 놓치지 않을까? 마치 지금 내가 그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내가 저자가 되어 그 느낌을 그대로 느끼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맛은 추억이다! 현재의 나를 돌연 다른 시점으로 공간 이동하게 만드는 아득하거나 아련한 추억들을 가져다주는 음식들, 진달래꽃 화전, 콩가루 국수, 호박 뭉개미, 찔래순이나 취나물 같은 삶은 나물 등등.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여 일생을 종이처럼 하얗고 납작하게 살다 가신 고모의 ‘허쁘게’(기쁘다와 슬프다와 고프다와 아프다를 다 녹여 비벼놓은 말) 산 삶이 눈물나다. 그 고모만 그랬을 리 없는 우리네 역사와 그 역사를 살아낸 사람들.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고모부처럼 사회주의를 선택한 전통적 유교집안의 종손이야기는 아버지에게 들었던 예전 우리 집안 어떤 어르신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저자는 음식이야기를 하며 작가들도 등장시키는데, ‘가자미’와 흰밥이 놓인 밥상에는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살다간 백석을 초대하기도 하고, ‘수박’ 예찬에서는 3백년 전 김성탄과 30년 전 김현과 10년 전 윤택수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수박을 예찬했다면서, 아름다움을 감각하는 인간의 역사는 수박을 통해 그렇게 이어진다고 즐거워한다. 고요하게 집중된 순간 칼을 대면 쩍~ 하고 열리는 ‘솔직하게 담백하게 자족하는 흐뭇함’의 소리에 대해 특히 찬탄하는 저자는 수박 맛에 대해서는 말할 언어를 찾지 못해 말하지 못한다고 한다. 겨울에 나는 수박을 수박이라 여기지 않고 여전히 여름 수박을 그리워하는 저자가 난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감자 이야기에서는 시대별로 감자를 노래한 작가들을 사방에서 불러낸다. 30년대 윤동주(만주), 50년대 권태응(충주), 70년대 권정생(안동). 감자는 수박과 달리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처럼 전혀 찬란하지 않은 덤덤하나 반가운 맛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감자의 역사에는 잉카의 원주민부터 마리 앙투아네트까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얽혀있다.

 

 

여러 사람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결국 저자는 이 책에서 엄마를 그린다. 마당 울타리 아래서 수박냄새가 나는 수박풀을 뜯어 짓이긴 후 엄마에게 냄새 맡게 하며 놀던 어린 시절 수박풀의 냄새를 깊이 들이마시던 그날의 엄마에게 저기 팔짝거리는 여윈 꼬마가 제발 큰 기쁨이었기를 바라는 저자. 나는 여기에서 멈추었다. 울 엄마에게 나는 언제 기쁨이었을까? 쑥을 뜯으며 엄마를 생각하는 그녀. 매일 아침 엄마의 국을 끓이는 지금의 나는 엄마에게 무엇이면 좋을까?

 

 

마당에 누운 주목 아래서 달래가 돋아난다. 엄마는 마당에 나갔다가 달래를 몇 뿌리 뽑아 들어오신다. 어떤 때는 계란말이에 송송 썰어 넣고, 다른 때는 표고버섯밥을 해서 달래장을 곁들이기도 한다. 순전히 달래장을 위해 표고버섯밥을 한 것이다. 그러다 달래장을 좋아하는 딸이 생각난다. 엄마의 달래는 나를 통해 딸로 이어질까나?

 

 

딸이 떠오르니 얼마 전 느닷없이 토하젓을 찾던 딸이 생각난다. 모르긴 해도 아마 할아버지의 일기를 타이핑해서 자료로 만들다가 할아버지가 좋아했던 토하젓이 생각났을 것이다. 유난히 할아버지와 잘 통하고 할아버지를 좋아했던 딸. 저자의 아버지는 4·3 항쟁이 다 끝나기 전 제주에서 먹어본 고구마 맛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었다고 했다는데 우리 아버지는 짭짤한 젓갈, 그 중에서도 토하젓을 참 좋아하셨다. 역시 맛은 추억이다!

 

 

이제 막 한 살이 되어가는 손자부터 구십에 가까운 엄마까지 함께 살게 된 지금 한 끼 밥을 위해서 쓰는 시간이 생각보다 많아졌다. 하루 종일 메뉴를 구상하고 재료를 챙기고 밥 먹을 사람들의 기분을 살핀다. 매콤한 게 나을까? 슴슴한 게 좋을까? 요즘 바지락이 제철인데 면 좋아하는 며느리에게 파스타라도 해주면 좋겠지. 그럼 엄마는 바지락 미역국으로? 이런 시간들이 좋으면서도 힘겹다. 힘겨우면서도 좋은 감정이 남아있는 건 무얼까? 이 책을 읽으며 발견했다. 정성! 그래 맞아, 그거야.

 

 

저자는 남들에게 저렇듯 헛된 정성을 바치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이든 지금은 우습게도 정반대가 되었다며, ‘인간이 제 안에서 뽑아낼 수 있는 최대 가치는 정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단다. 저자 말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애정을 눈앞에 구체화하는 방법이 정성이고, 정성이 일상으로 구현되는 것이 음식이다. 내가 밀키트를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 바로 이것이었다. 내가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식! 유가에서 말하는 경(敬). 우주 만물 앞에 고개를 숙이고 정성을 다하려는 마음가짐.....

 

 

댓글 7
  • 2023-05-03 11:15

    읽어야지, 읽어야지 마음만 먹고 다른 일들에 밀려났던 책인데, 인디언님 리뷰를 읽고나니 이번 연휴에 이 책을 읽어야겠어요. 어제도 대충 때웠는데, 오늘 저녁은 다른 마음을 먹어봐야겠어요. 메뉴가 카레인데, 그래도 뭔가 마음을 담을 수 있겠죠?

  • 2023-05-03 12:04

    저도 간단히 먹는 거 좋아하는데, 정성 없는 음식은 싫어요. 이거 모순이죠?
    우리 먹는 이야기한 번 해봐야 해요. 전 이거 되게 중요한 문제인 것 같아요~~

  • 2023-05-04 13:23

    문탁 공부방 식구들이 1박2일 프로그램을 하기로 했는데 인디언샘이 준비팀이에요.
    오늘 모여서 이야기하던 중에 인디언샘에게 "밥? 간단히 먹어요"라고 했다가 참석자들로부터 A4 1장 분량 메일 받고 싶냐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하하하 그말 듣고 깜짝 놀라서 없던 말로 하자고, 메일 보내지 마시라고 했네요.하하하
    간단(혹은 소박함)과 정성이 충돌하는 것도 아니고 양자택일도 아닐 터인데..
    현실에서 균형과 중도를 실현하는게 쉽지는 않아 보이는군요.^^

  • 2023-05-05 18:02

    간단히, 정성스럽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볼께요 ㅎㅎㅎ

  • 2023-05-07 00:10

    얼마전 남편이 국냄비에 멸치 육수 내는 것을 보더니 꼭 육수가 필요하냐고 그냥 맹물에 하면 안되냐고 묻더라구요.
    요즘 남편이 설거지를 많이 하는데 커다란 냄비까지 씻으려니 힘들다고 ㅋㅋㅋㅋ
    '간단하게' 다시다 넣고 하는 방법도 있다고 했지요.^^

  • 2023-05-08 12:28

    제목만큼, 음식에 대한 감정과 감각을 생각케 하는 글이네요, 인디언샘의 요리가 그래서 또 그리운~ㅋ

  • 2023-05-10 18:33

    인디언샘 만능 양념장 덕분에 저는 요리를 쉽고 빠르게 할 수 있게 됐어요. 맛은 더 좋아졌구요.
    인디언샘의 정성 덕분에 제가 편해진 거예요.

    간단해진거 같지만, 그 간단함 속에 타인의 정성이라는 비밀이 있죠.
    인디언샘 만능장은 시중의 밀키트와는 비교불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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