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개의 고원> 7회차 후기_ 1947년 11월 28일

관리쟈
2022-05-05 23:53
182

기관없는 신체, 앞에서 불쑥불쑥 나타나니 답답하다고 6장으로 건너뛰었다.

제목에 당당히 박아놓은 저 날짜, 기관없는 신체를 선언한 날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저 날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찾아보다가 일단 포기했다. 후기가 급하니..

이거하다 저거하다 적어도 오늘의 내 신체는 기관없는 신체이다.

기관 없는 신체는 Corps sans organes, 약자로 CsO라 한다. 저 말을 선언한 사람은 초월적 전위예술의 시조라 불리는 앙토냉 아르토이다. 아르토는 프랑스 사람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고, 잔혹극이라 불리는 연극 형식을 주창하였다고 한다. 이 두 사건은 CsO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푸코의 정상성/비정상성 비판에 영감을 준 사람이 이 아르토라고 한다. 사회가 이런 식으로 경계를 나누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잔혹극은 잔혹한 세상을 치유하기 위해 신체를 잔혹, 혹은 혼잡의 극한으로 밀어붙여 순수한 영혼을 찾게 해준다, 이런 내용인 것 같다. 고대 광란의 제의 형식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니 이해가 좀 되는듯도 하다.

정상/비정상같은 경계의 확정, 즉 규정성은 '기관'이라 불리는 것들로 구성된 신체, 유기체에 대응된다. 그렇다면 기관 없는 신체란 어떤 신체인가? 아무 규정성 없는 신체, 사회 등은 존재가능한가? 물론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아르토가 이 용어를 사용한 글 제목이 “신의 심판을 끝장내기 위하여”이다. '신'이 정해준 규정성에 반기를 드는 것이 CsO와 관련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하나의 기관으로 확정된 것, 신이 정해준 이름과 기능, 그것을 버리고 다른 기능을 가져보겠다는 선언이 CsO인 것이다.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신체의 변용이다.

그런데 신체의 변용이란 개념은 생산적인데도 불구하고, 그 예를 마조히스트의 신체같은 잔혹한 예를 들어서 우리를 당혹시켰다. 이는 아르토가 잔혹의 끝에서 치유가 일어난다고 본 것을 가져온 것도 같은데, 아마 CsO의 위험성을 말하기 위해서인가 추측해본다. 어떤 위험성일까? 위험하면 시키지나 말것이지ㅠㅠ

다른 신체 되기를 생각해보면, 이 신체에서 저 신체로의 변용 중간에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어떤 상태가 있을 것이고 그것이 CsO이다. 또한 신체의 고통 끝에서 정신의 치유가 일어난다면 신체와 정신은 어떤 연속성 속에 있는 것이다. CsO에서 어떤 신체 또는 어떤 정신으로 방향을 잡을지는 무엇에 달려있을까? 들뢰즈는 변용하는 힘(강렬도)의 분배와 욕망을 말한다.

강렬도가 클수록 기관은 고정된다. 만일 유기체의 강렬도가 10(극한)이라고 가정해보면 CsO는 강렬도의 재분배가 일어나는 시점이므로 강렬도는 0라고 볼 수 있다. CsO=0는 강렬도의 재분배가 일어남을 시사할 뿐이다. 그리고 무수한 욕망이 들끓는 시점이기도 하다. 밥먹는 용도로 사용하던 팔을 걷기의 용도로 바꾼다면 그 바꿈이 얼마나 어떻게 일어날지는 강렬도와 욕망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런데 예로 든  마조히스트는 두 국면의 CsO를 갖는다. 꿰매기와 채찍질. 꿰매기는 기관의 구분을 허물어 하나의 피부로 만드는 것이고 채찍질은 그 위를 다른 욕망이 지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국면을 나눈 이유는 이러하다. 구분은 없앴는데 생성의 욕망이 안생긴다면? 위험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들뢰즈가 말하고 싶은 것은 기관을 없애라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라는 환상을 버리라는 것이다. 유기체는 신의 판단이고 일자적 사유를 의미한다. 나아가 마조히스트처럼 도중에 멈추면 실패한 CsO이고 이는 외부적 쾌락에 자기 몸을 맡기는 것이니 자기 신체의 내재적 변용이라고 할 수도 없다.

들뢰즈는 아르토의 개념을 빌려오되 그 CsO를 하나로 다시 규정하려는 위험을 경고하는 것 같다. 실제로 우리는 매일 CsO을 겪지만 그 또한 성공과 실패의 양 극 사이 어디쯤에서이다. 다른 신체 되기에 성공하려면 멈추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도 같다. 적당한 국면에서 끝내면 파국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아르토식으로 말하면 잔혹연극은 연극이 연출되는 그 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광기에 빠져들어야 하는데, 광기를 통해 새로운 신체의 탄생으로, 영혼의 치유로  나아갈 수 있다. 만일 팔짱끼고 소란함을 관찰하는 관람자에 머문다면 그는 치유대신 불편함만 느끼게 될 것이다.

다시 읽어보며 눈에 들어온 것은 무엇보다 이 장의 제목이 “CsO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CsO는 무엇인가를 묻지 말라는 말이다. CsO는 논리적으로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인데, 실제 말하고 싶은 것은 CsO를 (지속적으로)만드는 실천을 할 수 있는가이기 때문이다.

 

기관 없는 신체에서 표류하다가 다시 앞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다음 시간에 3장을 읽는다 했지요?

댓글 5
  • 2022-05-06 08:20

    샘의 후기 읽으니 기관없는신체가 좀 쉽게 느껴지는군요 ㅋㅋ..

    함께 읽어서 다행^^

  • 2022-05-06 08:40

    우왕…후기에서 뭔가 알아듣고 있는 나ㅋㅋ

    이따 뵐게요^^

     

  • 2022-05-06 09:11

    그 연도, 아르토가 뭐 한 날이라고 책에 나오지 않나요?

    아마 아르토 죽기 직전일텐데... ㅋㅋㅋㅋㅋ

     

    글구 저는 축자적으로 해석하면 '기관없는 신체' 맞는데, 늘 세미나나 강의할 때는 유기체화하지 않는 신체.... 이렇게 말합니다. ㅋㅋ

    모두 홧팅!!!

    • 2022-05-06 09:34

      그게..연도가 달라서 말이죠. 신의심판을 끝내기 위해서는 1948년이니까요..그런데 고흐의 자살을 사회적 타살이라고  분노하며 쓴 책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본다>를 쓴 연도가 1947년이라 이거 확인해보고 싶었거든요. 마침 비마이너에 이 책 소개도 있네요. 탈시설 관련 텍스트로..쌤이 한번 읽어보시고~~♥~~

      • 2022-05-06 09:47

        고흐의 자연을 다시본다...이책이요? 이거 저 있어요. 읽었구요^^(제가 또 고호를 좋아하는지라^^)

        비마이너에 소개된지는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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