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태의 세계> 뒷부분 후기

띠우
2022-07-15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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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태의 세계> 뒷부분(5장~9장)을 지난주에 읽었다. 아렌트의 의지를 둘러싼 해석이 논리적으로 모순이라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아렌트가 아이히만에서 시작해 마지막에 이르면 정치의 조건을 복수성을 가지고 이야기하는데 이 과정을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모르겠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 푸코에 이르기까지 선택과 의지, 권력과 폭력을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해간다. 그리고 고쿠분은 마지막에 비자발적 일치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순수한 의지나 자발성이 없다는 이야기를 굳이 아렌트의 정치에 대한 정의를 가져와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다고 하지만 개념을 모르면서 그 정리를 따라가는게 쉽지 않았다.

언어의 역사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중동태와 관련된 동양철학의 ‘세(勢)’ 개념이다. 자연의 기세라는 말로도 표현되었는데, 자연스러운 발생에서 시작해 어떤 상태가 되어가는 모습을 표현하는 듯하다. 주체가 등장하는 능동/수동 대립의 언어에서 이러한 사유는 어려울 것이다. 당장 주어가 등장하니 말이다. 과거의 사건이란 개인이 아닌 공동체 속에서의 맥락 속에서 표현되었을 것이기에 개인이 아닌 집단의 행위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행위를 주어로 생각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사유의 중심이 고정된 것이 아닌 변화하는 기운이라고 봐도 될지 모르겠다. 맥락 속에서만 파악되는 언어가 중동태의 언어인 듯하다. 역사 안에서 언어의 흔적은 사유의 변천과 밀접한 연관을 보여줄 것 같다.

이어서 저자는 하이데거의 내려놓음(방하), 들뢰즈의 사건, 스피노자의 자유를 다룬다. 고쿠분은 이들에게서 중동태가 억압당하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저항한 움직임을 포착하려고 한다. 아렌트는 하이데거가 초기에는 니체를 긍정하고 그의 사상을 시대에 맞고 고안하려 했다면, 후기에는 니체가 사유하지 않기에(망각) 존재망각의 극단이라면서 비판하게 된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이때 ‘내려놓음’을 사유하고 있다. 이 내려놓음은 능동성과 수동성의 구별 바깥에 있는 것이다. 이는 ‘내려놓음’이 의지 바깥에 있다는 의미다. 고쿠분은 후기 하이데거의 글에서 중동태적 표현을 발견하는 듯하다.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학>은 사건의 철학을 정초한 텍스트라고 한다. 여기서 그는 ‘존재는 어떻게 말해질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들뢰즈는 하나의 명제 안에서 읽어낼 수 있는 관계로 지시(실증주의), 표시(현상학), 의미작용(구조주의) 이렇게 세 가지를 드는데, 그와 함께 사건을 표현하는 것은 그 세 가지와도 다른 네 번째 관계, 즉 의미라 불리는 관계라고 한다. 사물의 표층에서 일어나는 비물체적인 것으로서의 사건, 그 사건을 명제 차원에서 표현하는 ‘의미’, 바로 이것을 탐구하는 것이 ‘의미의 논리학’이 된다. 그리고 “의미는 혹은 표현되는 것은 그것을 표현하는 명제 바깥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표현되는 것은 그 표현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 의미와 사건은 동의어가 된다. 사건이란 물체와 물체가 접속해 계열화되었을 때 그 표면에서 발생한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이때 사건은 능동적이지도 수동적이지도 않다. 이 사건은 동사에 의해 표현된다. 들뢰즈가 동사를 중시한 건 프랑스어 문법으로 보면 동사의 부정법을 중시한 것이다. 부정법의 특성상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단어로, 문장 속에서의 기능으로 정의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서 중동태와 상통하는 개념은 내재원인이다. ‘존재하는 모든 만물은 신의 능력을, 만물의 원인인 신의 능력을 일정한 방식으로 표현한다(에티카 1부정리36증명)’에서 표현개념은 내재원인 개념을 도입하기 위해 필요하다. 아감벤은 ‘양태적 존재론’이 능동/수동의 싸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중동태적 존재론’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은 자극함과 동시에 자극을 받음으로써 어떤 생태로 생성된다는 중동태적인 과정 속에 있다. 중동태적 과정은 ‘질의 차이’를 갖는다. 동일한 자극을 받아도 사람들은 다르게 반응한다. 이 반응이 양태가 변양하는 능력이다. 변양이 우리의 본질을 충분히 표현한다면 능동으로 외부의 본질을 더 많이 표현한다면 수동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완전한 능동이나 순수한 능동일 수는 없다. 외부원인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우리가 자기안의 감정과 욕망을 명료하게 인식한다면 그것에 일방적으로 휘둘리지 않고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는 능동과 수동이라는 표현보다 자유와 강제라는 표현을 더 적극적으로 내세운다. 그에 의하면 자기본성의 필연성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은 자유롭다. 우리가 중동태하에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에서 자유로 나아갈 수 있다. 중동태의 철학은 자유를 지향한다.

9장은 멜빌의 작품 <빌리 버드>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능동과 수동, 행위와 의지, 책임등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선악에 대해 덕으로 사회유지를 하려 했던 비어 선장의 모습속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자유를 추구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중동태의 사유를 밀고나가면 결론에 덧붙일 이야기가 떠오를 수 있을까. 마무리하면서 <빌리 버드>를 단순한 이야기 독해가 아닌 삶의 조건과 자유의 문제로 소설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예술작품이 시대를 넘나드는 것은 이렇게 새로운 해석으로 살아날 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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