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고원} 5장 두번째 후기

관리쟈
2022-10-23 20:56
297

5장의 제목이 몇 가지 기호 체제에 대하여이지만 실은 기표작용적 기호체제와 후-기표작용적 체제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하고 있다. 기표작용적 기호체제는 언어적-정신분석학적-구조주의적 기호체제이다. 언어적이며 기호적인 구조가 세계의 전부라는 건  표상하고 해석해주는 전제군주적 체제나 마찬가지이다.  기표작용적 기호체제의 의미화는 개별 주체들을 모른다.

후-기표작용적 체제는 그에 대한 반동이다. 그러므로 전제군주적 기호체제로부터 얼굴을 돌리는 배신을 해야 나타난다. 기표가 의미생성을 하는게 아니라 “주체화라는 독특한 기법을 통해 정의된다”는 것이다. 이 장의 제목인 기원전 587년과 서기 70년은 바로 유대민족의 주체화 체제의 시작 시점을 표시한다. 두 기호체제의 다이아그램은 이미지도 용어도 모두 다르다.

 

기표작용적 기호체제   후-기표작용적 기호체제

기표작용적 체제는 의미생성의 중심이 있고 원환적이다(왼쪽그림).

반면 주체화체제는 한 점으로부터 시작해서 선형적이다. 1번의 주체화 점은 저 가운데 기표작용적 체제(점선)에서 얼굴을 돌리면서 시작된다. 유일한 얼굴이었던 중심군주로부터 얼굴을 돌리는 것은 기표의 의미화라는 구조를 벗어나는 것이다. 얼굴은 말하는 주체의 것이 되고 언표행위의 주체가 생성된다. 그러나 두번째 얼굴을 돌리므로서 재영토화된다.

들뢰즈에게 언표(행위의 주체)라는 용어는 기표라는 용어의 대체물로 보인다. 기표-기의 구조에서는 언표행위를 하는 주체가 없다. 있다면 오직 군주라는 대타자뿐이다. 선형성이 의미하는 것은 얼굴을 돌렸을 때 보이는 다른 누군가가 있으며 오직 그 옆지기만 있다는 것이다. 그 옆지기는 언표의 주체이다.  그리고 언표행위의 주체와 언표의 주체는 포개진다. 이 과정(3-5-4)이 반복되는 것은 언표행위의 주체가 언표의 주체로 되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공명, 또는 독신자에게서 내 의식의 이중화와 공명)

여기서도 탈주선은 봉쇄된다. 기표작용적 기호체제에서 유일한 언표의 주체였던 군주를 대신해서 내 의식 속의 나, 또는 정염적 커플이 언표주체를 대신하므로써  사실 도주선은 지층에, 선 위에 머물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체화의 기호체제에서도 언표된 규범이나 보편명제에 대한 자기 검열을 통해 언표행위주체인 나를 언표주체에 겹치는 방식으로 예속화되기 쉽다는 것이 들뢰즈의 설명이다. 이는 인간, 인간적 지층에 머물러서 그럴지도 모른다. 들뢰즈가 언어제국주의를 비판하는 배경에는 인간중심주의로는 어떤 탈주선도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언어 너머에 다양한 배치물이 있다. 아니 언표행위조차도  언제나 배치물을 갖는다. “의미생성 또는 주체화가 어떤 배치물을 전제하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269) 그러므로 어떤 기호체제로부터의 탈주선은 배치물을 변형시키지 않는한 성공하기 어렵다. 주체화마저 예속화에 머물게 된다.

우리는 기호체제를 필요로 한다. 그 기호체제를 기표작용적, 또는 후-기표작용적 체제가 아닌 방식으로 만들 수 있는가? 이 부분을 말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어떤 기호체제도 단일하게 쓰이지 않는다는 것, 언제나 혼성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표작용적 기호체제를 특권화하는 언어학이나 정신분석학적으로 세계를 볼 수는 없다. 참고로 이런 논의를 위해 들뢰즈는 내용-형식 대신 내용-표현을 대응시키는 이중분절을 갖고 온다. 표현의 층위인 언어나 심리 부분은 내용으로부터 독립적이 될 수 있으며 기표제국주의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환상이다. 표현의 층위 또한 언어, 심리가 아닌 기계적 배치물로 구성된다.)

또 하나는 혼성적 조성은 언제나 잉여, 여백이 있으며 따라서 변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변형은 언표행위, 표현의 층위에서는 주체화의 도식에서 보듯 언제나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내용의 층위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기호체제는 언어 이상의 것이며, 언어 이하의 것이다.” 내용을 형식화하는 배치물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추상기계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한다. “서로 전제되는 두 형식들-표현과 내용-을 동시에 설명하는 어떤 것에 이르러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추상적인 기계이다.”

추상기계는 표현과 내용을 구별하지 않는다. 어떤 질적 속성도 갖지 않는 입자 수준의 접속물, 기계이기 때문이다. 기호체제로 굳이 말하면 도표(다이아그램)적이라고 한다. 도표는 실재적이면서도 영토화되지 않으므로 내용도, 재현도 아니다. “오히려 추상적인 기계는 선도적인 역할을 한다.” 대체로 들뢰즈는 생성의 증위에서 논의를 전개하는 것 같다. 추상기계는 절대적 탈영토화이므로 ‘추상’이지만 언제나 생성의 와중에 있으므로 ‘실재적’이며, 배치물과 배치의 변형을 통과하므로 ‘기계’이다. 그러므로 추상기계는 존재론적으로 양면성을 지닌다. 한 발은 영토화가 진행되는 지층에, 다른 한 발은 절대적 탈영토화의 고른판에 있다.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말은 '추상기계는 지층의 내부에서, 가장 탈영토화된 첨점에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기표작용적 기호체제와 후-기표작용적 기호체제의 다이아그램을 보면서 그러니 어쩌라고? 묻는다면, 아마 저 끝의 도주선을 다른 지층으로 향하게 할 새로운 기호체제는 어떤 것인지 묻는 것과 같을 것이다. 화폐-기호 체제가 기표작용적 기호체제였다면 복이나 무진장은 아마도 어느 지점에서는 추상기계일 것이다. 물론 언제나 다시 재영토화될 수 있지만.

댓글 2
  • 2022-10-24 09:37

    추상기계가 도대체 뭔지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복이나 무진장의 예를 드니 조금 알 것도 같네요.

    같이 읽어가는 친구들 덕분에 읽기라도 하네요.

    고맙습니다~

  • 2022-10-24 18:59

    감사한 마음으로 후기 읽겠습니다. 

    강독하는 시간에 알아듣는 그 티끌이 언젠가 뭉텅이가 될 날을 기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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