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멸감 후기

하현
2022-10-13 17:57
195

 

5박 6일 교육캠프를 담당하는 실무자였던 시절. 저녁까지 강연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강연이 마무리되면 이후 일정에 대해서 내가 그 날 밤과 다음 날 아침에 대한 공지를 하기로 했었다. 강연이 한창 진행 중인 시간에 함께 캠프에 참여한 네트워크 단체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강연이 끝난 줄 몰랐다. 부랴부랴 강연장으로 들어가니 실무자 단체 대표가 공지를 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울구락불구락해져 있었다. 공지를 마치고 그는 나를 보더니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스탭방으로 불려갔다. 그는 쿵쿵거리며 스탭방으로 들어가 다리를 꼬고 의자에 앉아 기대더니 책상과 벽면 틈 사이로 나보고 서라고 했다. ‘강연이 끝나가는 줄 몰랐어?’, ‘뭐하고 있었어?’, ‘너는 너의 역할이 뭔지 몰라?’, ‘내가 너한테 어려운 일을 시켰니?’, ‘어디가 정신을 빼고 다니는 거야?’ 그의 쉴새없는 질문과 닦달과 분노는 스탭방문과 창문을 넘어 모든 참가자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우렁차게 퍼져 나갔다. 모든 사람들이 대표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지나갔다. 사람들의 시선에는 나에 대한 연민도 있었지만, 너는 왜 그러고 사냐 하는 시선도 있었다. 나는 한동안 벽 모서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부끄러웠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리고 한 대 맞겠다 싶었다. 두렵고 치욕적이었다. 20년 전의 일인데, 그 일은 지금까지 생생하다. 그가 했던 말과 태도는 또렷하게 몸에 기억되었다. 그렇게 행사를 치를 때면 대표인 그에게 혼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 했었다.

 

정혜신 박사가 말했다. 내 마음의 CPR이 필요할 때는 모욕감과 모멸감으로 인해 소멸해 나갈 때라고. 타인으로부터 존재가 부정당해지고 희미해지고 점점 소멸해나가면 결국 스스로도 자신이 소멸해나감을 알고 그 끝을 죽음으로 내 몬다고 말이다. 심정지가 되면 심장에만 주목한다, 어떻게든 심장을 살리고 심장을 지키려 노력한다. 마찬가지로 심리적 CPR은 내 마음에 집중해야 한다. 사회구조적, 인간관계적 문제는 두 번째이다. 일단 나를 지키고 나를 살리고 난 후, 어떻게 다시 살아갈 것인가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감정은 아주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다. 매사가 일희일비한 나에게 감정은 아주 사소하면서도 은밀한 것이라 생각했다. 편견, 혐오, 수치심 그리고 모멸감 따위는 나의 개인사에서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자존감이 높아지고 스스로 사랑하면 될 일이라고 여겼지만. 3개월간 감정의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떠오르는 각 종 감정의 키워드는 사회구조적이고 아주 체계적이며 조직적으로 운영되어 왔다는 것이다. 모멸감을 주고 싶지 않을뿐더러 받고 싶지 않은 나와 우리는, 편견, 혐오, 수치심 등에 대해서도 가족, 친구, 지인, 직장동료, 이웃주민 등에게 쉽게 주고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여기에 대한 편안함과 안정감으로 우리 자장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지도 모른다. 관심이 있다면 보일 것이다. 보이기 시작하면 관계를 맺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소통이 일어날 것이다.

 

댓글 5
  • 2022-10-13 20:10

    관심이 있다면 보일 것이다는 문장이 크게 보이네요!! 후기 잘 읽었습니다.

  • 2022-10-13 20:13

    "감정을 사회적인 지평에서 분석하고 역사적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마음의 습관들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을 지배하는 감정의 덩어리들을 폭넓은 시선으로 조망하면서 상대화하기 위해서다."( 모멸감. 36쪽)

    당연시되는 감정이 사회문화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것을 알아차리기에서 부터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 2022-10-13 20:40

    헐. 실무자 단체 대표 꼭 저런 공개적인 닥달의 방식으로 해야 했나 싶네요. 저것이 바로 저자가 말했던 '모욕' 아닌가요.

    뭔가 마지막에 무지개처럼 펼쳐지는 긍정예언 같은 마무리 ㅎㅎ 우리는 관심이 생겼으니 계속 살펴봅시다! 

     

     

  • 2022-10-13 21:42

    마음의 cpr 인상적이네요~ 하현님 목소리가 함께 지원되는 조용히 강렬한 후기?^^ 

  • 2022-10-14 22:10

    오늘 감정 문제를 타고난 정신적 문제나 질병으로 생각하는 경향도 강하다고 느꼈어요- 사회구조적이고 채계적인 문제라는 깨달음이 더 중요한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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