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 13주차 (버틀러, <비폭력의 힘> 전반부)- 발제/메모

문탁
2023-05-17 13:45
309

1.
우리 때는 체력장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저는 체육을 아주 잘하는 여학생이었지만 유독 약한 분야가 있었는데 바로 오래 매달리기와 수류탄던지기였습니다. 특히 수류탄던지기는 대학에 들어가서도 콤플렉스로 남았습니다. 왜냐? 화염병을 던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던지면 ‘적진(敵陣)’이 아니라 '아군 진영'에 떨어질테니까요.  (그래서 선두의 남성과 후방의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도가 생깁니다.  <1987>에서도  투쟁현장에서 어쩔줄 모르는 김태리를 구해주는 게 강동원 아닙니까? )

 

 

 

 

그게 기분 나빠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항은 ‘대항폭력’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게 ‘라떼’ 좌파의 상식이었으니까요. 혁명은 모름지기 맑스 선생님과 레닌 지도자의 혁명이론에 따라,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영도’하에 폭력을 통해 권력을 탈취하는 것이었습니다. 비폭력은, 그건 쁘띠 부르조아 개량주의자들의 나이브함에 다름 아닌 것이었죠.

나중에 생각합니다. 혁명 이후의 스탈린체제가 스탈린이라는 사람 때문에 비롯된 것이었을까? 그것은 혹시 다른 ‘통치성’을 발명해내지 못한, 다른 정치적 경로를 상상할 수 없었던  맑스주의의 무능력 때문 아니었을까?

 

 

2.
운동을 그만둘 즈음, 저의 고민은 어떻게 사회적 해방과 개인의 구원을 함께 사유할 수 있을 것인가, 였습니다. (맥락은 블라블라 좀 깁니다) 어쨌든, 그때 제가 발견한 인물이 ‘간디’였습니다. 그는 위인전에서 재현되는 '따분한' 성인이 아니었고 매우 복합적이지만 상당히 창조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저는 흔히 비폭력 불복종으로 번역되는 ‘사티아그라하’에 대해 이렇게 썼었습니다.

"따라서 ‘사티아그라하’는 단순한 정치적 불복종, 지문찍기를 강요하는 영국 지배에 대한 정치적 저항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 정신적 고결함을 파괴하며, 인간관계의 평화를 깨뜨리는 모든 폭력에 대한 불복종이었다. 그것은 영국을 향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스스로에게 하는 “맹세”이기도 했다. 나부터 한없이 고귀해지겠다는, 나부터 한없이 낮아지겠다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맹세”!" (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10516021001)

 

 

 

 

 

 

3.
세상에나, 버틀러의 책에서 간디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물론 버틀러는 간디의 사티아그라하의 힌두교적 맥락에는 전혀 주목하지 않습니다. (푸코가 이란혁명을 높이 평가하면서 종교/영성에 주목하는 것과는 좀 차이가 나지요) 하지만 간디의 사티아그라하를 단순히 개인적이고 도덕적인 윤리가 아니라고 포착한 점은 뛰어납니다. 저항적인 정치적 실천으로서 ‘사티아그라하’ 혹은 ‘비폭력’! 그것은 어쩌면 서구 근대 정치철학을 완전히 다시 쓰는 것을 통해 가능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프랑스혁명을 넘어야 하는 것이고 러시아혁명을 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버틀러가 담론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은 '적'이 아니라 우리, 맑시스트 좌파입니다.

 

 

 

이런 포스터 어떻게 봐야 할까요? ㅎㅎㅎ

 

 

4.
버틀러 두 번째 책이고, 우리나라에 번역된 버틀러의 가장 최근의 책이고 (팬데믹 책이 나왔다고는 하는데 번역이 아직 안 되었죠) 1학기 양생프로젝트 마지막 책입니다. 저는 버틀러를 읽으면서 ‘연대란 무엇인가’ 혹은 ‘간디와 버틀러, 비폭력의 상상력(판타지)’이라는 두 개의 글감을 발견했습니다. 언제 시간이 되면 한번 써보고 싶네요. 여러분은 뭘 써보고 싶으신가요?

 

 

5.
이번 발제는 둥글레와 묘선주샘, 메모는 B조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6월3일에는 세미나를 30분 일찍 시작하고 싶은데 가능하실지요? 이번주 토욜 모여서 이야기해봐요)

댓글 9
  • 2023-05-19 11:54

    원문 올려요

  • 2023-05-19 22:08

    버틀러는 자기방어로서의 폭력옹호론과 개인주의적 윤리를 비판하며 ‘자기’에 해당하는 것이 누구이고, ‘자기’는 어느 정도까지 포괄적일 수 있는지를 묻는다. 버틀러가 그동안에는 인간의 사회적 상호작용(수행성)과 언어, 담론적 차원에 무게를 두고 성(섹스/젠더)과 권력 관계를 설명해왔다면, 최근 저작들에서는 상호의존적으로 구성되는 신체성을 사유하고, 인간 너머의 관계까지 고려한 존재론과 비폭력 정치를 상상하고 있다고 봐도 될까? (“평등주의적 상상계의 맥락에서 비폭력의 에토스를 펼치고자 할 때 인간중심적 개인주의 비판이 중요하다는 점을 앞으로 더 이야기할 텐데...“98쪽) 젠더트러블 이후에 버틀러와 버틀러 비판자들의 논쟁이 왜 그렇게 첨예하였는지, 신체를 사유하는 버틀러와 다른 사상가들의 방식에는 어떤 차이가 있고, 어떤 접점이 만들어질 수 있는지 살펴보고 싶다.

    40. 비폭력은 행동하지 못하고 있다기보다는 생명의 권리를 물적으로, 살아 있는 방식으로 (발화, 동작, 행동을 통해, 네트워크, 점거, 집회를 통해) 주장하고 있으며, 이 모든 방식은 불안정한 상황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을 가치 있는 존재, 애도가치를 인정받는 존재로 다시 그려내기 위함이다(지금 그들은 시야에서 사라져 있거나 돌이킬 수 없이 불안정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불안정한 사람들이 자기의 생명을 위협하는 권력 앞에서 자기가 어떤 상황에서 살고 있는지를 내보일 때, 그들은 폭력적 권력이 목표하는 바 중 하나를 - 주변부로 따돌려진 삶들을 불필요한 존재로 그리는 일, 파농의 표현을 빌리면, 그들을 주변부 너머의 비존재 지대로 몰아내는 일 - 무찌를 잠재력을 간직한 생존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실천의 다양한 사례들을 개인의 윤리적 입장이나 정치적 각성, 양심의 차원으로 설명하지 않는 방식으로 글을 써볼 수 있을까?

  • 2023-05-19 22:12

    윤리적-정치적 실천이 개인의 생활양식이나 의사결정의 차원, 한 사람으로서의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성찰하는 덕 윤리학의 차원에 머문다면, 평등 구현으로서의 사회적 경제적 상호의존성을 놓칠 위험이 있다. 또한 이 조건하에서 우리는 방치와 파괴를 저지를 가능성에 노출된다. 그렇지만 이 조건은 그런 결과들을 막아낼 윤리적 의무란 무엇일지를 짐작하게 해주기도 한다.(79)

    1) 이 문장에서 “이 조건”이 가리키는 것은 “덕 윤리학 차원”에 머무르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뒷 문장과 연결하면 동시에 방치와 파괴를 저지를 가능성에 노출되는 결과를 막을 윤리적 의무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책의 내용에서 유추해 보면 “생명 지키기에 철저히 평등주의적으로 접근해야 한다.”(78)는 관점을 견지하는 실천을 통해 가능하다는 말인지?

    2) “상호의존성을 주요 특징으로 하는 사회적 유대관계란 늘 여러 형태의 양가감정을 감안하는 개념”(82) 이라는 게 버틀러의 주장인데요, 양가감정이 정확하게 이해가 안 됩니다. 책 내용으로는 “양가감정이 구체적인 사회적 관계들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해 질문해보자는 제안” “양가감정과 부인은 자율적인 심리적 현실의 속성들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관계의 심리적 속성들이기도 하다”는 부분과 연결됩니다. 상호의존성이라는 개념을 독해하는데 양가감정이 중요한 포인트 같은데, 상호의존성을 “우리가 평생 삶 그 자체를 지속하기 위해 사회적 경제적 형태의 지지들에 의존한다.”(70)는 의미로 보면, “몸을 가진 주체는 자족성의 결핍으로 정의 되는 존재” 라는 정의 등등에서 양가감정이 작동하는 구체적인 예를 알고 싶습니다.

    3) “폭력의 제도적 삶을 거꾸러트릴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폭력을 금하는 명령이 아니라 제도에 맞서는 에토스-실천일 것이다.”(84) 문장은 멋진데요..... 제도에 맞서는 에토스-실천이 좀처럼 상상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그동안 마을경제 등등의 실험으로 우리가 공동체내에서 복을 발행하고 순환시키는 활동의 실천을 등가교환을 기본으로 하는 제도에 맞서는 에토스-실천 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 2023-05-19 22:35

    2장 발제문입니다. 이해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제문을 쓴다는 것이 마냥 부끄럽습니다.ㅠㅠ
    내일 뵙겠습니다.

  • 2023-05-19 23:56

    서문과 1장 발제 올립니다.

  • 2023-05-20 01:03

    2장에서 다른 누군가의 생명을 지킨다는 것에 대한 논의가 흥미로웠어요. 우리는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여러 가지 파괴에도 불구하고 다른 생명을 보살핀다. 그것은 내가 폭력적 행동을 하려고 했을 때, 다른 사람도 나처럼 행동한다면 내가 그 세계에서 살고 싶을까? 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기본적으로 내재하여 있는 파괴 충동의 이야기도 나오는데, 오히려 이런 와중에 자살하는 사람의 심리는 무엇인지가 궁금해졌다. 이 많은 오류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보살피는 것과 반대로, 또한 자신의 생명을 꺾어버리는 것에 대한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또한 클라인의 논의도 재미있었는데요. ‘진정한’ 공감이라고 부르는 일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내 어린 시절의 상실과 불만들을 처리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어린 시절에 대해서 별로 생각을 안 하고 있었는데, 내 어린 시절은 뭔가 상실되어 있었던 적이 있었나. 아니면 나의 존재에 대해서 파괴적인 양가감정을 가진 적이 있었는가에 생각해보게 돼요.

    진정한 공감이 있으려면 내가 당신과 별개의 존재라는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또 어떻게 보면 나를 벗어나는 능력 또한 나란 존재의 한 부분이다. 동일시되면 나의 일부가 나를 넘어 당신으로 행동하게 된다는 뜻, 당신이 나에게서 지향하는 것을 내가 이행하게 된다는 뜻이다. 사실 우리는 거의 모두가 그 의존성에서 비롯하는 격분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요즘 뭐가 잘못되어가는 느낌인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는 모르는 상황이라 여러 가지 고민이 많은데, 다양하게 생각해볼 것들을 제공해 주는 거 같아요. 뭔가 나쁜 건 없는 거 같은데, 나쁜 기분이라.. 좀 더 무의식 형태의 판타지를 따져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뒤편에 나온다는 프로이트의 양가감정도 궁금해집니다.

  • 2023-05-20 02:33

    애도가치가 평등해야 한다는 전제는, 신념이 되거나 사람이 사람에게 인사를 건넬 때의 태도가 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의료,식량,주거,고용,성생활,시민생활을 사회적으로 조직할 때의 원칙이 되어야 할 것이다.(82)

    “수원 성폭행범 박00 출소- 거주지 화성시 00읍 ㅠ” 이라는 주민 카페의 글로부터 시작, 얼마 안있어 주민과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그 사람을 지속적 보호 감호, 격리를 시켜야 한다는 국민청원, 및 아파트 주민의 서명이 각 엘리베이터마다 붙어있었다. 한마디로 동네가 후지고 힘이 없어 생긴 일이니 주민의 힘을 보여줘야 한다는 논지였다. 충분히 ‘혐오스러운’(미안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그 사람이 살 수 있는 동네는 어디일까라는 의문이 잠깐 생기면서 서명을 미루었던 적이 있었다. 왜 서명 안하냐는 눈총을 받았다(엘리베이터를 타는 사람들마다 몇호가 아직 안했네...라는 말들을 서로 주고 받았다. 심지어 애가 없으니..내 일 아닌거 아니냐...는 식의). 애도가치의 평등이라는 전제를 어디까지 확대할 수 있는 것일까? 사회적 관계의 심리적 속성인 양가감정과 부인이라는 두 속성에 이런 것도 포함되는 것일까? 이런 틈 하나가 폭력을 도구화하거나 정당화할 수 있게 만들어 줄 수도 있는 것일까?

  • 2023-05-20 06:10

    서론에서 버틀러는 비폭력에 대한 편견을 깨고자 한다면서 비폭력은 개인의 윤리적 입장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실천이라는 것, 비폭력이 반드시 영혼의 평안한 부분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노와 공격성의 표명인 경우가 많고 이 저항은 공격적으로 행해져야 한다는 것, 비폭력은 실천 속에서 항상 철저하게 이뤄질 수 없는 애매함이(언제든 폭력행동으로 바뀔 수 있는) 있다는 것, 비폭력은 절대적 원칙이 아니라 진행중인 투쟁을 가리키는 이름이라고 한다.
    - 곱씹어볼수록 하나하나 내용이 다 어마어마하다. 공격성을 품은 비폭력, 언제든 폭력으로 바뀔 수 있는 비폭력, 진행중인 투쟁인 비폭력. 비폭력에 대해 갖고 있는 하트하트한 이미지가 순식간에 깨진다.
    - 넷째, 근본적인 윤리적 정치적 애매함을 경유하지 않는 비폭력 실천이란 없다. 비폭력은 절대적 원칙이 아니라 진행중인 투쟁을 가리키는 이름이라는 뜻이다. 비폭력이 약한 입장처럼 보인다면 우리는 무엇이 강하다고 여겨지는가를 물어야 한다. 강하다는 것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 또는 폭력을 사용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는 것과 동일시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 추정적 약함에서 비롯되는 비폭력의 강함이 있다면, 그 강함은 약한 존재들의 권력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39)
    - 약한 존재들의 권력 - 사회적 정치적 권력을 포함하여, 곧 개념적으로 무화되어온 사람들이 확고하게 존재하게 하는 권력, 불필요해 보이도록 형상화되어온 사람들이 가치와 애도가치를 인정받게 하는 권력, 폭력이 아닌 것에 폭력이라고 이름 붙이기 위한 언론들에 대해서 판단력과 공정함을 추구할 수 있음을 주장하는 권력을 포함하는 약자의 권력
    이라고 말하는데,
    약한 존재들의 권력이 무얼 말하는지 헷갈리네요. 약한 존재들이 그 자체로 권력이 되는 것은 아닌 것 같고, 사회적으로 존재를 인정받지 못했던 약자들이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게 하는 권력을 말하는 것일까요? 투쟁하는 권력? 약한 존재들이 투쟁을 통해 존재를 인정받았을 때 얻게 된 권력?

  • 2023-05-20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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