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회차 후기>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 3~4장

스티핑거
2023-05-02 01:31
262

지난 주  세미나가 무척 흥미로왔는데,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흥미로왔던 만큼 후기를 제대로 쓰고 싶었으나 쉽지 않아 제 기억속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내용 중심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제가 댓글에 첫번째 다음 두번째가 뭔지 모르겠다는 내용을 적어서인지, 세미나 시작에 앞서 문탁샘이 버틀러의 문체에 대해 잠깐 언급을 해주셨습니다. 결론은 푸코와 달리 버틀러는 국어 실력이 있어도 결코 쉽게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었어요. 마음이 조금 놓이는 한편, 그리고 나서 다시 읽으니  무작정 어렵다고 생각했을 때에 비해서는 버틀러와 아주 조금 친해진 것 같기도 하고요.

또한,  버틀러 첫시간을 함께 하지 못하신 묘선주쌤 덕분에 저희는 문탁쌤으로부터 3장에 대해 친절한 강독 수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3장 불안정한 삶과 공거의 윤리

 

3장의 서두에서 버틀러는 두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첫째,  원거리의 발생하는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 윤리적으로 반응할 능력이나 성향을 가지고 있는가. 그러한 능력이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둘째, 우리가 결코 선택한 적없는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 반응할 때 윤리적 책무는 무엇인가

첫번째 질문은 우리의 불안정한 삶과 연결이 되고,

두번째 질문은 공거의 윤리와 연결이 되는 것 같습니다.

 

버틀러는 우리가 결코 합의하거나 동의하지 않은 상황(원거리) 또는 같은 공동체와 같은 울타리에 묶이지 않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것과 같이 우리는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무를 느낄 수 있다고 봅니다.

(합의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은 기존 사회계약론에 비판적인 버틀러의 관점이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윤리, 근접성, 원격성의 관계에 대해 버틀러는 레비나스와 아렌트의 도움을 받는데요. 

레비나스는 타자가 자신보다 우선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윤리도 자아주의 (egoism)으로부터 파생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불안정하고도 신체를 매개로 한 존재는 타자의 삶에 책임이 있는 존재이며, 우리가 자신의 삶의 안위에 대해 얼마나 걱정하고 있느냐에 상관없이 타인의 삶을 보존하는 것이 극히 중요하다는 입장을 피력합니다. 하지만 버틀러는 타자의 삶과 나의 삶을 기본적으로 분리할 수 없는 ‘우리의 삶’으로 보고 우리는 ‘사회적 세계에 의해 구성되는 타자의 세계에 이미 처음부터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절대적인 타자를 상정한 레비나스의 의견에 거리를 둡니다.

또한 여기에서 불안정성과 취약성의 관계에 대해 질문합니다.

즉 취약함을 느끼면서 동시에 타자에 대해 책임감을 느낄 수 있는가의 문제인데요,

호소에 응답하고자하는 신중한 결정 이전에 이미 타자에 대한 민감성과 취약성이 거기에 존재하고 있고, 윤리적 책임감은 윤리적 반응성을 전제로 한다.  즉, 취약함이라는 것 자체가 어쩌면 상처받을 가능성이면서 응답가능성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수동적인 반응이라기 보다는 버틀러는 상처받을 수 있는(injurability), 응답할 수 있는(answerability)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취약성과 민감성을 또다른 능력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또한 3장에서는 버틀러의 시오니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드러나는데요.

공동체주의를 넘어서는 윤리적 책무를 이야기하며 유대인인 버틀러는 어느 누구도 자신과 공거할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질 수 없다는 아렌트의 신념을 지지합니다. 버틀러는 모든 이는 불안정한 상태에 있으며 이와 같은 불안정성은 우리가 삶의 필수 요건들을 위해 서로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신체들을 가진 존재라는 아렌트의 생각에 더하여 우리의 불안정성은 경제적, 사회적 관계의 조직 그리고 우리의 삶을 유지하는 인프라와 사회적, 경제적 제도의 유무에 크게 좌우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불안정성은 정치의 차원과 분리될 수 없고 이것이 불안정성을 위한 윤리적 책무를 위해 투쟁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는 것이죠.

 

결론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우리는 이 세상에서 누구와 공거할지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하지 않거나 우리가 결코 사랑하지 않을 이들, 우리가 모르는 이들,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던 이들의 생명을 보존해야할 책무를 지닌다.
  2. 이와 같은 책무는 우리가 동의하거나 계약한 것이 아닌 정치적 삶의 사회적 조건들(신체에 기반한 취약성)로부터 출현한다. 하지만 살만한 삶의 사회적 조건은 우리가 연대를 통해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3. 불안정성에 대한 노출은 우리에게 주어진 전지구적인 책무(불안정성의 최소화, 경제적 정치적 평등을 확립할 수 있는 정치경제의 형태를 찾아내야하는)를 이해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우리는 불안정성 안에서 불안정성으로부터, 그리고 불안정성에 저항하여 투쟁한다. 우리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함께 사는 것이다.

 

 

4장 신체의 취약성 연합의 정치

 

4장에서 중요한 것은 ‘신체‘입니다.

먼불빛샘도 질문을 해주셨는데요, 왜 ‘연대하는 사람들(인민들)’이 아닌 ‘연대하는 신체들‘인가.

이에 대해 문탁샘은 버틀러가 <들어가며>에서 설명한 ‘인민‘의 정의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셨어요.

생명정치를 이야기한 푸코는 ‘신체는 권력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진다'고 했고

버틀러는 이 책의 <들어가며>에서

‘신체들이 거리에, 광장에, 혹은 다른 형태의 공적 공간에 모일 때, 그들은 복수적이고 수행적인 출현할 권리를 실천하는’  그 주체로서의 인민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거리에서 복수들이 출현하는 수행의 현장에 존재하며

불안정성에 노출되어 있는 신체(체현된)

단지 생물학적인 육체가 아니라 정치사회적 맥락이 들어와 있는 신체를 가진 인민인 것이지요.

 

그래서 4장에서는 신체, 연합, 거리정치가 주요 키워드가 되고 있는데요.

문탁샘도 누군가 2학기 에세이 주제로 전장연의 이동권 투쟁을 다루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셨지만 저도 4장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그분들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바로 ‘인프라’라는 단어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이동성은 그 자체로 신체의 권리지만 그것은 집회의 권리 자체를 포함한 여타 권리를 실행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라는 표현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버틀러는 또, ‘본연의 신체의 일부가 곧 다른 신체들과 그 신체를 지지해주는 네트워크에 대한 의존성임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개별 신체들 각각을 완전히 분리된 변별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일이 결코 옳지 않음을 주장하는 셈이다.(191)’ ‘신체는 무엇보다도 의존성을 조건으로 해서, 의존적인 존재로서, 사회적 삶 안으로 들어간다'(192)라고 하면서 신체의 취약성으로 인한 상호의존성을 강조합니다.

 

4장의 결론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215쪽의 취약성과 관련된 몇가지 논점 부분입니다.

첫째 취약성은 반드시 상처받을 가능성하고만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반응성이라는 효과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개방성일 수도 있는데 이것은 감각을 통해 확장되거나 박탈된다. 때문에 감각에 대한 규제가 이뤄지기도 한다.

둘째 취약성은 우연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잠재적이고 명시적인 특질이다. 우리 모두가 취약한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단지 타자들에 대해서만 아니라 지속적이고 지속가능한 세상에 대해서도 철저히 의존적이라는 것이다.

셋째, 취약성이 상호의존성에 의해 개인적인 전략이 아닌 단결된 형태로 동원될 때 저항의 가능성이 분명해진다.

 

 

 다시 보니,

2장은 ‘연대’하는 신체,  4장은 ‘연합‘의 정치. 신체는 연대 정치는 연합을 쓴 이유가 있겠지요??

아, 글쓰기는 왜이리 항상 어려울까요.  부족하지만 또 다음 번에 조금 더 나아지기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 후기 쓰다가 잠시 샛길로...

문탁샘이 버틀러의 -ability 표현에 대해 언급해 주셔서

pdf파일의 단어들을 한번 검색해 봤는데요.

vulnerability를 비롯해서 -ability로 끝나는 단어(livability, unvulnerability, grievability, unlivability,등등)는 총 24개의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중 vulnerability는 본문에만 총 108번이 사용되었네요.(vulnerable 35회)

참고로 precarity도 108회, precarious 27회,  precariousness 2회, precaritization 2회로 불안정성으로 번역된 precarity가 가장 많이 사용되었지만 precarious도 많이 쓰였네요.(용례가 궁금하시면 파일에서 ctrl+F)

 

댓글 6
  • 2023-05-02 08:07

    하하...공부한 자의 후기?
    티가 팍팍 납니다. 수고했시유...

    글구 말씀드렸다시피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저도 시간이 있어서 좀 이상한? 이해가 안 가는 건 원문을 많이 봤는데...ㅋㅋ) 그러다가 문뜩
    버틀러가 수동적인 의미의 형용사에 ness를 붙이는 게 아니라 ablity를 붙여 명사형을 만드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상처받지만, 취약하지만, 슬프지만(grief), 그것으로 우리는 아무것도 못하는 게 아니라 (서발턴, 호모사케르), 그것 때문에 정치적 출현(행위)를 할 수 (able to) 있는 거구나, 라는!!
    이게 버틀러의 독특한 정치적 포지션인 것 같아유~

  • 2023-05-02 14:50

    샘의 '어려운 글쓰기'에 힘입어 지난 시간 공부를 정리하게 됐네요. 고마운 마음을 댓글로 남깁니다. 아무래도 뒤로 갈수록 댓글 반응이 시큰둥하기 마련이죠. 우리가 세미나에,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후기 쓰시는 분들 모두 화이팅! 올라오는 후기 모두 잘 읽고 있습니다.

  • 2023-05-02 18:33

    스티핑거님 감사합니다.
    지난시간 저의 반대편에 앉아서 초롱초롱하시던 샘의 모습이 떠올려지는군요~^^

    전 사실 연재 소재거리 찾다가 아렌트의 공거의 윤리를 가져다 급하게 썼어요. 배운거 1주도 안돼서 이렇게 써도 되는지 고민하다가(문탁샘의 일화가 떠오르는군요^^;;) 그냥 알아들은 만큼만 가져다 썼네요~!ㅎ

  • 2023-05-03 10:16

    후기 잘 읽었습니다.

    저는 세미나 때 튜터님께서 언급하신 '연대'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제 기억을 바탕으로 써본다면 튜터님께서는 " 문탁에서 '연대'라고 언급하며 쓴 글들이 다 맘에 들지 않는다. 내가 아는 연대는 80~90년대 학생운동의 노학연대 뿐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문탁이 밀양 송전탑 시위에 참가했을 때 밀양에서 우리를 '연대'자 라고 호칭하던데, 그것도 맞는지 잘 모르겠다. 이번 기후정의 파업에 참가한 것도 연대인지, 간식을 그렇게 많이 싸가는 것이 맞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무엇이 연대이고 무엇이 연대가 아닐까요?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인지요? 저는 무엇이 연대인지의 문제와 연대하는 자의 자세(태도)는 어떠해야 하는지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경험이 많지는 않았지만, 제 나름의 불안정성(?)에도 불구하고 참가했던 그 집회들에서 저는 분명 연대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으면 더 알고 싶습니다.

    튜터님께서는 "이번에 전장연 시위에 참가하면서, 이 책,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고 덧붙이셨는데요. 세미나를 하면서 '연대'에 대한 사유가 진전된다면 세미나 때 계속 나누어 주시길...

    • 2023-05-03 12:19

      내 문제제기의 핵심은 무엇은 연대이고 무엇은 연대가 아니냐는 게 아니고
      연대의 이론적, 철학적 근거가 무엇인가?라는 점이에요.
      제가 아는 것은 전통적인 맑스주의 입장에서 설명하는 연대 뿐인데, 이제 더 이상 맑스주의로 설명하기 힘들다면 무엇으로 '연대'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거에요.

      밀양의 경우, 그분들은 우리를 연대자로 부르는데 그렇다면 밀양주민은 당사자이고, 우리는 일종의 엘라이인것일까요?
      우리는 그분들을 도우러 가는 것일까요? 우리는 그 싸움에서 함께 변하는 게 맞나요?
      저는 모든 싸움에서 늘 현장에 남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과 그 현장을 가볍게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이 나뉘어지는 것 같았어요.

      쓰다보니 갑자기 정치적 이론적 질문이 아니라 윤리적 질문인 것 같기도 하네요.

      어쨌든 우리가 소위 '연대'라고 범박하게 부르는 어떤 행위 혹은 상황에는
      자유주의적 입장도 있을 수 있고, 신학적 입장도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버틀러는 지금 '상호의존'을 정치적/이론적으로 다시 규명하려는 것 같아요. 그래서 매우 인상적이에요.

      공부를 더 열심히 해봐야겠어요.

      • 2023-05-03 14:16

        위 답변으로 인해 튜터님의 고민 지점을 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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