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11주차 (버틀러, <집회 수행성 이론 노트> 2차시)- 발제/메모 올려주세요

문탁
2023-04-27 12:36
365

제가 이번주도 번다하여 일찍 공지를 올리려고 했으나, 후기가 늦게 올라오는 바람에...ㅋㅋㅋㅋㅋ

어쨌든 저는 <들어가며>를 다시 읽었습니다. 이번 공지에 <들어가며>의 내용을 다시 정리해드릴려구요. 

그런데 그걸 여기에 치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에잇...일단 패스하기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린샘 후기에 전혀 댓글이 달리지 않는 것을 보면서... 뭔가 정리를 하긴 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이 들기도 해유... ㅋㅋㅋ  제가 토욜 전에 좀 여유가 생기면, <들어가며>에 나오는 이 책의 문제의식을 한번 요약해보겠습니다. (시간이 될라나?^^)

 

 

다만 한가지만 정정할게요.

제가 폐제의 원어를 잘못 말씀드렸어요. 서론을 다시 읽다보니...그거...foreclosure...에요. 라캉용어구요. 아시죠? 버틀러가 헤겔리언이지만 방법론으로는 라캉과 푸코를 가져온다는 것.  (foreclosure는 특정 사실이나 개념, 대상 등을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상징계 밖으로 밀어내는 심리적 기제임)

그리고 이 '폐제'는 지금 버틀러 논의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네요. p24쪽 보면.. 미국의 티파티에서 보여졌던 것처럼 지금 신자유주의의 문제는 '책임' 담론을 통해 누군가(프레카리티)를 아예 상징계 밖으로, 아예 없는 존재인 것처럼 밀어내버리는 거죠. 

 

"왜냐하면 사회복지를 축소하는 게 좋다고 보는 이들 말마따나 만일 우리가 저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고 타인에 대해 책임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면, 그리고 만일 책임이라는게 자립의 모든 가능성이 허물어지는 조건 아래서도 경제적 자립을 의미하게 된다며, 우리는 누군가를 미쳐버리게 하는 모순에 직면할 것이다. 즉 그럼 규범을 실현하는 데서 구조적으로 폐제된 주체가 되라는 도덕적 압박이 우리에게 가해질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합리성은 자립을 어떤 도덕적 이상으로서 요구하고 있는데, 이와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형태의 권력은 경제적 차원에서 바로 그와 같은 자립의 가능성을 파괴하고 있기도 하다. 신자유주의적 효율성은 모든 이를 잠재적으로 혹은 실제로 프레카리티로 만들고 있으며, 심지어 모든 공적 공간에 대한 규제 강화와 시장 확대에 대한 규제 완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언제나 존재해왔던 불안정성을 십분 활용하고 있기도 하다"(24)

 

 

 

그리고 18쪽에 서론 두번째 절의 첫 단락은 원문을 대조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번주엔 1장부터 4장까지 다시 읽어오시고 논의는 3,4 장 중심으로 진행하겠습니다.

발제는 경덕샘이고, 메모는 B조입니다.

 

 

 

피에쑤 : 너무 유명해서 안 본 사람 없을 듯 하지만 혹시 몰라 첨부함 (책도 있음)

댓글 8
  • 2023-04-27 12:54

    역자 후기에도 버틀러가 아렌트를 폐제하지 않는다는 언급이 있더라구요^^ 폐제시키지 않는다는 방법론이 버틀러에게 중요한 지점인 것 같아요. 그 미세함을 아직 모르겠지만 쓰윽 넘기면 안되는 지점인 듯!!

  • 2023-04-28 21:59

    1) 3장에서는 취약성에 대해 집중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취약성(vulnerability)과 불안정성(precarity)을 어떻게 구별하여 이해해야 할까요? 간단히 말해 취약성은 신체적 조건이라면 불안정성은 삶의 조건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1장에서 불안정성을 “어떤 인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회적 경제적 지원체계 탓에 남들보다 더 많이 고통받으며 상해, 폭력, 그리고 죽음에 더 많이 노출되는, 정치적인 문제로 초래된 어떤 상태를 의미한다. 곧 불안정 상태의 차별적 할당“이라고 정의합니다.

    195-196쪽에 나온 생존과 삶에 대한 논의가 약간 힌트가 되는 것도 같습니다. “생존이 더 큰 삶의 정치적인 목적들을 실현하기 위한 전제조건임이 분명하기에, 신체들은 생존에 필요한 것을 가져야 한다.” “삶 자체의 조건들에 대한 공평하고도 공정한 재생산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정치적 목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2) 197쪽에는 “그러나 나는 민주주의를 가령 밀려오는 다중이 만들어내는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적 견해들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이다.”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버틀러는 그런 집단의 유지 자체만이 아닌 그 사건을 일으킨 배경이나 과정 등을 물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중’은 네그리를 염두에 둔 얘기일까요? 만약 네그리의 ‘다중’이라면 219쪽 “나는 연대란 우리의 의지로써 진입하는 의도적인 계약에서보다는 차라리 그와 같이 예측하지 못한 조건들에서 출현하다고 말한고 싶다.” 에서 말하는 ‘예측할 수 없는 연대’라는 의미가 네그리의 ‘다중’에 포함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3) 205쪽에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 조건들이 완전히 극복되지 않은 한 ”포스트페미니스트“일 수 없을 두가지 이유 즉 가난과 문맹”이라고 나옵니다. “포스트페미니스트”란 여성이 더이상 소수성을 갖지 않는 단계를 말하는 걸까요? 다시말해 페미니스트나 페미니즘이 더이상 필요없는 단계?

  • 2023-04-28 23:09

    이 책을 읽다보면 버틀러가 어떤 주제에 대해 몇가지 논점을 설명하겠다는 식의 표현이 종종 나오는데, 저는 이후의 문장에서 이 몇가지가 어떤 것인지를 잘 따라갈 수 없는 경우가 꽤 있었던 것 같아요.

    4장에서도 215쪽에서 ‘나는 그 정치적 중요성을 이상화하지도 폄화하지도 않는 차원에서 취약성과 관련된 몇가지 논점을 명료화할 수 있을 듯하다’면서 앞에서 다루었던 취약성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제기와는 다른 취약성이 갖는 긍정적 측면도 다루는 것처럼 보였는데요,

    첫째는 취약성은 반드시 상처받을 가능성하고만 연관될 수 없다.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반응성은 취약성의 기능이자 효과’라면서 완전히 알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세계에 대해 열려있는 ‘개방성’, 신체의 감각을 통한 ‘확장’ 등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두번째는 무엇인가요?
    취약성은 우연적이고 스쳐지나갈 상황인 것 처럼 이야기되지만(216)
    취약성은 가변적인 것이 아니라 ‘취약성이 우리 경험이 지닌 다소간 잠재적인 혹은 명시적인 특질’(217)이며. 우리 모두는 취약한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곧 우리가 단지 타자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지속 가능한 세상에 대해서도 철저히 의존적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저는 이렇게 이어지는 것 같은데 맞나요? 세번째는 없는건가요?

  • 2023-04-28 23:11

    4장 발제 올립니다!

  • 2023-04-28 23:42

    저는 그냥 좋았던 부분, 더 알아보고 싶은 부분에 대해서 쓰겠습니다.
    1. 이미지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데, 비록 보기를 선택하지 않아도 보아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때때로 넘쳐 흘러서 윤리적으로 압도된다. (동시에 마비되기도 한다.) 우리는 오직 우리가 행동하도록 감화될 때만 행동한다. 행동을 하기 위해선 감정의 격랑에 압도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 이 행동의 문제는 4장에 이르러서는 이 말은 곧장 행동을 위한 길로 이끌어야 한다는 말이 아님을 지적하며, 오히려 그것은 잠시 행동을 멈추고 성찰할 기회. 멈춤 또한 행동이라고 말한다.
    -> 저는 생각하는 것을 행동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구절이었습니다.

    2. 나의 삶은 타자의 삶이기도 하다. 나의 삶이 개별적이고 또 개별적임이 분명할 때조차 그렇다. 이 점을 안다는 것은, 나의 경계가 어떤 한계인 동시에 어떤 인접의 장이라는 뜻이다. 이 말인즉,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의 안위에 대해 얼마나 걱정하고 있느냐에 상관없이 타인의 삶을 보존하는 것은 극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 이 문구는 좋아서 썼어요.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경계를 인접의 장으로 느낄 수 있을지 고민입니다.

    3. 신체에 대한 정의가 좋았습니다. 신체는 통상 어떤 표면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신체는 움직임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해줄 그 모든 기술적 지지대를 마음대로 쓸 수 있어야 한다. 신체가 자신의 이동성의 권리를 실행하고 있다면, 이미 포장도로와 거리가 신체의 필요조건으로 이해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체는 취약하면서도 의존적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해는 되는데 완전히 소화가 되지 않은 거 같아요. 신체의 정의와 신체의 범위 등에 대해서 더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 2023-04-29 01:20

    질문은 없구요. 그냥 이런저런 생각들. 좋았던 구절들 옮깁니다.

    ❍ 모로님 3번 질문과 관련하여 (쓰다 보니 연결되는듯하여)
    -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할 때, 연결되어 있는 ‘우리’에는 주로 인간, 인심 크게 쓰면 동식물 등의 생명체, 바람·공기·햇볕·물 등 자연까지 포함시킬 수 있었다. 버틀러는 집회할 때의 광장, 거리, 건물은 물론이요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각종 인프라까지 넣자고 한다. 나를 ‘인간’이라는 정체성으로만 한정했기에 인간중심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나 역시 생명체이자 자연이요 인프라다.
    나의 걷기라는 행위에는 포장도로와 거리와 계단 등이 필요하다. 나는 팔다리가 멀쩡해서 걸어 다닌다고 생각했었는데, 각종 기술적 지지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수나우라 테일러의 산책 영상을 보면서 ‘팔다리가 멀쩡하다’는 것 또한 신체 기능에 대한 사회적 규정임을 알게 되었다. 신체적으로 손상된 팔과 다리는 내 고정관념과는 다른 기능을 할 수 있으며, 카페에서 커피를 나를 때는 입으로 커피잔을 물고 운반할 수 있다. 신체를 나만의 독자적인 것으로 가정할 때는 개별적이고 독립된 신체를 상정하게 되고 손상되지 않고 잘 다듬어진 신체를 욕망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런데 다른 것들과 연결된 것으로서의 신체, 행위를 중심으로 생각하게 되면 신체의 피지컬에만 매몰되지는 않게 되는 것 같다.

    ❍ 우리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함께 사는 것이다. (178)
    - 우리는 누구도 어디에서 태어날지 선택하지 않았다. 인종도, 민족도, 국가도 선택하지 않았다. "“우리”가 누구건 간에, 우리는 결코 선택된 적이 없는 이들이자, 모든 사람의 합의 없이 이 지상에 출현한 이들이며, 처음부터 보다 넓은 차원의 인구에, 그리고 지속 가능한 땅에 속한 이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선택받지 못한 이들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 함께 선택받지 못한 이들인 것이다. 스스로가 유대인이자 난민이었던 아렌트가 “선민”에 속하지 않고 그 대신 선택되지 않은 이들에 속해야 할 자신의 책무를 이해했다는 것, 아울러 존재함으로써 이미 존재할 권리, 살 만한 삶을 영위할 권리를 내포하고 있는 이들 사이에서 다양한 이들이 함께하는 혼종의 공동체를 이룩해야 할 자신의 책무를 이해했다는 것은 실로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69~170)
    - 아렌트는 의도하지 않은 근접성과 선택하지 않은 공거가 우리의 정치적 실존의 전제조건이며 지상에서 살아가야 할 책무라고 한다.(168)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이 땅에서 누구와 공거할지 선택할 특권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인류의 그 어떤 일부도 파괴하지 말아야 한다. 아렌트는 '선택하지 않은 공거'라는 개념으로부터 모든 생명이 살 만하도록 그리고 모두가 평등하게 살 수 있도록 제도들에 요구해야 한다는 보편성과 평등의 사상을 이끌어내고 있다.

  • 2023-04-29 03:11

    공교롭게도 신체와 관련된 질문들과 겹칠수도 다를 수도 있겠네요.

    ‘거리에 모인 신체들’, ‘신체들은 본질적으로 선한 것도 본질적으로 악한 것도 아니다’(184)

    =>원래 ‘신체’라는 용어가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 용어가 참 낯설었습니다. 『연대하는 사람(혹은 인민?)들과 거리의 정치』 (버틀러님에게 너무 죄송하지만) 이렇게 제목을 붙여도 맥락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없을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버틀러가 얘기하고 있는 바 인간, 사람, 인민, 혹은 장애인, 여성, 남성, 이민자, 성소수자.....는 각각의 정체성으로 개념화하고 경계를 지어버리기 때문에 ‘신체’라는 중립적 용어를 쓴 것이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아니면 각각의 차이들, 정치적 의미성이 신체를 통해 나타나기에 ‘신체’라는 용어를 쓰는 걸까요?

    ‘인간 신체가 살아가고 번성하는 내부로서의 관계들을 이해하지 않고서 신체의 정치적 의미를 쉽게 개념화할 수 없다면...’
    ‘관계망에 붙들려 있는 것은 이 신체나 저 신체가 아니라, 신체의 분명한 경계들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 경계들 덕분에 신체를 정의하는 것이 신체의 삶과 행위를 가능케 하는 관계들이라는 것이다’
    ‘신체는 자가동력적인 행위자로서 이 세계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이 조건에는 어딘가 있을 인민은 포함되지만, 하나의 다른 신체를 매개로 한 사람이 꼭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191-192)

    =>취약성, 상호의존성, 수행성의 개념들을 더 구체적으로 생생히 드러낼 수 있는 용어로서의 ‘신체’인가요?

    단수의 신체로서의 관념 때문에 ‘신체’라는 용어가 낯선걸까요? ‘신체’라는 용어를 깊이 이해함으로 제 생각의 문제를 알고 싶고, 이 '신체'의 철학적 사유의 근원이 있다면 무엇인지, 차용한 것인지,,,궁금하고, 이해함으로서 버틀러의 독특하고 다른 사유에 접근해보고 싶었습니다.

  • 2023-04-29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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