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10주차 (버틀러, <집회 수행성 이론 노트> 1차시)- 발제/메모 올려주세요

문탁
2023-04-18 15:04
284

1. 제가 이번주에 일정이 많아서 공지를 그냥 간단히 일찍 올립니다.

 

이번주부터 4주에 걸쳐 버틀러를 읽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최근 저작부터 거슬러 두 권을 선택했고, 우선 <Notes Toward a Performative Theory of Assembly>를 두 주에 걸쳐 읽습니다. 직역하면 <집회의 수행성이론에 대한 노트(소고)> 정도 되겠습니다. 한국어 번역인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는 이 책 2장 Bodies in Alliance and the Politics of the Street 의 제목이네요.

 

배경은 책 첫머리에 나왔있는 소위 '이집트' 혁명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 이전에 '재스민 혁명'이라고 불렸던 튀니지의 민주화 시위가 있었습니다.  10만여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었고, 23년간 독재 정치를 하던 벤 알리 대통령은 사임하고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했죠. 이후 이 영향은 주변국에 번집니다. 201o년 ~2011년의 민주화시위로 이집트에선 호스니 무바라크 독재정권이 무너졌고, 이후 리비아에선 최장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이 붕괴했습니다. 바로 '아랍의 봄'이라고 일컬어졌던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진 것이지요. (모르면 찾아보기~~ )

 

 

2011년 2월 이집트 반정부 시위대가 카이로 타흐리르광장에 모여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카이로=AFP 연합뉴스)

 

 

 

그리고 2011년은 미국에서도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고 하는 오큐파이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아참 그 전 2008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광우병 촛불집회'가 열렸었죠. 그 이전의 시위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시위 말입니다.

 

이 책은 그 '집회'들을 수행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분석하고 있는 책입니다. 집회에 모여있는 계산가능하지 않고 측정불가능하고 기존의 공적영역에서는 재현되지 않는 존재들, 그들이 퍼포먼스 (아렌트적 '행위')를 통해 집합적 주체로 출현하는 문제를 탐구하는 기획입니다.  바야흐로 버틀러의 관심은 젠더 퍼포먼스에서 집회 퍼포먼스로 변해가네요.

 

 

 

3.  이 책을 읽는 저의 개인적 맥락은 이런 것입니다.

 

2008년 촛불집회는 정말 새로웠습니다. 그런데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이택광 교수와 조정환대표 사이에서 이 집회의 성격을 둘러싸고 소위 '촛불논쟁'이라고 불리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음, 당시 수유너머에서는 자율주의 그룹답게 이것을 '다중'(네그리) 혹은 '다양체'로 분석하는 담론이 주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음, 쫌 유보적이었습니다.  https://blog.jinbo.net/daziwon/15

 

이후 오큐파이를 둘러싸고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죠. 우연히 미국에서 직접 그 운동을 목격한 고병권선생은  2012년에 아래와 같은 책을 내고 거기서야말로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고 말하죠. 그런데 2013년 한국판 르몽드 드플로마이드에서는 "오큐파이 운동이 빠진 함정"이라는, 다소 비판적이고 논쟁적인 글이 발표됩니다.  음,  그러나, 최근의 정세는 도대체 언제 아랍의 봄이 있었는지, 오큐파이가 있었는지, 좀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도무지 어찌 될 지 알 수가 없구 말입니다.

 

 

 

한편 우리는 광우병 촛불 이후, 그것보다 더 대규모의 박근혜 탄핵집회의 경험이 있고,  그와 동시적으로 탄생한 태극기집회도 경험했습니다. 저는 그 미디어화된 탄핵집회에 대해, 쫌 비판적입니다 (아시는 분이 많겠지만^^). 당연히 최근의 윤퇴진?탄핵 집회도 좀 부정적입니다.  ㅋㅋㅋ

 

어쨌든 저는 이번 버틀러의 책을 통해 두번의 촛불집회 (어쩌면 1980년 봄부터의 저의 '거리에서의 경험' )에 대해  한번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4. 개념이 많습니다. 나오는 사상가도 많습니다.  고생스러울지도 몰라요...  ㅋㅋㅋ

 

어쨌든 우리 후기 버틀러에게 매우 중요한 용어 두개의 표기법을 통일하겠습니다. 역자는 precarity는 '불안정성'으로, 'precariousness'는 '불안정 상태'로 번역했다고 하네요.(역자 후기)  뒤의 것(precariousness)이 <위태로운 삶>에서 사용된 'precarious'의 명사형으로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실존적 존재조건으로서 (생로병사를 겪는다는 차원)에서 '불확실성'이라면 전자 (precarity)는 정치사회적 맥락과 뉘앙스를 갖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모든 발제 등에서)  precarity를  '프레카리티'로 음차하여 쓰겠습니다. precariousness는 '불확실성'으로 쓰겠습니다. (용어 통일하자는 의미임)

 

 

 

5.  원문  pdf파일 올려드립니다.  발제는 기린샘과 핑거샘, 메모는 A조입니다.

댓글 9
  • 2023-04-18 15:20

    precarity를 프레카리티 불안정성이 아니라 불안전?성으로 통일하라는 말씀이시죠??

    • 2023-04-18 16:07

      ㅋㅋㅋ... 고칠게요. 놀리긴~~~

  • 2023-04-21 11:14

    저자의 주장이나 이론을 이해하고 쓰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가 이해하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아마 아무말로 못 쓸 것이다. 그저 다가온 느낌(?)으로 쓰면,
    ‘출현할 권리’에 대한 저자의 주장과 논의는 장애학생들의 지역사회 체험학습의 목적에 교육 이상의 힘을 실어 준다. 지역사회 체험학습은 장애학생들이 사회통합을 위하여 주체들의 교육적인 기능이 강조되어 왔다. 사회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더불어 중요한 기능이 있을 수 있겠다. 장애인들이 사회에 존재함을 나타내는 또 다른 출현이 될 수 있다. 장애아동들의 지역사회체험학습은 출현할 권리이다. 더 나가면 집회의 현장이다. 지적장애, 자폐학생들의 집단을 본적이 있는가? 단지 지적인 기능이 떨어지는 드라마 속의 순수한 사람들로 보이는가 또는 자폐학생들에게 우영우와 같은 환상이 있는가? 물론 모든 아이들은 정말 이쁘다. 흔히 말하는 보통의 외연안에 있는 사람과 다르게 외부와 소통을 하며 나타내는 음성, 몸짓, 외양들을 집단적으로 마주한 사람들은 자신의 온갖 감정을 잠시 감추기에 바쁘다. 출현은 숨겨온 존재의 인정이다.....우리 아이들에게는 지역사회에 출현할 권리를 옹호하고, 우리는 취약한 아이들을 정면으로 만나야 한다.

    *비밀메모가 필터링되었습니다

  • 2023-04-21 13:09

    1) 1장에 보면 상연, 규범적 상영, 방화, 출현의 장, 체제의 정당성이라는 연극, 새롭게 권위가 부여된 배우들..이라는 용어가 나오는데요.
    연극에서 배우라는 정체성으로 '수행적 화행이론'을 이해하면 되는 것인지, 수행적 화행이론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2장에서는 미디어 이미지들, 미디어 중심 집회라는 용어가 나와 결국 이 연극의 연출가는 누구이고 그 편집되어진 연출의도는 무엇인가?라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단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영화 <트루먼쇼>도 생각이 났구요.

    2) 평등을 체현하고자 노력하는 연대체로서 하는 시위는 평화적이어야 하겠지요?
    폭력적인 시위와의 차이, 차별성은 무엇일까요? (여성들의 참정권 운동은 폭력성이 필요했다고 전에 읽은 것도 기억나서.)
    또 얼만전 읽은 <이상한 성공>>에서 "비폭력이라는 가치가 절대화하면, 평화적으로는 이룰 수 없는 모든 사회의 변화를 늦추게 될 수도 있다"(하워드 진)고도 하고
    "사회 변화라는 가치를 절대화하면, 보잘것 없는 개혁을 위해 인간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극심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하워드 진) 이라고도 해서요.
    시위나 집회는 평화적이어야 하는지, 아닌지 헤갈리네요.

    3) 3장에서는 160쪽에 나온 "불안정성과 취약성의 관계"는 이기심과 이타심의 관계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란 의문도 들었어요.
    제가 요새 이기심과 이타심 사이에서 헤매고 있어서 그런지 이기심과 이타심 사이 어딘가가 레비나스가 말하는 "박해"(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우리에게 부여되는 어떤 윤리적 요구)와 비슷한가란 생각도 했습니다.
    160쪽 "나의 경계가 어떤 한계인 동시에 어떤 인접의 장이요, 시공간적 근접성의 한 양태이자 심지어 경계성의 한 양태임을 뜻한다."
    162쪽 "내가 윤리적으로 행동할 때, 경계지어진 존재로서의 나는 허물어진다."
    이런점에서 이기심과 이타심도 타자에 의한 파괴에 취약함을 느끼면서 동시에 타자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것인 "불안정성과 취약성의 관계"도 다 맞물려 있으면서 서로 경계지어진 것 같습니다.

  • 2023-04-21 23:23

    1) p41, "그러나 비록 정의에 대한 요구가 그와같이 개별적인 요구들 하나하나 안에 존재하고 있기는 하지만, 정의에 대한 요구는 그 모든 개별적 차원의 요구를 필연적으로 넘어설 수밖에 없다."
    p142, "자신들을 위한 공적 영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필요, 욕구, 그리고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요건들을 가지고 삶을 지속하는 신체들로서 자신들의 존재를 주장하기도 한 것이다." ~~"세계가 거기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인식하기를, 그 지지를 알려주기를, 그리하여 혁명적 행동 자체로 진입하기를 탄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르는 부분을 표시하다보니, 비슷한 내용이 표시되었네요. 이 두 문장의 뜻이 개별적인 요구를 한다할지라도 또는 사적인 영역의 행동들이 공공장소에서 표출되더라도 필연적으로 그 개별적 요구사항을 넘어서서 정권을 붕괴시키는 행위로 확장될 수있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분이 사라지는 그런 방식으로 이해하면 되는 걸까요? 저임금 노동자들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개별적인 요구라 할지라도 필연적으로 차별적인 부당함에 대한 이의를 제기할 수 밖에 없다?라고 해석하면 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2) 젠더 수행성과 집회 수행성을 수행성 측면에서 동일하다고 말하는거 같은데요? 허락된 권리가 없을 때 권리를 주장하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수행적이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이것은 불안정성에서 기인해서 이에 맞서 행동하는 방법이다라고 말하는 듯한데 맞나요?

  • 2023-04-22 00:10

    1. 버틀러는 아렌트를 차용하면서 비판하고 있습니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 에서 인간의 활동적 삶의 근본 활동을 노동, 작업, 행위로 구분하고 있는데요. 이 중 노동은 사적 영역, 작업과 행위는 공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고, 이 두 영역을 분리하면서 근본 활동(노동, 작업, 행위)에도 위계를 설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에 버틀러는 아렌트가 말하는 '사적 영역 안에서 우리는 욕구의 문제, 삶의 물질적 조건의 재생산 문제, 일시성, 재생산, 죽음과 같이 불안정한 삶과 관련되어 있는 여러 문제들을 발견할 수 있고(173), 복수의 신체들이 지속적으로 '기본적인 육체적 필요들에 정치적, 공간적 조직을 내어주면서'(142) 권리를 가질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는 주장을 여러 차례 강조하면서 이분법을 해체하고 있습니다. 버틀러가 말하는 '지속성'은 권리의 요구를, 출현을, 연대를 지속해야한다는 의미를 넘어 아렌트가 말하는 '사적 영역(노동)의 유한성과 일시성'을 전복시키는, 즉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의 우리의 지속성이 지속적인 상호의존 관계들의 기반에 달려있'(127)을 수밖에 없고 그러한 생존에 필수적인 활동들, 그 생명력이 어떻게 일시적일 수 있는지를 비틀어버리기 위한 의도적 사용인가요? 또 공적 영역(작업, 행위)의 역사성이라는 지속성을 취하는 의도일까요?

    2. <집회 수행성 이론을 위한 노트>는 제가 하는 세미나 <20세기의 매체철학>과의 연결 지점이 많아서 더 흥미로웠습니다.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하이퍼리얼, 실재' 이론을 버틀러의 문제제기로 정리해보면, '젠더라는 본질(원본)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젠더규범이 만들어낸 환상(시뮬라크르)이 너무나 하이퍼리얼이서 그 환상이 실재라고 믿고 살았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차이점이라면, 장 보드리야르는 모든 세계는 시뮬라크르라며 극허무주의 입장에 머무르지만, 버틀러는 젠더수행성 개념으로 전복적인 효과를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셜 맥루언은 시각 중심의 매체를 공감각(촉각)적 매체로의 전환, 인간과 기계의 상호작용성, 매체와 감각을 연결한 인간의 확장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요. 버틀러는 매체에 대해 '시위와 미디어 보도는 각기 다른 행동이지만 그것들은 모두 신체를 필요로 한다'(137)고 말하고 있습니다. 매체를 보도를 위한 매개체나 공간이동적 측면을 넘어 연대하는 '신체들'에 새로운 다지털 매체들도 포함시키는 논의까지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이미 우리의 신체는 그 매체와 결합된 '사이보그적 신체가 아닌가요?

  • 2023-04-22 00:59

    2,3장 발제문입니다

  • 2023-04-22 01:48

    들어가며-1장 요약입니다.

  • 2023-04-22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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