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7주차 (<동자동 사람들>)는 전원 질문 혹은 메모입니다

문탁
2023-03-30 11:43
260

이번에 커리큘럼을 짜면서 이 책, <동자동 사람들>만 검토한 건 아닙니다.

아래와 같은 책들도 함께 구입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 <동자동 사람들>을 픽한 이유는 부제 "왜 돌봄은 계속 실패하는가"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읽어가기 쉽지 않군요. 먹먹하고 답답하고 슬프고 화나고.... 

다른 책들은 못 읽겠어요. ㅠㅠㅠㅠ

 

왼쪽은 9-20 건물이고, 오른쪽은 쪽방촌 내부입니다. 단비뉴스에서 이미지 퍼 왔습니다. 아래 링크 클릭한번 해보세요 

http://www.danb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726

 

 

 

어쨌든 두 눈 부릅뜨고 읽어봅시다.

이번엔 전원, 질문을 하든, 감상을 적든, 뭐든 적어옵시다. (댓글로 직접 다는걸로. 글이 길다면 파일첨부)

 

 

 

 

피에쑤 : 여기서 쪽방촌을 '불안전성'의 공간이라고 할 때 불안전성은 영어로 precariousness... 입니다. 버틀러 때 계속 나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위태로움', '취약함', '불안전성' 등 역자마다 조금씩 다르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p265의 주 21번을 참조하세요)

 

 

댓글 12
  • 2023-03-31 10:59

    네 저는 그 불안정성에 대해 미리 예습을 해보고 싶습니다.
    클라라 한이 문제를 제기한 버틀러의 보편적이고 실존적인 차원으로 확장하는 '불안전성'은 무엇이고,
    한이 에스노그라피를 통해 불안정성이 드러나는 다양하고 구체적인 양상의 불안정성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276쪽 데리다가 선물은 "불가능한 것의 형상 자체"라고 한 부분도 말씀해주심 좋겠어요.
    제작년 읽은 나카자와 신이치 생각이 나기도 하고요.

    [동자동 사람들]에서 인상에 남는 문구는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따라서 항상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259쪽)입니다.
    쪽방촌 사람들도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인정받고 그 안에서 한 사람임으로 살아가고 싶은 것 같습니다.
    그들의 세련되지 못함, 거칠음, 투박함 등은 방치된 시간의 무게만큼 우리에게 낯선 것, 무서운 것 일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들에게 개입하려면 그들 안에 가려져 있는 그들의 "본모습"을 보려고 노력하는 개입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또 이쯤에서 소환하는 베르그손...."질의 차이가 아닌 정도의 차이다' 그들은 우리가 다른 종이 아닌 정도의 차이가 아닐까....생각해봅니다.

  • 2023-03-31 20:36

    책을 읽기 전에는 동자동의 존재를 몰랐다. 내가 생각하는 쪽방촌은 언덕 비탈길에 촘촘하게 모여있는 달동네 같은 느낌에 머물러 있었고, 서울역 바로 옆의 건물 속에 있을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서문에 등장하는 오멜라스의 벽장 안에 살고 있는 벌거벗은 아이는 상징적이다. (사회 전체가 누리는 행복과 물질적 풍요는 사회의 한 구석에 버려진채 가난, 고통, 질병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누군가의 삶을 전제한다.) 물론 나도 벌거벗은 아이를 알고 있다. 하지만 벽장 문을 닫음으로써 없는 척 하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이 되었다.

    - 공짜 짜장면은 나눠주는 것은 사람들을 자립을 막는다. 마비와 길들여짐이 일어나는 것이다. 거기에 반해 천 원의 밥값을 받는 식도락에서는 서로의 인격과 자존감을 지키면서 상호 의존을 연대를 이뤄나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는 배제의 과정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의 분배가 가능할까?
    - 정영희의 사례를 보면 돌봄이 단순히 물질적인 측면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정영희가 가진 성적 욕망은 생물학적 특성이 아닌 사회적 인정 문제로 들여다 봐야 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삶의 욕구를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부분에서 중요하다. 정영희가 이렇게 된 이유는 장애 등록의 문제와 얽혀있다. ‘지적 장애인’의 등록으로 지원금을 받지만, 또한 개인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낙인지어 버리게 되는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보고 싶다.

    저자는 타인의 고통과 가난을 쓰는 일은 괴로웠다고 적혀있는데, 나 역시도 책을 읽는 내내 그런 기분이 들었다. 타인의 가난을 들여다보면서 ‘재미있다’고 표현해도 될 것인지, 내가 가진 어떤 자원을 나누는 부분에서 어떤 고민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화두를 던져주는 좋은 책인 것 같다.

  • 2023-03-31 20:41

    작년 봄, 꽃이 피고 날씨가 따듯해서 외부 활동하기 참 좋은 날. 수급자 어르신을 만나 잠시 짧게 나눈 이야기입니다.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고, 소일거리가 주어지는 공공근로활동에서 생활의 활력을 느껴서 매일 아침이 기다려졌다는 이야기. 그러다 공공근로를 하면 수급비가 깎여서 나온다며 행정복지센터에서 공공근로를 그만두라고 하셨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한 달 기준으로 약 15만 원 정도가 덜 나오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뒤로 그 어르신은 다시 무료한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럴 때 사회복지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수급자 어르신에게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공공근로활동을 선택’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음 한 켠에 깊이 묻어두고 말았습니다.이런 식의 복지정책은, 노동을 통한 자활과 자립마저 남김없이 가로막습니다.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답답한 정책입니다. 그러니 오롯이 수급비에만 의존하는 존재로 만드는 것은, 당사자의 의지보다는 정책과 제도, 정부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더 나아질까요? 아니요.
    사회복지 현장은 더욱더 위계적이고 더욱 강한 불신 구조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뭐든지 확인 절차(예: 파스 하나를 주더라도 받는 사람의 사진을 찍고 서명을 남겨야 하는….)가 더욱 까다로워지고, 챙겨야 하는 서류는 더 많아질 뿐입니다.(IT강국에서, 기후위기상황에 종이의 낭비만이라도...ㅠㅠ)
    복지현장의 사회복지사는 함께하는 사람들을 찬찬히 들여다볼 여유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 2023-03-31 20:42

    메모 올려요

  • 2023-03-31 22:46

    저 역시 읽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20대 초반 2~3평 정도 되는 고시원에서 1년 여를 살았던 경험이 오버랩되더군요.

    1. 동자동 쪽방촌은 왜 생겨낳고 왜 지금껏 유지되며 돌봄은 왜 계속 실패하는지, 그 구조적 원인은 무엇일까를 계속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한국의 발전주의 복지레짐이 낳은 기형적 노동 위계, 구조적으로 생산된 잉여인구가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도심의 낡은 공간에 배치되어 만들어진 쪽방촌. 쪽방촌은 단순히 수급과 건강 이슈를 가진 빈자들의 집단이 아니라 우리의 현대사와 함께 공존할 수 밖에 없는 명암같은 공간으로 보입니다. 공유해주신 유튜브를 보니 건축가 유현준씨는 '쪽방촌 문제는 고차방정식이다.'라고 말하던데, 해결이 어려운 문제라는 의미겠죠. 재개발의 투기자본, 당장의 월세수입이 필요한 '빈곤 비즈니스' 소유주들, 이미 동자동 쪽방촌(의 '환경')에 마비되어 떠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 행정기관, 그리고 방관자들. 우리 모두는 아마도 여기 중 하나에 속하겠죠? 알고는 있었지만 애써 더 알고 싶지는 않아 묻어놓던 마음을 들킨 것 같기도 합니다. 아~ 오멜라스

    2. <차정정>을 읽은 직후라 연관해서 생각해보면, 피억압집단 동자동 쪽방촌(집단) 거주민들에게 지원물품 제공하거나 저렴쪽방 사업으로 방값을 할인해주는 등의 분배만의 방식 대신 분배를 포함하여 의사결정 구조, 노동 분업의 개선, 문화 측면의 다른 해법도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3. 비난과 헐뜯기(193)에 담긴 함의와 그 기능에 대해 설명한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보통 비난과 헐뜯기는 고약한 성격, 인정머리없음이나 예의없음으로 받아들여왔지, '돌려주어야 한다는 의무에 응답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는 인격 손상을 방지하기 위함'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거든요. 엄청 좋은 선물임을, 얼마나 어렵게 구했는지 생색냈던 과거의 경험이 떠올라 이불킥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닌 척하기'로 인해 불필요한 위계가 형성되지 않도록 하고 오히려 위계 관계를 역전시키기 까지 가능하다니. 인격과 자존심이라는 게 정말 징글징글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되돌려주지 못하더라도 감사히 받을 수는 없는 것일까요? 사회복지 실무 현장에서도 비난과 헐뜯기의 사례가 관찰되는지요? 괜찮으시다면 두 분 선생님께 묻고 싶습니다.

    4.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정의대로 도시를 단지 '물리적 환경만이 아니라 문화적 실천, 지적 회로, 정동적 네트워크, 사회적 제도들의 살아 있는 역동체'로 본다면, 동자동 쪽방촌은 법적 권리가 있는 소유주는 물론 쪽방촌 거주민들, 주민자치조직 활동가들 등 공동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설명도 인상깊었습니다. 거주민으로서 목소리를 내고 인격과 자존심을 찾기 위해서 소극적인 비난과 헐뜯기 보다 적극적인 권리 주장 투쟁 쪽으로 '정체성 정치'의 방향성을 설정할 수는 없을까요?

    5. 비혈연가족 정임합목 양생하우스 구성원으로서 동자동 쪽방촌 거주민들에게 따라 붙어있는 (수급과 무연고 장례에 있어서) '혈연가족의 규범 바깥에 놓여 있다는 비정상의 낙인이 남일같지 않았습니다. 가족 이외의 사회적 관계에 해당하는 "시신이나 유골을 사실상 관리하는 자"는 연고자의 최하순위에 속한다(122)는 사실도요. 1인가구, 다양한 가족형태의 출현으로 '관혼상제례'의 변화 역시 진행 중인데, 이 중 가장 더딘 것이 상례입니다. 나이듦연구소의 공동주거 실험에서도 장례식과 관련한 더 다양한 상상력을 기대합니다. 같이 고민해요.

  • 2023-03-31 23:25

    "큰언니를 포함한 가족이 정영희에게 제공하고자 한 돌봄과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제공하고자 한 돌봄은 서로 다른 '삶의 형식(form of life)'을 전제한다. 돌봄의 실천은 어떤 형태의 삶이 돌봄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암묵적 결정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각각의 돌봄이 개입하고자 하는 모습 역시 다르게 나타난다." 62쪽

    작년 하반기에 아랫마을 홈리스 야학에서 활동했다. 매 주 한 번씩 '표현하는 권리숲'이라는 수업을 다른 활동가 분들과 진행했다. 학생들과 홈리스 인권에 대해 공부하고 간단히 연극을 만들어보는 수업이었다. 수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닉네임+나무'로 불렀다. 한 분 한 분의 나무들과 길게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한 주 동안의 근황이나 수업 주제와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 서로의 일상을 공유했다. 무언가를 새롭게 배우기 시작한 나무, 등산을 다녀온 나무, 시위에 참여한 나무, 아파서 병원에 다녀온 나무. 수업 끝나고 귀가 길에 서울역 13번출구까지 매번 동행했던 나무도 있었다. 그는 담배를 피우며 내게 쉬지 않고 말을 건냈다. 말이 엄청 빠르고 발음이 뭉게져서 거의 알아듣지 못했지만 뭔가 엄청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것 같아서 헤어지기 전까지 계속 끄덕이고 호응했다. 종강 때 그는 내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써줬다.

    책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만났던 나무들이 떠올랐다. 수급자, 무연고 장례, 고시원, 쪽방 이야기는 낯설지 않았지만 연구자의 문화기술지를 통해 더 다양한 맥락들을 볼 수 있었다. 가족과 제도 밖에서 돌봄은 어떤 식으로 개입할 수 있을까. 동자동은 많은 것들이 얽히고설켜 형성되는 '환경"(푸코와 캉길렘)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욕망은 복잡한 관계 안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돌봄의 실천도 단순할 수 없을 것이다. 동자동에서 차이의 정치와 정의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 고민해보고 싶다.

  • 2023-03-31 23:47

    메모 올립니다

  • 2023-04-01 00:34

    강영섭과 최경철의 이야기가 가장 인상 깊었다. 이 이야기 안에는 우리나라 의료제도의 헛점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우리나라의 공공 의료 기관 수가 적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OECD 평균과 비교했을 때 10배 가까이 차이가 나고 있어서 무척 놀랐다(한국의 공공 의료 기관 비율은 전체 병원 수의 5.7%, 전체 병상 수의 10% vs OECD 평균은 52.4%, 71.4%). 여기에 의료 공급은 민간이 하지만 의료 보험의 보장성은 매우 높아서 비용은 공공이 부담하는 의료 체계의 모순적 구조와 전문가주의 그리고 기초생활수급 제도의 맹점까지 더해져 최경철씨가 요구받았던 기다림과 이동이 강영섭의 고생스러운 돌봄 제공과 함께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무연고 장례절차는 전혀 몰랐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행정적 절차 때문에 영안실에 1~6개월정도 방치되어 화장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대목을 읽을 땐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화장되어 공동유골함에 섞이거나 봉안되더라고 10년 뒤 폐기되고 있는지 몰랐다. 강영섭이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최경철의 장례를 무연고 장례로 치르지 않은 이유였다. 이 글을 읽으면서 비혼인 나도 무연고 장례를 치를 가능성이 전혀 없진 않겠구나… 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이어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누가 나의 장례를 치를까 하는 생각까지 이어졌다. 혈연가족이라는 규범이 복지제도에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강영섭은 우정과 도리로 최경철의 연고자가 됨으로써 그의 죽음을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제도적 기준을 우회했다. 강영섭의 돌봄은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에게 남은 것은 큰 경제적 부담과 건강악화였다. 아이리스 메리언 영이 말하는 정의가 생각났다. 분배적 관점으로 보자면 의료보험 제도와 무연고 장례 제도는 정부입장에서는 충분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최경철의 존엄을 생각한다면 분명 분배적 정의를 넘어서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최경철, 강영섭을 포함 동자동 사람들이 겪는 억압은 무엇일까? 착취, 주변화, 무력함, 문화제국주의, 폭력 다 해당항텐데.. 그 중에서 주변화와 무력함이 가장 클 듯 하다.

  • 2023-04-01 01:07

    1. 책을 읽으면서 첫번째 놀랐던 점은 1970년경 동자동에 거주하던 2700여명의 주민이 광주대단지로 이주했다는 사실이었다. 광주대단지는 지금의 경기도 성남시 일대이다. 나는 성남 출신이다. 그래서 동자동 사람들과의 연결성이 발견되는 이 지점에서 놀랐다. 내가 기억하는 성남은 고바이(일본식 '오르막길')가 많고 밀집지역의 주택가로 되어있다. 하지만 다 같은 구조의 집은 아니였다. 책에도 동자동도 새꿈어린이 공원을 기준으로 나누듯이 침수가 자주 일어나는 아랫동네는 좀 더 밀집주택가였고 윗동네는 나름 앞마당이 아주 살짝있을 정도의 주택가였다. 성남은 서울로 임금노동하러가는 노동자들에게는 저렴한 주거지였다. 서울인근지역 산성동, 태평동, 수진동, 그리고 서울로 나가는 곳은 아니였지만 공장지대가 많은 상대원동, 이런 곳은 정말 밀집의 초밀집이였다. 약 30~40년전 이야기이다. 지금은 여기도 재개발의 열풍이 불어 엄두도 못내는 금싸라기땅이 되었다. 또한 공장은 예전에 있던 빵공장, 시멘트 공장등등이 사라지고 IT형 기업으로 업종이 변경되고 저임금 노동이 필요로한 일자리가 사라졌다. 재개발이 추진된건 훨씬 후에 일인데 그 낙후되어있던 그 지역의 사람들은 어디로 갔던 것일까? 지금에서야 내가 살던 성남에 무슨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2. 혈연가족주의, 자립과 자활의 서사, 의존의 낙인 등 복지수혜자가 되므로써 감내해야하는 윤리적 낙인과 부정적 시선이 문제라는 지적에 동의하지만 이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사회적 삶이라는 형태가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다. 정영희와 홍인택의 이상한 연결성, 강영섭이 최경철에게 보였던 지나친 정체성 공유, 상호연대가 배제로 재생산되는 상황, 비난과 헐뜯기는 자신의 욕구와 정체성에 너무 집착한 행동이 아닐까 반문이 생겼다. 어떻게 바라봐야하지?
    저자는 이러한 관계성을 '취약함'이라고 표현한다. 관계가 쉽게 단절되거나 공동의 정체성이 미약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더 강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말하는 '관계의 취약함이란 주민들의 사회적 연결이 역설적으로 그 내부에 부분적인 자기 파괴를 동반한다는 점이다'이다. 저자는 '쪽방촌에서 형성되는 사회적 관계는 서로에 대한 인정과 의존의 일부이지만, 동시에 가난한 이들의 삶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누구나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필요성 속에서 계속된 사람됨의 부정, 상호 돌봄과 사회적 관계의 박탈은 온전한 삶으로 이어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상당부분 동의가 되었다.

  • 2023-04-01 04:44

    차이의 정치와 정의를 읽으면서 내가 직간접으로 접했던 자활사업 참여 주민들을 피억압집단으로 봐야할까…그들이 왜 수급권자로 유입되었는지 개인의 역사적 과정과 사회적 맥락을 본다면 명백히 피억압집단일 수 있겠다. 그런데 이들을 사회집단으로 볼 수 있을까?하는 부분에서는 아리송했다. 자활사업에 함께 참여한다는 면에서의 친연성은 있으나, 거주지가 서로 다르고, 각자의 거주지에서의 삶은 보편적 삶 속에 섞여 구별되어질 수 없을 것이므로.

    반면 동자동 쪽방에 사는 주민들은 명백히 지리적, 사회적 환경 속에서 하나의 사회집단으로 구분될 수 있겠다고 보여짐. 또한 그들의 특이성 대부분 일반수급자로서 노동시장에 참여하고 있지 않고 모여있으며, 주거환경, 지원 제도의 부족함, 기타 질병과 파괴적 돌봄 속에서의 위험이라는 말할 수 없는 취약함이 때로 공공적 이슈로 다루어지고, 그에 따라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 정치성을 갖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반면 제도권 내에서 자활근로에 참여하며, 가구별 최저생계비 소득+교육 or 의료 or 주거 급여를 수급하고 있는 자활사업 참여 주민들은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더 차단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됨. 제도권 혜택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으로 주어지는 수혜자로서의 위치라는 점. 각 지역자활센터에 소속되어 철저히 관리 통제되고 있다는 점이 이들의 존재를 사회적으로 드러내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벽장 안의 아이와 자신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아이의 고통 위에서만 자신의 행복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연결이 어떠한 공통의 구조 위에서 등장하는지 ‘지금 여기의 모습’을 이해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261)

    나는 그들과 우연한 기회에 직업적으로 연결되었다. 벽장 안의 아이가 있다는 사실, 아이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아야 된다는 직업적 사명감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이 자유주의적 혹은 계몽적 실천에 불과했지 않았나(물론 제도적 한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는 생각과, 상대적으로 나의 먹고사니즘 속에서 그들은 타자화되었다(나는 절대 그들처럼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결국 나도 오멜라스의 시민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그들과의 새로운 연결성을 위해 그들의 불안정성을 다시 이해할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 졸려서 횡설수설합니다.

  • 2023-04-01 06:55

    정상과 병리, 생명과 질병은 오직 “사람들이 환경과 맺는 총체적인 관계에서 경험하는 사실들”에 근거해 이야기할 수 있으며 개체는 환경과의 관계에서 각자의 특이성을 만들어나간다.(36)
    :<동자동 사람들>이 쪽방촌이라는 환경과 맺는 ‘총체적인 관계에서 경험한 사실들’이 쪽방촌이라는 환경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책을 읽는 내내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속해 있는 환경에서 혹은 비혼의 1인 가구라는 조건이 대한민국이라는 환경에서 어떻게 경험되고 있을까? 최근에 나는 지방에서 사회복지과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친구의 톡을 받았다. 1인가구이면서 임대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고 소득이 낮으니 주거급여를 신청해 보라는 거였다. 그러면서 관할 동사무소 복지팀에 갈 때 어떤 서류들을 들고 가야 하는지, 가서 어떻게 응대해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그 얘기를 들으며 처음에는 그래? 하면 솔깃했다. 근데 친구의 설명을 들을수록 챙겨야 하는 서류는 많고, 동사무소까지 가서 해야 하는 시간도 들여야 하고 등등으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그 사이 친구는 가봤느냐는 톡을 한 번 더 했다. 나는 시간이 없었다며 꼭 가보겠다고 했다. 이번 책을 읽으며, 내가 처한 상황을 대해 친구가 인식하고 있는 것들이 머지않아 대한민국 안에서 나를 규정하는 구체적 내용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러 상황으로 보아 언제든 빈곤으로 내몰릴 수 있는 처지, 그러기 전에 혹은 그 상황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로 복지 혜택에 관한 정보를 얻고 그것을 실행해서 안정적인 수혜를 받도록 조치하는 것. 이런 실행이 언젠가 닥칠지도 모르는 빈곤을 막을 수 있는 안전판이 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은 후에 든 생각은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른 대안을 물을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는 저자의 결론에 공감했다.

  • 2023-04-01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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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9일세미나] <감정의 문화정치>1~2장 발제와 메모 (9)
겸목 | 2024.03.08 | 조회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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