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 지구와 행성을 동시에 사고하기
에어컨 논쟁
올여름 서유럽에서는 40도가 넘는 폭염(暴炎)으로 ‘에어컨 논쟁’이 벌어졌다. 에어컨에 대한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 2024년 파리 올림픽 당시에 에어컨이 없는 선수촌이 문제가 되었었다. 그때 프랑스는 파리의 평균 기온이 26.5도라는 것, 선수촌 아파트가 지열 에너지를 이용해 실내 기온을 떨어뜨리는 시스템을 사용한다는 점을 들며 에어컨이 따로 필요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안을 식히기 위해 밖을 덥히는’ 에어컨의 사악함을 문제 삼았다. 에어컨 사용이 지구온난화를 가속화 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정이 좀 다르다. 최고 40도가 넘는 폭염이 6월 말부터 이어지면서 사망자가 다수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에 선풍기와 에어컨의 판매가 급증했는데, 그러자 에어컨 설치에 대한 찬반 논쟁이 일었다. 프랑스는 1971년 세계 최초로 환경부를 설립한 나라로 기후변화와 관련하여 에어컨 설치에 대한 규제가 까다롭다. 여기에 오래된 건축물이 많아 실제로 에어컨의 설치가 어렵다. 하지만 폭염이 2주 이상 지속되면서 에어컨 도입에 대한 새로운 정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특히 학교나 병원 등의 에어컨 설치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에 많은 이들이 동의하고 있다. 이 문제는 정치권 내에서 이념 공방으로 발전했으며 내년에 치러지는 대선에 ‘에어컨 규제 해제’가 주요 쟁점으로까지 떠올랐다.

우리나라도 지금은 에어컨이 필수 가전제품인 듯하지만 사실 얼마 전까지도 에어컨은 좀 사는 집에서나 사용하는 가전제품이었다. 내 기억에 15년 전만 해도 아주 더운 날이 일주일 정도였는데, 그때를 제외하고 굳이 에어컨이 필요 없었던 듯하다. 그래서 남편이 여름이면 우리 집에도 에어컨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을 때 나는 일 년에 열흘 정도 쓰자고 좁은 집에 에어컨을 지고 있을 거냐며 에어컨 구입을 반대했다. 물론 비싼 전기 요금도 걱정이 되었고, 실제로 더운 공기를 뿜어내는 실외기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다. 하지만 이후에 덥고, 습한 날이 계속 이어지면서 결국 우리 집에도 에어컨이 들어왔다.
차크라바르티의 《행성시대, 역사의 기후》를 읽다 보면 에어컨에 대해 좀 더 복잡한 마음이 들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 바로 인도 델리의 에어컨에 대한 이야기이다.
“또 다른 노동자 계급 가족이 집으로 첫 에어컨을 가져올 때마다 어떤 전율이 델리 카말푸르 C 블록 12번지로 내려 갑니다. 보통 온 가족이 자는 방을 식히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전원을 켜면 5월에 열이 117도(섭씨 약 47도)에 달하는 이 숨 막히는 콘크리트 미로의 삶이 바뀌죠” 《행성시대 역사의 기후》, 162쪽
인도의 에어컨은 입시 공부를 할 수 있게 하고, 병을 옮기는 모기에 덜 물리고, 열탈진과 같은 건강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다. 경제학자 마이클 그린스톤의 보고에 의하면 1960년에서 2004년 사이에 미국에서 에어컨은 더위로 인한 사망자수를 80%로 감소시켰는데, 같은 기간 인도에서 에어컨 사용으로 줄어든 사망자 수는 미국보다 25배가 많다.
기후 위기를 생각하면 에어컨을 덜 사용하는 게 맞긴 하지만 생존을 위협하는 폭염에 맞서 에어컨을 사용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것도 쉽지 않다.
차크라바르티와 인류세
이번 문*맥에서는 9월 19일에 있을 ‘기후정의 행진’을 주제로, 차크라바르티의 《인류세에 대하여 인문학이 답하다》를 함께 읽었다. 디페시 차크라바르티(Dipesh Chakrabarty, 1948~)는 인도 출신의 역사학자로 서벌턴 연구와 인류세 연구로 주목 받는 인문학자다. 그는 2000년 서구 유럽의 근대성을 보편적인 것으로 보는 관점에 문제를 제기한 《유럽을 지방화하기》로 유명해졌다. 이후 2003년 오스트레일리아의 대규모 산불을 계기로 기후변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그는 2009년 〈역사의 기후: 네 가지 테제〉로 인류세 인문학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인류세에 대해 인문학이 답하다》는 2024년 출간된 책이지만, 2015년 미국의 예일대학에서 행한 강연 “인류세의 인간의 조건”의 원고를 번역한 것이다.

위의 세 책은 모두 하나의 프로젝트로 기획된 것으로 함께 읽으면 도움이 된다.
인류세(Anthropocene)는 인간 활동이 지구 환경과 지질학적인 기록에 흔적을 남기게 되어 새로운 지질시대를 열었음을 의미하는 명칭이다. 공식적인 명칭은 아니나, 기후변화, 생물다양성 훼손, 플라스틱과 같은 인공 물질의 퇴적,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인한 사회 경제적 문제들을 다루기에 적합하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차크라바르티가 인류세에 주목하는 데는 기후변화에는 ‘인위적’이라는 것 이외에 “지구라는 행성에 인간이 아닌(nonhuman), 살아 있지 않은(nonliving) 벡터들에 주도되는 사건”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류세 논의는 비록 인간 활동을 주로 문제 삼고 있지만 그 피해나 영향은 기후, 지형과 지질, 그리고 다양한 생물종을 아우르고 있기 때문에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차크라바르티는 이러한 인류세 시대에는 그가 공부했던 역사 연구 방법, 즉 ‘인간사’와 ‘자연사’를 구분하는 방식으로는 현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인간사와 자연사를 통합하여 새로운 ‘지구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는 인간의 역사 이전의 시대, 즉 지질시대까지를 거슬러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차크라바르티는 ‘지구(globe)’와 ‘행성(planet)’이라는 용어를 구분해서 사용한다. 그는 지구온난화라고 할 때의 지구는 인문학적으로 사용하는 지구와 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깨달음을 바탕으로, 이때 지구는 ‘대지 시스템’으로 “행성에서 지질학적 요인과 생물학적 요인이 결합한 복잡한 다세포 생명을 뒷받침하는 시스템”으로서의 행성이라고 말한다. 그가 이렇게 지구와 행성을 구분하는 데는 ‘지구적인 것(global)’과 ‘행성적인 것(planetary)’의 구분을 통해 현재 기후변화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지구적인 것’은 인간중심적인 것을 말하는데 인간을 중심으로 놓고 보면 지구는 인간이 살기 위한 곳이 된다. 따라서 기후변화에 대한 대처도 인간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인간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대책을 세우기 마련이다. 그러다보면 각기 살고 있는 곳의 정치, 경제, 문화적인 차이를 바탕으로 논의가 일어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행성적인 것' 즉 탈인간중심적으로 보자면 지구/행성는 인간을 위해 이러한 지질학적 조건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조건에 우연히 ‘거주 적합성’을 획득한 인간이 살게 된 것이다. 이러한 거주 적합성은 인간만 얻은 것이 아니고, 지구/행성에는 이러한 적합성을 얻은 다양한 생물종이 함께 살고 있다. 게다가 이 거주 적합성은 각각 독립된 개체에 적용되기보다 그들이 엮어내는 그물망과 같은 형태로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행성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 중심’에서 ‘생명 중심’으로 그 관점을 옮기는 것이다.
공통적이지만 차별화된 책임
그렇다고 차크라바르티가 ‘지구적인 것’은 중요하지 않고 ‘행성적인 것’만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니다. 단지 이러한 지구적인 것, 인간을 중심에 놓고 이루어지는 정치적인 논의는 꾸준히 논의되고 있는 반면에 정말 우리는 기후변화를 공통의 위기로 인식하고 있는가를 질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공통적이지만 차별화된 책임(common but differentiated responsibilities)”은 리우지구정상회의(1992)와 쿄토의정서(1997)에서 채택된 이후 기후변화와 관련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라 할 수 있다. 기후변화에 대한 책임은 모두 공통으로 져야 하지만 이미 산업화를 끝낸 선진국과 이제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 간에는 그 책임이 똑같이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책임의 문제는 점점 기후변화에 따른 재난의 피해 규모가 커지고, 온실가스를 가장 적게 배출하는 저소득층이나 원주민과 같은 계층에 그 피해가 집중되면서 ‘기후정의’로 대두되고 있다. 얼마 전 일어난 네팔의 대규모 홍수 피해도 기후변화로 인하여 빙하가 붕괴되면서 일어난 참변이다. 네팔은 세계 온실가스 배출 비중이 0.1퍼센트에도 못 미치는 유엔이 지정한 최빈개발국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이 일에 대한 책임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현재 온실가스 배출이 가장 많은 중국, 미국, 인도가 책임져야 하는 일일까? 그러나 인도의 에어컨 사용은 위생적이고 건강한 환경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후정의’는 한편으로는 그 에너지의 사용 역시 불평등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공통’의 기반에서 기후변화를 사유할 수 있을까?
“저의 사고 실험 배후에 있는 질문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위험한 기후변화로 인한 불평등하고 불균등한 위기에 직면해 있을 때, 경쟁적이고 충돌하는 행동에 영향은 주지만 결정하지 않는, 그러한 공통의 시점을 구축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인류세에 대해 인문학이 답하다》, 13쪽
기후변화로 인한 위기의식을 야스퍼스의 ‘시대 의식(epocal consciousness)’으로 보고자 한 차크라바르티는 여기에 ‘전(前)-정치적’이라는 상상의 공간에 주목한다. 즉 정치적 사고 이전에 가져야 하는 공통적인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행성’은 차크라바르티의 이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나왔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치적인 논쟁은 분화될 수밖에 없다. 차크라바르티는 하나의 인류, 하나의 세계는 허상에 가깝다고 본다. 각각 다른 자연환경, 역사적 배경과 고유한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후변화에 대한 대처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동시에 하나의 ‘대기 시스템’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지구/행성 안에는 인간/비인간과 더불어 다양한 지질학적 요소가 함께 ‘거주 적합성’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덥다고 에어컨을 켜면 기후변화에 영향을 줄 것이고 이는 어디에 어떤 재난을 일으키게 될지 모를 일이다. 따라서 ‘행성적인 것’으로 우리는 기후변화를 사고 할 수 있어야 한다.

네팔에 발생한 갑작스러운 홍수로 인한 피해를 소년이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천천히, 시끄럽게 벌이는 논쟁
차크라바르티가 다른 환경론자들과 다른 점은 이 두 가지의 곤경, 기후변화와 관련한 불평등의 문제와 행성으로서 대기 시스템 안에 살아가는 우리를 함께 논하는 점이다. 더욱이 이 두 곤경은 하나를 없애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두 개의 곤경이 인류세를 살아가는 우리 삶의 조건이라고 본다.
유럽의 폭염으로 에어컨 논쟁이 일었을 때 내가 인상적으로 보았던 건 이러한 ‘논쟁’이 일었다는 그 자체였다. 폭염으로 사람이 많이 죽었으니 에어컨을 당장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과, 절대 설치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편이 정치적으로 공방이 일었다는 사실이었다. 거기에 환경부 장관이 에어컨 설치는 지구를 더 뜨겁게 만들기 때문에 신중하게 논의되어야 한다고 했다.
사실 환경문제는 많은 부분 기술적으로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에어컨은 현재 사용되고 있는 냉매(HFC/수소불화탄소)가 이산화탄소보다 지구온난화에 훨씬 많은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때문에 수소불화탄소를 에어컨 냉매로 사용하는 것을 2030년에 금지한다는 목표로 각국에서 친환경 냉매 연구와 개발에 힘쓰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은 기술적으로 언젠가는 해결될 가능성이 높다. 차크라바르티도 기술에 관한 문제를 언급했다. 기술이 인간의 생존과 이미 결부되어 뗄 수 없는 것으로 ‘기술권(technosphere)’을 형성한다고 했다. 기술은 이제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 비인간을 매개하며 생태, 사회, 경제를 규정한다. 에어컨을 설치하자고 주장하는 한편에는 이러한 기술에 대한 기대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내가 경험한 바로 기술로 해결한 환경문제는 바로 다른 문제를 일으키기 일쑤였다. 한때 “원전 대신 태양광 발전”이라는 구호에서 보이듯이 태양광 발전은 안전하고 친환경적이라고 다들 생각했다. 하지만 태양광 집전판을 만들 때 심각한 중금속 오염이 일어나며, 대단위로 설치할 때는 생태계 교란 문제가 발생하는 간과한 것이다. 물론 중금속 오염에 관한 문제는 현재 기술적으로 많이 해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환경문제에 대한 별다른 해답이 있지 않고 그저 에너지 사용을 줄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환경문제는 언제나 우리가 알게 혹은 모르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들 앞에서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에 대해선 속 시원하거나 명쾌한 답이 있을 수 없다. “답답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 차크라바르티는 이에 대해 오히려 이런 긴장감을 유지해야 한다고 한다. ‘지구적인 것’과 ‘행성적인 것’은 어느 하나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늘 이 두 개의 긴장 속에 있음을 일깨워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네팔의 참사를 보고 함께 분노하고 슬퍼하는 것은 우리가 기후변화에 공통의 책임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잠깐 멈추어서 생각해 보자. 네팔 참사에 우리는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에게 얼마나 많은 관심을 쏟고 있을까?
‘지구적인 것’에서 ‘행성적인 것’으로 관점을 바꾼다는 것은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천천히, 더 많은 것들을 고려하길 요구한다. 에어컨 설치의 문제도, 데이터센터 건립에 관한 문제도 네팔 참사를 복구하는 문제에서도 빠른 해결이 아니라 행성의 ‘거주 적합성’에 맞는 해결인지를 천천히, 그리고 시끄럽게 논쟁해야 하는 것이 인류세 인문학의 역할이다.

진달래
어쩌다 보니 나름 동양고전이라는 한 우물을 파게 되었다. 고전에 대한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고 느껴서 올해는 고전과 지금의 언어를 엮는 데 힘을 써 보려고 한다.




프랑스의 경우 에어컨을 보급하는 정책과 함께 제동을 거는 보수주의자들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대부분이 중산층인.. 그리고 프랑스도 북유럽도 청정지역인 건 제조업을 제 3국가로 넘겼다는 제국주의 성향도 드러나는 듯 해요. 따지고 보면 행성적인 것 같은 나라들도 사실은 지구적이지도 행성적이지도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아요.
이 지구에는 인간만 사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도 살고 있으니
지구적인 사유와 행성적인 사유가 동시에 가능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드네요.
"살려주세요!" 이번 여름 베를린이 40도였을 때 제게 보내온 딸의 문자였어요. 딸은 하루종일 달궈진 콘크리트 기숙사 건물에서 밤새 잠도 제대로 못자고, 잘 먹지도 못해 결국 병원까지 다녀왔어요. 일주일 폭염에 딸의 일상과 건강이 무너졌습니다. 에어컨은 고사하고 선풍기도 없는 방에서 어떻게 지냈을지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기후위기는 이제 인류가 해결해야할 최우선 과제가 되고 있는데, 행성적인 관점에서 논의가 되고 해결책이 나오기를 바래봅니다.
책을 읽으면서 행성적 관점을 가지는 것에 대해 내내 '답답했던 것'은 사고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은 느끼는데, 여전히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입니다.
아직도 인류중심의 과학적 해결책을 구하는 사고 때문인가요?
제가 이해한 행성적 관점으로 보면, 인류세에 이렇게 자원을 낭비하는 인류와 그 유탄을 맞은 생물체는 소멸하고 새로운 생물/무생물이 이 행성에서 살아 가는 것도 타당한(?) 듯 합니다. ㅎㅎ
기후변화와 관련한 불평등의 문제와 행성으로서 대기 시스템 안에 살아가는 우리
삶의 조건이 된 이 두 곤경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지...
생각은 넓어지는지 모르지만 작은 불편도 참지 못하는 일상을 보면 한심하기도 하고...
네팔이 이번 대홍수의 피해에 대해 중국, 인도, 미국에게 그 책임을 물었다고 합니다.
이번 피해에 대해 '원조'의 형식이 아니라 '정의와 보상'으로 외교를 전환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문제는 '기후정의'와 관련하여 중요한 전환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네요...
지구적 사고와 행성적 사고가 어떤 때는 잘 알 것 같다가도 금방 알쏭달쏭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