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례없는] 논어 수강 후기

영감
2021-10-30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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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안회를 이뻐한 이유는 그가 시험을 잘 보거나 논문을 잘 썼기 때문이 아니다.

논어에는, 안회가 배운 것을 실천하는 모습에 공자가 감탄하고 극찬하는 구절들이 나온다.

 

언행을 보니 나의 뜻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고, 吾與回言終日, 不違, 如愚. 退而省其私, 亦足以發, 回也不愚 위정 편 9

마음이 석 달씩이나 인을 떠나지 않았다. 回也, 其心三月不違仁, 其餘則日月至焉而已矣 옹야 편 5

 

실력과 겸손은 양립하기 어려운 가치다.

학식의 깊이와 오만이 비례해서 태만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목격한다.

 

우리들의 우응순 선생님은 공자의 사상을 가르치면서 스스로 겸손을 실천했다.

평생을 연구해서 일가견을 이룬 학자가 ‘이번에는 유례없는 강의’라고 예고하며 마치 대학 입시 재수생처럼 벼르셨다.

겸손, 열정, 그리고 진정성 없이는 불가능한 ‘학문적 선전포고’에 해당한다.

 

내가 놀던 바닥에선 이런 경우,

‘내가 이런 거 가르칠 군번은 아닌데 아무개가 하도 졸라서 한 번 해보기는 하지만 잘 따라올지 모르겠다’로 시작하며 학생들의 기를 꺽어놓기 일수다.

 

아니나 다를까 예고한 대로 우리는 선생님의 집중포화를 받았다. 좌전과 맹자의 곡사포에 주역, 서경의 미사일까지 날아들어 혼비백산했다.

논어가 참 재미있다는 선생님의 감탄에 나는 소외감과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다른 학생들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그러면서도 우 선생님은 학생들의 반응을 세심하게 관찰하며 눈높이를 조절하는 배려 또한 잊지 않으셨다. 다만 무릎을 굽히고 학생에게 맞추는 눈높이가 아니라, 학생의 귀를 잡고 끌어 올려서 선생님에 맞추는 눈높이 교육이었다. 귀는 좀 아프지만 덕분에 우리는 지적으로 성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에 공자님 댁을 들러서 오신듯한 현재 진행형 상황극으로 2500년의 세월이 압축되었다. 덩달아 우리는 제자들과 동격이 되어 자장子張 정도는 손아래 막내 동생으로 여기는 건방짐도 생겼다.

 

논어를 처음 배우는 나는 유/무례를 비교할 ‘사례’가 없고 안목도 부족하다. 하지만 짬밥과 통밥이 있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유례없는, 우리만 듣기 아까운 논어 강의를 들었다.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이 부분만은 외우라고 하실 때마다 좀 이상했다.

우리는 몽땅 외우거든요….

 


 

어려서 국민학생 시절, 할아버지 앞에 마주 앉아 있을 땐 뭐라도 써야 했다. 그게 룰이었다.  A4 크기로 썰어 놓은 신문지에 먹을 갈아서 쓴 게 뭐였는지는 생각이 안 나는데 구구단도 있었던 거 같다. 그때 할아버지 책상에 쌓여있던 책 중에 논어도 있었을까?

 

그동안 이문서당 학생 몇 명이서 매주 배운 원문 구절을 외워서 쓴 다음 사진을 찍어 카카오톡에 올렸다. 이른바 ‘미친 복습단’이다. 우리 팀은 오늘 마지막 구절의 암기를 끝내고 논어를 졸업했다. 정말 ‘미쳤’나보다.

 

논어의 원문이 다해서 만 육천 자 정도가 된다는데 나이가 드니 한 번에 300여 자씩 외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없는 집 제사 돌아오듯 일주일이 지나갔다. 외우는 시간은 길어지고 잊어버리는 건 순식간이다.

 

소리 내서 읽고 외우다 보니 옛 선비처럼 몸이 절로 앞뒤로 왔다 갔다 했다.

탄천길을 걸으면서도 외워봤다.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사람이 슬금슬금 피하는 걸 본 다음부터 그만뒀지만.

 

물론 여기서 '외웠다'는 현재 완료가 아니라 과거형이다. 현재성이 없다. 한 번 외웠다는 얘기이며 뒤돌아서면 머릿속에서 말끔하게 소消실된다. 시험 전날 벼락치기 한 지식처럼 짧은 시간만 보유하는 단기 기억에 속한다. 다만 외운 것을 손글씨로 옮기니까 약간은 오래간다.

 

그보다, 암기한 구절을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인용해서 표현하면 의사 전달에 도움도 되고 내용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계기가 될 것 같다. 고도의 사고력을 요구하는 말을 통해서 재현할 때 단기 기억이 장기 기억으로 전이된다고 한다.

 

군자불기君子不器처럼 몇 글자 안 되는 거저먹기 장구가 있는가 하면 어떤 건 200 자가 넘는다. 뜻을 모르면 글은 부호의 연속에 지나지 않고 삼백 개의 부호를 외우는 건 불가능하다.

 

게다가 장구를 순서대로 연결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앞뒤의 맥락을 알면 좀 수월한데, 나의 내공으로 안되면 억지 스토리라도 만들어 20여 장구章句를 줄줄이 엮었다. 외우는 과정에서 내용을 이해하게 되고 앞뒤 맥락을 (창작을 해서라도) 파악하게 되었지만, 모발이 본체를 이탈하는 고초를 겪었다.

 

그런데 내용을 이해하는 거로 안 되는 게 허사虛辭다. 焉, 矣. 以, 斯 같은 어조사가 구절 중간이나 끝에 붙는데 맥락에 따라 뜻이 있을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허사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으면 한문 해석에 오류가 생길 수 있다던데, 읽을 때는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도 외울 때는 나를 괴롭혔다. (내게는) 의미 없는 글자를 빼먹어서 '미친 숙제'를 틀리면 참 미치겠더라. 앞으로 더 알아야 할 부분이다.

 

읽고-외우고-쓰고-잊어버리는 '4 행정'의 순환을 거쳐 기억이 머릿속을 빠져나간다. 하지만 냇물이 스쳐 가는 바위에 이끼가 끼듯이, 조금이나마 자취가 남지 않았을까 위안한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이렇게 맺은 논어 글귀와의 든든한 연줄이 내가 바른길을 가는데 힘이 되어주길 소망한다.

 

미친복습단 가입을 ‘강권’해 준 기린 님, 그리고 팀장 바람 님과 모든 팀원께 감사드립니다.

 


 

두보杜甫의 시에서 인용한 '인생 칠십 고래희 人生七十古來稀'는 늙은이를 으쓱하게 만들지만,

위정 편의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 七十而從心所慾不踰矩'는 정신을 버쩍 들게 한다.

'나이 칠십에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는 공자 당신의 얘기로서 과거형이라지만, 나잇값 하라는 명령형으로도 들린다.

 

댓글 4
  • 2021-10-31 08:12

    [유례없는] 논어에 대한 [유례없는] 후기!

    후기계의 진수!

     

    진짜, 샘, 대단하세요.

    샘과, 샘의 논어와, 샘의 닥암(닥치고암송)과, 샘의 글쓰기, 모두 리스펙!!!

     

    그리고 [유례없는] 논어를 강의해주신 우샘과 수강생 여러분 모두에게 박수!!!

  • 2021-11-01 06:54

    그런데 선생님이 이 부분만은 외우라고 하실 때마다 좀 이상했다.

    우리는 몽땅 외우거든요….

    ㅋㅋㅋ 훌륭합니다!! 박수를 보냅니다^^

    '이부분' 도 외우지 않는 저로서는 ㅠㅠ

     

    제가 젊었을 때는 사십이 넘으면 불혹이 되어야지 했었는데 가장 유혹이 많았던 사십대에 그것이 실패하고

    오십에 공부를 하고 부터 예순이 넘으니 이제는 耳順이 좋습니다.

    유례없는 논어에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 2021-11-01 10:53

    영감샘 후기 너무 재밌어요^^

    미친 복습 하면서 공감백배 ㅋ

    없는집 제사 돌아오듯 돌아오는 숙제에도 다들 반장님의 격려에 졸업을 할수 있었다는 ㅎㅎ

     

     

  • 2021-11-16 18:18

    이제야 후기를 보네요^^

    유례없는 논어강좌에 유례없는 후기!

    한표 추가요~

    함께해서 참 좋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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