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합니다 17일차> 차갑고 파랗고 미끄러운 수영장 _고은

관리쟈
2022-12-17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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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다. 공개적으로 감사 인사하는 건 많이 부끄럽다. 평소 심정이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감사 인사를 하는 건 마치 ‘사실은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었소.’하고 공개 고백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틀 동안 동은이와 우현이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쓰다가 다 지워버렸다. 쑥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곰곰히 고민을 하다가 사람이 아닌 존재에게 감사의 인사를 써야겠다고 결정했다.

 

수영은 2021년 12월에 등록했으니 성인이 되고 다시 시작한 지 딱 일 년이 되었다. 2021년 12월은 (지금은 연애로 치지 않기로 한) 3개월의 짧은 데이트가 끝난 시기이자 <길드다>를 본격적으로 정리하던 시기였다. <길드다>를 정리하자고 말 한 건 나였지만, 결코 홀가분하거나 즐겁지는 않았다. <길드다>를 정리하고 나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나와 나의 미래에 대한 생각은 나를 계속해서 불안하게 했지만, 나는 이 사안에 시간이나 마음을 쓸 수 없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길드다>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함께 5년을 공부하고 4년을 일했으니 정리하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한 게 당연했다. 나는 지난 9년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기를 바라며 오가는 감정 덩어리를 차분히 받아들이고, 올라오는 나의 감정을 삼키려고 노력했다.

 

물 밖에서는 숨을 계속해서 삼키고 삼키는 느낌이었다면, 차갑고 파랗고 미끄러운 수영장 물 안에서는 비로소 숨을 내쉬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물 안에서 숨을 들이마실 수 없으니, 하나 마나 한 소리다. 수영할 때는 물 밖에서 숨을 짧게 들이마시고 물 안에서 숨을 오래 내쉬는 게 좋다. 숨을 오래 참음으로써 폐활량을 기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숨을 많이 마셨을 때 올 수 있는 과호흡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숨을 물 안에서 길게 쉬는 것은 수영 실력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 고개를 적게 물 밖으로 내밀면 물의 저항을 최소화하여 속도를 올릴 수 있고, 또 물속에서 여유를 가지고 자신의 자세에 신경 쓸 수 있다.

 

 

이같은 여러 이유로 초보 딱지를 뗀 수영인들은 코앞으로 올라오는 작은 공기 방울들을 헤치며 몸 안의 공기가 다 빠져나갈 때까지 물속에 남아 있기 위해 애쓴다. 수영이 끝나면 몸 안의 숨이 거의 다 빠져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그 때문이다. 숨을 최대한 뱉고 나면 기운도 함께 빠져나갈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 나는 수영을 하고 나서 몸이 홀가분해지는 것은 숨을 무진장 많이 내쉬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적 사실이 어떻든 간에 이글에서는 ‘숨을 내쉰 만큼 몸이 가벼워집니다.’하고 우겨보고 싶다. 그래야 올해 상반기 내내 숨을 마음껏 내쉴 수 있게 해준 수영장과 물에 뽀대나게 감사의 인사를 전할 수 있다.

 

 

댓글 7
  • 2022-12-17 12:16

    난 이 나이가 되도록 물은 여전히 두려운데ㅋ
    숨을 내쉰 만큼 가벼워진 것 인정~^^
    그 가벼움으로 2023년 시작?
    고은과 공생자행성에서 만나니 반갑고
    행복한 연말 보내길~~

  • 2022-12-17 15:58

    숨을 내쉰만큼 편안해진다는 말 동의!
    올 1년간 고은이 마음이 바빴구나.
    여러 공부와 정리를 하느라고..

    내년엔 편안한 마음으로 만납시다요

  • 2022-12-17 20:43

    9년!!
    꽤 긴 세월이네요
    한 단락 정리하고 새 장이 펼쳐지는 시기인 듯
    고은의 새로운 챕터는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되는군요
    우선 숨을 길게 내쉬는 것부터 시작하는걸로

  • 2022-12-19 08:29

    수영을 배워보고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숨을 마음껏 내쉴수 있는 공간이 나에게도
    필요할거 같기도 하고요.
    생각할 호흡을 나눠주셔서 고맙습니다!

  • 2022-12-19 11:49

    읽고 나니 나에게도 감사해야 할 여러 존재들이 있는데 늘 외면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얼마전에 갑자기 숨을 거둔 노트북...
    7년동안 그 기계와 호흡을 잘 맞춰왔는데 그가 보낸 싸인들을 무시하고 돌보지 못햇던 것과 내 불편만 생각했지 고마웠다는 마음은 깃털 만큼 조금 가졌던 것에 사과하고 싶습니다. 이미 늦어버린 사과네요...

    이런 마음들이 떠오르게 해준 고은에게도 고맙습니다~ 내년에도 더 가볍고 편안한 숨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고요!!

  • 2022-12-19 16:57

    오! 수영장의 물 속에서 비로소 숨을 내쉬는 기분이라니..
    뭔가 먹먹한 느낌이 듭니다.
    내년에는 수영장 안에서도 밖에서도 지금보다 더 편안하게 숨을 내쉬면 좋겠다는 바람을 실어 보냅니다.

  • 2022-12-26 19:28

    저도 그 감각을 아주 잘 압니다!! 도로를 풀장삼아 가쁘게 숨을 쉬다보면 들이쉬지도 내쉬지도 못하는 순간이 찾아오거든요! 바로 그때 해야할 건 숨을 마시는 게 아니라 잘 밷는 거죠!
    그리하여 세상 사람은 그 감각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나뉘게 됩니다. 동지. ㅋㅋㅋ 문탁에 처음와서 어리버리하고 있는 제게 이것저것 물어봐주고, (먹진 않았지만) 비건 케잌도 나눠줘서 고맙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