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는 행성 #1] 임신의 두려움이 생명의 충만함으로 변할 때

사이
2023-03-22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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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0월 임신테스트기의 선명한 빨간 두 줄과 마주했을 때 이건 뭐가 잘못됐구나 싶었다. 분명 다난성증후군으로 자연임신의 확율이 낮은데 임신이 되었다고? 마음속으로 ‘이건 아니었으면 좋겠다’라고 되뇌었다. 엄마 되기를 그렇게 피하고 싶었는데. 10년 동안의 직장생활에서 벗어나 프리랜서로 일을 하고 공부도 하면서 내 삶의 방향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임신…? 이 빨간 두 줄은 내 삶의 STOP 사인으로 느껴졌고 엉엉 울음이 터져 나왔다.

89년생인 나에게 결혼과 출산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었다. 후회와 원망으로 엉켜있던 엄마의 삶을 지켜보면서 내 인생을 선택할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나서 감사를 느꼈다. 21세기 현대사회에 고리타분한 4인 가족이라니. 더욱 다양한 가족이 탄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내가 결혼하지 않으면 헤어지자는 남자친구의 말에 질질 이끌려 결혼을 했다. 결혼하면서도 아이는 낳지 않을 거라는 뜻을 남편에게 밝혔고, 남편도 동의했다. 하지만 남편의 속마음은 아이를 갖고 싶었다. 그는 나의 임신 거부반응에 아닌 척 참아왔고, 결국 남편은 터져버렸다.

작년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시작한 인문학 공부를 시작했고, 새벽부터 밤까지 책 읽기와 줌 모임, 거기에 일까지. 퇴사 후 나는 더욱 바빠졌다. 남편은 퇴근 후 모니터만 바라보는 나에게 “너는 너 공부나 일에만 집중하고, 왜 가족의 계획도 말하지 않아?”라며 불만을 토로했고, 이런 공부를 하지 말라고 말했다. 3년 동안 언제나 나를 지지해주는 남편과의 결혼생활은 잔잔한 호수같다고 느꼈는데, 이제는 나의 삶을 모두 흔들어버리는 급격한 파도로 변했다.

가족의 계획은 나 혼자 세우는 문제가 아닌데 왜 내 탓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 너는 무슨 준비를 했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잘 생각해보니 어차피 임신은 계획대로 안 되는 일이다. 그러니 그에게 ‘계획’이 중요하다면 ‘계획’만 던지면 되는 거 아닌가? “내년 3월부터 준비해보자.” 이 한마디로 파도는 잠잠해졌다. 그 조건으로 나는 남편에게 명리학 공부를 거래했고, 남편은 계획이 생겼다는 것에 기뻐하며 흔쾌히 거래를 승락했다. 마음속으로는 ‘자연임신은 힘드니깐 그때부터 준비한다고 바로 임신이되지는 않겠지’라고 확신하며 이 싸움의 승리자라고 생각했다. 승리의 미소도 잠시… 빨간 두 줄은 미소를 울음으로 바꿔버렸다.

도대체 왜 임신과 육아는 나에게 큰 두려움을 주었을까?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아이를 갖는 두려움은 너무 선명하고 구체적이었지만, 행복은 모호하고 희미했다. 이 모든 관점을 지배하는 것은 바로 돈이었다. 출산과 산후조리만 해도 천만 원이 넘는다. 어린이집 가는데 대기가 많다. 회사에서 육아휴직 쓰면 승진을 못 한다. 사교육으로 월 100~200은 든다. 아이 낳고 몸이 다 망가졌다.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왜 낳아야 할까요?”라고 물어보면 “너무 힘들지만 말 할 수 없는 너무 큰 행복이 있어”라는 대답을 들었다. ‘큰 행복이라…’

사회적으로 우리 세대에게 아이를 낳아야 하는 이유도 자본의 논리다. 저출산은 20~30년에 큰 경제 위기가 온다. 국민연금도 점점 줄어든다. 등등… 지금 당장 와닿지 않는 경제위기를 위해서 지금 나의 행복을 왜 포기해야 할까? 또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에게 왜 그런 고통과 부담을 물려줘야 할까? 그 돈으로 지금 당장 내 경력을 쌓아서 연봉을 올려 맛집 가고, 여행가고, 쇼핑하는 작은 행복이 더욱 설득력이 있었다.

우리 세대가 출산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돈의 논리를 잠시 지우고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명 감각에 관해 이야기해야 했다. 작년에 파지사유 에코세미나를 통해 30년간 자본주의에 눌려있던 생명 감각을 조금이나마 깨울 수 있었다. <향모를 땋으며>는 북아메리카 전설인 하늘 여인으로 시작한다. 하늘 여인은 대지와 하늘을 이어준 창조의 여신이다. 작가 키미러는 아메리카 원주민으로서 토박이의 지혜를 가지고 두 딸에게 생명을 돌보는 법을 알려준다. 자본의 논리에서 내가 꿈꿨던 여성의 모습은 화이트 셔츠에 슬랙스를 입고 사업가로서 프레젠테이션하는 모습이었는데, 키미러는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아이들이 수영할 수 있도록 부츠를 신고 연못에 들어가 복원작업을 한다.

폴라 건 앨런은 <빛의 할머니들>이라는 책에서 달의 모양이 바뀌듯 여성의 역할도 삶의 국면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한다. 우리는 ‘딸의 길’을 걸으며 삶은 시작한다. 이때는 배우고 부모의 보호 아래서 경험을 쌓는 시기다. 그다음은 자립의 시기다. 이때 반드시 해내야 할 과제는 자신이 세상에서 어떤 존재인지 배우는 것이다. 이 길을 따라 우리는 ‘어머니의 길’에 이른다. 앨런에 따르면 이때는 “영적인 지식과 가치가 자녀를 위해 송두리째 요청되”는 시기다. 삶이 점점 커지는 나선형으로 전개되듯, 아이가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 지식과 경험으로 충만한 어머니에게는 새로운 과제가 부여된다. 이제는 자녀보다 더 넓은 원, 즉 공동체의 안녕에 힘을 쏟을 시기라고 앨런은 말한다. 그물은 점점 넓어진다. 원은 다시 둥글게 휘어지고 할머니는 ‘선생의 길’을 걸으며 젊은 여인들에게 본보기가 된다. 앨런이 상기시키듯 노년에 이르러서도 우리의 일은 끝나지 않는다. 나선은 점점 넓어져 슬기로운 여인의 영역은 자신을, 가족을, 인류 공동체를 넘어 지구를 끌어안고 대지를 보살핀다. <향모를 땋으며> 148쪽

딸의 길에서 어머니의 길 그리고 선생의 길로 점점 넓어지며 인류와 대지를 보살피는 일. 내가 그동안 꿈꿔왔던 여성의 삶과는 너무 다르지만, 나선 형의 길은 더욱 따뜻하고 단단한 느낌이다. 에코세미나를 통해 만난 많은 엄마 행성들과 연결되면서 엄마의 행복과 불행이라는 이분법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임신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도 2~3일 뒤에 잠잠해졌고, 생명을 품었다는 사실 자체에 충만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엄마라는 행성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 첫 번째 미션은 6월에 엄마 행성에 안전하게 착륙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위치한 2023년 대한민국 서울에서 비행은 순탄치 않다. 출산 육아템이라는 소비의 블랙홀, 사교육과 부동산이라는 소행성, SNS와 맘카페라는 위성 등등. 이런 좌충우돌 속에서 행성 탐사기록을 남기며, 주변 많은 엄마 행성들과 연결되고자 한다.

댓글 9
  • 2023-03-22 23:08

    사이샘의 임신을 다시한번 축하드려요~~
    작년 에코프로젝트가 출산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벗고 생명감각을 깨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니, 샘과 함께한 시간들이 다시 떠오르네요. 참 좋았어요~♡
    6월에 엄마행성에 안전하게 착륙하길 바라며, 앞으로 써주실 샘의 글이 무척 기대가 됩니다~^^

  • 2023-03-23 09:01

    사이님과의 연결로 ^^
    이렇게 흐린 아침도 빛이 나네요.
    보고 싶어요~

  • 2023-03-23 09:05

    보고 싶은 사람 추가요~^^
    벌써부터 아기도 보고 싶네요ㅎㅎ

  • 2023-03-23 09:17

    육아템이라는 블랙홀, 사교육과 부동산이라는 소행성, 맘케페라는 위성, 단어들에서 느껴지는 사이님이 느꼈을 세상을 같이 한것같아요~~
    행성에 잘 착륙해서 새롭고 대단한 내 안의 타자를 잘 만나시길~ 글이 반가웠습니다^^

  • 2023-03-23 09:40

    임신 소식을 막 전해듣던 때가 생각나네요
    그때에 비하면 사이님 엄마쪽으로 많이 이동하신듯
    당연한거겠죠 아이와 함께 한 시간이 그렇게 흘렀으니
    앞으로 이야기가 더욱 흥미진진할듯
    출산준비는 어떻게 할지
    산후조리는 어떨지
    아기는 어떻게 자라날지
    모두모두 궁금^^

  • 2023-03-23 12:23

    사이님 글을 읽으니 기성세대가 얼마나 젊은 세대의 감성을 모르고 헛다리 짚고 있는지 느꺼지네요.

    아무튼, 뜻밖에 찾아온 임신이지만
    우리 모두 기쁘고 아기 만날날을 기다립니다.
    얼마나 이쁠까요~~♡♡♡

  • 2023-03-24 12:56

    사이님~ 이렇게 글로 만나는 것도 새로운 기쁨과 반가움이 있네요~
    안전하게 엄마 행성에 착륙하길~^^

  • 2023-03-25 08:27

    아, 사이님의 걱정, 불안을 얼마나 알 수 있을까요?
    출산을 두려워하는 세대들의 고민이 단번에 다가오네요.
    그 두려움 끝에 착륙한 생명의 행성,
    생명의 기막힌 고귀함이 저와는 다르게 가 닿았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 건강하시길요~

  • 2023-03-26 13:24

    많은 고민과 걱정과 불안의 시기를 거친 후, 엄마라는 행성이 나만의 행성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공생자 행성이라는 생각으로의 전환이 멋집니다.^^
    아, 공생자 우주라고 해야 할까요? 아이키우기 힘든 거친 생태계지만 우리 함께 씩씩하게 잘 살아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