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마들렌

요요
2023-04-20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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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밥상에 가죽 나물 새순을 올렸다. "어디서 난 거냐?" 아버지의 목소리에 약간 흥분된 떨림이 느껴졌다. 요맘때가 아니면 먹을 수 없는 가죽나물을 며칠 전 2키로나 샀다. 좀 많다 싶었지만 아버지가 무척 좋아하는 거라 장아찌를 만들어서 오래도록 드시게 하고 싶었다.

 

 

 

어제 일산에 도착하자마자 일단 씻어서 살짝 소금에 절였고, 밤사이 물을 뺐고, 아침에 고추장과 간장을 섞어서 장아찌를 완성했다. 아버지가 더 좋아하는 것은 새순을 고추장에 찍어 먹는 방식이라 장아찌는 냉장고에 넣어 숙성시키기로 하고, 일단 새순을 식탁에 올렸다.

 

새순 몇개 집어서 반으로 접어 고추장에 푹 찍어 드시더니 순식간에 수십년전으로 타임슬립이 된다. 창원에 살 때 산에 옻나무가 많아서 옻순을 따러오는 여성들이 있었다는 이야기에서 시작해 진해 통제부에 근무할 때 봄이면 여성 문관들이 아버지의 실험실 뒤 언덕에서 봄나물을 뜯었다는 이야기, 실험실 뒤 언덕에 소나무도 멋졌고 옻나무도 많았다는 회상, 실험실 건물을 새로 지을 때 있었던 에피소드들과 주변 이야기들이 한참 이어지더니 언젠가 화약실험과정에서 금호공고 출신 하사관이 다쳐서 2개월이나 입원했다는 스토리로 넘어갔다. 조사관이 나왔는데 사고난 젊은이와 책임자인 아버지가 서로 사고는 자기 책임이라고 이야기하여 조사관과 상급자들을 감동시켰고 결국 사고에 대한 처벌 없이 '아름다운 해프닝'으로 마무리 되었다는 해피엔딩.^^

 

 

 

당신의 화양연화 시절에 심취한 아버지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그 이야기를 하는 아버지가 내 눈에는 진심 행복해 보였다.

 

밥 한 그릇 뚝딱하시고 믹스커피 맛나게 드시더니, 오늘은 센터에 안가겠다고 하신다. 옛추억 소환하여 기분좋게 아침 드신 것과 몸이 무거운 것은 다른 문제구나! 소파에 앉아 졸다가 방으로 들어가 주무시는 아버지를 보니, 가슴 한 켠에 뭔가 찌르르 하는 느낌이 온다.

 

화약폭발 사고 이야기는 처음 들었지만, 옻나무와 점심시간에 나물 캐는 여성 문관들 이야기는 수십번도 더 들었던 스토리. 어쩌면 화약폭발 이야기도 동생들은 몇번이고 들었던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노라와 누룽지에게 스페셜 땡스!!

재작년 봄에도 누룽지를 통해 가죽순을 구해서 장아찌를 담았다. 그 때 요양병원에 계시던 어머니께 가죽순 장아찌를 보냈더니 맛나다고 하셨다.(내가 어렸을 때부터 가죽순 장아찌는 우리집 반찬이었다.) 올해 가죽순은 누룽지를 통해 손큰 노라가 10키로를 사서 문탁친구들에게 풀었다. 10키로가 이렇게 많은지 몰랐다고 하길래 군말않고 2키로를 샀다. 귀한 음식재료가 있으면 알려주는 걸 잊지 않는 누룽지, 그리고 여러사람 거둬 먹이려는 노라가 있어 이런 일도 생긴다. 이런 두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게 늘 얼마나 고마운지!!

 

 

댓글 6
  • 2023-04-20 14:39

    요요님 인스타그램에서 읽고 넘 좋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도 보네요!! 그래서 문스탁그램인가?!

  • 2023-04-20 16:51

    가죽나물이 처음엔 가죽나무의 잎인줄 알았어요ㅋ. 자주 가는 도서관 입구에 가죽나무가 있거든요. 나뭇잎 뒤에 기름샘 같은 게 있어서 만져보면 기름이 묻어나와요. 그런데 찾아보니 가죽나물은 참죽나무 새순이라고 나오네요. 모르는 나무라서 또 찾아봤더니 멀구슬나무과라고 나오네요. 그 과도 흔한 과가 아니라서 보니 우리나라에 있는 나무의 속은 3개 뿐인 듯 보여요. 보통 나물은 초본이 많은줄 알았는데 나무 새순이라는 게 좀 신기해요. 물론 나무 새순 중 나물도 몇몇 있긴 하겠지만요. 아버님 행복하셨을 듯^^ 저도 맨날 아버지 이야기 듣는 게 직업이 되어가고 있어요ㅎㅎ

    • 2023-04-20 18:46

      하하하 하여간.. 탐구심 왕성한 세션님 덕분에 멀구슬나무과도 알게 되네요.
      아버지 이야기 듣는 직업이라... ㅎㅎ 저는 주로 밥먹을 때 들어드리는 것 같아요.
      당신 혼자서만 계속 이야기하고.. 내가 뭔 말해도 잘 듣지도 못하시고, 자신의 이야기에 심취해서 들으려 하시지도 않아요.^^

  • 2023-04-20 20:19

    그 10킬로 옆에 있었어야 했는디...ㅋㅋㅋ

  • 2023-04-20 21:45

    오늘 문탁 점심밥상에서 가죽나무 순을 초장에 발라 먹었습니다. 제게는 처음 먹어 보는......
    두릅도 있었는데, 향이 진하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문탁밥상 덕분에....꾸벅

  • 2023-04-20 21:53

    남은 가죽나물을 엄마집에 가져다 드렸어요. 일주일 만에 뵈었는데 얼굴이 많이 좋아지셨더라구요. 가죽나물을 보시더니 활짝 웃으시며 보기만해도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시네요 ㅋㅋ

    (요요샘 아버님도 좋아하셨다니 괜히 막 기분이 좋네요 ㅋㅋ)

    집에 와서 누룽지님께 고맙다고 문자 드렸어요. 오랫만에 활짝 웃으시는 엄마를 보니 제 마음도 좋았거든요.

    오늘 점심당번이었어요. 젊은(?) 저희들에겐 너무나 낯선 가죽나물 향! 그러나 몸에 좋다는 정보에 모두들 조금씩 드셨네요 ㅋㅋ

    요요샘 글을 보니 내년에도 가죽나물이 나오면 사서 같이 나눠 먹어야겠어요. 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