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락시아는 자전거를 타고 온다

정군
2023-05-02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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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학교가 방학을 맞은 이번주, 한결 마음이 가볍습니다. 철학학교가 있다고 그렇게까지 무거운 것은 아니지만 ㅎㅎㅎ 다들 아시잖아요. 준비할 세미나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그런데, '와 신난다!'하고 있는데, 아이가 아프네요. 흠... 요즘 말로 아빠 기강잡으려고 그러나 봅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이유로 집에 묶여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계속해서 집에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봄이니까요! 

봄이란 무엇입니까? 얼었던 땅이 녹고, 만물이 소생하고, 꽃들이 만개하며, 자덕은 다리털을 미는 계절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요즘 일주일에 대략 세번, 좀 더 정확하게는 2.5번 정도 자전거를 탑니다. 어제(5.1) 타고 났더니 사이클링컴퓨터와 연동된 휴대폰 앱에 이런 메시지가 뜨더군요.

 

 

기분이 좀 묘했습니다. '국제 근로자의 날'이라는 명칭도 그렇고, 그런 날 한강에서 여가를 보내고 있는 것도 그렇고, 이건 마치 '가죽나물'처럼, 저 뱃지가 이미 숨어든 기억들을 앞으로 불러오는 듯 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자전거를 왜 타는가?', '나는 왜 시간만 나면 한강으로 향하는가?' 같은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하지 않을 수 없었고요.

"몸은 통제할 수 있고 조작 가능한 대상이다. 또한 수많은 삶의 영역이 무너지면서 통제할 가능성을 상실한 이 시대에 자신을 되찾아주는 영역이다. 육체를 지배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우리는 일상에서 겪는 불확실함을 쉽게 잊어버리거나 견딜 수 있다. 완벽하게 업그레이드한 몸은 인정과 찬사의 대상일 뿐 아니라 자신감과 자기가치감, 사회적 정체성을 확보해주며 의미와 활력이 넘치는 삶을 약속한다." (에른스트 디터 란터만, 『불안사회』, 책세상, 113쪽)

그렇습니다. 아무것도 마음대로 되는 게 없는 상황에서 '운동'만큼 그 상황을 명징하게 드러내주는 게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인용문과는 조금 다른 맥락이기는 합니다만, 고강도유산소 운동은 지금 내가 어느 수준에 있는지, 잘 되는 것은 무엇이고 잘 안 되는 것은 무엇인지를 매우 분명하게 드러내 줍니다. 그걸 토대로 다음에 정복할 것이 무엇인지, 어디를 강화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고요. 

 

 

이런 차트를 보면서 말입니다. 피로도, 운동성과, 훈련부하점수 등등을 보면서 '자기자신'의 상태를 파악하고, 다음 번 라이딩에서 어느 정도의 노력을 해야하는지 산출하죠. 게다가 이 모든 것은 스포츠과학에 힘입어 자동화되어 있습니다. 미리 입력된 나이, 체중, 신장, 최대심박수, 평소 운동량(심박수 기반 활동량 측정) 등등과 오늘 수행한 훈련의 노력 정도가 한방에 계산되서 '내일은 50km를 존2로 타세요'하는 거죠. 

 

(이게... 문스탁그램이라... 사진 몇개 올리고 말려고 했는데... 글이 길어지내요)

 

뭐 어쨌든, 그래서 저는 아무 생각없이 두꺼운 책을 끝까지 주파해 가는 것과 자전거를 타고 되도록 멀리멀리 달리는 것에서 편안함을 느낍니다. 복잡한 문제, 풀 수 없는 문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 등에서 잠깐 떨어져나와 '단순한 문제-앞으로 간다'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요. 그건 달리기도 그렇지 않냐고 물으실수도 있는데요. '달리기'는 오로지 내 몸뚱이의 힘으로만 가는 것이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3km 가는 것도 어려울 수 있습니다. 당연히 시간도 짧아지고요. 평정의 쾌락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느냐의 문제에서는 '자전거'가 갑 중의 갑입니다. 달리기가 보르헤스라면, 자전거는 도스토옙스키입니다.

 

 

그러나 저러나, 이번주 날씨는 하루도 그냥 보내기 아까울 정도로 좋습니다. 사진 속에 있는 사람은 저처럼 보이실지도 모르겠으나 저는 아닙니다.ㅎㅎㅎ 물론 저도 쫄쫄이를 즐겨 입습니다만(심지어 저는 '일상복은 노숙인처럼, 자전거복은 런웨이에 서는 것처럼'이라는 신념마저 있습니다) 함께 공부하는 동학들의 소중한 안구를 위해, 그건 올리지 않겠습니다.

 

 

(아무도 안 오는 타이밍을 노려서 급히 찍은 셀카입니다. 셀카는 진짜... 너무 창피해요...라고 느낀다는 점에서(물론 그 외의 것들에서도) 제가 중년이 되었음을 실감합니다)

댓글 14
  • 2023-05-02 11:51

    요즘 도통 마주치가 어려운 정군쌤, 로드에 계셨군요!

    제 친구들도 자전거를 많이 타기 시작하던데, 20대 후반~30대초반부터 엄청 늘어나는 것 같아요
    자전거의 매력에 대해 언제 한번 자세히 들어보고 싶어요ㅋㅋ

    • 2023-05-04 02:07

      아 그래서 요 1, 2년 간 시장에서 로드 구하기가 엄청 힘들었어요... 공급은 달리고, 수요는 많고

  • 2023-05-02 11:53

    보람찬 노동절을 보내셨군요!!
    근데.. 중년티 내는 건 좀 그런데요? 아직 젊음을 구가할 때 아니십니까?ㅎㅎㅎ

    • 2023-05-04 02:07

      저도 자전거 끌고 나갈 때는 '구가'하러 나가는데... 들어올 때는 '중년티'를 내면서 들어옵니다 ㅠㅠㅠ

  • 2023-05-02 17:21

    ㅋㅋㅋㅋ 안경에 비친 폰은 세로인데 사진은 가로인 것을 보니 모종의 편집을 거친 사진이군요 ㅎ
    자전거복은 런웨이처럼!! ㅋㅋㅋ 웃겨요 ㅋㅋㅋㅋㅋ

    • 2023-05-04 02:08

      MCIA(문탁중정)급 분석력 ㅋㅋㅋ

  • 2023-05-02 17:54

    한때 자전거도 열심히 탔었고 요즘엔 열심히 달리는 입장에서 정군샘이 라이딩을 좋아하는 관점이 재밌네요~ㅎㅎ
    저는 아무래도 평정의 쾌락 때문에 자전거와 달리기를 하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 2023-05-04 02:11

      무엇 때문에 달리기를 하는지 궁금하군요, 저는 달리기를 하던 때에도 이유가 크게 다르지가 않았더랬죠. 수영(고은), 달리기(우현), 자전거(정군) 모여서 '고강도유산소 좌담회'라도 가져야할 듯 ㅋㅋ

  • 2023-05-03 09:42

    운동을 하면서 데이터로 기록하고 그걸 들여다보는 사람(부류)들이 있군요. 산행도 사이클링도 자주 하지는 않으면서 꼭 그걸 기록하고 그래프로 되어 나오는 걸 보고 뿌듯해하는.....ㅎㅎ

    • 2023-05-04 02:13

      뭔가 오해를 하시는 것 같은데, '그걸 보고 뿌듯'이 아니라, 그래프가 찍혀야 운동을 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운동을 한다는 건 그래프를 찍는 것이고요 '뿌듯'은 30일쯤 그래프를 찍고서 느끼는 것이랍니다.
      자주 안 하면 그래프도 앙상해지기 때문에 '뿌듯'하지 않습니다. ㅋㅋㅋ

  • 2023-05-05 20:28

    근데......
    존2 가 뭐시여?
    그라고 자전거 타는데, 다리털은......왜?

    1. 털이 패달에 걸려서 뽑힌다. - 고릴라가 아닌데....
    2. 미끈한 다리가 그 누군가에게 어필할 지도 - 그거 보려다가 넘어지니께 보는 사람이 없다.
    3. 다리를 좀더 태우가 위해서 - 선탠은 전신에 해야지 다리만?

    그럼, 도대체 뭐다냐?

    • 2023-05-08 21:33

      음... 무릎 아래가 까졌을 때, 씻고 약바르고 밴드 붙이고 하려면 털이 없는 편이 나으니까요.
      존2는 심박수를 기준으로 하면 최대 심박수의 70%라는 말이옵니다(이 구간이 지방이 가장 잘 타는 영역이라고도 알려져 있습죠)

  • 2023-05-06 14:48

    울집에도 자전거와 쫄쫄이가 오랜 영업을 뒤로 한채 이젠 창고와 옷장에서 쉬고 있지요 ㅜ
    정군샘~ 탈수있을 때 마니마니 타세요!!
    중년 초입 부럽습니다!

    • 2023-05-08 21:34

      와! 그렇군요!! 쫄쫄이는 뭐랄까... 그런 어떤 스피릿 또는 애티튜드... 뭐 그런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