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 1234] 권위적이지만, 균일하진 않은 고대 중국 세계

동은
2023-03-13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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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의 시공간에 대한 관심

중국 고전을 읽으면서 가장 익숙해지지 않았던 것은 어딘가 단정적이고 계시적인 말들 때문이었다. 세상은 알 수 없고 확실하지 않은 것들 투성이인데 도대체 뭐에 그렇게 확신에 차서 자꾸만 세상이 무너진다고 한탄하고 사람들을 (나를) 혼내는 거냐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20대 초 <논어>를 읽을 때 얼마나 나를 위주로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 이후 5년이 지나 이문서당에서 다시 논어를 읽기 시작하면서 공자가 살았던 세상과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질적으로, 어떤 점에서는 개념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 즈음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한자 공부와 작년에 공부했던 주역은 그 세계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한자 공부를 통해서 한자가 고대 사람들의 시선과 가치가 담겨있는 그릇이라는 걸 알았고 주역을 공부하면서는 고대 사람들이 시선이 어디를 향해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중국 철학 특유의 세계관은 오늘날과 세팅 자체가 달랐고, 그들의 시선을 빌릴 때마다 오늘 날의 세계가 평면적으로 느껴졌다. 그들이 온갖 사물들, 현상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흐름들까지 포착해 세상과 삶을 순환의 궤도에 올려놓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중국 고대 세계에 빠져들었다.

 

 

 

절기節氣, 사회의 절도와 인간의 기개

<시간의 서>는 스스로 지식을 발전시키기 어려운 오늘날, 세상을 풍부한 앎의 대상으로 바라본 고대 중국의 사유를 절기를 통해 알아보려 한다. 절기는 흔히 음력을 사용하던 중국에서 농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태양을 이용한 농사력으로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지만, 계절이 네 개로 구분되기 전부터 사람들에게는 이미 자연스럽게 '알고 있던' 세상의 흐름이 있었다. 72개의 물후物候*는 고대 사람들이 일후一候**마다 주기적으로 변화하는 만물을 살피고 기록한 것으로 그 내용을 살펴보면 수많은 사물과 사람도 함께 몸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흐름, 한낮과 한밤이 반복되고, 계절의 변화가 반복되는 흐름 속에서 사람들은 '때'를 발견하게 된다. 이 '때'라는 것은 흐름의 어느 지점을 의미하는데 하루의 새벽과 낮, 저녁과 밤, 계절의 춘하추동, 생명의 생장소멸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흐름의 '때'를 발견하니 시기를 구분할 수 있었고, 그 시기에 따라 사회적 행동을 달리할 수 있었다. 덕분에 시기에 따른 농사 행동지침같이 사회 안에서 절도가 서기 시작했다.

'때'의 구분은 생산활동 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가짐과도 연결되었다. 사람들은 그 시기를 지나는 동안에는 그 시기가 요구하는 것에 따라야 했다. 새벽이 되면 하루를 계획하고, 봄이 되면 농사를 준비하고, 한낮이 되면 일을 하고, 여름이 되면 농작물을 가꾸며 비가 오면 비를 반기면서도 폭우에 대비하고, 식물이 성장을 멈추면 다가올 추위를 각오하는 것이 시기가 요구하는 것이다. 시기가 무언가를 요구하고, 그것에 따르는 것은 내가 세상과 함께 흘러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요구에 따르겠다는 마음가짐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개다.

절기는 이렇게 때에 따라 구분된 사람들의 행위와 마음가짐을 나타내는 24개의 좌표다. 세상의 변화를 담은 물후와 그 변화의 좌표가 되는 절기 안에는 각각 서로 다른 사물과 풍경, 행동과 마음이 구분되어 배속되어 있다. 사람들은 그 '때'를 순응하거나 거스르거나, 거부할 수는 있었지만 절대로 놓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시기마다 행위만 다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다르게 살아가야 했다. 그렇기에 책에서는 절기를 서로 다른 시공간이라 소개하고 있다.

이런 시공간의 구분을 누가 해냈을까? 물론 이것들을 구분해낸 것은 당시의 권력 계층이 하는 일이었다. 이 시공간의 지식은 권력계층이 독점하고 있었으며 통치자는 시기가 돌아올 때마다 연호를 바꾸거나 조정하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고, 자신이 선포한 세상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권력을 작동시켰다. 물론 통치자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세상을 만들어내진 않았다.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 맡은 바를 다하기 위해 굉장히 노력했을 것이다. 통치자는 그 자리에서 세상의 모든 위치를 배정하는 자였다. 그래야 각각의 시공간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었고, 그래야 세상의 흐름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점을 가장 아쉬워하며 오늘날의 사람들이 부디 절기에 담겨있는 풍부한 문명의 지혜를 통해 진정한 '시간적 존재'****가 되길 바라고 있다.

 

사람의 존재는 시간적이고 시간은 사람의 감각에 의해 변화가 발생한다. 이런 의미에서 상대론은 얼마나 낭만적인가. 또한 그것은 잔혹한 것이다. (...) 감각을 통해 시간의 축을 바꿀 수 있는 이상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며 세계를 속이는 것 역시 그다지 불가능한 것도 못된다.

 

 

 

 

* 72물후에는 복숭아나무, 오동나무, 뽕나무, 국화 씀바귀, 기러기, 제비, 까치, 꿩, 호랑이, 늑대, 한호조(박쥐), 뻐꾸기, 때까치, 지빠귀, 참매, 반딧불이, 귀뚜라미, 사마귀, 누에, 사슴, 매미같은 다양한 생물들이 등장한다.

** 일후는 일미一微(5일)이고 삼후는 일저一著(보름)로, 절기는 삼후가 모여 약 일저마다 배치되어 있다.

*** 이 사실을 알고 나는 짜증났던 공자의 한마디가 딱 떠올랐다. 君君臣臣父父子子!!! 모든 것이 제 위치에 따른 제 역할을 해내야 하는데 위치와 역할이 무너지고 있는 춘추전국시대에 태어난 공자는 불안할 수 밖에... 본문에도 이런 언급이 나온다. '여름에는 만물이 장대하게 성장하며 서로간 질서가 효율적으로 이뤄지는 광경이 펼쳐진다. 질서를 효율적으로 지키는 것이 바로 예를 지키는 것이다.'

****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나오는 개념으로 다음 인용을 사용했다.

 

 

 

변화를 연주하는 주역, 세상을 노래하는 한시

이후로 본문에서는 권위적으로 만들어진 시공간의 좌표가 얼마나 다채롭고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소개한다. 황경부터 시작해 다양한 속담과 문화, 제사와 바람의 종류와 명칭 등등 배속된 시공간을 충실히 설명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주역과 한시가 눈에 띄었다.

책에서 절기마다 괘를 소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시기에 따라 음양의 화합에 따라 어떤 상태인지를 괘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우수에는 음양이 각각 자기 자리로 돌아가 고르게 분포하고 있어 천, 지, 인이 이상적인 상태이기에 수화기제괘로 표현하거나, 하지는 건괘의 시공으로 자연이 부여하는 충만한 에너지를 누리면 재능이 펼쳐진다고 하거나, 상강은 수산건괘로 산위에 물이 있으니 도를 행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덕을 쌓는 수양을 해야 한다는 식이다. 저자는 절기의 물후나 한자, 황경의 위치와 바람의 방향과 연관지어 계절과 괘를 해설했는데 작년에 계절에 대한 글을 쓰면서 주역 공부가 부족해 애먹은 기억이 떠올랐다. 만약 저자가 주역으로 절기를 풀어내는 방식을 미리 보았더라면 어땠을까. 물론 주역은 해석의 여지가 많기에 무엇이 맞다 할수 없지만 공부의 깊이가 다른 것이 여지없이 비교됐다... 비슷한 작업을 했다 보니 느껴지는 부끄러움과 씁쓸함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절기마다 빠짐없이 소개된 한시는 책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면서도 새로운 발견이었다. 시는 절기를 설명하거나, 절기의 물후가 상징으로 사용되는 예시로 사용됐는데, 고대 중국인은 서로 다른 시공간의 유형을 이해하고 그 '때'를 인지할 때 감정을 드러냈다. 작년에 읽었던 <중국사유>에서 중국어는 어떤 개념과 이념을 전달하기보다는 태도와 감정을 변화시키는 언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동양 고전에서의 감정 표현이 궁금했는데, 본문에 나온 시에서 내가 읽을 수 있던 것은 72물후 외에도 사람들이 주변의 사물을 어떻게 바라보고 활용했는지 알 수 있는 정도였다. 계절에 따르는 그들의 태도를 알려면 감정에 대해서도 알아야 할텐데, 올해 주역을 공부하고 나면 한시를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동양고전을 읽으면서 당위적인 느낌 때문에 세상을 특징없이 바라보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숙고와 노력을 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고대 중국은 권위적일지 모르지만 결코 세상을 균일하고 고정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흔적은 절기로 지금까지 알려지고 있다. 비록 절기는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시공간이 되지는 못하지만 다른 시공간을 상상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댓글 5
  • 2023-03-13 18:28

    현대사회의 시간관과 고대중국사회의 시간관 사이에 우리는 어떤 다리를 놓을 수 있을까요? 문득 그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동은의 마지막 코멘트도 뭔가 그런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 2023-03-13 19:23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시간의 매듭들과 차서, 그리고 삶의 리듬은 고대중국 문명이 4계절이 뚜렷한 황화강 유역에서 탄생햇기 때문이 아닐까?
    1년 내내 여름에 가까운 고대 중국 남쪽지역의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대자연의 시간을 어떻게 파악하고 (근대의 시계적 시간/박자는 아닐테니) 어떻게 삶의 리듬을 만들었을까, 이런 생각.

    신이치 책?을 보면 수렵채취생활을 하는 아메리카 인디언들 부족은 여름과 겨울로 시간의 두개로 나뉘어져 있고, 여름은 생산과 교환의 시기, 겨울은 (하마차 의례에서 알 수 있듯이) 의례와 순환의 시기....이런 리듬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은 점점 더 시공간이 균질화되어 있긴 한데....또 어떤 점에서는 새로운 과학적 발견들이 선형적 시간을 다시 부수게 하기도 하니까... 어찌 봐야 하는지....ㅋㅋㅋ

    어쨌든, 동은의 글 때문에 이런 저런 재밌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땡큐. (앞으로도 정진!!)

  • 2023-03-14 07:17

    동은아~~~ 장자에 절기와 관련된 얘기가 나왔던 기억이 있어서 친히 아침부터 장자를 펼쳤는데... 아아.. 표시를 안 해놨나봐.. 안 보여. 나는 절기라는 문화를 자연의 리듬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리듬은 권력의 리듬이기도 했다는 것... 또 자연과 권력이 만나서 또 우리라는 공동체의 리듬을 만들고... 재밌네^^

  • 2023-03-14 15:01

    저는 뭐랄까 현대사회, 더 구체적으로는 디지털적인 시간이 어쩐지 굉장히 다양한 시간적 리듬을 만들어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표상하는 '현대사회의 시간'이란 대개 '공장의 시간'인 경우가 많은데, 이 시간이 균질적이라는 건 확실합니다. 모두의 리듬을 생산의 리듬으로 통일하니까요. 그런데 서버의 시간은 전세계가 동기화되어 있습니다만, 거기에 접속하는 사람들의 시간은 저마다 다른 깊이를 갖는 것 같거든요. 단순하게 말해서 자연의시간=서버의시간, 변화를 연주하는 시간=접속의 시간 같은 도식이 가능한 듯 합니다. 당장 님부터가 호그화트 레거시가 풀리는 날을 기다리며 호라이즌 제로던의 시간을 보냈잖아요? 송*현이 UEFA EPL의 시간 안에 있었던 것처럼, 요컨대 이 세계는 각자 경험하는 시간을 다양하게 분화시킴으로서 유지(돈벌기)되는 세상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 2023-03-15 08:54

    계속 절기에 대해 공부가 디벨롭되는 게 재밌네요. 절기의 생활들도 의례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