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1234] <소요유>를 중심으로 장자의 해체 전략을 탐색하다

여울아
2023-03-13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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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를 중심으로 장자의 해체 전략을 탐색하다

 

『장자, 나를 해체하고 세상을 해체하다』는 저자 정용선이 『노자에서 데리다까지』의 저자 故 김형효 지도교수의 가르침을 받은 후 쓴 박사논문이다. 그는 하이데거의 탈근거와 데리다의 해체전략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장자』를 해석하고 있다. 이 논문에는 곽상의 주석이 많이 인용되고 있으며, 특히 <소요유>에 대한 곽상의 해석은 세간의 부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그와 맥락을 대부분 같이 하고 있다고 밝힌다. 또한 저자는 유소감(劉笑敢)의 견해에 따라 <내편>을 장자 본인의 저술로 가정하고 그 편제에 대한 “장자의 의도”를 해석해나가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예를 들면 “장자는 왜 <소요유>를 첫 머리에 놓은 것일까”라고 질문하고 이를 분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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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지난 해 <제자백가세미나>에서 “장자의 도는 정치적 대안이 될 수 있을까?”라는 최종에세이의 질문을 심화하기 위함이다. 당시 이런 질문을 하게 된 계기는 후쿠나가 미츠지와 같은 장자 해석의 대가들이 <소요유>를 실존주의적 시각에서 절대자유라고 해석하는데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다. 나는 올 한해 <읽고쓰기 1234>를 통해 “장자가 정치(삶)와 무관한 정신세계를 추종했을까”라고 질문하고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자 한다. 나는 이 책에서 저자가 “<소요유>의 어디에 절대자유가 나와 있다는 말인가(130쪽 주4번)”라고 인용하는 부분에서 그가 나의 문제의식과 같은 선상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확인하였고, 이에 <소요유>를 중심으로 그의 해체전략을 탐색하고자 한다.

 

1.무엇을 해체해야 하나

 

저자는 내편을 분석하기에 앞서 “성심(成心)을 해체하라(52p)”고 주문한다. 성심이란 무엇일까? 장자는 <제물론>에서 “자신의 성심을 스승(절대적 기준)으로 삼는다면 그 누군들 스승이 없겠느냐(55p)”고 말한다. 저자는 성심이 항상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성심으로 인해 자기 자신을 옥죄고, 더불어 타자까지 강제하려는 데 문제가 있다고 강조한다. 이런 성심이 발동할 때 개별자들은 누가 옳고 그른지를 따지면서 갈등한다. 이렇게 개별자들의 긴장관계를 유발하는 성심은 고정관념이나 편견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저자는 장자의 문제의식이 “성심에서 시작하여 허심(虛心)으로 귀결된다”고 말한다. 성심은 문제 상황의 “출발”이고, 허심은 문제 해소 지점의 “상태”라는 것. 다시 말해서 “마음에서 시작하여 마음으로 귀결된다.” 저자는 장자의 사유에서 “마음”이 매우 독특하고 중요한 위상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에게 마음은 인간의 한계이자 동시에 가능성이다. 성심에 갇혀서 새로운 세상을 보지 못할 때는 그 마음이 한계로 작용하지만, 반면 마음의 힘으로 “그 상태”를 문제 삼을 수 있기 때문에 또한 그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저자는 장자가 해체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우리의 마음, 즉 성심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벗어나야 하는 상태가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또 해결해야 할 문제 역시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문제를 만든 것도 우리의 마음이고, 그 상태를 문제 삼아 해결하려는 것도 또한 우리의 마음이다. 저자는 장자가 문제 삼는 “마음”을 해소함으로써 문제 자체를 해소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렇게 해소된 마음 상태는 허심이라고 표현하고, 그는 장자가 허심을 통해 이런 현실을 극복할 수 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삶 자체가 즐거운 어떤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피력한다.

 

2.왜 해체해야 하나

 

자, 이제 <소요유>에서 장자의 구체적인 해체전략을 살펴보자.

 

매미와 메추리가 붕새를 보고 비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힘껏 날아올라도 느릅나무나 다목 나무 가지에 머문다. 때로 거기에도 못가서 땅바닥에 떨어져 부딪히기도 한다. 그런데 저 붕새는 뭐 하러 구만리를 올라가서 남쪽으로 가려하는가”라고 한다. 교외로 소풍가는 사람은 세끼 먹고 돌아와도 여전히 배가 부르지만, 백 리를 가는 자는 하루 동안 식량을 찧어 준비해야 하고, 천리를 가는 자는 석 달 동안의 양식을 모아야 한다. 그러니 저 두 작은 새가 어찌 알겠는가.(<소요유> 5 中에서)

 

공상, 나비, 버섯, 숲, 곤충, 목재, 마법 같은, 동화, 꿈, 자연

 

이 메추라기 우화는 곽상의 <소요유> 주석 중에서 가장 많은 논란을 야기한 장면이다. 매미와 메추리는 대붕의 비행 계획을 비웃는다. 뭐 하러 힘들게 구만리를 날아올라 남쪽으로 가려하느냐고 말이다. 장자는 이들의 차이를 소지(小知)와 대지(大知)의 구별(小大之辨)이라고 명명한다. 메추라기는 소지의 대표주자이고, 대붕은 당연 대지이다. 나는 “저 두 작은 새가 어찌 알겠는가”라는 문장에서 장자가 이 둘에 대해 각기 다른 가치판단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대붕을 비웃는 메추라기는 장자에 대한 세간의 비웃음과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쪼그만 너희들 메추라기가 어찌 장대한 대붕의 뜻을 알겠는가”라고 말이다. 그러나 곽상의 해석은 달랐다. 그는 이 둘의 차이에 대해 장자는 어떤 가치판단도 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郭注 夫小大雖殊 而放于自得之場 則物仕其性 事稱其能 各當其分 逍遥一也(곽상의 주석 원문)

곽상이 말하길, 크고 작음이 다르더라도 자기 스스로 깨닫는(自得) 데에 이른다. 그런즉 물(物)은 본성에 맡겨두고, 사(事)는 그 능력에 부합하니, 각자 자기의 분수(구별)에 맞으니, 소요함은 같다(一).

 

저자는 곽상의 주석에 대해 “각득기의(各得其宜), 각자 자기의 分에 따르므로 그 자체로 평등하다(一)”고 해석한다.(139p) 본문의 자득(自得)이라는 한자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1) 스스로 터득함이나 2)스스로 만족함, 둘 다 해석이 가능하다. 이로써 “자기만족”으로 읽는 독법이 자득이라는 말에서 나왔음을 추측할 수 있다. 곽상식의 해석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자기만족”이라는 키워드가 장자의 소요유를 담기엔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제한적이라는 입장이다. 나 역시 그 자체로 평등하다는 곽상의 주석을 “자기만족”이라고 소극적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스스로 터득함”으로써 적극적인 “자기 변화”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자기 변화를 소지에서 대지로의 이행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소와 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소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둘은 우열의 관계가 아니다. 소지에 갇힌 메추라기도 문제지만 대지 또한 절대적인 도의 경지는 아닌 것이다. 소지뿐만 아니라 대지도 장자에게는 해체의 대상이다. 그래서 메추라기를 비웃는 송영자의 비웃음 또한 문제이다.

 

송영자는 이런 인물을 싱긋이 비웃는다. 그리고 세상 모두가 칭찬한다고 더욱 애쓰는 일도 없고, 세상 모두가 헐뜯는다고 기가 죽지도 않는다. 다만 내심과 외물의 분별을 뚜렷이 하고 영예와 치욕의 경계를 구분할 뿐이다. 그는 세상일을 좇아 허둥지둥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안정되지 못한 데가 있다. (『장자』 안동림, 소요유 7 中에서)

 

여기서 송영자가 비웃는 “이런 인물”은 메추라기이다. 그는 온 세상이 그를 칭찬을 해도 혹은 비난을 해도 흔들리지 않는 심지가 굳은 인물이다. 그런 그가 왜 자신보다 못한 미물이라고 메추라기를 비웃는 것일까? 그는 내(內)와 외(外), 영(榮)과 욕(辱)이라는 이분법적 세계에 여전히 갇혀 있기 때문에 비록 분별하지 않고 세속을 좇지 않을지라도 여전히 소지와 대지를 나누고, 대지의 입장에서 소지의 메추라기를 비웃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장자는 송영자를 “아직 세우지 못한바”가 있다고 평가한다. 저자는 메추라기가 소지에 갇혀버린 것처럼 송영자 역시 대지라는 지적 교만함에 갇혀있다고 지적한다. 메추라기가 대붕을 비웃고, 그런 메추라기를 송영자가 비웃는 이야기의 구조를 따라가면서 독자는 자연스럽게 대소의 비유를 우열로 보는 고정관념이 해체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것이 장자가 해체전략을 사용하는 이유이다.

 

3.어떻게 해체해야 하나

 

북명에 물고기가 있는데, 그 이름을 곤이라 한다. 곤의 길이는,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화하여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을 붕이라 한다. 붕의 등 넓이는 몇 천리나 되는 지 알 수 없다. 노하여 하늘을 날면, 그 날개가 마치 하늘의 구름을 드리운 듯하다... “붕새가 남으로 날아갈 때 3천리나 되는 파도를 일으키고, 바람을 일으키며 날아오르면 구만리를 오르는데 육 개월이나 쉬지 않고 간다”고 한다. (<소요유> 2-4 中에서)

 

갈매기, 새, 호수, 움직이다, 물새, 동물, 물, 나는, 바다, 가까이

 

해체 전략의 핵심은 이야기의 구조가 과장적이고 신화적으로 그려지는 대조 방식에 있다. 장자의 <소요유> 첫 장면은 대붕의 웅장한 구만리 비행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뒤이어 나오는 매미와 메추리의 이야기가 더 작고 하찮게 생각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장자가 파놓은 고정관념이라는 함정에 여지없이 빠진다. 저자는 이러한 수사적 과장법이 “개념적이고 분석적인 사유를 유보시키고 직관적이고 통찰적인 사유의 기능을 활성화한다.(131p)”는 입장이다. 이를 “초과적 사유(故 김형효)”라고 지칭하며, “이해타산적인 실용적 관점에서 벗어나, 제한된 속박을 초탈하려는 자유의 정신”이라고 풀이한다. 다시 말해서 이 소요유는 초현실적이지만 결코 비현실적이지는 않다. 신화는 액면 그대로의 사실은 아니지만 사실이 아니라고 진실하지 않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로써 초현실적인 우화를 통해 경험적 현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은 그 타당성이 의심되고 해체의 수순을 밟게 된다.

 

뱁새와 메추라기는 깊은 숲에 둥지를 트는데 나뭇가지 하나면 족하고, 두더지가 강물을 마시는데 배를 채우면 그만이다. 그대는 돌아가 쉬라. 나에게 천하란 소용할 데가 없다. 숙수가 요리를 잘하지 못한다하여 시동(尸童)이나 신주(神主)가 제기를 들고 다니며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소요유> 23 中에서)

 

<요와 허유의 이야기>에서 요는 최고의 전설적인 성군이고 허유는 세속을 떠난 은자이다. 요는 인간의 유위를, 허유는 자연의 무위를 지시하지만, 장자는 자연과 인간을 둘로 나누지 않는다. 저자는 장자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어느 쪽에도 그 우위를 두지 않는다고 말한다. 장자의 관점에서 유위와 무위의 구분은 여전히 이분법적 사유일 뿐이다. 이 중 취사선택하여 장자 철학을 유위에 반대하는 무위자연으로 풀이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저자는 무위와 유위의 우열을 가르기 위해 장자가 결코 담론을 하지 않는다고 풀이한다. 유위의 세계는 유위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고, 무위자연은 자연 세계의 원리대로 움직인다. 그렇다. 요리사 숙수와 제주(祭主)의 자리는 다르다. 이들은 각기 다른 원리에 의해 움직인다.

 

장자의 해체 방식은 각기 구분된 세계를 인정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스스로 터득함(자득)으로써 소요(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각자의 고유한 자리에서 그 자체로 온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숙수는 요리하는데서 소요하고 제주는 제사를 주관하는 데서 소요할 수 있다. 허유는 무위가 유위를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유위를 부러워하지도 않는다. 요가 절대시하는 천하란 허유에게 쓸모없는 것이다. 뱁새에게는 나뭇가지 하나로 충분하고, 두더지에게는 한모금의 물이면 충분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요가 무위로 세상을 다스리려는 시도는 장자에게 성심의 방편으로 비춰질 뿐이다. 작은 뱁새가 나무를 통째로 차지하고 둥지를 터서 무엇 한단 말인가. 저자는 <소요유>가 <장자>의 “오리엔테이션” 역할이라고 한다. 성심을 벗어나기 위해 제일 먼저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런 해체적 시각 전환은 “메타적 현실 읽기(154p)”를 가능하게 한다. 그는 고정화된 자기중심적 시각을 해체하고 난 후에야 새롭게 열리는 넓은 시야를 맞이하라고 당부한다.

 

4.해체 그 후

 

자네는 너구리와 족제비를 보지 못하는가. 몸은 낮게 엎드리고, 사냥감을 기다리는데 동서로 뛰면서 높고 낮은 데를 피하지 않다가 덫에 걸리거나 그물에 걸려 죽는다. 검은 소는 하늘을 드리운 구름 같이 크지만 작은 쥐를 잡지 않는다. 지금 자네의 큰 나무가 무용하다고 걱정하지 말고, 無何有之鄕의 廣莫之野에 심어두고 그 곁에서 한가로이 소요할 생각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도끼에 찍혀 요절할 염려도 다른 물에 해를 입을 염려도 없다네. 쓸모가 없다 해서 어찌 곤고하겠는가.(<소요유> 40 中에서)

 

고목나무, 나무, 겨울나무, 고목나무, 고목나무, 고목나무, 겨울나무

 

<혜시와 무용한 나무 이야기>에서 장자는 자연이 인간의 쓸모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쓸모는 오히려 자신을 해칠 수도 있다. 마치 족제비가 이익을 찾아 날뛰다가 덫에 걸려 죽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쓸모”로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중심적 시각을 문제 삼으며, 마음의 “자리이동”, 전회를 통해 노니는 지혜가 필요하다. 대붕 우화로 시작된 <소요유>편은 이렇듯 “무하유지향”이라는 비현실적이고 무용해보이는 과장적이고 초과적인 언설로 끝을 맺는다. 장자의 거대 담론이 비현실적이고 무책임한 황당지설에 가까워서 도무지 쓸모가 없다는 세간의 평에 대한 장자의 응수라고 저자는 풀이한다. 이로써 장자의 해체전략은 성심이라는 고정된 시각에서 보면 무용해 보이지만, 시각을 달리하면 더 큰 것을 볼 수 있다는 장자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주고 있다.

 

<소요유>가 첫 머리에 배치된 이유는 대붕의 우화를 통해 자신의 좁은 경험을 넘어서는 “시각의 전환”을 시도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장자의 해체 전략이 전술하는 소요유(대붕의 비상)는 절대 자유(존재)라기 보다는 자신의 경험치를 초과하는 경지라고 보는 것이 어떨까? 그렇기에 매순간 해체의 과정만 있을 뿐 절대적일 수 없지 않을까.

 

p.s.

이 글을 쓸 당시 나는 초과적 사유와 초탈적 자유에 대한 해체주의적 관점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기 때문에 절대 자유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탐구를 진행하지 못했다. 며칠 전 철학학교에서 읽은 <근대적 세계관의 형성>에 따르면, 해체전략은 “초과의 기획”이라는 힌트를 얻었다. 이는 “무규정자, 무(無) 혹은 무한자로 향한 초과의 기회, 사유 가능한 전체, 존재자와 규정된 의미들의 전체, 사실적 역사의 전체를 넘어서려는 초과의 기획”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소요유> 전편은 단지 어느 한 쪽이 더 우월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고정관념을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의 전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해체전략의 기획이라는 점이다.

댓글 5
  • 2023-03-13 16:32

    이제야 읽었네요.

    그런데 문제의식이 “장자의 도는 정치적 대안이 될 수 있을까?”인데, 왜 하필 데리다의 '해체'라는 개념으로 장자를 해석하는 책을 선택한 건가요?

    • 2023-03-13 16:47

      좀 더 써본다면....

      동양고전과 정치학을 연결시켜서 논의를 하려고 할 때는
      질문을 어떻게 정식화하느냐가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예를들면
      장자는 흔히 정치학이 없는, 소극적이고 개인적인 철학이다(by 후스?!)라고 평가를 받는데 정말 이렇게 말하는 게 맞는 것일까?
      오히려 장자에게 '없는', 혹은 장자가 거부한 정치는 통치로서의 정치 (혹은 유가의 정치-이럴 때는 랑시에르를 가져올 수 있을 듯)이고
      장자를 통해 우리는 우정과 환대의 정치학(다시 데리다? ㅋ)을 새롭게 구성할 수 있지 않을까?...
      라거나,

      아니면 반대로
      최근 데리다의 '해체'나 들뢰즈의 '되기'같은 서양 탈구조주의 철학/정치학을 통해 장자를 정치적으로 독해하는 해법은 과연 온당한가? 뭐 이런 질문이 가능할 것 같기도 하고,

      그것도 아니면
      장자에게 정치학이 없다고 하지만, 그 때 없다고 하는 정치학의 '정치'의 개념은 도대체 무엇일까?
      (예를 들어 클라스트르는 그의 책에서 원시사회에는 정치학이 없다고 하고, 그래서 저발전된 사회라고 이해되는 것을 매우 문제삼았었죠. 그리고 새롭게 만들어낸 개념이 '추장의 정치학'이었어요)
      만약 (클라스트르처럼 말한다면) 장자에서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정치학적 함의는 무엇일까?

      뭐 이런 식으로 질문이 구체화되어야 할 것 같아유.

      (아직도 2,3,4가 남은 여울아를 위해 길게 썼음)

      • 2023-03-13 21:22

        으음. 해체주의 전략이 뭔지도 모르면서... 절대자유에 대한 다른 해석의 길을 어떻게 내는지 궁금해서요. 작년 1년은 전통적 해석 위주로 공부했더니 이런 의문이 생긴 거고. 그렇다면 다른 해석을 좀 보자 싶어서요. 제 질문의 시작이 워낙 단선적이라.. 다음은 노장철학의 관점을 보려고 해요. 이렇게 장자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더 공부하다 보면.. 뭔가 질문을 다르게 할 수도..

        글고 샘의 마지막 댓글 부분이 제 최종에세이에서 살짝 건드려본 방향이기도 하고 해서. 기회가 된다면 추후 이런 방식으로 정리하고 싶어요.

  • 2023-03-14 01:51

    역시나 동양바보(동양에서 온 바보 아님)라 잘은 모르지만, 여울아샘의 질문 '장자의 도는 정치적 대안이 될 수 있을까'를 보면서 고대 그리스 Democracy(민중의 지배)와 Isonomia(무지배)가 떠올랐습니다. 요컨대 이 이야기의 골자는 이오니아식의 무지배로서의 정치가 바다 건너 씨족사회인 아테네로 오면서 어떨 수 없이 '민주주의'의 모습을 띌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재작년에 요요샘께 들었던 가라타니 고진이 <철학의 기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여기서 조금 더 나가면 오늘날의 우리는 '민주주의'에 완전히 포획되서 '지배없는 정치'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게 된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쩐지 '장자'를 가지고 '정치'를 사고하면 이와 비슷한 구도로 이야기가 진행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2023-03-18 12:21

    장자를 통한 여울아님 사고전환 과정이 재밌네요. 요리사 숙주와 제주 단락은 무슨 뜻일까 아직도 궁금했는데 유위와 무위의 세상살이가 다름을 의미한다니 오~ 쌈박~ 저도 장자가 분별심을 내서 어느 것이 좋다고 얘기하신거 같진 않아요. 자기만족이라고 하면 나태한 느낌이라 사림들이 또 분별심을 발휘할 수도 있겠네요. 지금 여기 그대로의 자기 수용이라고 읽히네요 ㅎㅎ 저편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부정하게 만드는 관념들의 해체~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