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1234]탈마스크에서 탈감정까지

스르륵
2023-03-06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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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와 일상의 사회학’이라는 부제가 붙은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은 노동, 의료, 문화, 젠더, 법, 정치 등 각 분야의 사회학 연구자와 활동가들을 불러모아, 코로나19를 둘러싼 거대 담론이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를 묻고 있다. 이젠 철 지난 옷장 속으로 들어 가버린 듯한 코로나를 다시 잘 들여다보라며 나에게 채근하는 듯하다. 마스크를 쓰는 일로 상징되었던 ‘코로나19’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보고 느꼈는가? ‘모든 것이 IMF 때문이야’를 외쳤던 한동안의 그 시절처럼, 앞으로 얼마간은 ‘모든 것이 코로나 때문이야’를 외치게 될 우리들은 코로나를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며 살게 될까 새삼 궁금했다. 아니, 그보다 ‘나’에게 코로나는 무엇이었을까?

 

 

'재난은 모두를 분노하게 하지만 불평등은 모두를 무감각하게 만든다’ 

갑자기 마스크를 벗었다. ‘갑자기’라는 건 무관심의 다른 표현이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지만 나의 일상은 어쨌든 감염의 두려움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게 사실이다. 그저 가족과 주변인들을 소소히 걱정하는 수준이 내가 서 있는 ‘몸’의 위치였기에 감염의 위험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일터로 나서고, 그 일자리마저 빼앗겨 생계가 힘들어지고, 갑작스런 변화로 삶의 조건이 고립된 ‘몸’들의 비명과 두려움들은 실은 생생한 나의 현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건 정말 나의 현실이 아니었을까?

 

         “코로나 19 이후, ‘재택근무’로 삶이 변형은 되었을지언정 그 질에 있어서는 별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면, 혹은 심지어 새로운 업무 형태에 신선함을 느낀다면 그 사람은 정년이 보장된 정규직이자 자신의 일을 보조해 줄 인력을 갖춘 시니어급 지식노동자일 확률이 높다.”
                                      (<돌봄>, 오하나, p140)

 

  예란 테르보른(Goran Therborn) 은 불평등이 비유적으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음을 강조하며, 사회 구조에 속한 인간 유기체가 생명을 유지하는데 겪는 불평등을 생명력 불평등(vital inequality)이라고 말한다(p139). 좋은 직업과 나쁜 직업, 혹은 노동조건과 생계 사이에서 선택을 감행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사회경제적 환경에 사회적 차별이 더해지면서 증감되는 ‘수명의 불평등’ 같은 것에 대해 대체로 무감각하다.

 

  그러나 사회적 ‘면역(건강, 수명)’과 상관없이 나의 개체적 면역 상태만 문제없다고 해서 결코 내가 안전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우리는 코로나로 인해 절감했다. 사회의 불안과 위험요소는 곧 나의 위험과 불안요소이다. 의학과 기술, 혹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자신의 개인적 상황만으로는 우리의 생명력은 지켜질 수 없다. 하여 생명력 증진과 사회의 위험요소를 줄이는 주요한 방법 중 하나는 건강, 보건, 정보, 기술과 관련된, 일명 여러 ‘자원’을 가급적 많은 이들이 함께 누려야만 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다.

 

  하지만 경제적 효과, 효용이라는 담론으로 구축되는 ‘뉴노멀’의 새로운 질서 속에는 여전히 이런 ‘평범한’ 깨달음들이 중요한 변수가 되지 못한다. 이는, 코로나 사태가 초래한 상황이 돌봄의 가치를 느끼게는 해주었을지언정 그 가치를 재평가하는 일로는 나가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재평가란 돌봄 노동의 공식경제적 가치 측면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취약성과 유한함을 가진 유기체로서 우리 모두는 다른 누군가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평범한’ 진리, 그래서 누구나 돌봄을 필요로 하고, 돌봄자의 안녕과 건강 역시 누군가는 돌봐야 한다는, 일명 시민 모두를 돌봄에 대한 상호 책임과 의무를 지는 주체로 만들자는 지극히 ‘당연한’ 기획의 하나다.

 

  그러나 저자들의 주장처럼 어떤 이들의 일상의 목소리나 경험은 ‘포스트 코로나’ 혹은 ‘뉴노멀’을 진단할 때 기록되거나 기억되지도, 고려되지도 않는다. 불평등과 생존이라는 절박한 논의는 비대면 산업과 소비를 둘러싼 ‘뉴노멀’의 논의들 속에서 여전히 이전 ‘노멀’의 시대에 그러하였던 것처럼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하여 과연 젠더, 노동, 돌봄, 민주주의 등 우리의 일상을 구성해왔던 기존의 문제와 감각들은 과연 이러한 재난으로 인해 얼마나 더 새롭게 가시화되고 구체적으로 보듬어질 수 있을까? 하여 거짓말처럼 느껴졌던 것은 타인의 현실들이 아니라 공기처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런 나의 현실에 내가 무감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속도와 언택트는 우리를 시공간이 없는 세상으로 데려다 놓는다’

‘아직도’ 확진자와 사망자는 이어지고 있지만 초기에 이어졌던 그 무수한 ‘대란’들은 마스크를 벗는 시점에 즈음해서 이미 그 흔적들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팬데믹 선언의 공포, 마스크 줄서기, 동선 공개. 집단 감염, 신천지, 폐쇄와 격리조치, 확진자 알림 문자 등등은 이제 아스라해졌다. 공항은 다시 활기차졌고, 아이들은 모니터 앞을 떠나 학교로 나섰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린 이제 ‘무언가’에 ‘익숙’해졌다.

 

  줌(ZOOM)의 어색함도, 키오스크의 난감함도, 재택 라이프라는 신세계도 이젠 모두 조금은 익숙해진 이야기다. 이제 우리는 코로나 덕분에 각자의 방, 각자의 공간에서 더 편리하게 만나기도 하고, 더욱 쉽게 쇼핑을 하고, 홈코노미를 자의식 없이 즐길 수 있는 뉴테크적 역량화(?)에 한 걸음 더 진보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혼자 부스 안에서 연습하는 언택트 스포츠에 더 호감이 느껴지고, 현관문만 열면 ‘쨘’ 하고 놓여있던 마법 같던 빠른 배송들은 더이상 마법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렇게 ‘빠르고 편리한’ 익숙함들에 끈질기게 달라붙는 은근한 이 불편함은 무언지, 아니 더 정확히 이 불안은 무엇인지 실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내게 던지 과제는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이에 맞춘 규준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속도와 공간에 대한
획일화된 감각을 새롭게 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 <비대면>, 추자현, p35)

 

철학자 폴 비릴리오(Paul Virilio) 는 실시간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과 원격으로 현전한다는 새로운 존재 방식의 등장에 대하여 이를 ‘공간의 외재성을 망각’하는 질주의 정치라 비판한다(p34). 다시 말해 우린 성숙할 틈도 없이 늙어버리는 ‘속도공간(speed space)’속에서 순간의 간직도 허용치 않는 ‘순간의 폭정’과 ‘황급한 삶’이라는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정보사회학자인 마뉴엘 카스텔 역시 네트워크로 연결된 흐름은 오히려 개인이 위치한 장소를 비가시화하고 또한 공유하기 어려운 것으로 만들고 있다고 강조한다(37). 이런 이유들이 그저 네트워트나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는 것 자체가 혁신이 될 수 없는 이유인 것이다. 속도와 언택트는 우리를 시공간이 없는 세상으로 데려다 놓는다.

 

  하여 코로나로 인해 더 가까이 근접해온 언택트라는 새로운 일상은 시공간의 가치를 초월하는 비대면의 ‘미덕’을 다시금 일깨워주며, 나와는 다른 시공간에 위치한 ‘몸’들의 안녕에 무감각하게 만든다. 이는 ‘돌봄의 여전한 젠더화와 가족화(5장)’, ‘고용의 외부화로 일어나는 억압적인 노동현장에서의 집단 감염사태(7장)’, ‘동선 정보 공개의 사회적 수치심 조장(2장)’이라는 코로나적인 사태로 다양하게 변주되어 그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우리는 디지털 네트워크나 정보 기술을 통해 ‘국민청원을 하고, 어려운 농가를 돕는 착한 소비를 하고, 거동이 불편한 이들에게 생필품을 전달하는’ 새로운 삶의 시공간을 창조하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들의 걱정처럼 이러한 우리들의 선의는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바이러스에 대한 불안이, 인간과 자연에 대한 성찰이, 그리고 인간종 내부에서 일어나는 불평등과 폭력과 착취가 디지털 정보 기술로 성급하게 치환되면서, 우리는 나와 다른 시공간에 위치한 타자들에게 ‘지속가능한’ 관용의 감각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익숙해진 것은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에 대한 무심함이었다.

 

 

 ‘우리는 이 세계에 머물고 싶어 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일으키고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 다시 결합하고 싶어 한다’ 

 

”우리에게 낯설고 두려우며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느낌을 주는
세계가 도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오히려 불안, 소외, 경악, 충격,
놀라움, 공포 등은 현대인이 공유하는 일반적인 세계감에 가깝다.“
( <모더니티>, 김정환, p257)

 

마스크의 저자는 지금 우리 시대에 공유되고 있는 특정한 감정들을 강조하지만 나는 코로나를 반추하며 재난과 시공간, 그리고 타인의 현실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무감정한 자신을 발견했다 그런데 실은 ‘무감정’이란 말은 옳지 않다. 감정은 실제로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회적으로 변형될 뿐이기에 말이다.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우리의 감정은 어디로 증발된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하여 한편,스테판 메스트로비치는 『탈감정사회』에서 지금의 우리 사회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사회’라 명명하며, 우리가 이전 시대라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을 사건들과 위기들에 ‘무감각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감정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감정이 고도로 지성화 조작화 되어, 대량생산된 기계적 감정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뜻이다. 산업적이고 사회적인 삶을 넘어 감정적인 삶 역시 기계화의 영역으로 넘어온 것이다. 하여 우리의 ‘진정한’ 감정들은 설상가상으로 어딘가에 모두 익숙하고, 합리적이고, 단정한 얼굴로 잘 포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뉴노멀은 이미 도덕이나 가치 판단의 규범과 같이 사람들의 행위를
하나로 모으는 구심적인 것이 아니게 된 지 오래다. 비정상적인 것은 회피된다.
다른 경험들은 돌아볼 새가 없이 모두가 대세에 끌려가고 있다.“
(<비대면>, 추자현, P38 )

 

기계적인 감정은 우리를 ‘행위’와 멀어지게 만든다. 만들어진 감정은 행위를 이끌 힘이 부족하기에 말이다. 또한 조작된 감정은 나와 다른 것들을 비정상이라 간주하게 만든다. 나와 다른 시공간에 위치한 존재들을 돌아보는 감정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 우리는 점점 더 머뭇거리고 점점 더 계산한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안전벨트를 매듯 감정벨트를 매고 자신의 감정을 안전하고 합리적이고 친절한 애티튜드로 관리하며 살아가는 것이 여러모로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 매일 벌어지는 크고 작은 새로운 일들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낯설고 두려운 곳으로 느끼게 하지만, 사람들은 무기력하게 체념하거나 그저 넋을
                잃은 재 멍하니 있지는 않는다. 갑작스럽게 마주하게 된 이 내 집 같지 않은 낯선 세계가 어떤 곳인지 탐색하고, 위험을 제거하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다시 살아갈 만한
곳으로, 자신의 터전이자 보금자리로 일구어낸다.“
( <모더니티>, 김정환, p259)

 

허나 메스트로비치는 결국 기계화의 최종 승리가 될 것이라고 비관한다. 경제적 모델은 무지막지 막강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이라는 비합리성(?)이 제공하는 ’낯선 세계를 탐험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의미의 끈을 차마 놓지 못한다. 마스크의 저자들 역시 수많은 일상들의 아픔과 고난을 기록하면서 탈출구 없음에 절망하지만, ‘이 세계에 머물고 싶어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일으켜’ ‘다시 살아갈 만한 곳으로 일구어내는’ 기대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 역시 '탈마스크'하는 순간 인식된 나의 무심한 기계적인 감정들이 '탈감정'의 지점들과 연결된 이상,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 다시 결합하고 싶어하는’ 그 마음들에 합류하는 심정으로  '감정'을 더 공부하며 마음의 사회학이란것이 무엇인지 또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고민을 찬찬히 이어나가 봐야겠다.

댓글 7
  • 2023-03-06 15:30

    샘 발표듣고 나서 탈감정사회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저는 뭐랄까... '기계화의 최종승리'가 꼭 그렇게 비관할 일인가 하는 생각을 종종하는 편이어서요(사실 이미 승리했으니까요..) 발표날에도 말씀드렸지만, 기계화 이전보다 '탈감정화'되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여하간 '기계화 전쟁'의 마침표만 남은 이 마당에 다시 생각해볼 문제임에는 분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2023-03-06 19:44

      탈감정과 기계화 ᆢ 쉬운것 같으면서도 뭔가 어렵네요. 그런데 어쨌든 그전보다 더 탈감정화 된건 맞아?라는 정군샘 질문도 흥미롭네요.

  • 2023-03-06 16:18

    스르륵의 공부는 감정에서 시작해 마음의 사회학으로 가고 있구나~ 신기하게도 신자유주의시대 스노비즘을 분석한 김홍중의 책이름이 <마음의 사회학>이에요^^ 비슷한 생각들을 한다는 게 재미있고 공부들이 맞닿고 이어지는 지점인가 싶네요!

    • 2023-03-06 19:02

      근데 살펴보니 마음의 사회학보다 '은둔기계'가 확 끌리네요

  • 2023-03-06 18:30

    기계적인 감정, 조작된 감정으로, 대세에 끌려가며 사는 존재가 아니라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 감정을 가진 존재가 된다는 건 어떤 것일까?
    <탈감정사회>라는 책과 함께 감정사회학이, 마음의 사회학이 궁금해지는 글이었습니다.^^

  • 2023-03-06 19:11

    ‘이 세계에 머물고 싶어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일으켜’ ‘다시 살아갈 만한 곳으로 일구어내는’ 기대를 포기하지 않는 태도에 공감하고 저도 감정사회학 더 공부해가보고 싶어요!

  • 2023-03-06 21:05

    스르륵의 글을 읽으며 친절한 애티튜드로 관리되는 감정이 아닌, 산산히 부서진 마음에 다시 합류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해 보게 됩니다. (코로나 시기에 sns 상에서 생겨난 여러 형식의 작은 모임도 산산히 부서진 우리 마음을 붙여보려는 시도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도 드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