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미즘과 현대세계 > 1회차 발제 및 메모

토토로
2024-06-11 21:33
114

메모 올려요.

댓글 8
  • 2024-06-11 22:39

    올려요

  • 2024-06-11 23:08

    우와 노라닷!

  • 2024-06-12 00:09

    에이쿠

  • 2024-06-12 00:49

    발제 올려요~

  • 2024-06-12 00:53

    아버지가 타일러씨를 만난다면?

    과학혁명 이후 근대인들은 원주민과 그들의 애니미즘에 대해 ‘우리와 같은 종류의 사람은 아니다’라고 확신했고 따라서 원주민들은 종교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관점에서 나의 아버지 역시 무신론자다. 서구 근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창조주나 최고신, 심판 관념도 믿지 않고 예배의 대상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일러 식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 타일러는 종교 같은 광의의 단어를 좁은 의미에서 사용하면서 일반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 얼마나 기만적인 일인지 비판하면서 “생활 속에 영들과 신들을 위한 다양한 행위와 의례들이 존재하는데, 어떻게 그들에게 종교가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80)지 묻는다. 그렇다면 나도 아버지에게 묻고 싶다. 일 년에 여덟 차례나 조상 신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는데, 과연 종교가 없다고 할 수 있나요?

    타일러는 기본적으로 인류의 진화를 전제한다. 그가 볼 때 세상은 점점 발전한다. 그는 ‘원시인은 인류의 유아기에 해당한다’고 했고, 종교 발전은 ‘다신론에서 유일신론으로’ 선형적으로 진화해 왔다고 주장한다. 음.. 여기까지는 아버지도 동의할 것 같다. 그런데 타일러는 중국의 지배적 종교라고 여겼던 조상 숭배와 관련해서 수천 년에 걸쳐서 죽은 자들의 영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추구하는 중국인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자식이 부모에게 그리고 조상에게 무한히 복종하는 관습은 조상 전래의 제도로부터의 변화를 막게 되고 나아가 문명의 진보를 멈추게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잔존물’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잔존물이란 재채기하고 나서 신의 축복을 비는 식으로 우리 문화에 남아있는 흔적을 말한다. 타일러에 따르면, 이러한 사례들은 일종의 예외적 상태이다. 인류의 지성적, 도덕적, 정치적 생활은 폭넓은 관점에서는 진보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동일한 보폭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일종의 지체 혹은 역전 현상이 곳곳에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인류 역사 전체를 조망할 때 진보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물결이다. 그렇게 볼 때 (제사와 같은) 문명의 억지와 쇠퇴는 발달의 큰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국지적 현상에 불과하다. (116) 이제 아버지는 슬슬 기분이 나빠질 것이다. 아니, 그 소중한 ‘제사’를 그렇게만 말할 수 있냐고! 하지만 타일러는 덧붙인다. 한때는 타당했던 행동과 관습이라 하더라도, 세계의 발달이 계속됨에 따라 원래의 의미는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각 세대는 원래의 의미를 점점 더 잊어버려서, 마침내 그것은 대중의 기억에서 떠나버릴 것이라고. 제사에 반대하는 나는 타일러의 주장이 반갑다.

    한편, 문명이 점점 진보하여 근대에 접어 들면서 물리적 세계를 설명하는 역할은 과학에 넘어갔다. 온 세상에 충만하던 영들은 과학에 의해 물질세계로부터 잘려 나갔다. 그러나 근대 세계가 인간 영역과 자연 영역, 초자연 영역의 분리를 선언하고 있지만, 이들 세 영역은 사실 근대 세계 내에서도 미끄러지듯 얽힌다. 오히려 말끔히 분리되는 근대성의 지향은 곤경에 처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타일러는 의미는 날아갔지만 (제사라는) 형식만큼은 ‘잔여물’이자 ‘흔적’으로 좀더 오래 살아남아서 계속 이어질 것이라 한다. 제사에 대한 아버지의 고집도 그런 것일까. 근대인이고픈 아버지지만, 사실 마음 한 켠엔 영혼의 삶이 지속된다는 관념이 자리하고 있어서 제사를 놓아버릴 수는 없는… 뭐 그런 걸까.

    또한, 라투르는 근대인들이 치러야 했던 대가 중에서 ‘스스로를 전근대인과의 연속선상에서 개념화할 수 있는 능력’(137)의 상실에 주목한다. 이 상실과 단절의 경험은 ‘경이와 감탄의 감각’을 잃어버린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저자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타자와의 분리, 인간과 비인간 영역 사이의 분리가 아니라 연결, 관계, 나아가 두 영역을 엮는 일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기에, 나선형의 사유를 통해 과거를, 과거의 ‘잔존물’로 치부되었던 부분을 다시 끌어와서 재조합하고 재해석하고 새롭게 활용해 볼 수 있을 것이라 한다. 과연 탈근대적 애니미즘 논의는 ‘제사’에 대한 나의 부정적 관념으로부터 세상과 관계하는, 세상에서 존재하는 방식으로 전환시켜 줄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 2024-06-12 08:00

    애니미즘적 문화와 그렇지 않은 문화의 차이를 살아있음의 감수성과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상상해보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이와 같은 탈근대적 애니미즘 논의는 무엇보다도 관심의 초점을 관념으로부터 세상과 관계하는, 세상에서 존재하는 방식으로 전환시킨다.

    ==>콘의 <숲은 생각한다>에서 숲은 숲을 구성하는 살아있는 유기체들이 매우 복잡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깊숙이 침투하여 식물들이든 동물들이든 미생물들이든 자아들의 생태계를 발생시킬 때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근대인들이 지구에 널리 퍼져있는 살아있음과 관계성을 이해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점이다! 살아있으며 생각을 하고 있는 존재가 단지 인간만은 아닌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종류의 유기체들은 인간의 관찰 및 활동과는 별개로 자아와 의미를 창조하고 있다. “열대우림은 서로를 구성하며 살아있고 자라나는 생각들이 창발적으로 팽창하는 다층적이고 시끌벅적한 망이다”라고 콘은 쓰고 있다.
    근대 인식론과 앎의 방식들로서는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자아들의 거대한 생태환경’에, 숲들이 생각하는 방식의 논리에 우리 근대인들은 스스로 진입할 수 있는가? 우리는 가령 식물들과 토양 사이의 관계 또는 인간과 재규어 사이의 관계를 살아있는 재현과 의미의 형태들로서 (설령 이 형태들이 언어가 닿지 않는 곳에 있더라도) 보는 법을 배울 수 있는가?

    데스콜라는 <타자들의 생태학>에서 지구상의 다양한 존재들의 관계적 삶은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이고, 관계적 앎은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 정령, 죽은 자까지도 포괄하는 모든 존재의 실천을 조직하는 ‘삶의 지침서’이다. 그러므로 각기 다른 존재론은 그 존재론의 존재들이 실천적으로 관여하는 세계 자체가 다르다. “자연과 사회, 인간과 비인간, 개인과 집단은 이데 물질, 과정, 표상 사이에 흩어진 채 나타나지 않고 타자와의 관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존재론적 지위와 행동 역량이 다변하는 다중적 개체 간 관계의 제도화된 표현으로서 나타날 것이다.”라고 한다.

    데스콜라와 콘의 이야기와 유기쁨의 이야기가 조금씩 다르다. 애니미즘은 새로운 존재론, 새로운 관계적 삶의 이야기이다. 유기쁨의 문제의식을 따라가면서 새롭게 숲과 타자를 읽어야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 2024-06-12 08:28

    메모 취합

  • 2024-06-12 08:35

    타일러가 놓친 것은 무엇일까?

    타일러는 인류의 동일성과 연속성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비서구 타자들이나 근대 서구의 자신들이나 자신이 살고 있는 우주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의도를 가졌었다. 그렇게 해서 처음 나타난 사유는 영적인 것들의 존재에 대한 믿음인 애니미즘이었고 점차 문명의 진보 및 과학적 발견과 더불어 탈물질화된 종교로 변해갔다는 이야기이다. 그가 말하는 연속성은 단선적 발달단계의 도식을 따른다.
    타일러는 원시심성에 종교적인 것이 없다는 이전 기록들을 훑으면서 그 증거로 제시된 것들이 오히려 반증이라 보았고, 그들이 서구인과 다를 바 없는 사고체계를 지녔다(다만 어린 단계에 머물러 있을 뿐)고 확신했다. 그 결과는 아무리 두둔하려 해도 비서구를 '순진한 미개인' 내지는 '어리석은 야만인'의 틀에 더욱 단단히 가두는 꼴 아니었을까? 저자의 말처럼 시대적 한계라고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타일러가 기록물들에 놓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비서구인의 많은 지역에서 인간-비인간 사이의 연속성을 전제하는 존재양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타일러는 인류의 동일성을 발견했다고 하지만 인간과 비인간(자연)은 당연히 분리된 세계라는 관점 아래 세계를 보고 있다. 플라톤 이래 데카르트로 이어지는 서구 형이상학에서, 인간은 주체이고 인간이외의 존재들은 자연이라는 이름의 대상으로 분리되었다. 인간만이 자연 안에서 그것을 극복하면서 이해하려하고 그러는 가운데 과학과 종교 등의 문화가 탄생하고 발전해왔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 분할선의 경계를 지워버리면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그것이 애니미즘적 세계관을 수천년간 (야만적 서구의 침탈전까지) 지속해온 이유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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