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모를 땋으며 두 번째 과제

사이
2022-07-12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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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뿌리를 내려놓다 - 사이

 

모호크강에는 향모가 무성하게 자랐다. 모호크 족은 이 강유역에서 살았다. 그때는 강이 물고기로 가득했으며, 봄철에 범란하는 강물이 고운모래를 실어 날라 옥수수밭을 기름지게 했다. 모호크어와 모호크족 문화는 저절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강제 동화되어 모호크족 아이들은 펜실베니아주 칼라일의 막사로 보내졌다. ‘인디언을 죽이고 사람을 구원하라’라는 학교의 사명. 흰 장갑은 향모의 향기를 대신한 것은 막사 세탁장의 비누 냄새. 남자아이들 운동, 정착생활에 유용한 기술 – 목공, 농사를 배웠다. 땅과 언어와 원주민의 고리를 끊겠다는 정부의 목표는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모호크족은 스스로를 카니엔카하, ‘부싯돌 부족’이라고 부르는데, 부싯돌은 미국의 거대한 도가니에 쉽사리 녹아들지 않는다. 갈라일에도 불구하고, 추방에도 불구하고 400년간의 봉쇄에도 불구하고, 굴복하지 않는 무언가가, 살아 있는 돌의 어떤 마음이 있다. 언어의 주머니는 땅에 뿌리 내린 사람들 가운데에서 살아남았다. 남은 것 중 하나는 날을 맞이하는 감사연설이다. 세상과 맺은, 돌처럼 단단한 감사의 호혜성은 나머지 모든 것이 떨어져 나갔을 때 그들을 지탱했다.

 

테라사는 모호크족 바구니 장인이다. 검은 물푸레나무와 향모를 함께 엮는다. 바구니를 위해 한 자리에 모인 여인들은 웃음과 이야기도 엮어지고, 영어와 모호크어가 한 문장에 어울어졌다. 바구니의 놀라운 점은 변형이다. 살아 있는 식물의 온전함에서 조각조각 가닥이 되었다가 바구니의 온전함으로 되돌아간다. 바구니는 세상을 빚는 파괴와 창조의 이중적 힘을 안다. 한 때 분리된 가닥들이 새로 엮어 새로운 전체가 된다. 바구니의 여정은 부족의 여정이기도 하다.

 

톰 포터 곰족의 일원이고, 할머니는 언젠가 모호크족이 모호크 강 유역의 옛 보금자리로 돌아와 살리라고 예언했다. 1993년이 그 언젠가였다. 땅은 재생의 언어를 구사한다. 이들의 목포는 ‘칼라일을 거꾸로’였다. 사람들이 빼앗긴 언어, 문화, 영성, 정체성을 그들에게 되돌려줄 터다. 잃어버린 세대의 자녀가 고향에 돌아올 수 있도록. 재건 이후의 다음 단계는 언어를 가르쳤다. 언어는 땅과 더불어 쪼그라들었다. 언어가 죽으면 사라지는 것은 말만이 아니다. 언어는 다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 깃드는 장소이며 세상을 바라보는 프리즘이다.

 

펜실베니아주 칼라일시는 자신의 역사를 자랑스러워하며 300주년을 기념하였고, 모든 잃어버린 아이들의 후손이 이른바 ‘기억과 화해 행사’차 카라일에 초청받았다. 우리 가족 3대도 참석했다. 칼라일시가 역사를 열렬히 보존하며 명성을 얻은 반면에 인디언 컨트리에서는 그 이름이 역사 말살의 소름 끼치는 상징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공동묘지에 모였다. 빼앗긴 아이들. 잃어버린 유대. 상실의 짐이 공기 중에 맴돌다 향모 냄새와 섞인다. 분노로, 자기파괴의 힘으로 그 상실의 슬픔을 달래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물은 둘씩 짝짓는다. 흰색 복숭아 씨앗은 검은색 복숭아 씨앗이고, 파괴는 창조와. 사람들이 생명을 힘차게 외치면 복숭아 씨앗 내기의 결말이 달라질 수도 있다. 칼라일에서 출발한 많은 길 – 톰의 길, 테레사의 길, 나의 길 – 이곳에서 하나가 된다. 심장에 박힌 씨앗을 끄집어내어 여기 심을 수 있다. 땅을 회복시키고 문화를 회복시키고 스스로를 회복시킬 씨앗을.

 


너무 많은 이야기가 있어서 발제를 하기가 벅찼지만, 다시 이 이야기를 곱씹어 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자신의 땅에서 쫓겨나고, 자신의 언어와 정체성을 부정당하는 역사는 반복되고 있네요.스스로 회복 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호크족을 바라보면서 나는 어떤 것을 회복시켜야 하는지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추가로 책에서 나온 내용은 이것저것 찾아보았습니다!

 

모호크족에 대해서 찾아보니 위키피디아에서 모호크족은 스스로를 부싯돌의 사람들이란 뜻의 카니엔케하카(Kanien'kehá:ka)라 불렀다. 유럽인들이 이들을 모호크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에는 여러 이견이 있으나 알곤킨 어로 모호크가 "사람을 먹는"이란 뜻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2] 그러나 그들이 사람을 실제 잡아 먹었는지 모욕을 위한 것인지 그들이 사납다는 소문을 과장해서 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걸 읽는데 진짜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 프레임인지 다시 한 번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쉽게 접하는 정보 속에는 진실이 왜곡되어 있는지 다시 깨닫게 되네요..

 

모호크 강 - 복원된 강인거 같네요~

 

Mohawk River - Wikipedia

 

펜실베니아 카라일 인디언 산업 학교

어린 아이들이 이렇게 빼곡하게 있는데.. 처음 이 사진을 보자마자 진짜 좀 충격받았어요 ㅜㅜ 

졸업식에서는 “저는 이제 인디언이 아닙니다. 활과 화살을 영영 내려 놓고 쟁기를 들 것입니다.” 이라는 맹세를 해야했다고 하는데 역사는 돌아볼 수록 마음이 아파서 숨기고 싶지만, 자주 마주치면서 우리가 어떤 길을 밟아왔는지 아는 것이 중요한 것 같네요.

 

인디언 (Indian) 7편

 

 

 

댓글 15
  • 2022-07-12 13:36

    <둘러앉기>

    저자의 대학 강의는 크렌베리 호수 생태 체험장에서 5주간 보내는 과정을 포함한다. 이곳은 인터넷 연결도 되지 않은 곳이며, 하루를 걸어도 오로지 야생 뿐이다. 참가 학생들은 호기심과 두려움으로 이곳에 온다. 그들이 처음으로 해야할 일은 '교실짓기'이다. 교실을 짓기위해 필요한 재료들은 모두 자연에서 얻어야 한다. 그들이 짓는 교실은 위그웜의 형태이다.

    저자에 의하면 토착 건축물은 대체로 작고 둥글다고 한다. 마치 보금자리의 보편적 패턴이라도 있는 듯이. 

    출입구는 늘 동쪽을 향하게 하는데, 바람 때문이기도 하지만, 새벽 여명을 맞이하는 쓰임새로도 제격이다.

     

    늪은 징그런 벌레, 질병, 악취 등등으로 악명을 떨치기도 하였으나, 이제 사람들은 늪이 얼마나 귀중한 곳인지 알게 되었다. 그러나 머리로 아는것과 몸을 늪에 직접 담그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학생들은 늪에 들어가는 일에 상당한 어려움을 느낀다. 늪에는 부들과 푸딩같은 진흙이 가득하다.

    늪은 월마트 만큼이나 숲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준다. 그러나 습지는 빠르게 사라져가고 있고, 그 습지에 의존해 살아가는 원주민도 그만큼 줄어들고 있다.

     

    위그웜 만들기의 마지막 작업은 '지붕만들기'이다, 지붕에 쓸 재료는 자작나무 껍질이다. 또한 학생들은 뿌리를 채집하기 위해 나선다. 이미 자연친화적으로 변한 그들은 가문비나무님에게 묻는다. 땅을 파도 되겠냐고... 허락을 구한다.

    숲을 파헤칠때 그들은 조심스럽다. 집 마당의 균질화 된 흙과 달리, 호혜적 그물망으로 엮어진 숲의 흙은 더럽지 않다. 달콤하다. 학생들은 허밍을 하며, 충만한 기분을 느낀다.

    그런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말로 가르치지 않아도 자연이 주는 선물을 깨닫게 되고, 그 선물에 대해 어떻게 대갚음 할수 있을지 다양한 방식으로 고민하게 된다. "이 선물에 대해 인정, 감사, 호혜성으로 보답하는 일은 자작나무 껍질 지붕 아래서든, 브루클린의 아파트에서든 똑같이 중요하다"

     

    • 2022-07-13 10:22

      책에 나오는 이로쿼이 연맹의 롱하우스에요^^

  • 2022-07-12 13:57

    뉴욕주립대 크랜베리 생태 학습장 모습입니다

  • 2022-07-12 15:46
    1. 19 은종소리 (노라)

     

    의예과 학생들에게 식물학적 소속감을 길러주고파 현지 자연보호구역으로 대려간 저자는 생태학에 대해 그들의 무관심에 가슴이 아팠다. 학생들이 대지가 풍요로운지 관심을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그 풍요에 보답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저자는 학생들을 사흘간 ‘호모 사피엔스’에서 눈을 돌려 우리와 지구를 함께 쓰는 600만종을 쳐다보도록 했다.

    산을 올라가는 것은 생태학의 관점에서 캐나다로 걸어가는 것과 같다. 위로 올라가자 활짝 벌린 꽃은 아직 온기에 깨어나지 않아 꼭 다문 봉우리로 바뀌었다. 생장 철이 너무 짧은 비탈 중간에서는 꽃산딸나무가 아예 자취를 감춘다. 그 자리에는 늦서리를 잘 견디는 은종나무가 자란다. 그러나 학생들은 교수인 저자가 하는 말을 의무적으로 받아 적으면서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저자는 여행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흘간 종과 생태계를 하나하나 체크아웃 해나갔다. 학생들이 피부 경계 너머의 세상을 보기를 바라며 가르칠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숲을 사랑한다는 얘기로부터 은근슬쩍 시작하여 토박이 환경 철학자에 대해, 창조 세계의 다른 구성원들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러나 기독교로부터도, 과학으로부터도 동떨어져서 학생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마지막 날 주차장에는 가지에 매달린 산은종나무로 가득했고 진주빛 랜턴처럼 속에서 빛이 나오는 것 같았다. 이 경이로운 장소를 걷는 동안 그늘에서 붉은꼬리지빠귀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고 흰 꽃잎이 산들바람에 비처럼 흩날렸다. 그러나 저자는 세상을 선물로서 받아들이고 보답하는 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과학의 오만에 사로잡힌 열정적인 젊은 박사인 저자는 스스로가 유일한 스승이라고 생각했으나 땅이야말로 진정한 스승임을 깨달았다.

    학생으로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챙김 뿐이다.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열린 눈과 열린 가슴으로 선물을 받아들임으로써 생명 세계와 호혜적 관계를 맺는 형식이다. 그것은 학생들을 생명 세계와 대면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귀를 열도록 하는 것이다. 그 햇살 뿌연 오후, 산은 학생들을 가르쳤고 학생들은 선생을 가르쳤다.

  • 2022-07-12 17:06

     

    28 옥수수 사람, 빛 사람

     

    과학은 앎의 원천이자 저장고가 될 수 있지만, 과학적 세계관은 생태적 공감의 적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 렌즈에 대해 생각할 때는 대중의 마음속에서 곧잘 동의어로 통하는 두 개념을 분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과학 행위와 그로 인한 과학적 세계관이다. 과학은 합리적 탐구를 통해 세계를 드러내는 절차다. 진짜 과학을 하는 탐구자는 인간을 넘어선 세계의 신비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경이와 창의성으로 가득한 자연과 비할 데 없이 친밀해질 수 있다. 우리와 전혀 다른 존재나 시스템의 생명을 이해하려 애쓰다보면 겸손해지 마련이며, 많은 과학자들에게 이것은 깊은 영적 추구다.

    이에 반해 과학적 세계관에서는 환원론적이고 유물론적인 경제적, 정치적 의제를 강화하려고 과학과 기술을 동원하는 문화적 맥락에서 과학의 해석이라는 과정이 문화에 의해 이용된다. 내가 말하려는 바는 나무로 만든 사람의 파괴적 렌즈가 과학 자체가 아니라 과학적 세계관의 렌즈, 지배와 통제의 환각, 앎과 책임의 분리라는 것이다.

    나는 과학의 ‘드러냄’에 뿌리 내리고 토박이 세계관에 기반한 이야기의 렌즈를 길잡이로 삼는 세상을 꿈꾼다. 물질과 영혼에 고루 목소리를 부여하는 이야기 말이다.

     

  • 2022-07-12 18:52

    23 움빌리카리아: 세계의 배꼽

     지의류는 뿌리와 잎, 꽃이 없는 가장 원시적인 생명체다. 조류와 균류 둘로 구성되어 있는 데, 두 짝은 사뭇 다르면서도 매우 밀접한 공생 관계를 맺어 완전히 새로운 생물이 된다. 
     조류는 빛과 공기를 당으로 바꾸는 광합성을 하고 균류는 물질을 분해하여 무기질을 끄집어낸다. 이 둘의 공생 덕분에 당과 무기질을 호혜적으로 교환할 수 있다. 이렇게 생겨난 유기체는 하나의 개체처럼 행동하며 이름도 하나다. 우리는 이들을 마치 새로운 존재, 이종 가족이 된 것처럼  '돌양','움빌리카리아 아메리카나'라는 이름을 붙인다.
     과학자들은 조류와 균류의 결혼이 어떻게 일어나는 지 연구했는 데, 이상적인 환경에서는 독자적인 삶을 고수했다. 괴롭고 힘겨운 조건을 만들었을 때에야 조류와 균류는 서로에게 협력하기 시작했다. 
     갈 데 많은 호시절에는 각각의 종들이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여건이 열악하고 삶이 팍팍해지면 그들은 삶을 유지하기 위해 호혜성의 맹세로 하나가 된다. 희소성의 세계에서는 상호 연결과 상호 부조가 생존의 필수 요건이 된다. 이것이 지의류의 가르침이다.
     지의류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법으로 가르침을 전달한다. 지의류를 보면 상호성에서 생겨나는, 각각의 종이 지닌 선물의 공유에서 생겨나는 꾸준한 힘이 떠오른다. 균형 잡힌 호혜성 덕에 지의류는 가장 힘겨운 조건에서도 번성할 수 있었다. 지의류의 성공을 판단하는 잣대는 소비와 성장이 아니라 우아한 장수와 단순함, 세상이 변해도 변치 않는 끈기다.

  • 2022-07-12 18:52

    25. 비의 목격자 (느티)

    비의 목겨자는 마치 빗속에 서서 비를 맞고 있는 둣, 귀 옆으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 이끼의 끈적한 실가닥과 포송포송함의 생생한 묘사들로 나를 흠뻑 젖게 하는 글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걷어내고 글 속에 담긴 메타포를 목격하기 위해 내 나름으로 글의 순서를 편집했다. 외워서 낭송하고 싶은 글이다.

     

     

    사정없이 파고드는 빗속에서 몇 시간을 서 있었더니 몸이 갑자기 축축하고 으슬으슬하다. 오두막으로 돌아가는 길이 나를 유혹한다. 차와 보송보송한 옷이 기다리는 곳으로 도피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이지만, 지금은 돌아갈 수 없다. 온기가 아무리 솔깃하더라도 모든 감각을, 사방의 벽을 무너뜨리고 감각을 깨우기에는 빗속에서 서 있는 것만 한 것이 없다. 안에서 밖을 내다보며, 젖은 세상에서 혼자만 마른 채인 고독을 견딜 수 없었다. 이곳 우림에서, 나는 수동적이고 보호받는 바의 방관자에 머물고 싶지 않다. 폭우의 일부가 되어, 발밑에서 꼼지락거리는 시커먼 부식토와 함께 푹 젖고 싶다. 북슬북슬한 개잎갈나무처럼 빗속에 서서 껍질 속으로 스며드는 물을 느끼고 싶다. 우리를 가르는 장벽을 물이 녹여줬으면 좋겠다. 개잎갈나무가 느끼는 것을 느끼고 개잎갈나무가 아는 것을 알고 싶다.

     

     

      물방울의 종류는 물과 식물의 관계에 따라 정말로 달랐다. 내가 숲에서 배운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무작위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은 온갖 의미로 충만하며 온갖 관계로 다채롭다. 웅덩이 거울의 표면에는 속도와 음색이 제각각인 물방울들의 특징이 아로새겨진다. 물방울 하나하나는 이끼를 만나든, 단풍나무나 젓나무 껍질이나 내 머리카락을 만나든 생명과의 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듯하다. 우리는 비를 마치 그저 하나의 사물인 것처럼, 마치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그냥 비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끼가 단풍나무가 우리보다 비를 더 잘 안다고 생각한다. 비라는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제각각 나름의 이야기를 가진 빗방울들만 있을 뿐.

     

     

      빗소리를 들으면 시간이 사라진다. 사건과 사건의 간격으로 시간을 측정한다면 오리나무의 적하 시간은 단풍나무의 적하 시간과 다르다. 이 숲은 저마다 다른 시간의 무늬로 짜여 있다. 웅덩이 표면이 저마다 다른 비의 무늬로 짜여 있듯. 젓나무 바늘잎은 비의 고주파 음을 내며 떨어지고 가지는 커다란 물방울처럼 ‘첨벙’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나무는 드물게 들리는 와르르 소리와 함께 쓰러진다. 우리는 시간을 마치 그저 하나의 사물인 것처럼, 마치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그냥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라는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제각각 나름의 이야기를 가진 순간들만 있을 뿐.

      과거에, 또한 상상된 미래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순간에서 포착되는 의미이다. 세상의 모든 시간을 가졌다면 어디론가 가는 일이 아니라 지금 있는 곳에 그대로 머무르는 일에 그 시간을 쓸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기지개를 켜고 눈을 감고 빗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달랑거리는 물방울에 내 얼굴이 비친다. 어안 렌즈여서 이마가 거대하고 귀가 조그맣다. 너무 많이 생각하고 너무 적게 듣는 우리 인간의 모습이 꼭 저렇다.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우리 아닌 지적 존재로부터 배울 것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귀를 기울이고 목격자가 되면 세상을 향한 마음이 열리고 우리를 가르는 벽이 빗방울처럼 녹아내릴 수 있다.

     

     

     

  • 2022-07-12 21:09

    26. 윈디고 발자국 (곰곰)

    윈디고는 아니시나베 부족의 전설 속 괴물로, 북부 숲의 춥디추운 밤에 들려주는 이야기 속 악당이다. 이 괴물은 자연적 짐승이 아니다. 식인 괴물이 된 인간이 바로 윈디고다. 윈디고는 영원토록 욕망의 고통을 겪는다. 먹으면 먹을수록 굶주림에 시달리고, 식욕의 노예가 되어 인간 세상을 초토화한다.

    시스템 과학의 관점에서 윈디고는 양의 되먹임 고리다. 윈디고의 허기 증가는 섭취량 증가로 이어지고, 더 극심한 허기로 이어져 급기야 통제되지 않는 소비의 광란을 낳는다. 이기심 때문에 자제력을 잃어 더는 만족할 수 없게 된 인간이 윈디고다. 반면, 안정되고 균형잡힌 시스템은 음의 되먹임 고리다. 허기가 섭취량 증가시키면 섭취는 허기 감소로 이어져 포만감을 느낀다. 음의 되먹임은 두 힘이 짝을 이뤄 균형과 지속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호혜성이다. 윈디고 이야기는 사람들 마음속에 음의 되먹임 고리를 불어 넣으려는 시도였다. 옛 가르침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윈디고적 본성이 있지만, 우리가 스스로의 탐욕스러운 성격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간파했다. 어둠을 직시하고 그 힘을 인정하되 양분을 주지는 말 것! 그런데 최근 몇백 년간 윈디고의 서식지가 넓어졌다. 다국적 기업이 낳은 새 품종의 윈디고는 지구 자원을 “필요해서가 아니라 탐욕에서” 게걸스럽게 집어삼킨다. 그 흔적은 어디에나 있고, 하도 많아서 헤아릴 수 없다. 윈디고의 발자국. 

    우리는 공모자다. 우리는 ‘시장’이 가치의 기준을 정하도록 내버려 두었으며 이렇게 재정의된 공공선은 판매자를 부유하게 하고 영혼과 대지를 빈곤하게 하는 방탕한 생활 양식에 의존한다. 우리는 날조된 수요와 강박적 소비라는 윈디고 경제의 시대를 살아가는 듯 하다. 내가 두려운 것은 단지 내면의 윈디고를 직시하는 것보다 세상이 뒤집혀 어두운 면이 밝은 면으로 둔갑했다는 것이다. 방종한 이기심이 이제는 성공의 비결로 찬양받고, 우리는 탐욕을 존중하라고 요구받는다. 영구적 성장은 자연 법칙과 양립할 수 없는데도, 정부는 유한한 지구에 무한한 성장을 처방하는 경제 체제를 계속해서 받아들인다. 우리 지도자들은 지구상의 나머지 모든 종이 보여주는 지혜와 본보기를 고의로 외면한다. 윈디고적 사고방식만 빼고. 

  • 2022-07-12 21:56

    21 캐스케이드 헤드의 불(넝쿨)

    “돌아오라, 돌아오라, 나의 살 중의 살이여. 나의 형제여. 그대의 생명이 시작된 강으로 돌아오라. 그대를 위해 환영 만찬을 준비했으니.” 카누가 닿을 수 없는 바다 너머 칠흑같은 해변에 한 점 불빛이 보인다. 어둠 속에서 성냥불 하나가 깜박거리며, 해안을 따라 밀려와 안개와 섞이는 흰 기둥 아래에서 신호를 보낸다. 아득한 공간에 불빛 하나. 때가 됐다. 한 몸처럼 그들은 동쪽으로 향한다. 해안으로, 고향의 강으로. 그들은 고향 개울물의 냄새를 맡자 이동을 멈추고는 느려지는 조류를 타고 휴식을 취한다. 그들 위에서, 곶에서는 빛나는 불기둥이 물에 제 모습을 비추어 붉어진 파도 꼭대기에 입맞추고 은빛 비늘을 반짝이게 한다.
     
    모든 가장자리의 가장자리인 만은 강, 바다, 숲, 흙, 모래, 햇빛이 만나는 생태계의 교차점으로, 생물 다양성과 생산성이 어느 습지보다 높다. 온갖 무척추 동물의 번식지이기도 하다. 식물과 퇴적물의 촘촘한 스펀지는 온갖 크기의 수로가 얽혀 있어 다양한 크기의 연어가 그 그물망으로 들고 날 수 있다. 강어귀는 연어 양식장이다. 알에서 깬 지 며칠밖에 안 된 작은 치어는 몸을 불리고 짠물에 적응하는 스몰트smolt(바다로 가는 2년생 연어_옮긴이)가 된다. 왜가리, 오리, 독수리, 조개는 그곳에서 살 수 있지만 소는 살지 못한다. 풀의 바다는 너무 축축했다. 그래서 정착민들은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둑을 세우는 간척 사업을 벌여 습지를 목초지로 바꿨다.
    둑을 쌓자 강은 모세관 그물망에서 쭉 뻗은 하나의 물살로 바뀌어 강에서 바다로 곧장 흘러 들어갔다. 소들에게는 좋았을지 모르지만, 사정없이 바다로 내팽개쳐진 어린 연어들에게는 재앙이었다.
     
    1976년부터 미국 산림청과 여러 제휴 단체들은 오리건 주립대학의 주도하에 강어귀 복원 사업을 실시했다. 그들의 계획은 제방과 댐과 방조 수문을 철거하고 다시 한 번 미세기가 원래 목적지까지 가서 목적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었다. 강어귀의 본분을 땅이 기억하길 바라면서 그들은 인간이 만든 구조물을 하나씩 해체했다.(...)
    제방과 댐이 철거되자 땅은 염습지의 본분을 기억해냈다. 물은 퇴적물 사이사이의 작은 배수로를 통해 어떻게 스스로를 내보내야 하는지 기억해냈다. 곤충은 어디에 알을 낳아야 하는지 기억해냈다. 오늘날은 강물의 자연적인 곡선이 복원되었다. 곶에서 본 강은 일렁이는 사초를 배경 삼아 울퉁불퉁한 노老로지폴해송shore pine이 그린 동판화 같다. 모래톱과 깊은 웅덩이는 황금색과 파란색의 소용돌이 무늬를 그린다. 이렇게 새로 태어난 물 세상의 만곡부마다 어린 연어가 쉬고 있다. 유일한 직선은 제방의 옛 경계뿐으로, 강물의 흐름이 어떻게 방해받았는지, 어떻게 복원되었는지를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연어를 상품으로 만들어 돈을 벌려던 사람들은 연어를 존중하지 않았다.상류에 건설된 댐으로 돌아갈 길을 잃어버리고,산업발전으로 인해 환경은 더욱더 오염되어 연어들은 멸종위기로 내몰렸다. 언제까지나 영원할 줄 알았을까?
    귀환을 환영해 주던 불빛은 사라진지 오래이고,다시 그들이 돌아오기를 염원해 보지만 그들은 쉽게 돌아오지 않을것이기에 마음이 아프다.

     

  • 2022-07-12 23:17
    1. 31.윈디고에게 이기다.

    -선물로 이루어진 세상이 상품으로 이루어진 세상과 공존할 수 없을까봐 두렵다.

    윈디고에 맞서 내가 사랑하는 것을 지켜낼 힘이 없을까봐 두렵다.-

     

    윈디고를 퇴치하던 전설의 시대, 그 옛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이야기에 따르면 사람들은 나나보조에게 윈디고의 비명에 맞서는 노래가 되어주길 간청했다. 윈디고는 굶주림의 계절인 겨울에 가장 힘이 세다. 그래서 나나보조는 ‘여름’-토박이말로 니빈niibin-풍요의 때-에 윈디고를 사냥하기로 했다. 나나보조가 윈디고를 물리친 때, 니빈. 과소비 괴물의 기세를 꺾는 화살, 병을 치료하는 약이 여기 있다. 그 약의 이름은 ‘풍요’. 빈궁이 극에 이르는 겨울에는 윈디고가 걷잡을 수 없이 기승을 부리지만, 풍요가 퍼지면 굶주림이 사그라들고 그와 더불어 괴물의 힘도 약해진다.

    현대의 시장 체제는 부의 원천과 소비자 사이의 흐름을 가로막음으로써 인위적으로 희소성을 만들어낸다. 누군가가 기아에 시달릴 때 누군가는 과식으로 인한 질병에 시달린다. 우리를 지탱하는 대지 자체도 연료 부정의 때문에 파괴되고 기업에는 인격을 부여하면서 인간을 넘어선 존재들에게는 그런 자격을 부정하는 경제- 그것이 윈디고 경제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말한다. ‘그릇 하나와 숟가락 하나’의 가르침에 대안이 있지 않을까?

    이것은 대지의 선물이 그릇 하나에 모두 담겨 있으며 모든 선물은 숟가락 하나로 나눠야 한다는 공유재 접근법이다. 이런 현대의 경제적 대안은 대지가 사유 재산으로서가 아니라 공유재로 존재하며 모두의 유익을 위해 존중과 호혜성을 품고 돌봐야 한다는 토착 세계관을 뚜렷이 반영한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책 변화만이 아니라 가슴의 변화다. 희소성과 풍요는 경제적 성질인 것 못지않게 정신과 영혼의 성질이다. 감사는 풍요의 씨앗을 심는다.

    감사는 윈디고 정신병을 치료하는 강력한 해독제다. 대지가 우리에게 내어준 모든 것에 감사하면 우리를 따라 다니는 윈디고에 맞설 용기가 생긴다.

     

    후기: 선물에 보답하다

    -우리는 모두 호혜성의 언약에 묶여 있다. 식물의 숨과 동물의 숨이, 겨울과 여름이, 포식자와 피식자가, 풀과 불이, 밤과 낮이, 살아 있는 것과 죽어가는 것이 연결되어 있다. 물은 안다. 구름도 안다. 흙과 대지를 만들고 부수고 다시 만들며 끊임없이 베풂의 춤을 춘다.[......]

    호혜성의 도덕적 언약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 우리가 받은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을 존중할 것을 요구한다. 이제 우리 차례다. 이제 서야. 어머니 대지님을 위해 베풂을 열자. 그녀를 위해 담요를 펴고 우리가 손수 만든 선물을 높이 쌓자. 책, 그림, 시, 기발한 기계, 공감의 행위, 초월적 생각, 완벽한 연장을 상상하라, 주어진 모든 것을 치열하게 지켜내라. 마음, 손, 심장, 목소리, 환상의 선물이 모두 대지를 위해 차려진다. 선물이 무엇이든 우리는 내어줘야 하며 세상을 다시 새롭게 하기 위해 춤을 춰야 한다, 숨이라는 특권의 대가로.-

     

    향모 안에서 숨을 고르며 읽어나간 단어들이

    향모 밖에서 작은 깨달음들로 이어집니다.

    두려움에 머뭇거리고 더딘 움직임에 지치는 순간을 딛고

    서로에 대한 감사와 연결이 나아갈 용기가 되고,

    돌고 도는 선물과 춤이 세계를 물들이기를.                                                                                                       2022.7.12.참

  • 2022-07-12 23:20
    1. 부수적 피해 (고마리)

    차들이 호모 사피엔스를 보고도 브레이크에 인색하다면, 밤중에 이 도로를 건너는 우리의 이웃 암비스토마 마스쿨라타(점박이도롱뇽)에게는 무슨 희망이 있을까?

    부수적 피해: 미사일이 엉뚱한 곳을 맞힌 결과를 얼버무리는 기만적 표현. 마치 인간이 일으킨 파괴가 불가피한 자연 현상인 것마냥 고개를 돌리라고 요구한다. 무력감에 라디오를 끄고 비옷을 걸치고 겨울철 굴에서 나와 임시 봄못에서 짝을 만나는 도롱뇽의 이동을 탐색하기 위해 올해의 여정을 시작한다. 도롱뇽의 유도 체계는 위성이나 마이크로칩의 도움 없이 자력 신호와 화학 신호를 조합하여 길을 찾는다. 길 찾기의 비결은 지구 자기장을 정확히 읽는 능력으로 뇌에 있는 작은 기관이 자기 데이터를 처리하여 많은 호수와 임시 봄못을 지나 목적지인 고향에 도착한다.

    임시 봄못을 산란지로 고르는 이유는 물이 얕아 금방 사라지므로 도롱뇽 유생을 잡아먹는 물고기가 없기 때문이다. 암컷이 젤라틴질(100~200개씩) 덩어리째 낳은 알은 안전한 웅덩이에서 몇 달 머물면서 아가미가 허파로 바뀌고, 청소년기를 지나 4~5년 뒤에 성숙해지면 웅덩이로 돌아온다. 성체는 길게는 18년 동안 짝짓기 이주를 한다.

    양서류는 피부 호흡을 한다. 몸과 대기 사이의 축축한 막에서 독소를 걸러내지 못하면 기형 이 된다. 공기와 물의 독소, 산성비, 중금속, 환경 호르몬의 최종 행선지는 물이다. 우리는 발전의 비용으로 습지와 숲이 사라지면서 양서류 서식처를 잃는 부수적 피해를 입고 있다. 오늘 밤 도롱뇽이 처한 최대의 위협은 쏜살같이 자나가는 자동차다. 이 캄캄한 시골길에서의 대학살과 바그다드 길거리에 널브러진 시신들은 연관성이 있는 듯하다. 자식을 전장에 보내도록 하는 것이 석유라면, 이 분지를 질주하는 엔진의 연료가 석유라면, 우리는 모두 공모자다. 군인, 민간인, 도롱뇽이 죽음으로 엮인 것은 석유에 대한 우리의 애정 때문이다.

     

    로드킬 조사는 모음담장을 설치하고 도로를 순찰하고 밤새 개체 수를 센다. 미래에 종이 보전되기를 바라면서 자연주의자들은 상처의 세상에서 살아간다. 그 상처는 그들만이 볼 수 있다.

    우리는 그곳에서 경이로운 의식을 목격하고 하룻밤 동안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는다. 현대인들은 ‘종 고독’(창조 세계의 나머지 구성원으로부터 소외된 상태)이라는 크나큰 슬픔을 겪는다. 이 고립을 만들어낸 재료는 우리의 두려움, 오만, 밤에도 환하게 불을 밝힌 우리의 주택이다. 도로를 걷는 동안 고독이 덜어지기 시작했으며 우리는 다시한번 서로를 안는다.

     

    도롱뇽은 ‘타자’로 손색이 없다. 차갑고 미끌미끌. 우리에게 타자혐오를 일으킨다. 혐오는 다른 종을 겨냥할 때도, 우리 스스로를 겨냥할 때도 있다. 도롱뇽과 함께 하는 것은 그들의 존재할 권리와 제 나름의 영토에서 살아갈 권리를 입증한다. 그들을 무사히 건네주는 건 호혜성의 언약. 우리가 서로에게 지는 상호적 책임을 떠올리는 데 유익하다. 도로의 교전 당사자로서 우리는 스스로 가한 상처를 치유할 의무가 있지 않을까?

    “들으라! 부수적 피해를 입는 우리는 그대의 부, 그대의 스승, 그대의 안전, 그대의 ‘가족’이다. 안락을 향한 그대의 뒤틀린 욕구가 창조 세계의 나머지 구성원들에게 사형 선고를 의미해서는 안된다.”

    “나는 통곡한다. 슬픔이 사랑으로 통하는 입구가 될 수 있다면 우리 모두로 하여금 우리가 부수고 있는 세상을 위해 통곡하도록 하라. 세상을 다시 온전히 사랑할 수 있도록.”

  • 2022-07-13 00:30
    27 성스러운 것과 슈퍼펀드
    저자의 집에는 샘이 있는 모양이다. 우선 이 점이 너무나 부러워서 입이 떡 벌어졌다. 이끼에 맺힌 물방울에서 물의 여행을 상상할 수 있는 환경이라니... 그런데 저자는 물 한방울의 흐름을 멈춰주고 싶을 정도록 걱정을 한다. 이 물방울이 미국 산업시대의 폭력이 낳은 환경 오염의 대표적 상징 중 하나인 오논다가호로 곧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논다가호는 현재 허니웰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과거 얼리이드케미컬사, 그리고 얼라이드케미컬의 전신인 솔베이프로세스라는 회사의 산업폐기물이 축적되어, 사람들이 수영을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식물도 동물도 살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된 호수이다. 지금은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 유투브를 찾아보다. 어떤 사람이 기형 베스 낚아 보려 낚시하는 영상, 호수를 정화한다고 어떤 배가 떠 있는데 허니웰이라는 회사 이름이 크게 보였고, 이 과정에서 나온 폐기물을 파란 비닐봉지에 담아 육지에 산 처럼 쌓아두었는데 이로 인한 건강 문제를 호소한 소송에서 주민들이 패소해 슬퍼하는 영상도 찾아볼 수 있었다.
     
    이 장의 제목에 슈퍼펀드라는 말이 등장한다. '슈퍼펀드'는 미국의 환경보호국(EPA)가 유해물질로 오염된 현장을 조사하고 '청소' clean up할 것을 약속한 1980년의 [종합 환경 대응, 보상 및 책임법](CERCLA)이 마련한 프로그램을 의미하거나 이 법이 적용되는 '현장'을 일반적으로 부르는 말이다. 찾아보니 처음엔 그 비용이 석유회사나 화학제조업체의 소비세로 예산이 마련되다가 1995년부터는 일반 납세자에게 전가되었다고 한다. 이름은 슈퍼펀드지만 지금은 자금이 부족하고, 미 전국에 4만곳, 가장 심한 오염으로 관리되는 곳은 1400곳인데 자금 부족으로 2014년까지 소위 '청소'했다고 밝힌 곳은 1200곳 중 8곳이라고 한다. 다행히 2021년 말에 화학물질 재조업체의 소비세가 이 수퍼펀드로 들어가는 것이 재승인되었다고 한다.
     
    이 책에서 슈퍼펀드는 화학적으로 오염되었다고 미국 안에서 잘 알려진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저자도 언급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재난을 실은 잘 들여다보지 않는다. 아니, 적극적으로 '망각'한다. 책에서는 R. J. 클리프턴이라는 심리학자의 말을 인용한다. 사람들은 "삶의 토대에 직관적이고 정서적이고 생물학적으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이와 동떨어진 정신적 계산에 몰두한다. 이런 분열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의 사멸이 준비되는 것을 묵묵히 받아들인다"라고.
     
    내가 몇 년전에 비건 채식을 시작하면서 책과 자료들을 찾아볼 때 인상적인 내용이 있었다. 사람들은 개 고양이는 사랑하고 소 돼지는 먹는 현실에서 인지부조화를 일으킨다고. 그리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각종 장치들이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작동한다는 내용이었다. 저자가 땅의 '의미'부터 다시 봐야 한다거나 '나무'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문제를 그렇게 자주 언급하는 것이 나는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된다. 이것을 '인지부조화'라고 하던, 이 책에서처럼 '질병'이라고 부르던 이 현상은 문화로, 상식으로 우리 내면과 세상 곳곳을 채우고 있으므로, "직관적이고 정서적이고 생물학적인" 불편함은 계속 억누를 수 있고 덮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엔 댓가가 따른다. 우리 삶의 터전이라는 "공동체의 다른 주권적 존재들"과의 연결감이 그 댓가인 것이다. 우리 마음 한 곳의 이유모를 공허함, 불안함, 슬픔이 이 연결의 부재를 알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 현실을 마주하며 슬픔, 절망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온전하게" 만들자고. 그리고 이 길을 갈 때 파괴의 현장에 대한 정보의 홍수를 조심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옳은 일을 하려는 우리의 성정을 살려 땅의 안녕을 위해 참여할 수 있는 역할을 살려내자고 말한다. 땅과 우리의 호혜적 관계를 '출입 금지' 표지판 앞에서 포기하지 말자고.
     
    대한민국에서 환경, 생태, 생명이라는 말에 멈칫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나도 이 '절망'이 어떤 것인지 잘 안다. 20,30대 새만금 간척사업을 반대, 천성산 고속철도 터널 공사 반대 운동을 하면서 초기에는 사람들이 이 사실들을 '알기만 하면' 이 엄청난 부조리들이 바로잡힐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사람이 절벽에 매달려 뉴스가 되고, 사람이 수십일 단식으로 죽어가 뉴스가 되어도 산이 폭파되고 터널이 뚫리는 것을 보았다. 그때는 세상을 등지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조애나 메이시가 '절망', '슬픔'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 로빈 윌 키머러씨가 절망이 "우리를 마비시키고 우리 자신과 대지의 힘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말도 너무나 경험적으로 이해한다. 그 시기에 '이 세상이 망하겠구나'라는 절망은 무력한 나 자신은 물론, 세상이 너무 미웠기 때문에 '세상아 망해라'와도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이제 생태계 '문제'도 관계의 문제라는 점에 쉽게 동의가 된다. 그래서 생태계 복원으로 가는 길은 정말 관계를 고민할 일이고, 내가 '보호'하겠다, '복원'하겠다라는 그 '땅', '물', '도롱뇽', '갯벌'을 내가 무엇으로 보는지, 무엇으로 보도록 교육받았는지를 검토하는 것이 어쩌면 가장 중요하겠다고 생각한다. 저자도 우리가 이 점을 놓치면 인간의 "복원"은 땅은 어느새 '자본'이 되어 돈벌이 수단이 되고, 누군가의 '재산'이나 '자원의 보고'가 되어 그 주인이 뭐라도 할 수 있는 곳이 되고, 쓰레기통이 되어 뭐든 어질러 놓고 덮어 놓으면 '법적 책임'을 다했다 말하고 떠날 수 있는 곳이 되고 수질오염을 공학적으로 해결하는 도구로 나무는 녹색 스펀지, 땅은 살아있는 기계가 되어버린다고 말하는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 모두가 진정한 복원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저자에게 땅은 "자급자족 경제의 원천이자 영적 보금자리"이기 때문이다. 토박이의 세계관에서 생태계를 주권적 존재들의 공동체로 보자고한다. 그렇게 저자는 드디어 폐기물층에서 치유의 스승들을 발견한다. 자작나무님부터 부들님, 미국질경이님, 미루나무와 사시나무 등등 최초의 복원생태학자인 식물들을. 저자는 오논다가호의 어느 한 조각에서 이들 아래 뿌리 투성이 흙을 발견하며 이들이 영양소 순환의 복구라는 임무를 제대로 해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 호혜성의 패턴이 아로새겨져있음을 인식한다. 풀은 씨앗으로 개미를 먹이고, 개미는 흙으로 풀을 먹이며 사시잎자작나무는 염주말 거품의 보호와 질소 공급의 혜택을 누리고, 사시잎자작나무 근처에 물열매를 만드는 떨기나무들은 나무에서 새가 싼 똥 속 씨앗에서 출발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태공동체가 '시작'되는 이 곳을 저자가 '존경한다'라고 표현한 지점에 잠시 머물러본다. 그리고 '스승으로서의 땅', '치유자로서의 땅'을 뵙고 느끼면서 좀 더 튼튼한 내 모습도 떠올려본다. '복원 현장'에서 치유의 스승, 다정함과 공감의 상징인 향모를 발견하고 저자는 "부서진 것은 땅이 아니라 우리가 땅과 맺고 있던 관계"이며 "생태 복원은 인간이 자신을 지탱해주는 생태계에 돌봄의 책무를 다하는 호혜성의 행위로 간주할 수 있다"고 말한다. 궁극적인 복원은 대지가 하는 것이고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대지와의 관계"라고.
     
    저자는 "복원의 시대를 열고 지금도 우리를 둘러싼 생명이 놀라운 다양성을 다시 짜는 것보다 더 가슴 뛰는 목표는 없다"는 '지구의 절반'의 저자 E. O 윌슨의 말을 인용한다. "복원의 시대", E. O 윌슨의 비전대로 지구의 절반을 자연에, 비인간 동물, 식물에게 돌려주어 본격적으로 복원의 시대가 열리는 것. 상상만해도 인간으로서의 자부심이 살아난다. 그리고 이 시대로 본격적으로 들어서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절망의 해독제이다. 그래서 저자는 복구된 송어 개울, 복구된 공동 텃밭, 옛 영토에서 노래하는 늑대, 도롱뇽이 길을 건너도록 도와주는 아이들과 같은 '이야기'들이 쌓이고 있음을 말한다. 왜냐하면 이런 승리들이 종이학처럼 연약해도 이것이 영감이 되어 절망이 독을 해독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호수 탐방을 마치며, 땅과의 관계 복원은 자아와 세상이 관계가 그런것 처럼 호혜적이니 "우리는 대지를 치유하려 노력하고 대지는 우리를 치유할 것"이라며 '보금자리로서의 땅'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럼 나는 이제 어디에서 시작할까? 복원의 이야기를 실어 나를 것이고 만들어내는 데 동참할 것이고, 누가 나무 이야기를 하면 그 나무 이름 뒤에 나는 '님'자를 속으로, 가끔 소리내어 붙일 것이다. 종종 습관적으로 절망하는 내 마음을 돌볼 것이고 더욱 튼튼해질 것이다. 저자의 말 처럼 대지가 나를 치유할 것이니.

  • 2022-07-13 00:33

    18 나나보조의 발자국을 따라: 토박이가 되는 법 - 겨울

     

    인류의 어머니, 하늘여인은 본디 이민자였다.

    전설에 따르면 조물주가 네 가지 성스러운 물질을 모다 으뜸사람을 빚고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거북섬에 정착시켰다고 한다. 만물 중에 마지막으로 창조된 으뜸사람이 받은 이름은 나나보조였다. 나나보조가 맡은 첫 임무는 하늘여인이 춤으로 생명을 불어넣은 세상을 걷는 것이었다.

    나나보조는 으뜸명령을 곱씹어보고서 자신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지식이 땅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역할은 인간으로서 세상을 다스리거나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는 법을 세상으로부터 배우는 것이었다.

    나나보조는 땅을 계속 탐사하면서 새로운 임무를 받았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이름을 익히는 것이었다. 이름은 우리 인간이 서로와 또한 생명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법이다. 나나보조는 모든 존재가 한 언어를 말하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기에 모든 피조물이 서로의 이름을 알았던 시절이 있었다고 말한다.

    나나보조는 토박이가 된다는 것이 곧 대지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임을 기억했다. 땅에 대한 지식을 존중하고 땅의 수호자들을 보살핌으로써 우리는 토박이가 되어간다.

    나(저자)는 시트카가문비나무 할머니 곁에 앉아 생각한다. 정착민들(백인)이 나나보조의 뒤를 따라 “걸음걸음이 어머니 대지님에게 드리는 인사가 되”도록 걸으리라 신뢰할 수 있을까? 나나보조의 발자국을 따른다고 해서 버금사람이 반드시 탈바꿈할 수는 없다. ‘토박이’라고 느끼지 못하더라도 세상을 새롭게 하는 깊은 호혜성에 들어설 수는 없을까?

    나는 시트카 할머니 곁에서 ‘백인의 발자국(질경이)’을 발견한다. 이 식물은 동해안에서 서해안까지 첫 정착민과 함께 들어와 그들이 가는 곳 어디나 퍼졌다. 원주민들은 처음에는 이 식물을 미심쩍어했지만 나나보조의 후손답게, 모든 것에는 목적이 있으며 우리는 그 목적의 성취를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어떤 선물을 가져왔는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베거나 데거나 벌레 물렸을 때 응급 처치용, 소화제, 지혈제 등의 역할을 하며, 이 슬기롭고 너그러운 식물은 사람들을 충실히 따라다니면서 식물 공동체의 명예 회원이 되었다. 질경이님은 '귀화 식물'이다.

    버금사람에게 부여된 임무는 ’백인의 발자국‘의 가르침을 따라 장소에 귀화하도록 애쓰고 이민자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우리는 자신의 선물을 주고 자신의 책임을 다한다. 귀화한다는 것은 자녀의 미래를 염려하며 살아가는 것, 우리의 삶과 모든 친척의 삶이 여기 달린 것처럼 땅을 보살피는 것이다.

    시간이 한 바퀴 돌아 처음으로 향하면서 백인의 발자국은 나나보조의 발자국을 따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직선적 시간관을 가진 사람에게는 나나보조의 이야기가 오래전 과거를 되새기며 세상의 내력을 밝히는, 역사의 신화적 전승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순환적 시간관에 따르면 이 이야기는 역사이자 예언이요, 다가올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시간이 회전하는 원이라면 역사와 예언이 만나는 지점이 있다. 으뜸사람의 발자국은 우리 뒤의 길에도 있고 우리 앞의 길에도 있다.”

  • 2022-07-13 08:40

    밑줄메모 합본

  • 2022-07-13 08:49

    20. 둘러앉기

    허브 뿌리를 조심스레 떠내자 밑에 있는 흙은 크림을 얹기 전의 모닝 자바 커피만큼 새카맣다. 부식토는 축축하고 치밀하며 곱디고운 커피 가루만큼 부드럽다. 흙에는 '더러운'것이 하나도 없다. 이 부드러운 검은색 부식토가 얼마나 달콤파고 깨끗한가 하면 한 숟가락 퍼서 먹어도 될 정도다. 

     

    아파치어로 '땅'의 어원은 '마음'을 일컫는 단어와 같다. 뿌리를 캐는 것은 땅의 지도와 우리 마음의 지도 사이에 거울을 드는 것이다. 이 일은 침묵 속에서, 노래 속에서 대지를 어루만지는 손길에서 일어나는 듯하다. 거울을 일정한 각도로 기울이면 길들이 합쳐지고 집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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