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과학' 대신 'SF' 클래식, 열 번째 시간 (끝)

명식
2023-06-01 16:12
356

 

 

 

  지난 5월 17일, <공상과학이 아닌 SF 클래식> 세미나는 그간의 세미나를 바탕으로 저마다의 글을 쓰고 그를 동료들, 손님들과 나누며 시즌1을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날 세미나에는 시즌 1을 함께 해온 멤버인 저와 호면님, 라니님, 모닝빵님, 초희님, 유하님 이외에도 정군님, 요요님, 청량리님, 우현님, 동은님, 초빈님께서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셨습니다. 이렇게 총 열두 명이서 오붓하게 세 시간 정도의 세미나를 진행했는데요. 이날 발표된 글들은 총 다섯 개로 목차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리뷰 에세이

 1. 진짜가 되려면 :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를 읽고 / 라니
 2. 비록 거짓이라 할지라도 :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 리뷰 / 호면

 

 SF 초단편(엽편)

 3. 행성의 비명 / 인유하
 4. 재미없는 세상을 재미있게 / 명식
 5. 무제 / 초희

 

  보시는 것처럼 이번 세미나의 마무리 글은 두 개의 형식 중 하나를 골라 쓰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하나는 세미나 기간 중 읽은 작품들 가운데 택일하여 리뷰 에세이를 쓰는 것, 다른 하나는 자신만의 초단편 SF 작품을 쓰는 것이었지요.
  라니님과 호면님은 두 분 모두 필립 K.딕의 작품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에 대한 리뷰 에세이를 쓰셨고 나머지 세 사람은 각자의 초 단편 작품을 썼습니다. 모닝빵님께서는 건강 문제로 마무리 글을 쓰지 못하셨지만, 컨디션이 다 회복되지 않은 와중에도 자리에 참석하셔서 동료들의 글에 감상을 남겨 주셨습니다.

 

 

 

  1. 리뷰 에세이

 

「레시피가 같아도 재료 손질과 요리하는 자에 따라 맛이 다르듯, 진짜란 그 기준이 무엇인지 명확히 표현하지 못하지만 ‘이것이 맛있다’라고 명확히 알듯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지의 상태에서는 알 수 없지만 지식과 경험을 통하면 자연스럽게 얻게 된다.
  그런 점에서 안드로이드들은 많은 능력과 지식을 주입받았지만 모든 경험을 기계적이고 지적인 납득으로만 체험하기 때문에 인간이 감정을 겪으며 체득한 지점과 일치하기 어렵다. 소설에서도 “안드로이드들의 정신과정에는 추상성이 퍼져 있는 것 같다”는 표현으로 인간과의 차이를 드러낸다. 결국 진짜를 알기 위해서는 살아내는 지난한 과정을 겪어야 하는 셈이다.」

- 라니님, <진짜가 되려면 :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를 읽고> 중

 

「감정을 이입한다는 것은 다른 이와 같은 감정을 동일하게 느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결코 타인이 될 수 없기에 다른 이가 느끼고 있다고 추정되는 감정을 나의 마음으로 짐작 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안드로이드가 이야기 하는 감정이입이 허구라는 이야기는 새삼스럽지 않다.
  그러나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도 바로 허구다. 거미의 다리를 떼어내는 순간, 안드로이드에게는 거미가 걷는데 필요한 다리가 몇 개인지의 여부가 중요한 문제라면 인간 이지도어에게는 거미의 고통이라는 문제가 중요하다. 거미의 고통이라는, 거미를 인간처럼 여기는 허구의 사실을 진짜처럼 느끼는 것이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인간에게서 매번 일어나는 감정이입이라는 허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처럼 느끼는 것, 그것이 비록 내 안에서 일어나는 아주 개인적인 일이라고 할지라도. 비록 허구일지라도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 호면님, <비록 거짓이라 할지라도 :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 리뷰> 중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이기도 한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는 얼핏 영화와 닮아보여도 사실 디테일한 부분에서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블레이드 러너>의 인조인간 ‘레플리컨트’들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인간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 어쩌면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면모’를 보이며 인간과 레플리컨트 간의 경계를 흐트러뜨리지만 『안드로이드는……』는 ‘진짜’와 ‘가짜’를 다루는 뉘앙스가 약간 미묘하지요.
  원작에서는 ‘레플리컨트’ 대신 ‘안드로이드’라는 명칭이 쓰이는데, 이들 안드로이드들과 인간을 구분하는 가장 큰 기준은 감정 이입 능력입니다. 이에 안드로이드들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감정 이입 능력을 확인하는 가장 장치인 ‘머서 교’의 허구를 폭로하여 감정 이입 능력 자체가 무의미한 것임을 드러내려 하는데요. 작중에서는 결과적으로 머서 교가 허구인 것과 상관없이 감정 이입 능력은 여전히 존재하며 유의미하다는 메시지를 흘리지요.
  이는 분명 ‘진실’과 ‘허구’의 이분법을 다시 생각하게 하지만, 동시에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이분법에 대해서는 재차 선을 긋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대신 그 반대로 생각할만한 장면들도 여럿 있고요. 때문에 세미나 때도 작품의 주제 해석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었고, 라니님과 호면님의 에세이에서도 그런 상이하고 다양한 관점들이 드러난 듯합니다. 두 분의 글을 통해 다각도에서 작품을 살피고 주제에 대해 토론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두 분 모두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2. SF 초단편

 

 「행성 표면의 한 군데서 시작된 붉은 점하나가 점차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누가 실수로 스크린에다 울달루 소스를 묻혀놓은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것은 스크린 뒤에서, 우리의 망원경이 바라보고 있는 그 푸른 행성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한 군데였지만 시간이 지나자 다른 곳에서도 붉은 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생겨난 그 붉은 점들은 점점 커지더니 마침내는 그 행성을 모조리 덮고 말았다. 이제 그 행성의 아름다운 푸른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창백한 빛을 내뿜던 그 자리에서는 이제 붉은 화염이 마구 타오르고 있었다. 죽음의 빛, 멸망의 빛이었다. 그것은 자멸의 빛이었다.」

- 유하님, <행성의 비명> 中

 

 「이 시대의 모성은 완벽한 로봇과 함께 아이를 키우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D의 머릿속에는 이제껏 읽은 정보들이 스치며 더 불안해졌다. '가끔 뉴스에 나오는 사이코패스 살인마들은 걔네 부모님들이 돌보미 로봇을 구할 돈이 없어서 그냥 키웠다는데.' 설마, 자신이 그 정도로 아이를 잘못 키우지는 않을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아이를 키울까 고민을 하느라 J에게 4년 동안 같이 살던 로봇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말을 어떻게 전할지는 차가 유치원 대문을 들어서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채였다.」

- 초희님, <무제> 中

 

 「“기계학습 인공지능의 발전은 이전까지 인류가 자초했던 수많은 문제들을 손쉽게 해결했습니다. 인공지능의 문제 해결 역량이 인류의 그것에 비해 월등하다는 사실이 여러 사례를 통해 증명되었고, 초기 강세를 띠었던 반反 인공지능 여론도 빠르게 잦아들었습니다. 이러한 흐름에 힘입어 21세기 중반에 이르렀을 즈음에는 이미 대부분 인류 집단이 의사결정을 인공지능에게 위임하게 됩니다. 바야흐로 창조물이 창조자를 관리하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 명식, <재미없는 세상을 재미있게> 中

 

 

  유하님의 <행성의 비명>은 지구가 멸망하는 순간을 우연히 목도한 야근 중이던 사무직 외계인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초희님의 <무제>는 육아에 있어 돌보미 로봇이 필수로 여겨지는 시대에 로봇 없이 아이를 키우려 한 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고, 저의 <재미없는 세상을 재미있게>는 인공지능이 인류를 관리하는 미래 세계에 모 역사기념관에서 진행된 학생 견학을 다루었습니다.
  세 작품 모두 상이한 주제와 상이한 구성, 상이한 문체로 쓰여 각 작가의 스타일이 잘 드러났던 작품들이 아닌가 합니다. 또 유하님의 작품의 경우 저희가 함께 읽은 아서 C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 느낌이 약간 묻어났고, 초희님과 제 작품의 경우에는 마찬가지로 함께 읽은 아이작 아시모프의 <아이, 로봇>의 느낌이 묻어난다는 평도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좋았던 점과 아쉬웠던 점에 대해 참가자 분들의 적극적이고 다채로운, 그러면서도 예리한 피드백들이 있었습니다. <행성의 비명>의 맛깔 나는 고유명사들이라던가, <무제>에서 등장하는 육아의 미래가 갖는 개연성, <재미없는 세상을 재미있게>의 작은 반전에 대한 호평 등이 기억나네요. 그런가 하면 <무제>에 대해선 로봇 없는 육아가 겪는 어려움들이 더 디테일하게 그려졌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운 평도 있었고, <재미없는 세상을 재미있게>에선 ‘거짓말’이라는 장치로 인한 파동이 다소 비약적으로 느껴진다는 평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평들을 아울러 ‘좀 더 이 이야기들을 길게 보고 싶다’는 요청들이 있었고요.
  저로서는 이런 식으로 소설을 써서 세미나를 마무리해본 것이 처음이었는데, 쓰는 과정도 나누는 과정도 신선했고 또 매우 즐거웠습니다. 쓰신 분들도 듣고 평해주신 분들도 모두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상 총 다섯 개의 글과 함께 마지막 세미나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세미나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여러모로 제가 미숙했는데, 그럼에도 함께해주신 모든 분들이 꾸준히 글을 읽어와 주시고 매번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셨기에 세미나가 잘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또 마지막 세미나도 거의 세미나가 임박해 홍보글을 올린 탓에 다른 분들이 와주실거란 기대를 거의 못했었는데, 여섯 분이나 참석해주셔서 활발한 감평을 해주셨기에 글쓴이들에게도 큰 의미가 있는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이 글을 빌어 모든 분들에게 거듭 감사드립니다.

 

  이제 이어질 시즌 2는 오늘로부터 2주 후인 6월 14일 시작을 목표로 합니다. 본디 6월 7일 시작으로 예정되었으나 시즌1 마무리가 일주일 뒤로 미루어지면서 이 역시 일주일 밀린 것인데요. 상세한 사항은 곧 올라갈 공지글을 참조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시즌 2에도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댓글 2
  • 2023-06-01 22:12

    순수문학도 인문학책도 아닌 것이, 나중에 시간이 남으면 언젠가 읽어야지 미뤄뒀던 그 SF 소설이 이렇게나 재미와 의미를 품고 있었던가 발견하게 된 수업이었습니다.
    함께가 아니면 읽고 말할 생각조차 못 했을 것 같아요. 마지막 시간은 참여자 모두가 공감하셨을 것 같지만 참 뜻깊고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저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읽어내기도 했지만 다양한 해석으로 이해해주셔서 선생님께도 감사드려요^^
    그리고 위의 제 리뷰 중 레시피-맛에 대한 부분은 <영혼과 정치와 윤리와 좋은 삶/저자 박연옥>에서 인용했습니다.

  • 2023-06-05 14:27

    에세이 발표를 아주 재밌게 들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나네요~^^
    랄랄루스가 보고 싶은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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