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방학 단기집중 과학세미나> 혁명은 없다?
2회차 과학세미나는 <과학철학> 3장 과학에서 설명이란 무엇인가, 4장 과학의 변화와 과학혁명,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4장 과학혁명, 5장 과학적 진리, 6장 과학의 진보까지 읽었습니다.
저는 세미나를 마치고,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과학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예를 들면 코페르니스쿠스의 지동설, 갈릴레오의 역학, 뉴튼의 만유인력 등)과 쿤의 과학혁명은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장하석 교수의 책에서 쿤은 "승자만을 두둔해서는 제대로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142p) 그러면서 산소를 발견한 라봐지에(라부아지에) 이전에 지금은 폐기된 플로지스톤 이론으로 라부아지에보다 먼저 산소를 만들고 실험내용을 라부아지에게 설명해주었던 화학자 프리스틀리의 예를 듭니다. 쿤은 그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이론을 믿었기 때문에 정상과학에는 편입하지 못했지만 그가 비과학적이거나 비이성적인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쿤은 과학이 누구는 틀렸고 누구는 맞았다거나 하는 객관성과 중립성에 대해 도전했습니다.
뉴튼 덕분에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했고, 이전과는 공약불가능하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혼란이 가중됩니다. 공약불가능성은 이전과의 단절을 의미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전 패러다임에 비해 새로운 패러다임이 진리에 가깝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쿤에게 과학혁명이란 진리가 아니라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점을 지난 시간부터 강조해왔는데, 쿤이 왜 진리라는 말 대신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사용했는가... 저는 이번 시간이 되어서야 납득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후기에서 재하님이 과학적 믿음(고집)의 극단적인 예로 소개했던 아인슈타인도 쿤에게는 비과학적이거나 비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패러다임 간의 공약불가능성 때문에 소통에 실패한 과학자일 뿐이지 않을까 저는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쿤의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은 위대한 아인슈타인조차 자신의 패러다임(고전역학)에 갇힐 수 있고, 이것은 개인의 문제라기 보다는 그 구조적 한계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미나 시간에 과학의 진보가 진리에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그 진보의 정체는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얘기가 오갔습니다. 이렇게 혼란이 가중되는 이유는 혁명은 진보를 담보한다는 우리의 믿음 때문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데 쿤의 혁명은 퍼즐 풀이(오카샤 책 129p)라고 합니다. 이전에 풀지 못하던 퍼즐을 풀이해내는 능력 향상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기존 패러다임으로 충분히 문제 풀이를 해내는 과학자들의 태도는 보수적일 수밖에 없고, 이 활동이 계속되다보면 이상현상(130p)이 발견되기 시작하고, 그 현상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정도가 되면 과학자들은 "믿음"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갈아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패러다임 간의 공약불가능성(비정합성) 때문에 기존과 새로운 패러다임이 서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토론 및 설득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믿는 대로 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과학의 객관적 진리를 주장하던 기존 과학자들은 쿤에게 반발했습니다. 오카샤는 패러다임이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는 쿤의 주장에 따라 그를 "반실재론을 신봉하게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만, 과연 그렇게 단정할 수 있을까요??? 실재론과 반실재론은 다음 시간에 중점적으로 다뤄진다고 하니 기대해봅니다.
쿤의 과학혁명은 과학사를 기존의 진보적 역사관에 따라 중세에서 근대로의 과학적 진보라고 읽는 것에 반대합니다. 하지만 쿤의 혁명이 퍼즐 풀이라고 하더라도 기존 패러다임이 새로운 패러다임에 비해 더 풀이 능력이 출중한가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이라는 퍼즐 풀이는 각자의 영역(거시세계와 미시세계)에서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쿤의 과학혁명에는 과학적 진보 혹은 객관성, 중립성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혁명과는 다르다는 점이 확연해집니다. 하지만 쿤의 과학혁명에는 진보가 없다고 말한다면 과연 혁명일까... 그는 어쩌면 우리가 믿는 혁명은 없다는 점을 의도한 것 아닌가... 저는 이런 생각마저 듭니다. 바로 이런 의문점에 대해, 장하석 교수는 "노이랏의 배"와 자신의 "진보적 정합주의"로 답하고 있습니다.
노이랏의 배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배입니다. 이 배는 물이 새고 있습니다. 배의 선장과 기관장, 갑판원 등 물이 새는 배를 수리하기 위해 총동원하고 있는 상황, 이것이 노이랏이 생각하는 과학입니다. 이 사례에 장하석 교수는 진보 개념을 한 스푼 추가합니다. 정처 없이 떠도는 배처럼 우주에 떠 있는 둥근 지구. 그러나 지구는 크고 단단하며 중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 집을 짓고 살고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확실성(진리)의 토대를 강조했던데 반해, 노이랏의 배는 토대 없음을 주장했고, 또 여기서 장하석은 절대적 토대는 없지만 집짓을 정도의 토대는 가능하다는 점에서 과학의 진보 역시 가능하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쿤의 과학혁명이 진리라는 절대적 토대주의를 거부한데 반해, 장하석 교수의 진보적 정합주의는 집 짓을 만큼의 토대를 인정하고 이를 기반으로 지식은 더 개량되고, 과학은 진보할 수 있다고 합니다.(203p) 쿤의 혁명은 기존 혁명사와 달리 패러다임의 전환을 발전적 진보라고 해석하지는 않았지만 그 변화를 각 패러다임 간의 '단절'이라는 측면에서 강조한 반면, 진보적 정합주의는 연속과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과학의 발전이 가능하다는 입장입니다... 저는 요즘 챗GPT나 재미나이로 생성형 AI를 경험하면서 내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아는 체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과연 이것이 앎의 진보인가? 앎의 지체(소피아님의 질문 중에)는 아닌가? 그럼에도 패러다임의 전환을 목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와 과학은 혁명과 진보적 정합주의가 혼재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다음 시간은 장하석 7,8,9,10장, 오카샤 4장을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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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를 읽고 과학혁명과 진보적 정합주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니 어쩌면 진보적 정합주의 또한 그 내부에 혁명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종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나서 이전에 바라보던 대상에 대한 해석이 변화/진보한다는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쿤이 다루는 공약불가능성은 애초에 ‘같은 대상’을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하는데 이를 진보적 정합주의의 ‘연속과 보존‘과 공존시키냐는 문제가 존재할텐데, 이는 세미나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쿤의 철학을 부분적으로 바라보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어느정도의 공약가능한 지점들은 있다는 것이죠.
갑자기 후기를 읽고 떠오른 생각을 적다보니 댓글이 길어졌습니다.. ㅎㅎ
'혁명'보다는 '진보'가 많은 건을 포함하고 아우를 수 있는 것 같긴해요. 하지만 노이랏의 비유를 보면서는 우리의 여정이 목표가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목적은 있으나 목표는 없다는게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과정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