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호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 |
| 566 |
<겨울방학 단기집중 과학세미나> 4회차 후기-벌써 마지막이라고요?
소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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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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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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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 | 2026.02.18 | 66 |
| 565 |
<겨울방학 단기집중 과학세미나> 4회차 질문들
(6)
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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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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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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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하 | 2026.02.10 | 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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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의 언어> 마지막 후기^^
(1)
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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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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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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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 2026.02.10 | 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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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의 언어> 5회차 후기
(3)
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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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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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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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 2026.02.08 | 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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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방학 단기집중 과학세미나> 나랑, 과학철학을 만나다
(2)
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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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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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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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 2026.02.08 | 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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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방학 단기집중 과학세미나> 3회차 질문들
(6)
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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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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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하 | 2026.02.03 | 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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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방학 단기집중 과학세미나> 혁명은 없다?
(2)
두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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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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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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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 | 2026.02.02 | 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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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방학 단기집중 과학세미나> 2회차 질문들
(10)
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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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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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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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하 | 2026.01.27 | 1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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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방학 단기집중 과학세미나> 1회차 후기 - 과학적 믿음
(4)
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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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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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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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하 | 2026.01.27 | 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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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의 언어> 4회차 후기
(6)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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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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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 2026.01.26 | 132 |
| 556 |
[2026년 1월 맥-잡기 세미나]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 - 메모
(13)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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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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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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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 2026.01.23 | 1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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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의 언어> 3회차 후기
(4)
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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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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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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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리 | 2026.01.21 | 136 |

과학,철학을 만나다.140,141p
똑같은 물건을 보더라도 두 패러다임은 전혀 다른 관측결과가 나올수 있습니다. ᆢ혁명이후의 과학자들은 아주 딴 세상에서 사는것이라고 쿤은 말했다.
질문
서로 다른 패러다임이 공약불가능(uncommemsurability)하다면 과학의 혁명이 발전인지 아니면 시대에 따른 변화나 발견으로 봐야할지 그러한 과학 기준이 있을까요?
과학철학 P143~145) 지난 시간 쿤이 과학에 개종이란 말을 쓴 점과 이번 시간에 '과학에 이론 선택을 위한 알고리듬은 없다'라고 한 점등을 곰곰 생각해 봅니다. 정당화가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인데요. 찬성도 반대도 못하고 어정쩡한 채로 있습니다. 시비를 걸기도 맞장구를 치기도 거시기한 처지입니다. 거기다 일상에서 이성적인/논리적인 반대자를 만나는 경우가 드물다보니 논리/이성이 이래저래 딱한 처지에 있는 것 같습니다. 드물기도 하고 딱하기도 하고... 이걸 좀 구하기는 구해야 될 텐데, 이성은 훈련이 아니라 수양의 영역이 된 것 같습니다.
<과학, 철학을 만나다>, p.202
“처음에 어린아이가 회으적인 질문을 하나요? 아닙니다. 무조건 어머니, 아버지가 하는 말을 믿고 시작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어조차도 배울 수 없습니다.”
토대주의를 읽고서는 ‘그렇다면 토대가 완전히 엄밀하게 자명할 수 있는건가?’라는 질문이 떠올랐지만 이 구절을 읽고는 과학의 느슨함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논리실증주의자들에 맞선 쿤이 말하는 과학의 비논리적인 측면들, 그리고 과학적 지식의 토대를 다룰 때 장하석 교수님이 제시하는 ‘일단 믿고 시작한다’는 생각 등, 이론적인 엄밀성도 물론 있어야 하겠지만, 그 정도를 조절하는 것도 학문으로서의 실용성과 연결되는 듯 합니다.
<과학철학>, p.136
“공약 불가능성은 과학적 변화가 진리를 향한 직진이기는커녕 어떤 의미에서는 방향이 없음을, 다시 말해 나중에 나온 패러다임보다 나은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른 것일 뿐임을 함축한다.”
과학에서 이론적 기틀의 변화가 일어날 때에 그것이 점진적으로 절대적인 진리에 다가간다는 생각이 철학적으로 ‘나이브’하다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즉, 이론적 기틀들을 하나의 선 상에서 비교할 수 없으니 그렇다는 말로 이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방향성을 제외할 수 있을까요 (이를테면 관측정합성이 한 척도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혹은 다양한 척도들 전반의 발전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과학에서의 발전이란 있을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쿤의 주장 중 하나인 상대주의적 진리 (자기지시적인 질문에 노출되어 있는)로 가는 길목이 아닐까요?
1. AI는 기술혁명인가? 과학혁명인가?
AI 이전에는 인간이 정한 규칙에 따라 프로그래밍하고, 컴퓨터는 그 규칙을 따랐기 때문에 명확한 알고리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데이터 기반의 생성형 AI는 인간의 손을 어느 정도는 떠나 작동하고 결과를 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전통적인 과학과 기술의 관계는 아닙니다. 전통적으로 과학이 먼저이고 기술이 따랐습니다. 가령 전자기학을 이해했기 때문에 전기 기술이 가능했고, 양자역학을 이해했기 때문에 반도체가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AI는 거꾸로입니다. 작동은 하는데 왜 작동하는지 인간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술이 먼저 가고, 과학적 이해가 뒤따르고 있는 셈입니다. AI로 인해 과학과 기술의 관계는 역전되고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AI는 기술혁명이면서 동시에 과학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혁명적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단순한 기술혁명이 아니라 "인간이 안다는 것"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에 과학혁명에 준하는 변화를 이끌어내지 않을까 예측됩니다. 한편으로 어쩌면 AI는 과학혁명도 기술혁명도 아닌, 둘의 관계 자체에 대한 혁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 과학적 진보에 대한 진보적 정합주의는 쿤의 과학혁명과 어떻게 다른가?
그 (상대적 의미의)기초를 기반으로 지식은 더 개량되고, 과학은 진보할 수 있습니다. 이 진보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는데 일단 두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하나는 더 뻗어나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있는 것을 더 짜임새 있게 하는 것입니다.(203p)
저자는 과학적 진보를 쿤의 "과학혁명"이 아니라 진보적 정합주의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과학혁명은 패러다임 전환시 기존 지식의 폐기, 즉 단절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지식의 축적 등 많은 우려점이 있습니다. 이에 반해 저자에게 변화는 확장이고, 큰 변화가 일어나더라도 기존 체제와의 단절이 아니라 재배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뉴튼 역학은 태양과 지구의 보이지 않는 끌어당김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수학적으로 풀어낸 방정식입니다. 그가 연금술과 자연마술 등에 깊이 관여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힘, 숨겨진 작용 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해석하는 과학자도 있니다. 이에 따르면 뉴튼의 스타일(혁명)에는 단절만이 아니라 연속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쿤은 패러다임의 내부에서 변화를 읽었고, 저자 장하석은 패러다임 바깥에서 변화를 바라보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다시 말해서 과학적 진보는 두 이론이 공존해야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정상과학 시기에는 진보적 정합주의로 점진적 확장과 정합성을 높여가고, 혁명의 시기에는 전환이 일어나고, 혁명 이후에는 다시 기존 지식의 재배치가 일어납니다.
쿤의 과학혁명은 과학의 일부 이론에만 해당되는 것일까?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혁명이 일어났듯이 그런 대대적인 혁명에는 해당되는 이론이지만 그 외에 모든 과학 이론에는 해당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교과서에는 천체의 겉보기운동과 실제운동을 모두 싣고 있으며 전자가 발견됐음에도 전류의 방향은 바뀌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혁명은 일어났지만 전환은 지체되고 있다고 생각해야할까?
전 질문이 딱히 없어서 그냥 인상 깊은 구절을 적어봐야겠네요. 질문이 아니니 논의에서는 빼주세요.
- 인과성이란 우리 인간이 세상 위로 ‘투사하는’ 어떤 것이다.
<과학철학> p146
쿤의 유산으로 , 전통적으로 과학철학이 무시해온 과학의 사회적 맥락에 주의를 끌었다는 점이다. 쿤에게 과학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활동이다. 다시 말해 공유하는 패러다임에 대한 충성심으로 결속된 과학자 공동체라는 존재가 정상과학이 실행되기 위한 선행조건이다. 쿤은 각급 학교와 대학에서 과학을 어떻게 가르치는가, 젊은 과학자들이 과학자 공동체에 어떻게 입회하는가, 과학적 결과가 어떻게 발표되는가 같은 '사회학적' 문제에도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다.
이해가 안되는 지점은 윗글에서 보이는 것이 과학자와 과학자 공동체 뿐인데 , 과학이 갖는 사회적 의미와 중요성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과학혁명을 통해 진보한다고 하면서 그것이 진리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반실재론의 의미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혹시 양쪽은 (실재론과 반실재론) 진리의 정의에 대해 다른 기준이 있는건 아닌가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실재론에서 말하는 진리라는 건 세계의 진짜 실체와 그 원리를 말하고, 반실재론에서 말하는건 어떤 종교적 의미의 불변의 깨달음?같은걸로 생각하며 서로 대립하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학철학 (p.140-141)
많은 철학자가 순수한 이론중립성은 이룰 수 없다는 쿤의 의견에 동의한다. (...) 그러나 이 때문에 패러다임 전환의 객관성이 모조리 위태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 프톨레마이오스주의 천문학자와 코페르니쿠스주의 천문학자가 의미있게 논쟁하려면 두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천문학 데이터가 얼마간 필요하다. (...) '5월 14일에는 태양이 오전 7시 10분에 떴다' 같은 진술은 어느 과학자가 지구중심설을 믿건 태양중심설을 믿건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한 진술들은 두 패러다임 지지자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이론 중립적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 질문 : '5월 14일 오전 7시 10분 일출'은 지극히 특정한 공간과 시간이라는 조건에서만 발생하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모두가 받아들일 만한 진술이라고 섣불리 일반화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진술을 바탕으로 보편적인 가설이나 이론을 수립하기 어렵다. 설사 이 진술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고 해도, 다른 지역에서는 이 진술로부터 발전시킬 실험이나 이론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다. 또한 그렇게 양쪽이 동의할 만한 진술들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지 - 이론에 적용할 만큼 양적으로 충분할지 - 도 의문이다.
조금 더 나가서, 여러 변수들을 통제하고 실험실에서 행해진 실험들은 가설이나 이론을 수립하는 데 도움이 되고 필요하지만, 실험실을 벗어났을 때 수치의 차이나 변화가 너무 심하다면 그것을 적용할 수 있는 분야가 얼마나 될 것이고, 과연 객관적 진리라고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종합하자면, 어떤 진술이 특정 조건에서는 진리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조건에서는 진리가 아니다라고 할 수 밖에 없으므로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고 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2회차 질문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