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맥-잡기 세미나]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 - 메모

웹진
2026-01-23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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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맥-잡기 세미나를 하게 되었습니다~

 

 

 

 

 

26일 오후 2시입니다. 

주제가 '전환'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시고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를 읽고 메모를 해 주시면 됩니다. 

전날 25일까지 올려 주시면 좋겠죠? 

분량은 1페이지를 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댓글 13
  • 2026-01-25 19:55

    우리는 망했다, 이제 어쩌지? /요요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2015)에 이어 로이 스크랜턴이 쓴 책 제목은 <망했다, 어쩌지?>(2018)다.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는 이미 죽은 우리의 문명에 대한 애도의 글이다. 망해가는 세상을 어떻게 되돌려 놓을 것인가? 여섯 번째 멸종의 시계를 어떻게 늦출 수 있을 것인가?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대안이 있을까? 스크랜턴은 이런 희망의 말이나 대안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 문명에 대해 사망선고를 내린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가야 하기에, 거짓 희망에 속지 않고 살아가려면 죽음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로이 스크랜턴은 이 책에서 기후행진이나 멸종저항 같은 행동이 아니라 훼방꾼으로 철학하는 것이야말로 인류세의 죽음 앞에 절망하고 애도하며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이야기한다.

    1, 팩트체크
    109쪽의 주9)에 인용된 마크 밀즈의 2013년 보고서(클라우드는 석탄과 함께 시작된다)는 당시 전지구적 정보소통생태계에서 쓰는 전기량이 세계 발전량의 10%라고 말한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우리의 세계는 급격히 디지털화되었고, 2023년 챗지피티 이후 AI개발과 데이터센터는 전기 먹는 하마가 되었다. 조사해보니 그 사이에 발전량이 25% 가량 증가했다. 빅데이터 기업이 전력 효율을 높인 결과 ICT에만 10~13% 정도의 전기량을 쓰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속도는 빠르게 증가할 것이다. 전기에 기반한 문명인 우리 세계는 석탄, 석유, 천연가스, 재생에너지, 핵발전 모든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여 전기생산을 늘리려 하지 않을까? 탄소감축은 물 건너갔다! 온실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2. '훼방꾼으로서의 철학자' 개념으로 지구온난화문제를 고찰한다는 것은?
    142쪽에서 스크랜턴은 페터 슬로터다이크를 인용하며 기후위기에 대한 우리의 접근은 기술이 아니라 철학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슬로터다이크는 냉소주의를 본질을 파헤쳤다. 냉소주의자는 “그래, 난 알고 있어, 하지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래, 난 기후위기(송전탑, 미세플라스틱 등등)에 대해 알아. 그러나 소비주의적 삶을 바꿀 수는 없어. 맑스주의의 이데올로기 비판은 우리가 진실을 알기만 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 가정한다. 그러나 스크랜턴은 냉소주의 비판에 입각하여 아는 것만으로 되지 않는다고 한다. 훼방꾼(interrupter)으로서의 철학자 되기는 어떻게 가능할까? 파국을 직시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환상을 버리고, 구원의 가능성을 버려라!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처럼 현실의 절망을 받아들이는 것, 견유주의자 디오게네스처럼 자신이 말하고 쓰는 것과 삶의 방식을 일치시키라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의 지혜의 유산을 공부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삶을 조직하는 것이다. 이 사람이 말하는 공부, 만만치가 않다.

    3. 전환, 죽는 법을 배우는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앞서 말한 것 외에도 나 자신을 버리는 것, 인류세의 어두운 미래에 대해 나의 책임과 나의 참여를 이해하는 것 등등 여러 방식의 표현이 등장한다. 이것은 폭력도 비폭력도 아니고, 저항을 조직하는 것도 아니다. 저항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인가를 하고 있으므로 이 정도면 괜찮다는 착각에 빠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별의 죽음으로부터 태어난 존재임을 깨닫고 삶과 문명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것이 죽음을 배우고 죽음을 실천하는 것이다. 허무주의도 저항도 아닌, 인문학을 통한 성찰! 그런 전환의 공부를 하라는 이야기.

  • 2026-01-25 22:17

    인류세와 기후위기 속에서 우리의 공부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의 저자 로이 스크랜턴은 그의 책에서 기후위기에 대한 문제들을 다각도에서 바라본다. 기후위기에 대한 과학적 분석들을 통해 그 심각성을 알리면서도, ‘기후위기인민행진’이나 좌파 정치인, 유명인사들의 행동들이 실질적인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있으며, 현재 거론되는 기후위기에 대한 정책들 또한 비현실적이거나, 한계가 명확하다는 입장을 보인다.

    “오늘날 우리의 정치 시스템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물질적 권력의 흐름에서 성장하고 그 흐름과 공명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정치 시스템은 기술자들이 소수의 이익을 위해 관리하는 탈중앙화된 시스템에서 신체들을 소비하는 집단적 조직체다. ... 대부분의 사람은 기껏해야 소비자로서 선거 게임을 참관하고 공식적으로 승인된 소수의 후보자 중 한 명에게 투표할 뿐이다. ... 아무리 많은 사람이 대규모 행진이나 행동의 형태로 거리에 나선다 해도, 그들은 권력의 흐름을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권력을 생산하는 일을 돕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소비만 할 뿐이다.” (95~96)

    내가 마음에 들었던 저자의 태도는 이런 것이다. 다양한 입장들을 비추며 좌파의 감성적인 면(“폭력이 문제를 해결한 적은 한 번도 없다”라던가)과 우파의 기술낙관주의, 비관주의를 모두 비판하고, 정치적 참여의 수단과 실질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를 짚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인류세 속에서도 (인문학을 통한)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반면 그가 제시하는 인문학, 즉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이해하기 어렵다. 길가메시와 엔키두 신화를 비롯한 여러 그리스 신화들을 가져오며 그 당시의 인간과 지금의 인간을 너무 쉽게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 신화를 소환하는 맥락이 ‘영성’이라는 대안으로써 그것을 가져오는 게 아니라 ‘철학’에 국한된 면으로써만 가져오려고 한다는 점에서도 아쉽다. 인류 문명의 흐름을 정리하는 부분에서도 종교적 흐름, 영성에 대한 지점은 전혀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책은 지금의 현실 속에서 우리의 공부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에는 아주 적절해보인다. 단순히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하고, 탈핵에 찬성하는 것만이 해결 방안인지, 우리는 정말 기후위기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하는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 동의할 수 있는지, 동의한다면 왜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죽음’이라는 사유에 대해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인문학 공부를 지속하는 것이 하나의 희망이라고 보는 것에는 동의한다.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 공부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것에 물음을 지속적으로 던지는 것이며, 변화하는 세계를 해석하고 삶의 방향성을 결정하며 자신의 삶을 변혁하기 위해서 필요한 태도는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 2026-01-25 23:16

    어려운 문제다. 글쓴이의 신랄한 묘사는 우리의 알량한 연대나 유쾌하게 문제를 해결해보려는 태도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고 날카롭게 비판한다. 우리의 문제라기 보다는 문제가 너무나도 거대하고, 사람들의 연대는 현실적으로 해결방안을 실행할 수 있는 권력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며, 영향을 주더라도 실재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란 어렵다. 그러니... 우리는 죽음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호메로스와 아이스킬로스가 이라크, 시리아 등 이슬람 국가나 지구온난화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저 유물을 자세히 보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상해보이고 심지어 야만적으로까지 보인다. 그들은 우리와 달리 자유 의지를 믿지 않았다. (...) 현재의 개념적, 상징적 삶의 구조의 역사적이고 문헌학적인 계보를 살펴보는 것은 우리가 누구이고 누구였는지, 앞으로 어떤 존재가 될 것인지를 인식하는데 도움이 된다. (...)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일하는 우리는 특저한 방식이 특정한 상황에 적응하다가 우연히 만들어진 결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도구와 기술, 그리고 의미 추구와 상징적 추론이라는 인간의 보편적 형판을 가지고 적응한 결과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65-7)

    그런데... 결국 그가 예시로 드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주장들, 수많은 지식의 축적을 통해서 오늘날의 모습이 달성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질문이 드는 것은... 왜일까... 가공, 혹은 재가공(168, 182)이 실패했기 때문인 걸까? 인문학의 전통을 살아있게 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것에 희망을 걸어보아야 한다는 의미인 것인지... 그런 전환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인문학이란 무엇인지 고민해보게 된다.

  • 2026-01-26 00:08

    (180~182) "문해력으로서의 휴머니즘은(...) pc와 인터넷이 출현하면서 다시 디지털 휴머니즘, 혹은 포토휴머니즘으로 변형되었다.(...) 우리는 진동이 되었고, 포토휴머니즘은 우리를 집단적 연결과 접속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번역, 탈바꿈, 놀이를 통해 지각, 정서, 개념을 개조하고 혁신해야 한다. 디테일에 대한 관심, 논증에서의 엄밀성, 주의를 기울여 읽기, 깊이 있는 성찰을 가르쳐서 인간에게 사색의 진동을 주입해야 한다. "

    오랜만에 눈을 부릅뜨고 정색하며 읽었는데, 이 책의 마지막, 이른바 실천적 결론은 결국 앞으로 더 열심히 ‘정독’하라는 말처럼 들린다. 분석하고, 비판하고, 또 우리처럼 이렇게 메모를 남기며 시간을 들여 꼼꼼히 읽고 쓰는 것-이것을 정독이라 부를 수 있다면, 자동화된 세계에서 자동화를 중단시키는 사유를 보존하는 기술이자 공부법은 바로 이러한 정독의 기술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AI의 시대에 우리는 점점 이해하지 않은 채 읽고, 생각하지 않은 채 쓴다. 문제는 ‘멸종위기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멸종위기정독’이다. 즉각적 반응을 늦추고, 의미가 서서히 형성되도록 시간을 허용하는 일, 텍스트의 저항을 견디며 이해되지 않는 것을 그대로 남겨두는 사색의 훈련은 인공지능의 시대에 그 자체로 사회적으로 가성비가 떨어지는 활동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슬로터다이크가 말하는 자극의 방해, 스크랜턴이 말하는 죽음의 학습, 포토휴머니즘이 요청하는 거리 두기의 기술을 위해 AI를 전면적으로 거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의 사유의 시간을 의도적으로 보존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 같다.

  • 2026-01-26 00:23

    사유의 전환 - 죽기까지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01 사유의 전환
    이번 주제인 ‘전환‘이라는 단어 앞에는 다양한 수식어가 붙을 수 있다. 나는 걔 중에 사유의 전환을 고르게 되었다. 왜냐하면 저자가 방법론으로 제시한 인문학적으로 사유하기에 초점을 맞춰 읽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급격하게 다가온 기후 위기 시대, 과학적 분석보다 철학적 사고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특히 ‘죽음’에 대해서 사고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문명으로서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라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이 인류세는 문명이 아니라 개인으로서 죽어가고 있지만 앞으로는 꿀벌의 세계처럼 “가장 똑똑한 개체보다 더 영리한 집단을 구축하기 위한 보편적 조직 원리가(꿀벌의 민주주의)” 필요하다는 말로 들렸다.

    02 죽음을 배우다
    나는 제목을 보고는 왜 죽음을 배워야 하는지 의아했다. 배운다는 건 새로운 지식이나 기술을 얻는 것인데, 나에게 ‘죽음’은 새로운 것보다는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죽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죽음‘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미디어로 전해지는 이미지, 사회적 흥분, 재전송 된 두려움 등을 통해 안다고 착각한 건 아닐까? 그래도 각자에게는 ’죽음’에 대한 경험과 표상이 존재할 거라고 믿기 때문에 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죽음’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배움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 죽음과 함께이고, 인간 활동은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지만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는 필연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우리 뒤에 올 사람들을 위해 가능한 한 품위 있게 이 길을 지나가야 한다.(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고 말한다. 이때 품위란 상징적 삶의 뿌리와 거기서 파생된 변종을 끈기 있게 보살피는 일이다. 꿀벌들은 ’엉덩이 춤‘을 통해 품위 있게 살아간다면 인간은 ’인문학 연구‘를 통해 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03 인류세에서
    사실 인류세라는 말은 조금 오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인간이 지구 환경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는 뜻으로 제안된 개념인데, 우리가 사는 지구에는 셀 수 없고 감히 분류할 수도 없이 다양한 존재 그리고 때론 보이지 않는 존재도 사는데 인간이라는 한 종족이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왔다고 말하는 게 어쩌면 인간의 위상을 높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간보다 더 넓게 더 많이 포진되어 식물과 동물과 공생관계를 이루어가는 건 이끼류다.) 그런데 어찌 되었든 인간이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탄소연료 자본주의 다음으로 자연과의 공생이라는 새로운 서사를 담고자 하니 일단은 찬성이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기후위기’ 라는 말보다 ‘인간 위기’라는 말이 더 걸맞는지도 모르겠다.
    무튼 저자는 학문과 사유를 통해 죽음을 연습하고, 이 연습을 실천하고 실패하기를 반복하길 권유한다. 나는 여기에 더해 비인간과 가까이서 공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말하는 것은 인간이 전해온 인간의 죽음이라는 생각이 들고, 내가 일상을 같이 보내는 6명의 동물에게서는 또 다른 ‘죽음‘을 배울 수 있다. 우리는 서로를 가르치지 않고, 옳고 그른 것을 따져 묻지않는다. 우리는 언어도 다르고 공통감각도 쌓은 적이 없지만 함께 소통하고 알아가고 같이 살아간다. 그리고 그들이 삶과 죽음을 받아들리는 태도를 통해 나는 완전히 다른 감각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인문학 연구, 철학적 사고를 하면서 ‘꿀벌의 엉덩이춤’을 배워야 한다. 문명으로서 죽는다는 건 개개의 인간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책을 다 읽고서는 ‘죽기까지 남은 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이 들었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으로 시작했을 질문이지만 지금은 ‘현재 내가 속한 문탁네트워크는’으로 시작하고 싶다. 우리는 남은 시간에 해당하는 25년 12월에 이사를 했다. 앞으로 이 집단은 어떤 식으로 탄소배출을 줄이고, 어떤 식으로 인문학 연구를 할 수 있을까? 어떤 식으로 비인간과 관계맺고, 어떤 식으로 죽은자의 유산을 미래로 보낼 수 있을까?

  • 2026-01-26 00:51

    이 책을 읽는 내내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라는 설치미술 전시회가 생각났다. 멸종위기에 처한 호모사피엔스, 혹은 이미 멸망한 인류문명을 흙, 쇳덩이, 나무, 천, 색 등을 이용해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디스토피아의 암울한 모습이 아닌 인간에 대한 낙관, 희망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있다. 자연광이 전혀 없던 전시실을 지나 마지막 전시에 이르면 아주 작은 틈으로 외부의 빛이 들어온다.

    “인류는 화석 연료 문명이 끝난 뒤에도 살아남을 수 있다. 그 폐허 속에서 어떤 폭정, 어떤 야만 상태가 출현하든 인류는 살아남을 수 있다. 우리는 온실 세계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183)

    인류세의 위기는 호모사피엔스 종의 위기다. 막대한 탄소배출로 기후위기를 초래한 인류가 공룡처럼 한번에 멸종하지는 않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종의 변화는 불가피할 것 같다. 새로운 기후에 적응한 지구생태계가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호모사피엔스가 아닌 다른 종이 새롭게 탄생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현재의 인류는 살아남지 못하는 것 아닐까?
    탈탄소는 불가능하다. AI 때문에 전기는 더 많이 필요하고, 재생에너지, 석유, 석탄, 원자력 등 가능한 모든 에너지를 다 동원해야 할 판이다.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생각한다면 지금과 같은 삶의 방식을 버려야 하지만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이런 상황에서 인문학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삶이,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중요하다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한다. 우리가 사는 현재가 바로 미래가 되기 때문에. 나는 저자가 말하는 ‘지혜의 기록’, ‘죽은 자의 유산’ 뿐만 아니라 좀 더 적극적으로 자연을 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네 뒷산만 올라도 인간은 겸손해질 수 있기에.

  • 2026-01-26 09:16

    죽는 법을 배운다는 것

    나는 ‘기후위기’라는 단어가 싫다. 문제가 마치 기후변화 탓인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래 기후라는 것도 지구의 긴 역사를 통해서 보면 늘 일정했던 것도 아니지 않나. 문제는 이러한 기후 변화에 현재 인간이 생활 양식이 따라가지 못해서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마치 인간이 이 지구를 책임지고 있는 양, 그래서 생태계 전반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도 별로다. 그래서 이 책에 들어가는 글에서 나온 “이 뜨겁고 급변하는 세계에서의 삶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19)의 질문이 좋았다. 그럼에도 왜 하필 ‘사는 법’이 아니라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하는 걸까?

    “죽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개인의 차원에서는 우리의 성향과 두려움을 버린다는 것이지만, 문명의 차원에서는 특정한 생활 방식과 정체성, 자유, 성공, 진보에 대한 특정한 생각을 버린다는 것이다”(31)

    따라서 이 책에선 기후변화 문제를 풀기 어려운 것은 개인이나 한 국가의 차원이 아니라 전체가 연결되어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거기에 집단으로 대응하는 데 실패한 것은 현재 우리의 정치 체제들의 구조적 결과라는 것을 밝힌다.

    특히 4장에서 자본주의가 두려움과 공격성을 욕망과 쾌락으로 상쇄시키기 위한 문화적 장치를 만들어 냈다고 하는 부분에서 ‘연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공부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하는가? 페터 슬로터다이크(1947~/독일철학자)가 말하는 ‘훼방꾼으로서의 철학자’라는 개념에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중단은 박살 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머무는 것이다. 차단이 아니라 성찰이다.”(144)

    예전에 ‘문탁’과 같은 곳이 많이 생긴다고 해서 세상이 뭐가 달라질까? 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큰 변화가 아니라 아주 작은 균열이라도 여러 군데에 생긴다면 결국 언젠가는 판이 깨지지 않을까. 여기서 말하는 ‘중단’도 비슷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5장의 새로운 깨달음을 읽으면서는 ‘새로운 욕망을 창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2026-01-26 09:45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이미 잘못 설정되었을 가능성에 대해 파고든다. 이 책에서 저자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현 시점에서는 탈탄소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구조적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 지구적 기후 위기는 기술의 부족이나 의지의 결핍 이전에 지금의 문명 형태인 지구적 자본주의와 분리될 수 없다는 점에서 거의 해결 불가능한 문제로 제시된다.

    탈탄소화는 명확한 해법처럼 보이지만 그 즉시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화석연료에 기반한 에너지를 제거한다는 것은 단순한 전환이 아니라 세계 경제와 삶의 조건 대부분을 해체하는 일에 가깝기 때문이다. 대체 에너지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의 탈탄소화는 곧 전력의 대규모 상실과 세계적 경제 붕괴를 의미한다. 이는 조금 불편해지는 삶이 아니라 문명 차원의 수축이다.

    재생에너지 역시 구원처럼 호출되지만 실제로는 고도의 의료 시스템, 서버 인프라, 정보 통신망이 요구하는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에너지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더 아이러니한 점은 기후 위기에 항의하는 행진조차도 막대한 전력을 소모하는 정보-통신 생태계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문제를 비판하는 동시에 그 문제를 작동시키는 시스템을 매 순간 사용하며 살아간다.

    이 책이 던지는 가장 불편한 질문은 여기 있다. 기후변화는 너무 거대해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바로 그 문제의 일부라는 점이다. 집단행동은 필수적이지만 그것을 강제할 전 지구적 권위와 집행 기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탄소세, 국제 협약, 도덕적 호소는 모두 이상적인 해법처럼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무력하다. 어쩌면 인류세에서 산다는 것은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 무너지고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를 배우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 2026-01-26 10:02

    헉... 펼쳐 올리는 군요.

    왜 기억만이 유일한 구원인가?

    이미 죽은 자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점에서 인류세에 우리를 구원해줄 유일한 것을 가져왔다. 바로 기억이다.(161p)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의 저자 로이 스크랜턴이 기억이야말로 유일한 구원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우리는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2015년 파리기후협약과 같은 해 출판된 책인데, 그는 이것을 “알고 있었다”. 비행을 준비하는 꿀벌조차 각자의 춤을 추다가 시간이 지나면 하나의 춤으로 수렴하고 곧이어 비행을 시작한다. 그러나 인간은 지난 30년간 수많은 협약을 맺었지만 춤만 추고 비행을 시작하지도 못했다. 그동안 목적이 분명치 않은 거리행진은 가짜 희망을 선전선동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투쟁의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그는 이렇듯 모든 구원이 실패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이미 죽은 자에게 기억은 왜 유일한 구원인지에 대한 해답을 바그다드에서 구사일생을 살아난 청년들의 “거듭남, 부활(176p)”에서 찾는다. 이들은 밴드를 결성하고 연주를 시작한지 15년 만에 첫 앨범을 발표했다. “그것은 그들의 예술적 야심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들이 처한 독특한 역사적 상황에 대한 성찰이자 그들의 유산을 기리는 기념물이었다.” 이들은 여러 선택의 기로에서 “음악과 예술을 선택했다”.(178p)

    그들은 문화 간의 연결,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리듬, 공동의 전통을 탐구하고 강화하는 쪽을 선택했다. 팬들을 위해 전통과의 연결을 유지하면서 편협한 지역주의와 갈등을 초월하는 희망을 형상화하고, 폭력이 아니라 품위와 상호 지지를 통해 전쟁에서 살아남는 용기를 형상화하고, 고통에 시달린 길가메시 왕처럼 죽지만 되살아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가능성을 형상화했다. (178p)

    이 책의 시작과 끝은 저자가 군인으로 목격한 바그다드 폭격에서 시작해 다시 바그다드의 이야기로 연결된다. 전쟁으로 인해 문명의 파괴를 목격한 저자는 카트리나 허리케인의 경험을 통해 지구온난화라는 전지구적 종말이라는 전쟁 한 가운데에서 우리는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음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폐허 위에서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폭격으로 도시는 붕괴되었지만, 기억은 남았다. <길가메시 서사시>를 읽고 자라난 아이들은 청년이 되어 헤비메탈 밴드를 결성하고, “길가메시는 죽었지만 전설로, 상징으로,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로 여전히 살아있다.”(175p)
    저자가 말하는 구원은 전통적 의미의 구원은 아니다. 이 구원은 자신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현실이 파국(희망 없음)임을 인정하는데서 출발한다. 그렇기에 여기서 구원은 살아남음이 아니라 기억됨을 선택하는 것이다. 독특한 점은 죽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도 작동하는 구원이라는 점이다. 저자는 비록 읽고 쓰기의 인문학적 전통이 취약하기 이를 데 없지만 인류에게 가장 강력한 수단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나의 꼬꼬무가 시작된다. 기억은 탄소배출량을 줄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온갖 협약들 역시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제 인류의 구원은 늦었다. 끝났다. 앞으로 이 폐허 위에서 우리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 2026-01-26 11:28

    탈탄소화는 불가능하다. 저자의 결론은 이것이다. “차에 시동만 걸어도, 스마트폰을 충전하기만 해도” 인류는 멸망을 향한 행진을 멈출 수 없다. 이 체념과 허무의 탄소연료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우리가 할 일은 ‘훼방꾼으로써의 철학자’일 뿐이라고 슬로터다이크는 말한다. 그것은 집단적 진동자의 역할을 멈추는 것이다. “중단은 시스템에 충격을 가하고 전체를 산산조각 내는 파괴와는 반대로 연속적인 과정을 정지시키고 유예시킨다. 중단은 박살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머무는 것이다. 차단이 아니라 성찰이다.”(144p)

    장마다 각기 다른 주제를 가지고 있지만 결국 저자는 5장의 깨달음으로 귀결한다. 즉 우리가 공부한다는 것은 죽음을 배우는 것이다. 책의 제목이 말해주는 것처럼 인류세에서 우리가 할 일은 인류세의 주인공인 인류의 죽음을 바라보는 것이다. “죽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버리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죽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자아, 미래, 확실성, 애착, 쾌락, 영속성, 안정을 버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구원을, 희망을, 죽음을 내려놓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156p)

    ‘죽음을 배우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은 지금까지 들었던 “잘 죽는다는 것은 잘 산다는 것이다”류의 언설과는 당위의 차원에서 결이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웰-다잉은 잘 살기 위해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 자체를 사유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욕망에 휘둘리는 존재, 그나마 그것(욕망)을 멈출 수도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는 절실한 요청이다.

    매번 어떤 책을 읽거나 세미나를 하면서 늘 ‘실천’에 대한 고민을 해왔다. 그리고 그 실천의 방향은 그때마다 나의 실행과 정반대를 향하곤 했다. 나는 공부하기 위해 자동차 시동을 걸고, 공부를 위해 인터넷에 접속한다.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러한 류의 좌절에 더 이상 빠져들지 않기로 한다. 어차피 인류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유한한 존재로서의 숙명이 더 짧게, 더 괴롭게 다가온다손 치더라도 크게 변할 것은 없다. 다만 그 가운데서도 생각없는 ‘집단적 진동자’만큼은 되고 싶지 않다. 제천의 날씨는 차갑다. 보일러의 온도를 1도 높일 것인가, 번거롭지만 장작을 때서 그 1도를 높일 것인가. 나의 실천의 선택지가 남아있음을 감사하며 문화기술을 거슬러 가볼 작정을 한다.

  • 2026-01-26 11:37

    주제가 전환이라고 한다. 혹은 전환을 주제로 이 책과 관련지어서 정리하거나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전환이라는 주제는 진전되진 않고, 지금을 혹은 지금이 있기까지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환을 상식적인 내용으로 작금 상황의 미래에의 급격한 변화로만 인식하니까 머릿속이 까매진달까. 그런데 전환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줄리앙의 말로 치자면, 고요하게 변화중이다. 전환에의 생각은 지금에의 생각이고 현재의 일이다.
    이 책에서 재밋게 읽은 부분은, 첫째로는 그가 주제로 내걸고 있는 서장과 결론에서의 죽는 법을 배운다는 것, 죽음에의 명상을 말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비판적 사고, 명상, 철학적 토론을 통해 사회적 자극의 스트레스를 중지시켜야 하고, 과거를 계속 살아 있게 하고, 아카이브의 정보를 가꾸고, 저장되어 있는 기억을 읽고 해석하고 분류하고 돌보고 특히 재가공함으로써 현재에 대한 집착을 중단해야 한다. 재조합, 리믹스, 번역, 탈바꿈, 놀이 등을 통해 지각, 정서, 개념을 개조하고 혁신해야 한다. 디테일에 대한 관심, 논증에서의 엄밀성, 주의를 기울여 읽기, 깊이 있는 성찰 등을 가르침으로써 인간이라는 동물 안에 사색의 진동을 주입시켜야 한다. 죽은 자들과의 교감을 지속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미래 세대에게는 죽은 자들이듯 그들이 곧 우리이기 때문이다.”(182쪽) 저자는 죽음을 배우는 것이 바로 철학이라고 말하면서 몽테뉴를 언급한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언급. 사실 몽테뉴 이전에 스토아가 있었다. 키케로가 있었고, 에픽테토스가 있었고....이 주제를 스토아학파는 어떻게 말하는지 살펴보면 좋을 듯하다. 그런데 스토아처럼 죽음을 명상하고 공부하는 적극적인 사유(혹은 철학)의 대상으로 삼는 한쪽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은 죽음을 상품화한다. “죽음의 위협은 우리의 가장 내밀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동물적 충동을 활성화”(127)시키고, 죽음의 얼굴을 여실히 보지 못하도록 두려움과 불안이라는 정동으로, 저속노화나 건강백세와 같은 의학 과학 담론으로 무장한다. 또한 자본은 전쟁, 혐오, 차별, 안전 등의 말로 죽음의 위협에서 회피하고 도망치게 만든다. 어떻게 죽음을 배울 것인가. 그것조차도 인문학, 혹은 철학만의 고유한 내용은 아닌 것이다. 그럴 때 나에게서 죽음은? 죽음을 배우는다는 것은 무얼까.
    지금이 항상 전환기다. 제3장의 탄소 정치를 보면, 지금의 전환이 에너지의 생산 시스템과 사회적 에너지학과 관련해서 설명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관건은 에너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에너지 생산과 사회적 에너지학이다. (중략) 특정한 집합적 유기체의 정치적 배치를 만들어내는 것은 신체들의 에너지 채취, 생산, 조직, 분배 방식이다.”(90쪽) 이렇게 바이오매스(?)-농업혁명, 석탄-산업혁명, 석유와 천연가스를 만들어가는 사회적 구조, 그게 오늘날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다. 석탄이 중심 통로 하나에 여러 개의 가지들이 만나는 식의 사회를 만들면 그 병목지점 하나 하나가 네트워크가 되고 투쟁의 지점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석탄 노동자의 파업이 전체 산업과 그 흐름을 저지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석유는 경로가 하나 이상이라서 에너지 흐름의 차단이나 파괴를 극복하기 위해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전력망 같는 격자 모양의 네트워크를 따라 이동했다.”(95) 석유는 탈중앙화된 시스템과 소수의 훈련된 기술자 집단과 극소수의 가진 자들에 의해서 다뤄지고 세상을 만들어간다. 석유가 만든 네트워크 모델은 지금의 디지털 사회적 모델 즉 사회적 에너지학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석유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다(!?) 태양광, 풍력, 원자력 등 혹은 다른 에너지원의 발명/대체로 만들어질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 2026-01-26 11:43

    "1875년 스웨덴의 과학자 스반테 아레니우스는 이산화탄소 농도와대기 온도 간의 밀접한 관계를 입증했고, 오늘날 이야기되고 있는 온실효과를 이론화했으며, 광범위한 석탄 연소가 지구 온도의 상승을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침내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과학적 합의가 이루어졌다."(59~60)
    백년이나 걸렸구나!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여기서부터 이미 답은 없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탄소기반 자본주의에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 우리 문명을 이미 죽었다고 봐야하는데 그럼 무엇을 해야하는가?에 대해 저자는 훼방꾼으로서의 철학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죽는 법을 굳이 배워야 할까? 사는 동안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 가능할까?
    '죽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버리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구원을 내려놓는 법, 희망을 내려놓는 법을 배우는 것.

    "우리는 비판적 사고, 명상, 철학적 토론을 통해 사회적 자극의 스트레스를 중지시켜야 하고, 과거를 계속 살아있게 하고, 아카이브의 정보를 가꾸고, 저장되어 있는 기억을 읽고 해석하고 분류하고 돌보고 특히 재가공함으로써 현재에 대한 집착을 중단해야 한다. ... 인간이라는 동물 안에 사색의 진동을 주입시켜야 한다.
    인간이라는 사실이 인류세에서 어떤 의미가 있으려면, 우리 자신을 기억 없는 삶의 덧없음 속으로 침몰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려면, 우리는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엄청난 역경과 싸워 힘들게 얻어낸 수천 년 동안의 지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죽은 자들에 대한 기억을 버려서는 안 된다."

    어떻게 공부해야 할까? "안락한 소비에 기초한 지속 불가능한 삶"(108)을 살면서 어떤 서사시를 써내려가야 할까?

  • 2026-01-26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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