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나는 스피노자> p136 단어와 해석

초빈
2022-07-30 17:51
208
136~137p_초빈
 
相手(あいて) 상대
**真理(しんり) 진리
**基準(きじゅん) 기준
*真(まこと) 진실, 참
別(べつ) 차이
探す(さがす) 찾다
以上(いじょう) 이상
説明(せつめい) 설명
必要(ひつよう) 필요
彼(かれ) 그
対して(たいして) ~에 대하여
疑問(ぎもん) 의문
抱く(だく) 안다
作る(つくる) 만들다
果てしない(はてしない) 끝없다
続く(つづく) 계속되다
探索(たんさく) 탐색
陥る(おちいる) 빠져들다
*意味(いみ) 의미
正確(せいかく) 정확
外側(そとがわ) 바깥쪽, 외측
使う(つかう) 사용하다
判定(はんてい) 판정
見出す() 보기 시작하다, 발견하다
原理的(げんりてき) 원리적
不可能(ふかのう) 불가능
意外(いがい) 의외
照らし合わせる(てらしあわせる) 대조하다
基本的(きほんてき) 기본적
知性(ちせい) 지성
課す(おほす) 부과하다
苦しい(くるしい) 괴롭다
条件(じょうけん) 조건
単純(たんじゅん) 단순
深刻(しんこく) 심각
逆説(ぎゃくせつ) 역설
対する(たいする) 대하다
答え(こたえ) 대답
定理(ていり) 정리
設ける(もうける) 마련하다
教える(おしえる) 가르치다
偽(にせ) 거짓
自身(じしん) 자신
虚偽(きょぎ)허위, 거짓
規範(きはん) 규범
 
相手はどうするでしょうか。
상대방은 어떻게 할 것인가?  
「分かった、じゃあ、この真理の基準が真だと言えるようなもう一つ別の真理の基準を探してくるよ」となります。
"알았어, 그럼, 이 진리의 기준이 참이라고 말할 수 있는 또 하나 다른 진리의 기준을 찾아올게"가 됩니다.  
これ以上は説明する必要はないでしょう。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もし彼がもう一つ別の真理の基準を見つけ出してきたとしても、それに対して私はまた同じ疑問を抱かざるをえません。
만약 그가 또 다른 진리의 기준을 찾아냈다고 해도, 그에 대해 나는 또 같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つまり、真理の基準を作ろうとすると、真理の基準の基準の基準の・・・・・・と果てしなく続く探索に陥ることになる。
즉, 진리의 기준을 만들려고 하면, 진리의 기준의 기준의 기준의......라고 끝없이 계속되는 탐색에 빠지게 된다.  
これは何を意味しているかというと、真理の基準は存在しえない、もう少し正確に言えば、真理の外側にあって、それを使えば真理を判定できる、そのような真理の基準を見出すことは原理的に不可能だということです。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진리의 기준은 존재할 수 없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진리의 바깥쪽에 있어서, 그것을 사용하면 진리를 판정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진리의 기준을 발견하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これは意外とショッキングなことです。
이것은 의외로 충격적인 것입니다.
それに照らし合わせれば真理かどうかが分かる基準を人間は基本的にもちえないということですから。
거기에 비추면 진리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기준을 인간은 기본적으로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これはある意味で人間の知性に課された苦しい条件とも言えるかもしれません。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지성에 부과된 괴로운 조건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ならばどう考えればよいのでしょうか。
그렇다면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요?  
この実に単純な、しかし実に深刻な逆説に対する答えが先の定理なのです。
이 실로 단순한, 그러나 실로 심각한 역설에 대한 대답이 앞의 정리입니다.  
つまり、真理の基準を真理の外に設けることはできない。
즉, 진리의 기준은 진리 밖에 마련될 수 없다.  
真理そのものが真理の基準と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
진리 자체가 진리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そして何が真かを教えるものは、何が偽であるかも教えてくれるだろう。
그리고 무엇이 참인지를 가르치는 것은, 무엇이 거짓일지도 가르쳐 줄 것이다.  
それが「真理は真理自身と虚偽との規範である」の意味するところです。 
그것이 "진리는 진리 자신과 허위와의 규범이다"의 의미입니다.
댓글 3
  • 2022-07-30 21:02

    (141~146)

    再燃(さいねん) 재연

    元栓(もとせん) 원꼭지, (가스)밸브

    閉域(へいいき)

    閉域網(インターネットから分離することでセキュリティを確保したネットワーク)

    突破(とっぱ) 돌파

    おおらか 너그러움, 대범함, 의젓함

    獲得(かくとく) 획득

    気楽(きらく) 마음 편함, 태평함, 한가함

    演繹(えんえき) 연역

    帰結(きけつ) 귀결

    重(おも)んじる 중히 여기다, 아끼다

    告げ知らせる(=告げ知らす) 통지하다, 고지하다

    告げ知らされる 통지받다, 고지받다

    ~の何たるか=~が何であるか

    懇願(こんがん) 간원

    ~に負けて ~에 넘어가서

    あえて 감히, 굳이

     

    스피노자와 데카르트의 진리관의 차이

    그에 비해서 스피노자는 어떨까요.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진리는 타인을 설득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서는 진리와 진리를 마주하는 사람의 관계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가 진리 자신의 규범이라고 하는 겁니다. 소위 진리를 마주하면 진리가 진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피노자의 진리관을 전하는 또 하나의 정리를 봐봅시다.

     

    참된 관념을 가진 자는 동시에 자신이 참된 관념을 가진 것을 알고, 또한 그 일의 진리를 의심할 수가 없다. (제2부 정리43)

     

    여기서 타깃이 되는 것은 아마도 데카르트일 겁니다. 데카르트는 아무리 참이라고 생각되는 관념이더라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1진리인 코기토 명제만 하더라도 거기에서 도출되는 결론만을 다루고 있자면 점차 의심이 재연되고 만다고까지 서술하고 있습니다(자세한 것은 다음 장에서 언급하겠는데, 이 의심의 재연을 억제하기 위해서 데카르트는 신의 존제증명을 필요로 했습니다. 확실성을 신에 의해 보증하고자 한 겁니다).

    그것은 마치 집을 나와 조금 걸으면 “어라, 열쇠는 잠갔나?” 하고 걱정이 되어 방으로 돌아가고, 다시 집을 나와 걷기 시작하면 “가스 밸브는 잠갔나?” 하고 걱정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반복하여 점차 집에서 나올 수 없게 되어버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데카르트는 이 폐역을 어떻게 해서든 돌파하려 하여, 설득하는 힘을 가진 강력한 코기토 명제를 필요로 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코기토 명제가 설득하려고 하는 것은 데카르트 본인인 겁니다.

    실제로는 여기서 말하는 ‘참된 관념’에는 조건이 있고, 그것은 근본 원리인 신의 관념으로부터 연역된 것이어야 하지만, 여기서는 그 문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진리관의 차이이며, 거기서부터 도출되는 귀결입니다.

    데카르트는 누구라도 설득할 수 있는 공적인 진리를 중히 여겼습니다. 실제로는 거기서 지향했던 것은 데카르트 본인을 설득하는 것이었습니다만.

    그에 비해 스피노자의 경우는 자신과 진리의 관계만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진리를 접하고, 어떻게 그것을 획득하고, 어떻게 그 진리 자신으로부터 진리성을 고지받는가, 그것을 문제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획득한 진리로 남을 설득한다든가 반론을 막는다든가, 그런 것은 전혀 개의치 않는 겁니다.

     

     

    4 사물을 알고, 자신을 알고, 자신이 변한다

     

    사물을 인식함으로써 스스로를 안다

    참된 관념을 가진 자는 동시에 자신이 참된 관념을 가졌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참된 관념을 가진 자만이 참된 관념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참된 관념을 획득하지 않은 사람은 참된 관념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봅시다.

    만약 당신이 스피노자 본인을 만나러 갔다고 치고, “스피노자 선생님, 당신이 생각하는 확실성이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칩니다. 당신의 간원에 넘어가서 스피노자는 열심히 설명해줄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본인으로부터 설명을 들었다 한들, 그렇게 설명을 들은 것만으로는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확실성을 이해할 수는 없겠지요. 왜냐하면 확실한 것을 인식해보지 않으면 확실성이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피노자는 처음 든 “진리는 진리 자신과 허위의 규범이다”라는 문구 직전에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굳이 묻겠는데, 미리 사물을 인식하고 있지 않다면 자신이 그 사물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즉 미리 사물에 대하여 확실하지 않다면 자신이 그 사물에 대하여 확실하다는 것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제2부 정리43 비고)

     

    무슨 말일까요.

    “지금, 나는 이 사물에 대하여 확실한 인식을 갖고 있다. 확실한 인식이란 이런 인식을 말한다”, 그와 같이 느낄 수 있는 것은, 뭔가를 확실하게 인식한 후의 일이라고 스피노자는 말하고 있는 겁니다.

    무언가를 확실하게 인식했을 때, 사람은 그 무언가에 대한 인식을 얻을 뿐만 아니라, 확실성이란 무엇인가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확실성을 어떻게 느끼는가를 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것은 그 무엇인가만이 아니라, 스스로의 인식하는 힘을 인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언가를 앎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더 잘 안다고 해도 좋겠지요.

  • 2022-07-31 23:25

    p132~ 단어와 해석 띠우

    おおむね [概ね] 대체의 취지, 대체(로), 대개, 대강

    でそろう [出揃う] 빠짐없이[모두] 나오다.

    かつやく [活躍] 활약

    こうはい [荒廃] 황폐

    しょみん [庶民] 서민

    ざんぎゃく [残虐] 잔학

    こんてい [根底] 근저

    くつがえす [覆す] 뒤집다

    やけのはら [焼け野原] 온통 불탄 벌판, 허허벌판

    はいきょ [廃墟] 폐허

    そうごん [荘厳] 장엄

    アーキテクチャー architecture 아키텍처. 건축 양식. 구조, 조직.

    けんちくぶつ [建築物]

    きずく [築く] 쌓아올리다

    あらわす [顕す] 나타내다

    きょぎ [虚偽] 거짓

    あてはめる [当てはめる] 꼭 들어맞추다, 적용시키다

    じょうぎ [定規] 모범, 본보기, 사물의 표준.

    ていき [定規] 정해진 규칙

    にせ [偽] 가짜, 거짓

    はかる [測る] 무게·길이·깊이·넓이 등을 재다

     

     

    1 스피노자철학은 ‘또 하나의 근대’를 가리킨다

     

    현대를 결정지었던 17세기

    제1장은 ‘선악’, 제2장은 ‘본질’, 제3장은 ‘자유’라는 테마로 썼습니다. 스피노자의 ‘자유’의 사고방식을 접하고, 신선한 놀라움과 즐거움을 느끼셨다면 무척 기쁘게 생각합니다.

    다만, 여기까지의 논의를 잘 이해한 분이라면, 역으로 의문이 나오는 점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것은 ‘들어가며’에서도 접했던, 스피노자의 사고의 OS(운영체제)가 우리들의 사고의 OS(운영체제)와 달랐다고 하는 문제와 연관됩니다. 본장에서는 ‘진리’를 테마로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역사 이야기를 복습해보지요. ‘들어가며’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스피노자가 살았던 17세기는, 현대의 우리들에게까지 이어지는 다양한 학문이냐 제도가 유럽에서 대략 빠짐없이 나왔던 시대입니다.

    제도로써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근대국가입니다. 우리들이 지금 국가라고 생각하는, 영역이 있고 주권이 있는 국가라는 형태는 17세기 중반이 되어 나왔던 것입니다.

    이른바 근대과학도 이 시기에 나왔습니다. 예를 들어 뉴턴은 17세기후반에 활약한 인물입니다. 그 과학의 기반이었던 근대철학도 같은 시기에 나타났습니다. 17세기는 정말 현대라는 것을 결정지었던 중요한 시기입니다.

     

    사상적 인프라를 정비했던 시대

    16세기로부터 계속된 종교전쟁(위그노전쟁과 30년전쟁)은 유럽을 황폐화시켰습니다. 서민이 돌연 잔학한 살인자로 들어선 듯한, 그때까지의 인간관이 근본에서부터 뒤집히는 것이 일어나고,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유럽이 허허벌판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그 페허 속으로부터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다시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 17세기의 사상적 과제였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이 세기를 ‘사상적인 인프라를 정비했던 시대’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는 근대철학의 , 홉스는 근대정치사상의 인프라를 만들었던 인물입니다. 그 인프라의 위에서 이어서 18세기의 사상이 장엄한 아키텍처, 즉 건축물을 세우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칸트(1724~1804)의 철학과 루소(1712~78)의 정치사상을 그것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17세기는 어떤 의미에서 전환점이고, 어떤 하나의 사상적 방향성이 선택되었던 시대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역사에 ‘혹시’는 있을 수 없습니다만, 그러나 어쩌면 다른 방향이 선택되었을 수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의 생각으로는 스피노자 철학은 이 가능성을 나타내는 철학인 것입니다. 그것은 ‘있었을 수도 있는, 또 하나의 근대’에 다름 아닙니다. 그리고 이 ‘또 하나의 근대’에 관여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 최초에 기술했던 진리에 대한 사고방식입니다.

     

    1. 2 진리는 진리자신의 기준이다.

    진리의 바깥에 진리의 기준은 없다

    스피노자는 진리에 대해 상당히 유명한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실은, 빛이 빛 자신과 어둠을 드러내는 것처럼, 진리는 진리 자신과 허위와의 규범이다. (제2부정리43비고)

     

    무척 멋있는 문언이지만, 이것만을 들어도 뭐가 뭔지 잘 알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이것을 이해하는데 상당히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 정리를 이해하는 데에는 약간 사고실험을 해보면 좋습니다. 그것을 해보지요.

    여기서 말하는 ‘규범’이란 기준입니다. 즉, 후반 부분만을 가져오면, 진리는 진리 자신의 기준이고, 그리고 또 그것은 허위의 기준이기도 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진리의 기준이란 무엇인가요. 그것은 아마도, 그 기준에 들어맞으면 어떤 것이라도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다, 그러한 표준과 같은 것이겠지요.

    그럼, 누군가가 그러한 기준을 발견했다고 말하고 보여주겠다고 합니다. ‘어이, 이 기준으로 재면, 어ㄸㄴ 것이든 참인지 어떤지 알 수 있지!’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었던 나는, 돌연 다음과 같은 의문을 안게 됩니다. ‘잠깐 기다려봐. 네가 말하는 것은 알겠는데, 그래도, 이 기준자체가 참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지?’

     

  • 2022-08-01 01:03

    135-141 뚜버기

     

    語(かた)りかける 말을 걸다.

    証(しょう)する 증명하다. 보증하다.

    顕(あら)わす 드러내다

    前半(ぜんはん)

    提示(ていじ)

    抵触(ていしょく)

    向(む)き合(あ)う 마주 (바라) 보다[향하다], 마주 대하다.

    明晰判明(めいせきはんめい)

    年長(ねんちょう)

    なお 부언할 때 쓰는 말: 더욱이, 더구나, 또한.

    過激(かげき)

    明晰判明(めいせきはんめい)

    年長(ねんちょう)

    なお 부언할 때 쓰는 말: 더욱이, 더구나, 또한.

    欺(あざむ)く (거짓으로) 속이다. 무색게 하다, 착각시키다.

    暖炉(だんろ) 난로

    冬着(ふゆぎ) 겨울옷

    馬鹿(ばか)げる 우습게 보이다. 어이없다.

    天文学(てんもんがく)

    要素(ようそ)

    複合(ふくごう)

    眠(ねむ)る

    誤(あやま)る 실패하다, 실수하다, 틀리다((약간 격식 차린 말씨)). (=まちがう) (남을) 그르치다.

    極限(きょくげん)

    突(つ)き詰(つ)める 끝까지 파고들다[밝혀내다], 추구하다. 골똘히 생각하다.

    接(せっ)する 접하다. 접(촉)하다.

    くるりと 한 바퀴 뱅그르르, 빙, 휙.

    足掛(あしが)かり 발판. 거점

    打(う)ち立(た)てる 수립하다

    くっきり 또렷이, 선명하게

    精査(せいさ) 자세히 조사함.

    封(ふう)じ込(こ)める 안에 넣고 봉(쇄)하다, 가두다. 

    備(そな)える 갖추다

     

    스피노자의 진리관과 근대과학

     

    그러면 진리가 진리자신의 기준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진리가 “자신은 진리이다”라고 말을 걸어 온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진리를 획득하면 “아, 이것이 진리다”라고 알게 되고, 그 외에는 진리의 진리성을 보증하고 세우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것만 들으면 납득할수 없을지도 모른다. 앞의 간단한 사고실험에서 알게된 것은, 진리의 진리성을 보증하고 세우는 것을 진리의 바깥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오면, “빛이 빛 자신과 어둠을 드러내듯이”라는 전반 부분의 의미도 보여집니다. 어떤 것도 빛을 비추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 빛을 비추지 않아도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빛입니다. 빛은 그것을 비추는 빛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빛은 빛만으로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진리도 또한 그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실제로 사고 실험을 해보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진리관이 나온 이유는 알 수 있겠죠. 그러나 납들할 수 없는 분도 많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진리관에서는 근대과학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새롭게 제시하는 실험결과와 정리를 공적으로 증명하여, 공유한다는 프로세스와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 정리를 보면 진리임을 알 수 있다”라는 것은 과학에서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진리관은 근대과학의 존재방식에 저촉한다.

     

    3.진리와 마주보다

     

    데카르트의 진리의 기준은 <명석판명>

     

    근대과학의 방향성을 만든 것은 , 스피노자보다 36살 연장의 철학자 데카르트입니다. 여기까지도 몇 번인가 이름이 나왔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있다. Cogito, ergo sum”, 현대식으로 바꿔말하면, “나는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존재하고 있다”라는 명제로 알려진 철학자입니다. 또한 이 명제는 종종 ‘코기토 명제’라고 불립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데카르트의 철학은 의심하는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그 의심은 과격합니다. 감각은 인간을 착각하게 만든다. 따라서 감각으로 얻게 된 것은 확실하다고 말할 수 없ㄱ다. 감각으로 얻게 된 것은 모두 의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나는 난로 옆에서 겨울 옷을 입고 앉아 있는데, 그것도 감각에 의해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을 의심하는 것은 어어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내가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은 아닐까요. 따라서 나에게는 몸이 있다는 것마저 확실하지 않습니다.

    학문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니다. 자연학, 천문학, 의학 등, 가지각색의 요소가 복합해 있는 학문은 확실이라는 말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불확실한 요소가 들어가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수학이라면, 심플하기 때문에 확실할 지도 모릅니다. 확실히 깨어있던, 잠들어 있던, 2 더하기 3은 5다. 하지만 어쩌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신이 이ᅟᅥᆻ어서, 내가 계산할 때마다 그렇게 틀리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는 건 아닐까요. 어이없는 가정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는 것 아닐까요...

    이렇게 데카르트는 의심을 극한까지 끝까지 파고듭니다. 그것은 이제 거의 광기에 가까워질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은 진리를 발견합니다. 지금 나는 의심하고 있다.. 의심하고 있다는 것은 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하고 있다면 생각하고 있는 내가 존재하고 있을 터이다, 라고.

    이런 저런 것에 의심을 던지고 있는 손가락 끝을 한바퀴 휙 돌려서 나에게 향했을 때, 생각하고 있는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을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이 “나는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존재하고 있다”를 제1 진리로 삼아, 그것을 발판으로 철학을 구축해갔습니다.

    그때 데카르트는 진리의 기준이라는 것을 수립했습니다. 그것이 ‘명석판명 clarus et distinctus’입니다.

    그것은 또렷이 빛이 비쳐 밝고, 다른 것으로부터 확실히 구별되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존재하고 있다”라는 진리는 명석판명이고, 이렇게 명석판명하다면 진리로서 인정해도 좋다고 데카르트는 생각했습니다.

    데카르트 진리관의 특징은 진리를 공적으로 사람을 설득하는 것으로서 위치짓고 있다는 점입니다. 진리는 공적인 자세한 조사를 견딜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나는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존재하고 있다”를 입으로는 의심할 수 있읍니다. 그러나, “나는 생각하고 있다. 생각하고 있다면 그 생각하고 있는 나는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아닐까”라는 말을 들으면 반론할 수 없습니다.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진리는 그 진리를 사용하여 사람을 설득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반론을 봉쇄할 수 있는 그런 기능을 갖춘 진리인 것입니다.

    첨부> 132-146 단어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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