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나는 스피노자> p96~99 단어와 해석

띠우
2022-07-09 11:13
164

 

p96~99 단어와 해석 띠우

 

かどう [可動]

はんい [範囲]

とびこえる [飛(び)越える](장애물·단계를) 뛰어넘다

はたす [果たす] 다하다. 달성하다

かす [課す]

およぐ [泳ぐ]

のがれる [逃れる]

あます [余す] 남게 하다, 남기다, 남아 있다.

つらぬく [貫く]

ぼう [棒]

ゆびしゃぶり [指しゃぶり] 손가락 빨기

りょうが [凌駕]

むゆうびょうしゃ [夢遊病者]

かくせい [覚醒]

すいみん [睡眠]

なしとげる [成(し)遂げる]완수하다

 

여기서 말하는 필요성을, 그 사람에게 주어진 신체와 정신조건이라고 생각하면, 스피노자가 말하는 바가 보입니다. 앞서 보았던 것처럼, 팔은 가동범위를 가지고 그 내부에는 일정한 구조가 있습니다. 이들 조건에 따라서 팔의 움직임은 필연적인 법칙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뛰어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팔을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필연적인 법칙에 잘 따르고, 그것을 살리는 것이 가능할 때입니다.

<신학정치론>의 제16장에서는 물고기의 예가 나옵니다.

물고기에는 물속에서 헤엄치며 생존한다는 조건이 부과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확실히 제약이고 필연성입니다. 그러나 물고기가 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그 필연성을 도망치는 것은 아닙니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헤어치며 살아간다는 필연성에 잘 따라 살 수 있었던 때야말로, 그 힘을 남김없이 발휘할 수 있습니다. 물고기를 벽으로 옮기면 죽어버립니다. 인간 신체와 정신에도 이것과 같은 필연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실험하면서 자유롭게 되어간다

여기서도 또 실험의 사고방식이 중요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신체와 정신의 필연성은 본인에게도 미리 알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제2부정리24). 누구라도 그것을 조금씩 실험하면서 배워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태어남으로 해서 자유롭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자유롭게 되거나 혹은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제4부정리54비고,정리68)

아기를 예로 생각해보면 알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아기는 자신의 몸의 사용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즉 자신의 신체가 어떠한 필연성에 관통하고 있는가를 알지 못합니다.

나의 딸이 아직 어렸을 때, 손가락 빨기는 할 수 있는데, 손에 든 막대기 끝을 입에 잘 넣지 못하는 것을 보고 놀랐던 일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몸은 어떻게 움직이면, 그 결과 어떻게 움직이는지 아직 잘 모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위치에 손을 두어야 막대기의 앞이 자기 입가에 올 것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동작을 시도해보는 것도 스피노자적인 실험입니다. 실험을 거듭하는 가운데 스스로의 신체의 필연성을 알고, 조금씩 사람은 자유롭게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럼 어른이 되면 스스로의 신체를 충분히 알 수 있느냐고 하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 번에도 소개했습니다만, 우리들은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길게 인용해 보겠습니다.

 

실제 오늘날까지 누구도 신체 기능 전부를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하게 신체 조직을 알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지혜를 훨씬 능가하는 많은 일이 동물에 있어서 인정되는 것이나, 몽유병자가 각성 때에는 도저히 하지 않을 것 같은 많은 것을 수면 중에 이루는 것(이것은 신체가 단순히 자기 본성의 법칙에만 따라서 자신의 정신을 놀라게 할 만한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가리키고 있다)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제3부정리2비고)

 

우리들은 신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설명할 정도로 정확하게 신체를 이해하지는 못한다. 예를 들면, 몽유병자는 수면 중에 놀랄만한 일을 완수합니다.

신체에 대해서 여기까지 말해지고 있는 것은 정신에도 같은 모양으로 적용됩니다. 우리들은 정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설명할 정도로 정확하게 정신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인류는 지금도 아이와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들의 일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않을지도 모르니까요.

 

댓글 4
  • 2022-07-10 12:49

    「はじめてのスピノザ - 自由へのエチカ」 p.94~p.96

    꼭지

     

     

    はっき [発揮] 발휘

    わだい [話題]

    さいしゅう [最終]

    もくひょう [目標]

    だい-する [題する] 1.제목을 붙이다 2.어떤 사물을 제목으로 시를 짓다 3.표제나 제자·제사 등을 쓰다

    いかなる [如何なる] 어떠한.

    ふつう [普通]

    そくばく [束縛]

    せいやく [制約]

    おもいだ-す [思い出す] 생각해 내다; 상기[회상]하다.

    ぞうだい [増大]

    こ-える [超える] 1.지나가다 2.기준을 넘다 3.보다 낫다

    うで [腕] 1.팔. 2.완력. 3.솜씨, 실력, 기술

    かどう [可動]

    はんい [範囲] 범위

    こっかく [骨格·骨骼]

    きんにく [筋肉]

    かんせつ [関節]

    せいげん [制限]

    したが-う [従う·順う·随う] 1.따르다;좇다 2.쏠리다 3.→したがえる

    きょうせい [強制]

     

     

     

     

     

    1. ⌈자유⌋란 무엇인가?

     

    주어진 조건하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

    『에티카』에서는 전5부를 거쳐 실로 많은 화제가 논해지고 있습니다. 다만 이 책이 지향하는 최종목표는 매우 심플합니다. 「인간의 자유」가 그것의 다른 것이 아닙니다.(바로 그것입니다) 최종부인 제5부는 「지성의 능력 혹은 인간의 자유에 관하여」라고 제목이 붙여져 있습니다. 그럼 스피노자가 지향하는 자유란 어떤 것인 걸까요?

    「자유」라는 단어를 우리들은 대게, 「속박이 없다」라는 의미로 사용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제약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그처럼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약이 없다는 만으로는 자유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애초 완전히 제약이 없는 것 따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스치노자의 출발점이 됩니다.

    무슨 말일까요?

    전장에서 본 스피노자의 본질 개념을 상기해 보죠. 인간의 본질이란 그 사람의 힘이며, 인간에게는 좋은 것이란, 그 사람의 활동 능력이 증대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활동능력이 증대된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에게 주어진 조건이나 제약을 넘어 나간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두 팔과 두 발이 있는 경우, 두 팔과 두 다리가 있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은 그 사람에게 주어진 조건입니다. 그 사람의 활동 능력이 높아지거나, 팔이나 발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상태일까요? 팔에도 발에도 가동범위가 있습니다. 또, 골격이나 근육이나 관절에 의해 움직일 수 있는 방향이나 스피드에는 제한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팔이나 발의 경우의 조건입니다.

    팔이나 발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그것들의 조건을 넘어 나간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조건의 토대, 그 조건을 따라서, 팔이나 발을 잘 움직일스 있을 때, 우리는 그것들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토대에서, 그 조건에 따라서, 자신의 힘을 잘 발휘할 수 있는 것. 그야말로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자유의 상태입니다.

     

    필연성에 따른 것이라야 자유

    스피노자는『에티카』의 모두에서 자유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본성의 필연성만에 의해 존재하고 · 자기자신만에 의해 행동으로 결정되는 것은 자유라고 말해진다. 이에 반해 어느 일정한 양식에 의해 존재하고 · 작용하는 것처럼 남으로부터 결정되는 것은 필연적이어서, 어쩌면 차라리 강제된다고 말해진다.(제1부 정의7)

     

    이 정의를 읽고 풀이하는 포인트는 두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필연성에 따른 것이 자유라고 말해진다는 것입니다. 대게 필연과 자유는 대립합니다. 필연이면 자유가 아니고, 자유라면 필연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스피노자는 그들이 대립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필연성에 의해 존재한다거나 행위한다거나 하는 때만이, 그 사람은 자유롭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 2022-07-10 22:11
    91~92_초빈
     
    いわゆる 소위, 이른바
    契約説(けいやくせつ) 계약설
    一回性(いっかいせい) 일회성
    *反復的(はんぷくてき) 반복적
    論ずる(ろんずる) 논하다
    近代(きんだい) 근대
    政治(せいじ) 정치
    *哲学(てつがく) 철학
    新書(しんしょ) 신서, 신간 서적
    確か(たしか) 확실함
    *集団(しゅうだん) 집단
    *権利(けんり) 권리
    制約(せいやく) 제약
    面(めん) 면, 얼굴
    認める(みとめる) 인정하다
    完全(かんぜん) 완전
    否定(ひてい) 부정
    存在(そんざい) 존재
    互い(たがい) 쌍방, 서로
    組み合う(くみあう)
    指導者(しどうしゃ) 지도자
    *確認(かくにん) 확인
    *契約(けいやく) 계약
    内容(ないよう) 내용
    背く(そむく) 등지다
    行い(おこない) 행위
    蹂躙(じゅうりん) 유린
    暮らし(くらし) 일상생활
    崩壊(ほうかい) 붕괴
    社会(しゃかい) 사회
    一度(いちど) 한 번
    限り(かぎり) 끝, 동안
    生活(せいかつ) 생활
    続ける(つづける) 계속되다
    的(-てき) ~적
    我々(われ‐われ) 우리
    常(つね) 항상, 늘
    緊張感(きんちょうかん) 긴장감
    向き合う(むき‐あう) 상대하다
    必要(ひつよう) 필요
    教え(おしえ) 가르침
    権利(けんり) 권리
    踏みにじる(ふみにじる) 짓밟다, 유린하다
    国家(こっか) 국가
    長続き(ながつづき) 오래 감
    自ら(みずから) 몸소
    従う(したがう) 따르다
    巨大(きょだい) 거대
    次章(じしょう) 다음 장
    取り組む(とりくむ) 맞붙다, 싸우다, 몰두하다
     
    私はいわゆる契約説が一回性の契約説であるとしたら、スピノザのそれは反復的契約説であろうと論じたことがあります(國分功一郎 『近代政治哲学』ちくま新書)。
    저는 이른바 계약설이 일회성의 계약설이라면, 스피노자의 그것은 반복적 계약설일 것이라고 논한 적이 있습니다(코쿠분 코이치로 『근대 정치 철학』치쿠마 신서).
    確かに集団の中で生きていくことで、自分の権利が制約を受けるという面はあるでしょう。
    확실히 집단 안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자신의 권리가 제약을 받는다는 면은 있을 것입니다.  
    スピノザもそれを認めます。
    스피노자도 그것을 인정합니다.  
    ただ、だからといって集団で生きることを完全に否定はできない。
    다만 그렇다고 해서 집단에서 사는 것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人間は一人では生きられないし、集団で存在して互いに組み合うことで高められる力があるからです。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고, 집단에서 존재하고 서로 조합함으로써 높아지는 힘이 있기 때문에 합니다.  
    ただし、もしその集団やその集団の指導者たちが、これまで確認してきた契約内容に背くようなことを行い、人々の権利が蹂躙されるようなことがあれば、人々は日々の暮らしの中でその契約を確認することをやめるでしょう。
    다만, 만약 그 집단이나 그 집단의 지도자들이, 지금까지 확인해 온 계약 내용을 뒤집는 것과 같은 일을 하고, 사람들의 권리가 유린되는 일이 있으면, 사람들은 나날의 생활 속 에서 그 계약을 확인하는 것을 중지할 것입니다.
    つまり、集団は崩壊するでしょう。
    즉, 집단은 무너질 것입니다.
    社会契約が一度限りのものではなく、生活の中で反復的に確認され続けるものだとするスピノザ的契約説は、我々に、常に緊張感をもって契約に向き合う必要があることを教えます。
    사회계약이 한 번의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어 계속하는 것이라고 스피노자적 계약설은, 우리에게, 항상 긴장감을 가지고 계약을 마주할 필요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一人ひとりの権利が蹂躙され、コナトゥスが踏みにじられる、そのような国家は長続きしないというのがスピノザの考えでした。
    한 사람 한 사람의 권리가 유린되고 코나투스가 밟히는 그런 국가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생각이었습니다.  
    一人ひとりがうまく自らのコナトゥスに従って生きていければこそ、集団は長続きする。
    한사람 한사람이 잘 스스로의 코나투스에 따라 살아가야, 집단은 오래 지속된다.  
    なぜならばその時に人は自由であるからというわけです。
    왜냐하면 그때 사람이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ではスピノザの言う自由とはどのようなものなのでしょうか。
    그러면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유란 무엇입니까?  
    この巨大なテーマに次章で取り組んでみたいと思います。
    이 거대한 테마에 다음 장에서 집중해보고 싶습니다.

  • 2022-07-11 00:27

    (100~104)

    力点(りきてん) 역점, 중점, 힘점

    目を向ける 시선을 주다, 눈을 돌리다

    読解(どっかい) 독해

    圧倒(あっとう) 압도

    叱責(しっせき) 질책

    訓戒(くんかい) 훈계

    暴君(ぼうくん) 폭군

    復讐(ふくしゅう) 복수

    虐待(ぎゃくたい) 학대

    べく べし의 連用形, 구어에서도 사용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함, 그렇게 할 것을 목적으로 무엇인가를 함을 나타내는 말

    過酷(かこく) 가혹

    度合い(どあい) 정도

    能動(のうどう) 능동

    明瞭判然(めいりょうはんぜん)

    刺激(しげき) 자극

    吸収(きゅうしゅう) 흡수

    摂取(せっしゅ) 섭취

    持続(じぞく) 지속

     

    자유의 반대는 강제

    자유의 정의를 독해하는 데에서의 두 번째 포인트는 자유의 반대가 ‘강제’라는 것입니다.

    앞서 나온 제1부 정의7을 보면, 처음에 자유의 반대는 ‘필연적’이라고 말해지고, 그것이 ‘강제된다’로 말이 바뀌고 있습니다. 만약 전자만을 다룬다면 자유도, 자유의 반대도, 양쪽 다 ‘필연성’으로 설명되게 됩니다.

    자유의 반대를 설명하면서 처음에 나오는 ‘필연적’이라는 형용사는 ‘일상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져 있다’라는 것을 서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상적으로는 자유의 반대는 ‘필연적’이라고들 하지만, 그 의미하는 바는 ‘강제’입니다. ‘강제’에 중점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potius’라는 말이 그 직전에 놓여 있는 거겠지요.

    그러므로 여기서는 ‘강제’ 쪽에 눈을 돌리고 정의를 독해해 갑시다.

     

    강제란 본질이 짓밟힌 상태

    그런데 강제란 어떤 상태인가. 그것은 그 사람에게 주어진 심신의 조건이 무시되고 뭔가를 강요당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 사람에게 주어진 조건은 그 사람의 본질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제는 본질이 짓밟힌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은 외부의 원인에 의해서 그 본질이 압도당해버린 상태라고 말해도 되겠지요.

    저는 이 자유의 반대로서의 강제를 생각하면, 항상 『에티카』에서 소개되고 있는 에피소드를 상기합니다. 부모의 질책을 견디지 못한 청년이 집을 버리고 군대로 달아나, “가정의 안락과 아버지의 훈계 대신에 전쟁의 고생과 폭군의 명령을 선택하여, 오직 부모에게 복수하기 위해 모든 부담을 떠안는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제4부 부록 제13쪽).

    이것은 스피노자가 실제로 들은 이야기일까요. 어린 시절부터 이른바 학대를 받으며 자란 청년이 그에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일부러 가혹한 상황에 두고, 폭군의 명령에 따릅니다.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에티카』에 의하면 복수심이란 증오의 감정으로 해악을 가한 자에 대해서 같은 증오의 감정으로 해악을 가하도록 사람을 내모는 욕망입니다(제3부 여러 감정의 정의 37). 이 청년은 부모에 대해 직접 복수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대신에 자신의 심신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상태에 있을 때 이 청년은 예전에 받은 학대라는 외부의 압도적인 원인에 자신의 거의 모두를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그의 행동 전체가 이 복수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강제’의 상태, 자유와는 정반대의 상태에 지나지 않습니다. 외부의 원인에 의해서 존재 방식이 결정되어 버린 상태입니다.

     

     

    2 자유의 정도를 높이는 윤리학

     

    자유란 자신이 원인이 되는 것

    이렇게 생각해보면, 스피노자의 자유 개념은 어딘가에서 원인이라는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유롭지 못한 상태, 강제된 상태란, 외부의 원인에 지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유란 자신이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럼, 자신이 원인이 된다는 건 어떤 것일까. 스피노자는 이것을 ‘능동actio’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사람은 자신이 원인이 되어 뭔가를 이룰 때 능동이라고 합니다. 내가 나의 행위의 원인일 경우, 나는 그 행위에서 능동인 겁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정의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그 타당한 원인이 된 어떤 일이 우리 안 혹은 우리 밖에 일어날 때, 다시 말하면[......] 우리 본성에 의해서만 또렷하고 확실하게 이해될 수 있는 어떤 일이 우리 본성으로부터 우리 안 혹은 밖에 일어날 때, 나는 우리가 작용을 이룬다[능동]고 말한다. (제3부 정의2)

     

    사람은 자유로울 때, 또한 능동이기도 한 것이 됩니다. 어떻게 하면 인간은 자유로워질까 하는 질문은, 따라서 인간은 어떻게 하면 능동적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으로 바꿔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남습니다. 중대한 문제입니다.

    내가 자신의 행위의 원인이 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모든 것은 신이라는 자연 안에 있으며, 모든 것은 신이라는 실체의 변용이었습니다. 신의 변용이라는 뜻에서는, 우리의 존재나 행위는 신을 원인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원인이 아닙니다.

    다른 한편, 우리는 외부로부터 계속 자극을 받으면서 존재합니다. 『에티카』에서도, 어떠한 것도 다른 것으로부터 작용을 받지 않으면 존재하는 것도 작용하는 것도 할 수 없다고 분명히 쓰여 있습니다(제1부 정리28). 이것은 간단한 일입니다. 산소를 들이마시거나 수분을 섭취하지 않으면 신체는 지속되지 않습니다. 생각하거나 하는 것도 다른 것으로부터의 작용이 있고서 비로소 생기는 일입니다.

    우리는 늘 계속해서 작용이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늘 수동으로밖에 있을 수 없는 건 아닐까요. 우리가 원인이 되는 일 따위 가능한 걸까요.

  • 2022-07-11 08:47

     

    88-91쪽 뚜버기

    まだまだ 아직・아직도・더;더욱

    ~がちだ/がちで/がちの/がちな 名詞に接続したときは、その名詞が示す状態の傾向にあることを表し、「いつも」「よく」と呼応することが多いです。 動詞に接続したときは、何も考えずともそのようになってしまうという意味を表し、「どうしても」「つい」「うっかり」と呼応することが多いです。

    最後(さいご)

    順(じゅん)を追(お)って 차례대로, 차근차근

    増大(ぞうだい)

    偽(いつわ)り 거짓(말). (=うそ, 虚言) 인위를 가한 것, 허구(虛構).

    長続(ながつづ)き 오래 계속함, 오래 감.

    参照(さんしょう)

    社会契約説(しゃかいけいやくせつ)

    虚構(きょこう)

    論法(ろんぽう)

    一度切(いちどき)り 한번 뿐

    害(がい) 

    及(およ)ぼす 미치게 하다.

    更新(こうしん)

     

    1. 코나투스와 사회의 안정

     

    한사람 한사람의 자유가 사회의 안정으로 이어진다

     

    이 장은 힘으로서의 본질이라는 테마를 보아 왔습니다.

    ‘본질’이라는 말는 매우 오래된 말입니다. 현대 철학에서는 종종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스피노자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이 말에는 아직도 이용가치가 크다고 생가합니다. 스피노자적인 본질개념은, 형태에 사로잡혀 버리기 쉬운 우리들의 시각을 근저에서부터 바꾸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스피노자적인 본질개념을 사회 안에서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라는 문제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코나투스는 자신의 존재를 고집하는 힘입니다. 그러면 이런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요. 자신의 존재를 고집하는 힘이 인간의 본질이라면, 그것은 사회와 모ᅟᅮᆫ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입니다.

    차근차근 생각해 갑시다.

    스피노자는 선악을 조합으로 생각했습니다. 코나투스가 잘 작동하여 활동능력이 증대하는 것은 잘 조합되었을 때이다. 사회라면,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잘 구축했을 때이다. 따라서 코나투스라는 원리는 확실히 스스로의 존재를 고집하는 힘이지만, 그것은 결코 타인을 희생시키고 스스로를 유지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커뮤니티가 잘 돌아갈 때, 사람들ㅇ은 잘 조합하여 서로의 힘을 높여주게 됩니다. 그것은 스피노자적으로 말해서 좋은 것(선)에 다름아닙니다.

    <<에티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코나투스가 잘 작동하면 살아갈 때, 자유이다. 그렇게 자유로운 사람들은 서로서로 감사하고(제4부 정리71) 거짓된 행동을 피하여 늘 신의있게 행동하며 (같은 곳 정리72), 국가의 공통법률을 지키기를 원한다. (같은 곳 정리73증명).

    한사람 한사람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곳이야말로, 사회가 안정되기 때문에 가장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코나투스는 자기본위의 원리가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공동으로 안정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한사람 한사람의 코나투스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코나투스를 짓밟는 국가는 오래 가지 않는다

    <<에티카>>는 국가에 대해서는 본격적으로 논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에 관해서는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이나 <<국가론>>을 참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사회계약설은, 안전을 위해 사람들이 모여 사회계약을 행한 뒤에 그에 따라서 국가 안에서 살아간다는 논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언젠가 어딘가에서 한번 계약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계약설이 허구라 불리는 이유도 있습니다. 누구도 그런 계약을 했다는 기억은 없기 때문입니다.

    스피노자는 확실하게 계약설의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단 한번의 계약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매일, 타인에게 해를 입히지 않으려 하고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면서 생활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계약이라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선가 한번 계약을 했다는 내용에 따르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국가 안에서 서로 존중하면서 생활해 간다. 그것에 의해 계약은 이른바, 매시간, 매일 갱신되고 확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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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 2024.04.04 | 조회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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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 국제법과 학문의 책임> (1)
띠우 | 2024.03.29 | 조회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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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p56 단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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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 p49 단어 올립니다 (4)
띠우 | 2024.03.23 | 조회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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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 가자 지구, 인류의 위기> 번역
초빈 | 2024.03.22 | 조회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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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 p44 단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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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 p41 단어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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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슨하게 철학하기> 377p (1)
초빈 | 2024.02.25 | 조회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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