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はじめてのスピノザ - 自由へのエチカ」P.168~P.170

꼭지
2022-08-20 18:09
165

p.168~170

꼭지

 

ていしき [定式]

みみょう [微妙]

めいかく [明確]

※ もちだ たつお [持田辰郎]

せいれん [精練]

アプリオリ [(라틴어) a priori]아프리오리; 선험적; 선천적.

けいそう[勁草] 경초 しょおく [書屋]

ていじ [提示]

なんたる [何たる] 1.무엇인가;뭐라는 2.무슨;얼마나

せいみつ[精密]

たんきゅう [探究],[探求]

ふ-す [付す·附す] 1.붙이다, 첨부하다. (=つける) 2.맡기다, 회부하다. (=託(たく)する)

さんだんろんぽう [三段論法]

すくなくとも [少なくとも·尠くとも]적어도

きょうつう [共通]

ばんにん [万人]

とりわけ [取り分け]특히; 유난히; 그 중에서도.

とうしょ [当初]

まことに [誠に•真に•実に·真に·実に] 참으로, 정말로, 실로, 대단히, 매우. (=まこと)

めいせき [明晰·明晳]

か-ける [欠ける] 1.이지러지다 2.귀떨어지다;흠지다 3.이울다

それゆえ [それ故·其れ故] 그러므로; 그러니까; 그 때문에((‘それだから’의 격식차린 말씨)).

じゅっこう [熟考]

ねりあ-げる [練(り)上げる]이겨서[반죽하여, 단련하여, 잘 손질하여] 훌륭히 마무르다.

おのずから [自ら] 1.저절로;자연히 2.스스로;몸소 3.만일

ぜんけい [前掲] 전게; 전술

きょうちょう[強調]

みがきあ-げる [磨き上げる] 1.닦아서 마무리하다;충분히 닦다 2.솜씨 따위를 연마하다

ととの-える [整える·斉える] 1.조정하다;조절하다 2.정돈하다;단정히 하다 3.가지런히 하다

くもなく [苦もなく] 어렵지 않게; 힘 안 들이고.

ふかけつ [不可欠] 불가결

そな-える [備える] 1.준비하다;대비하다 2.갖추다 3.구비하다;마련하다

かかせない [欠かせない] 빠뜨릴 수 없는; 없어서는 안 될.

ともな-う [伴う] 1.함께 가다;따라가다 2.상반하다 3.어울리다;맞다

ときふ-せる [説(き)伏せる] 설복(說服)하다.

たんなる [単なる] 단순한

 

 

그러나, 실제로 데카르트의 텍스트를 보아 오면, 라이프니츠의 정식과는 미묘하게,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는 것이 발견되어 집니다.

그 점을 명확히 지적한 모찌다타츠오의 논문「데카르트에 있어서 신의 관념의 정련과, 신의 실재의 선험적 증명」(『현대 데카르트논집3-일본편』케이소서옥)을 참조해 가면서 이 점을 검토해 가보죠.

모찌다는 데카르트가 제시한 선험적 증명에는 라이프니츠의 정식에서는 보여지지 않는 ⌈신은 무엇인가를 충분정밀하게 탐구한 뒤에⌋라는 조건이 붙여져 있는 것에 주목합니다. 이것은 삼단논법이라는 논리의 경우에는 불필요합니다. 논리적으로는 불순한 요소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실은 데카르트에게 있어서는 이런 요소만이 결정적으로 중요했습니다.

무슨 일일 까요?

데카르트는 신의 관념의 공적 성격을 발견했다고 모찌다는 말합니다. 데카르트는 어떠한 증명의 경우에도, 우리가 신의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 혹은 적어도 신의 관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의 관념이 누구에게라도 공통이며, 공적인 것이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신의 관념은 만인 사이에서 공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데카르트에 의한 신의 존재증명의 전제입니다.

그러나, 라고 모찌다는 말합니다. ─⌈한편, 신의 관념도 관념인 한 사적인 것으로 밖에 있을 수 없다. 특히 탐구의 당초의 경우에는, 우리는 참으로 가지각색의, 그리고 명석성이 결여된 신의 관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신에 관하여 숙고하고, 신의 관념을 잘 손질하여 마무르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신의 존재를 ⌈저절로⌋인식하는 것은, 그러한 신의 관념의 정련을 거친 뒤에,입니다.⌋(전게서, 196페이지, 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말해진 정련이란, 명석성이 결여된 신의 관념을 연마하는 것이고, 또, 신에 관하여 숙고해 가면서 정신을 정돈해 가는 과정에 다름 아닙니다.

·프리오리한 증명이 말하는 것처럼, 확실히 신의 존재는 ⌈자명한 per se nota⌋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의 존재가 누구에게도 어떤 어려운 없이 알려진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신의 관념에 관한 긴 사색이 필요하며, 데카르트는 그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이프니츠가 제시한 삼단논법이 논리적인 증명이라고 한다면, 여기서 말해지는 정련이란 그 논리의 밖에 있는 것, 불순물입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그것이 불가결하다고 생각해 왔을 터입니다.

신의 관념은 확실히 공적인 성격을 갖추고 있어,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 관념을 제가 사물로 하기 위해서는, 사적일 수 밖에 없는 정련의 과정이 없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혼자서 신에 관하여 숙고하는 고독한 작업입니다. 그리고, 정련은 증명을 받아 들이는 것이 가능한 것과 같은 정신으로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주체의 변용을 동반합니다.

그렇다면 데카르트는, 단지 상대를 설복하는 증명을 제시해 왔을 뿐만 아니라, 증명을 받아 들이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되는 정련이라는 사적인 과정에도 주목해온 것이 됩니다. 데카르트는 진리를 단순한 인식의 대상으로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일종의 진리가 주체의 변용을 요구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댓글 3
  • 2022-08-21 22:26

    p165~168 단어와 해석 띠우

     

    こっし [骨子]

    ア‐ポステリオリ a posteriori [名・形動]近代認識論では、経験に基づくことをさす。귀납적, 경험적, 후천적 ⇔アプリオリ 선험적

    ~せしめる 「する」の未然形「せ」に使役の助動詞「しめる」がついたもので、「させる」の意味になります。

    ふよ [付与]

    か-ける [欠ける]

    そなえる [備える] 갖추다

    そなわ-る [備わる] 갖춰지다

    ときふせる [説(き)伏せる] 설복(說服)하다. (=説(と)きつける)

    せまる [迫る·逼る] 육박하다.

    しゅちょ [主著]

    せいさつ [省察]

    だいする [題する] 제목붙이다

    さきどり [先取り] 선취

    ひょうしぬけ [拍子抜け] 맥빠짐, 김빠짐

    せんこく [宣告]

    • 2022-08-22 08:36

       

      우리들 안에는 확실히 신의 관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관념은 신이 무한하고, 독립된, 전지⦁전능한 실체, 모든 것을 창조한 실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여기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만큼 완전한 존재에 대한 관념이 우리들 자신에서 유래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 관념은 신 그 자체를 원인으로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신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 이것이 그 증명의 골자입니다.

      제2의 경험적 증명은 ‘신의 존재는 또 그 관념을 갖는 바의 우리 자신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으로부터도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요. 나 자신의 힘에 따라서는 아닙니다. 혹시 나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힘이 있다면, 나는 자신에 대해서, 존재뿐만 아니라 모든 완전성을 부여할 수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나를 존재하게 하는 힘을 가졌던 것은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또 나에게는 결여되어 있지만 내가 인식은 하고 있는 대부분의 완전성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한 완전성을 갖는 존재란 신입니다. 따라서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그러한 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이 이러한 증명에 납득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여기서 문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주목하고 싶은 것은 두 개의 증명의 방향성입니다.

      인간적인 시점에 서 있는 이 두 개의 경험적인 증명은 상대를 설복하려고 합니다. 당신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당신이 신의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지요. 그 관념을 가지는 당신 자신이 존재하는 것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 이 증명은 그러한 어조로 상대에게 다가가고, 상대를 설득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 개의 증명은 데카르트에 의한 신의 존재증명을 대표하는 것이고, 데카르트에 의한 신의 존재증명이라고 말하면 우선은 이것들을 가리킵니다. 데카르트의 주저라고 말해지는 『성찰』에서는, 우선 이들 증명이 ‘신에 대해서’라고 제목 붙여졌던 제3성찰에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자기를 정련하는 증명

      다만, 문제는 세 번째 증명이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것은 앞의 두 개와는 전혀 관점이 다른 선험적이라고 불려지는 증명이고, 『성찰』이라면, ‘다시 신에 대해서’라고 제목 붙여진 제5성찰에 나타납니다.

      물론 독자로서는, 왜 이미 존재를 증명하고 있는데, ‘다시’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신경 쓰일 것입니다. 제 5성찰의 타이틀은 그러한 독자의 감상을 선취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 선험적 증명이란 ‘신 존재는 단순히 신의 본성을 고찰하는 것만으로 인식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맥빠지게 하는 듯한 증명이지만, 이것은 라이프니치에 의해 삼단논법으로써 정식화되었던 -그리고 또 나중에 칸트에 의해서 그 무효를 선고받았던- 존재론적 증명이라고 불리는 것과 유사합니다.

      라이프니치의 정식이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신의 관념은 모든 완전성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재는 완전성의 하나입니다. 따라서 신은 실재합니다.

      그럼 신의 본성을 고찰하면, 거기에 모든 완전성이 갖춰졌다는 알 수 있다는 식으로 이해한다면, 데카르트의 선험적 증명은 이 존재론적 증명의 일례라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2022-08-22 08:30

    (160~163)

     

    精錬(せいれん) (광석의) 정련, 제련

    懐疑(かいぎ) 회의

    病(やまい)병2. 나쁜 버릇

    治癒(ちゆ) 치유

    比較(ひかく) 비교

    違和感(いわかん) 위화감

    精査(せいさ) 정밀하게 조사함

    説き伏せる(ときふせる) 설복하다

    辿り着く(たどりつく) (겨우) 당도하다

    任意(にんい) 임의

    泥沼(どろぬま) 진흙탕, 수렁

    処方(しょほう) 처방

    日付(ひづけ) 날짜, 문서에 작성 또는 제출한 연월일을 기재하는 것

    宛(あて) 당, …앞

    騙す(だます) 속이다, 달래다

    実存(じつぞん) 실존

    見合う(みあう) 대응하다, 어울리다, 서로 보다

    微細(びさい) 미세

     

     

    5장 신의 존재증명과 정련의 길

     

    1 회의의 병과 치유의 이야기

     

    신의 존재증명이 없으면 확실한 앎은 보증되지 않는다

    제4장에서 스피노자의 진리관을 데카르트의 진리관과 비교하고 그 차이를 검토했습니다.

    데카르트의 진리관은 확실히 근대과학이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위화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것에 의하면 진리는 공공성을 갖고 있으며, 공적인 정밀한 조사를 견딜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가 진리로 인정받는 것은 더 이상 반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됐을 때이며, 따라서 진리가 상대를 설득했을 때입니다.

    데카르트적인 진리는 상대를 설득하는 것이고, 그것은 그에게 제1진리였던 코기토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명제를 말로는 의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므로 적어도 생각하는 내가 존재하는 게 아닌가, 라고 하면 반론할 수 없습니다. 데카르트적 진리는 말하자면 상대를 설복합니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그 의심 끝에 이 코기토명제라는 제1진리에 당도했습니다. 아무리 사항들을 의심해도 이것만은 의심하 구 없다는 겁니다.

    데카르트의 회의난 종종 ‘방법적 회의’라고 불리는데, 이 말에는 충분히 주의해야 합니다. 데카르트는 임의로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이 회의를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데카르트는 어쩔 수 없이 의심했습니다. 자기 자신은 어찌 할 수 없는 회의의 수렁에서 나올 수 없게 되었던 겁니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그와 같은 의심의 병으로부터의 치유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코기토명제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데카르트가 자신에 대해 처방한 약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앞장에서도 강조한 점인데, 코기토에 의한 설득은 실은 누구보다도, 다름 아닌 데카르트 자신에게로 향하고 있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데카르트는 신체 감각은 고사하고 수학 같이 지성에 의해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것조차 의심하게 되어버린 자신을 어떻게 해서든 설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데카르트는 틀림없이 약의 효력에는 시간제한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코기토 같이 확실한 진리라 할지라도 점차 효력을 잃어간다는 이야기도 하고 있습니다. 확실한 진리로부터 끌어내진 결론을 떠올릴 때, 우리는 종종 그 전제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기 않기 때문에, 그런 결론이 불확실하다고 느끼게 된다는 겁니다(1640년 5월 24일, 레기우스에게 보낸 서간).

    데카르트는 그렇기에 신의 존재증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선량하고 우리를 속이는 일이 없는, 그런 신이 존재하고 있다고 인식함으로써 확실한 앎이 드디어 보증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이렇게 보아오면, 확실한 진리를 구하는 데카르트에게는 과학주의라는 말로는 도저히 정리되지 않는 실존 상의 고민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새 주체의 모습이 진리의 진리성을 지탱한다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진리의 특징은 그것이 주체의 변용을 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진리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걸맞은 주체로 레벨 업해야 합니다. 진리를 획득한 사람은 자신이 그것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앎과 동시에 그 확실성을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생각이었다는 것은 앞장에서 봤지만, 왜 스피노자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나 하면, 진리의 획득과 주체의 변용을 세트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설복되어 반론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사람에게는 어떤 주체의 변용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 뭔가를 “이거야!” 하는 방식으로 이해했을 때, 아무리 미세하더라도 그 사람 안에서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렇게 얻어진 새 주체의 모습이 획득된 진리의 진리성을 지탱한다고 스피노자는 생각한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데카르트와 비교했을 때, 스피노자는 진리의 사적 성격을 강조한 거라고 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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