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나는 스피노자>p115단어와 해석

초빈
2022-07-23 20:16
304
124~125p_초빈
 
*現代社会(げんだいしゃかい) 현대사회
はびこる 만연하다
*意志(いし) 의지
信仰(しんこう) 신앙
教(-きょう) 교, 교파
時代(じだい) 시대
最後(さいご) 최후
決定(けってい) 결정
*選択(せんたく) 선택
盛ん(さかん) 맹렬함, 번창함
珍しい(めずらしい) 드물다
巡る(めぐる) 돌다
*論法(ろんぽう) 논법
選択肢(せんたくし) 선택지
決める(きめる) 정하다
自身(じしん) 자신
責任(せきにん) 책임
全く(まったく) 완전히, 정말
*疑う(うたがう) 의심하다
純粋(じゅんすい) 순수
自発性(じはつせい) 자발성
存在(そんざい) 존재
共有(きょうゆう) 공유
*信仰(しんこう) 신앙
感じる(かんじる) 느끼다
先(さき) 앞
述べる(のべる) 말하다, 진술하다
通り(とおり)
創造(そうぞう) 창조
合理的(ごうりてき) 합리적
説明(せつめい) 설명
誰も(だれも) 아무도, 누구나
 
五 現代社会にはびこる意志への信仰
5 현대사회에 퍼져있는 의지에 대한 신앙
「意志教」の時代
「의지교」의 시대
意志の話をしましたので、最後に少し現代社会について考えておきたいと思います。
의지의 이야기를 했으므로, 마지막으로 조금 현대사회에 대해 생각해 두고 싶습니다.
というのも、現代ほど、「意志」「意志決定」「選択」といったものが盛んに言われる時代も珍しいと思われるからです。
그렇다고 하는 것도, 현대만큼, 「의지」 「의지 결정」 「선택」이라고 말했던 것이 활발하게 말해지는 시대도 드물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意志を巡る現代社会の論法というのは次のようなものです。
의지를 둘러싼 현대사회의 논법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これだけ選択肢があります。
이것만의 선택지가 있습니다.  
はい、これがあなたの選択ですね。
네, 이것이 당신의 선택입니다.  
ということはつまり、あなたが自分の意志で決められたのがこれです。
즉, 당신이 자신의 의지로 정해진 것이 이것입니다.  
ご自身の意志で選択されたことですから、その責任はあなたにあります。
자신의 의지로 선택되었기 때문에, 그 책임은 당신에게 있습니다.  
この論法が全く疑われないわけですから、純粋な自発性としての意志など存在しえないという、ちょっと考えれば分かることですら共有されません。
이 논법이 전혀 의심되지 않기 때문에, 순수한 자발성으로서의 의지 등 존재할 수 없다는, 조금 생각하면 아는 것조차 공유되지 않습니다.  
このように意志なるものを信じて疑わない現代社会を見ていると、何か私は信仰のようなものを感じます。
이렇게 의지하는 것을 믿고 의심하지 않는 현대 사회를 보면, 뭔가 나는 신앙과 같은 것을 느낍니다.  
意志というのは、先にも述べました通り、「無からの創造」です。
의지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무로부터의 창조」입니다.  
それは合理的に説明ができないものです。
그것은 합리적으로 설명 할 수없는 것입니다.  
その合理的には説明ができないものを誰もが信じて疑わない。
그 합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누구나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  
現代社会はある意味で、「意志教」のようなものを信仰してい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현대 사회는 어떤 의미에서, '의지교'와 같은 것을 믿는 것이 아닐까요?
 
 
 
 
 
 
 
 
 
 
 
 
 
댓글 4
  • 2022-07-23 21:25

    「はじめてのスピノザ - 自由へのエチカ」 p.123~p.129

    꼭지

     

     

    そうとう [相当]

    たましい [魂·霊]

    きがい [気概] 기개. (=気骨, はり)

    せんく [先駆] 선구

    かりに [仮に] 1. 만일;만약 2.임시로;잠정적으로

    さんせい [賛成]

    おどろく [驚く·愕く·駭く]

    そうぞう [創造]

    けんとう [検討] 검토

    しんこう [信仰]

    パウロ (포르투갈) Paulo

    かくてい [確定]

    かいじょ [解除]

    とりつか-れる [取りつかれる·取(り)憑かれる] 1.들리다;홀리다 2. 망상이나 고정 관념 따위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다

    なにもかも [何も彼も] 무엇이든, 일체, 모두. (=すべて)

    つつ 1. 그 동사가 가리키는 동작과 작용이 계속되고 있는 뜻을 나타냄 2.…하면서 3. …에도 불구하고;…면서도

    なや-む [悩む] 1. 괴로워하다 2.고민하다 3.고생하다;앓다

    いそんしょう[依存症]

    やくぶつ [薬物]

    びょうき [病気] 1.병 2. 앓음;질병 3.나쁜 버릇;악습

    よわ-い [弱い]

    せ-める [責める] 1.비난하다;나무라다 2.괴롭히다;고통을 주다 3.재촉하다;조르다

    おいつ-める [追いつめる·追(い)詰める] 막다른 곳[궁지]에 몰아넣다; 바싹 추궁[추적]하다.

    ひゃくがい [百害]

    いちり [一利]

    おさな-い [幼い] 1.어리다 2.미숙하다;유치하다

    かか-える [抱える] 1.안다 2.팔에 안다;부둥켜 들다 3.끼다

    かいふく [回復·恢復]

    きおく [記憶]

    ふとうこう [不登校] 주로 심리적인 저항감에서 학교에 가지 않는 일; 등교 거부.

    せんもんし [専門誌]

    せんびき [線引(き)] 1.선을 그음 2.확실히 구분함 3.도시 계획 등에서, 지도 위에 선을 긋고 지역을 정함

    いちげんてき [一元的]

    ほんにん [本人]

    めいかく [明確]

    かいけつさく [解決策]

    けんしょう [検証]

    かいじょ [解除]

    じしょう [次章]

     

     

     

     

    의지라는 개념은 보편적으로 존재해 온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것은 의지의 개념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압니다.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의지라는 개념은, 보편적으로 언제도 어디에도 존재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고대 그리스에는, 의지의 개념도, 의지에 상당하는 낱말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플라톤을 읽어도 의지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플라톤에는 유명한⌈영혼의 삼분⌋이라는 사고방식이 있는데, 그 세 가지라는 것은 지성·욕망·기개이며, 의지의 자리는 없습니다.

    아리스토 텔레스에게는 의지의 선구되는 개념이 있었다고 알려진 것도 있습니다만, 만일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지개념의 선구가 될 것 같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것과 같은 의지와는 다릅니다. 한나 아렌트는, 아리스토 텔레스에게 의지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저도 그녀에 찬성입니다.

    현대 사회는 의지개념을 절대 믿고 있어서, 의지개념이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놀라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애초에 먼저 상세히 검토한 것처럼, 의지의 개념은, 실제로는 존재할 수 없고,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로부터의 창조⌋이기 때문에, 그러한 모순된 개념이 예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차라리 당연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의지의 개념은 분명히 신앙의 가운데에서 발견되어 왔습니다. 그것을 만든 것은, 바울(?~60년경)이나 아우그스티누스(354~430)등의 크리스트교 철학이었다고 한나 아렌트는 말했습니다.

    의지의 개념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확정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현재와 같은 의지의 개념은 옛날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해제를 위해

    저는 이 의지라는 개념에 현대 사회가 홀려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든 의지에의해 설명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의지를 신앙하면서, 의지에 홀려, 의지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죠.

    알콜 의존증이나 약물 의존증은 병입니다. 따라서, 그런 의존증을 앓는 사람들을 ⌈의지가 약하다. 왜 스스로 끊을 수 없는가?⌋라고 비난해도, 그들을 몰아 넣는 뿐이고, 백해무익 합니다.

    많은 경우, 의존증을 앓는 사람들은, 어릴 때 학대를 받는 등, 마음의 고통을 안고 있는 것이 알려져 있습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회복해 온 아픈 기억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알콜이나 약물이 사용되고 마는 케이스인 것입니다. 그것은 ⌈의지의 힘⌋으로는 어떻게해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애초에 ⌈자신의 의지⌋로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최근, 등교거부 아이들의 전문지로부터 인터뷰를 받았습니다. 등교거부 아이들도 자주 ⌈의지가 약하니까 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말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등교거부 아이들도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이 자신의 의지⌋라고는 단언할 수 없는 셈입니다.

    가고싶지 않다고 하는 ⌈의지⌋가 있었는지, 어떻게 해도 ⌈가지 않을 상황⌋이었는지, 명확히 선을 그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행위가 의지에 의해 일원적으로 결정되고 있는 탓은 아닌 것이니까 당연하지요. 그리고 또, 의식은 결과만을 받아 취하는 것처럼 되어 있어서, 행위의 원인을 아는 것이 어려운 까닭이어서, 본인에게서 등교거부의 명확한 원인을 알지 못하는 것도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이것들의 문제에 관하여 무언가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애초에 하나하나의 케이스를 구체적으로 검증하지 않는 한 무엇도 말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스피노자의 『에티카』의 에소로지적인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다만, 현대사회에는, 의지가 거의 신앙처럼 강하게 믿어지고 있다는 것은 알아 두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신앙을 해제한다면, 우리들은 조금만큼 더 자유로와질 수 있지 않을까요? 이 메시지를 남기며, 다음장을 대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 2022-07-25 00:27

    의식의 존재는 부정할 수 없다

    의지가 일원적으로 행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때, 일본이라면 혼동하기 쉬운 두 개의 말을 정확히 구별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두 단어란, ‘의지’와 ‘의식’입니다. 영어로 Will과 Consciousness로 완전히 다른 단어여서 틀릴 것 같지 않지만, 일본어에서는 비슷해서 주의가 필요합니다.

    스피노자는 의지가 자유로운 원인이라는 것을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의지의 존재를 의식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습니다. 확실히 우리는 그러한 정신의 힘을 느낍니다.

    그러면 의식이란 무엇일까요. 스피노자는 이것을 ‘관념의 관념’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엉뚱해 보이는 표현이지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관념의 관념’이란, 정신 안에서 나타나는 관념에 관에 반성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배가 고플 때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보면, 정신에는 그것을 먹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겠지요. 이 욕망도 관념입니다. 이 단계에는 의식은 없습니다. 의식이 생기는 것은, “지금 내가 이 음식을 먹고싶다는 욕망을 품고 있다”는 관념이 생길 때입니다.

    관념에 관하여 관념이 만들어지는 것, 바꿔 말하면 어떤 생각에 관하여 생각이 만들어지는 것, 그것이 의식입니다. 의식이라는 것은 관념에 대한 메타 레벨이고, 관념에 대하여 파생적이고 이차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지로 느껴지는 관념이 정신 안에서 나타날 때에도, 그것에 관한 관념을 메타 레벨로부터 형성하는 것으로, 그 의지가 의식되는 것입니다.

    ‘의지의 자유’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에 저항을 느끼는 사람은, 그것이 의식도 부정하는 것으로 이어진다고 막연하게 생각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의지와 의식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의지가 자유로운 원인이라는 것의 부정은 의식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의식의 존재는 부정되지 않습니다. 의식이란 어떤 관념이 있으면, 그것에 반성을 더하는 것으로 생겨납니다.

    앞에서 행위는 이런저런 복수의 요인에 의해서 다원적으로 결정된다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의식도 그 요인의 하나이겠지요. 인간 정신의 특징 중 하나는 의식을 고도로 발달시키고 그것에 의해 자신의 행위를 반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식은 행위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의식은 무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식은 만능도 아닙니다. 의식은 신체의 복잡한 기구를 통제할 수 없고, 습관도 대부분의 경우 의식할 수 없습니다.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것의 어려움을 설명한 것이 프로이트이고 뇌 안의 운동 프로그램에 이르러서는 의식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의식은 행위에 있어서 무엇인가의 역할을 부과받고 있습니다. 스피노자는 의지가 자유로운 원인이라고 믿어버리는 것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의 의식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로봇은 아닙니다. 의식은 만능은 아니고 의지는 자발적이지 않은, 단지 그 뿐입니다.

     

    122-124쪽 뚜버기

     

    一元的(いちげんてき)

    混同(こんどう)

    きちんと 정확히

    とんち 기지(機智), 재치.

    言(い)い回(まわ)し 표현(하기), 말(주변).

    空腹(くうふく)

    美味(びみ)

    派生的(はせいてき)

    二次的(にじてき)

    覚(おぼ)える 느끼다, 기억하다, 배우다

    要因(よういん)

    多元的(たげんてき)

    発達(はったつ)

    万能(ばんのう)

    機構(きこう)

    統制(とうせい)

     

     

  • 2022-07-25 01:32

    (119~121)

    恐(おそ)らく 아마, 필시

    少(すく)なからず 적잖이, 매우, 꽤

    唯一(ゆいち) 유일

    操縦者(そうじゅうしゃ) 조종자

    抵抗(ていこう) 저항

    人体(じんたい) 인체

    骨(ほね) 뼈

    関節(かんせつ) 관절

    骨格筋(こっかくきん) 골격근

    連係(れんけい) 연계

    連携(れんけい) 제휴, 연대

    協応構造(きょうおうこうぞう) 협응구조

    戸惑う(とまどう) 당황하다, 허둥대다, 당혹스러워하다

    脳神経科学(のうしんけいかがく) 뇌신경과학

    精神分析学(せいしんぶんせきがく) 정신분석학

    創始者(そうししゃ) 창시자

    しぐさ 하는 짓, (배우의)연기, 몸짓

    やたら 함부로, 무턱대고, 마구

    靴音(くつおと) 구두 소리

     

     

    4 행위는 다원적으로 결정되어 있다

     

    의지는 행위를 일원적으로 결정하지 않는다

    ‘의지의 자유’나 ‘자유의지’를 부정하면 아마 적잖은 사람들이 “그럼 우리는 외부로부터 뭔가에 의해 조작되는 로봇 같은 존재인 걸까” 하고 생각할 겁니다.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이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조금만 행위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의지의 자유를 부정하면 인간이 로봇같이 생각되어버린다면 그건 인간의 행위를 단지 의지만이 결정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지야말로 인간 행위의 유일한 조종자이므로 그 종종자가 없어지면 인간에게는 조종자가 없어진다고 생각해버리는 겁니다.

    ‘의지의 자유’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에 대한 강한 저항의 근거는 여기에 있습니다. 의지가 일원적으로 행위를 결정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 저항은 강한 것이 되는 겁니다.

    행위는 실제로는 실로 많은 요인에 의해 규정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걷는 동작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이 동작은 인체 전체와 관계됩니다. 인체에는 200 이상의 뼈, 100 이상의 관절, 약 400의 골격근이 있고, 그것이 복잡한 연계플레이를 함으로써 비로소 걷는다고 하는 동작이 가능해지는데, 사람의 의식은 그와 같이 복잡한 인체의 기구를 모두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체의 각 부분은 의식으로부터의 지령을 기다리지 않고 각부에서 자동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아 복잡한 연대를 해내고 있습니다(이것을 신체 내의 ‘협응구조’라고 합니다).

    또 걸음걸이라고 해도 각양각색입니다. 보통은 아무도 그것을 의식하여 선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메이지 초기에 근대적인 군대가 만들어졌을 때, 그때까지 농민이었던 병사들은 서양식 행진을 잘 할 수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걸음걸이 따위 의식한 적도 없었겠지요. 그래서 새 걸음걸이에 당황했던 겁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배운 어떤 형식에 따라 걷고 있습니다. 그것은 의식해서 선택된 것이 아닙니다. 의식하지 않고 따르고 있는 습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행위를 강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현대의 뇌신경과학에서는 뇌내에서 행위를 하기 위한 운동프로그램이 만들어진 뒤에 그 행위를 하고자 하는 의지가 의식 속에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가 논한 무의식의 역할을 여기에 추가해도 좋겠지요. 프로이트는 우리의 일상의 사소한 몸짓이나 동작에도 무의식이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마구 큰 구두 소리를 내며 걷는 사람, 필요 이상으로 소리를 내며 컴퓨터의 키보드를 두드리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주위에 어필하고 있다, 즉,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어떤 불안을 안고 있는 건데, 본인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의식은 행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행위는 실로 많은 요인 아래 있습니다. 그것들이 협동한 결과로서 행위가 실현하는 겁니다. 즉, 행위는 다원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지, 의지가 일원적으로 결정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우리는 자신의 행위를 자신의 의지에 의해 일원적으로 결정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복이 되지만, 그것은 우리의 의식이 결과만을 받아들이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2022-07-25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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