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고전장문(弔古戰場文) 후기

누룽지
2022-06-02 08:19
180

조고전장문(弔古戰場文)은 중당(中唐)의 시인인 이화(李華)가 옛 전쟁들을 회고하며 쓴 조문(弔文)이다.

전쟁이 많았나보다. 글 속에서 불과 몇 줄 안 되는 문장만 봐도 주(周), 조(趙), 진(秦), 한(漢)이라는 네 나라의 전쟁이 들어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이 쉬운 건 아니었을텐데...

 

黯兮慘悴하여 風悲日曛하고 蓬斷草枯하여 凜若霜晨하니 鳥飛不下하고 獸挺亡群이라

(암담한 전경이 서글퍼 바람은 슬피 울부짖고 해는 어둑어둑 저물며 쑥대는 꺽여지고 풀은 말라서 으스스함이 서리가 내린 새벽과 같으니 새도 높이 날고 내려오지 않으며 짐승도 달아나 무리를 잃는다- 성백효 선생님 번역)

 

이화는 황하가 띠처럼 둘러 있고 여러 산들이 분분히 솟아있는 옛 전장터를 눈에 담으니 이렇게 쓸 수밖에 없었나보다.

안내한 亭長이 말하기를

 

此는 古戰場也라 嘗覆三軍하니 往往鬼哭하여 天陰則聞이니라

(여기는 옛날 싸움터인데 일찍이 삼군을 전멸시킨 곳입니다. 왕왕 귀신들이 흐느껴 울어 날씨가 흐리면 들립니다- 성백효 선생님 번역)

 

말 안해도 이화의 전장묘사에서 이미 알겠는데 정장의 얘기까지 보태지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내렸다.

전쟁의 명분이나 정치적인 역학관계 따윈 나 같은 소인이 헤아릴 리 없다.

다만 그저 비참하다라는 표현 하나로 그 많은 소인의 죽음이 뭉뚱그려질 수 없다는 것만 안다.

장군과 병사의 죽음이 정치적으로는 의미가 다를 수 있겠지만 그 어떤 생명의 죽음에 무게를 저울질 할 수 있겠는가. 죽음을 등에 지고 무기를 쥐고 나간 사람들의 마음속엔 어떤 생각이 들어 있었을까? 전장터 근처의 마을에 살던 청년은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이겨 남겨 놓고 온 가족을 지키려 했을 것이고 이 전장터가 어디인지 제대로 알 수도 없는 머나먼 곳에서 온 사람은 난 여기 왜 있는가 싶었을 것이다. 다들 살아 돌아가고 싶지만 그걸 가장 알 수 없는 곳에 서 있었을 것이다.

지구상의 생물 중에 자신의 종을 이렇게 무자비하게 살육하는 생물이 얼마나 있을까? 이런 살육의 명분을 다른 생물이 들었다면 무슨 말을 해줄까?

어렸을 적에 강원도에 산 적이 있는데 깊은 산골이라 심마니 할아버지들이 많이 계셨다. 아버지께서 자식들에게 산삼을 구해 먹이시려고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이른 새벽에 지내는 산신제에 심마니할아버지와 함께 하시곤 했다. 산신이 주셔야 얻는 것이지 그냥 구해지는 게 아니라고 심마니 할아버지는 늘 말씀하셨으니까.

인적이 끊긴 골짜기 골짜기를 다니시느라 몇 달이 되어야 산에서 내려 오실 때도 있었다. 그리고 산짐승 이야기며 나무, 하늘, 별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무당이야기가 하고 싶다.

사람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어느 골에서 굿을 하는 무당을 봤다 하셨다. 꿈에 가여운 영혼이 보여 위로해주러 왔단다. 6.25 전쟁이 끝나고 30년이 채 안된 때였으니 그럴만도 했겠다. 산나물 뜯으러 다니는 할머니들 말씀도 대관령 골짜기 물들이 아군 적군 가릴 것 없는 피로 물들어 온통 붉게 흘렀다니 얼마나 많은 생명이 이 골에서 스러져간 것일까?

꿈에 나타나서, 지나가다 눈에 띄어서...

많은 무당들이 옷을 갖춰입고 한상을 차려 원혼을 달래준단다. 할아버지 말씀에 어떤 무당은 굿을 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더란다. 하염없이.

그래서 나는 6.25 전쟁 동부전선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슬픔은 시간이 상당히 지났어도 어느 순간 내 의지와 상관없이 확 내게 다가올

때 더 가슴이 에인다. 예전에 ‘B29’ 라는 과자가 신상품으로 출시되어 TV 광고를 냈다.  난 이 과자를 절대 사 먹지 않아 그 맛을 모르거니와 이런 걸 아이들 과자 이름으로 만드는 사람들의 마음은 뭘지 알 수가 없었다.

6.25를 말할 때 낙동강 전투를 빼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1950년 8월 16일 왜관에 있었던 전투의 그 B-29를 과자 이름으로 하다니. 집결한 4만의 인민군을 B 29 폭격기 98대가 26분간 960톤의 폭탄을 퍼부어 인민군 3만이 죽고 계속 밀리던 우리나라는 북상할 수 있었던 결정적 전투이다. 전쟁에서는 너무 의미있는 전투였겠지만 왜관철교를 폭파했는데도 진격하기 위해 대규모 도하작전을 강행한 북한군이나 융단폭격으로 26분 만에 3만명을 폭사시킨 연합군이나 모두  내겐  너무 가슴이 에이는 통증을 주는 사람들이다. 그들로서는 작전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걸 알지만 한 명의 사람으로서 내겐 그게 뭔가 싶다.

내가 그런 과자를 입에 댈 리가 없지 않겠는가. 굳이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투하까지 갈 필요도 없이 너무 아프다.

 

屍塡巨港之岸하고 血滿長城之窟하여 無貴無賤히 同爲枯骨하니 可勝言哉아

(시신이 큰 항구의 강안을 메우고 피가 장성의 굴에 가득하여 귀한자와 천한자를 막론하고 똑같이 마른 해골이 되었다. 아! 참혹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 성백효 선생님 번역)

 

한동안 가슴이 너무 시릴 것 같다. 어쩜 알 수도 없는 누군가를 위해 명복을 빌지도 모르겠다.

댓글 2
  • 2022-06-03 11:15

    알지 못하는 이의 명복을 비는 누룽지샘의 마음이 전해지는 글입니다.

    어떤 명분으로도 전쟁은 합리화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이 글을 읽으며 저는 우크라이나가 계속 떠올랐습니다.ㅠ

     

  • 2022-06-03 17:33

    전쟁을 글로만 읽은 저 같은 사람은 상상하기도 힘든 참혹함입니다. ㅠㅠ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225
<전습록 > 안자의 마음공부 (2)
울타리 | 2024.03.23 | 조회 32
울타리 2024.03.23 32
224
<전습록> 100조목에서 107조목 후기: 존덕성과 예민함 (1)
콩땅 | 2024.03.20 | 조회 29
콩땅 2024.03.20 29
223
<전습록> 93~99조목 후기-얼마나 간단하고 쉬운가! 정말? (1)
인디언 | 2024.03.06 | 조회 44
인디언 2024.03.06 44
222
다시 <당시삼백수>로
토용 | 2024.03.03 | 조회 47
토용 2024.03.03 47
221
<전습록> 없는 '전습록' 후기^^
자작나무 | 2024.02.27 | 조회 46
자작나무 2024.02.27 46
220
<전습록> 62조목: 비추는 공부와 닦는 공부에 대하여 (1)
요요 | 2024.02.16 | 조회 88
요요 2024.02.16 88
219
전습록 24.2.7.후기
누룽지 | 2024.02.14 | 조회 72
누룽지 2024.02.14 72
218
한문강독세미나 시간 변경 및 『맹자』성독
관리자 | 2024.02.11 | 조회 98
관리자 2024.02.11 98
217
『사대부의 시대』 번개 세미나 합니다(3주)
관리자 | 2023.12.26 | 조회 601
관리자 2023.12.26 601
216
전습록 5회차: 주일천리 (1)
콩땅 | 2023.11.23 | 조회 119
콩땅 2023.11.23 119
215
<전습록> 3회차 후기 : 격물과 지지선 (1)
인디언 | 2023.11.07 | 조회 184
인디언 2023.11.07 184
214
<전습록> 2회차 후기 : 지행합일 (1)
토용 | 2023.10.31 | 조회 121
토용 2023.10.31 121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