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소동파의 적벽부

누룽지
2022-10-24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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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년 전에 태어난 한 여성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곤 했다.

빙허각 이씨라 불리는 이선정.

조선의 여성실학자로서의 삶은 어땠을까?

천재적인 詩才를 발휘했던 1563년에 태어난 허난설헌, 여성 성리학자로 1721년에 태어난 임윤지당보다 좀 더 나았을까? 빙허각 이씨는 1759년에 태어났으니까.

그녀를 실학자 서유구의 형수라고 하면 사람들이 감을 잡을까? 서유구가 어렸을 때 형수에게 글을 배웠다고 하면 비로소 그녀를 인정할까?

 

그녀의 집안은 대단했다. 친가는 조선 세종의 서자 영해군의 가문으로 대대로 명망 높은 소론 가문이었으며, 외가 역시 실학 및 고증학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집안으로 외숙모이자 《태교신기(胎敎新記)》를 지은 사주당 이씨(師朱堂李氏)와 그의 아들로 《언문지》의 저자인 류희 등이 유명하다. 듬뿍 예쁨을 받고 자란 막내 딸이지만 신문물이 보고 싶어 청나라로 가는 사신들을 따라 한 겨울에 압록강을 건넌 당차고 진취적인 여인이었다.

15살에 실학자인 행정 서유본(徐有本)과 결혼하였으며, 출가한 달성 서씨 가문 또한 소론의 실학 학풍을 따르는 학자 집안이었다. 시할아버지 서명응(徐命膺)은 《보만재총서 保晩齎叢書》를, 시아버지 서호수(徐浩修)는 《해동농서 海東農書》를, 시동생 서유구(徐有榘)는 《임원경제지 林園經濟志》를 저술하였다.

남편은 빙허각의 학문적 재능을 존중하였고, 평생 동안 학문적 동지 관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서유본은 43세라는 뒤늦은 나이에 벼슬에 오르나 1806년 숙부 서형수의 옥사로 벼슬에서 일찍 물러났다. 집안이 몰락하였고 거처가 동호 행정(서울 용산)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갑자기 곤궁해진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차밭을 직접 가꾸며 생활했으며, 자신의 생활지식과 실학서의 내용을 종합한 가정백과사전을 쓰기 시작한 것이 《규합총서》이다. 이 책의 제목은 남편인 서유본이 직접 붙인 것이다. 이러한 집안 살림 경영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1809년《규합총서 閨閤叢書》를 저술하였다. 그녀의 나이 51세에 쓴 이 저서는 20세기 초까지도 여성들에게 가장 널리 읽히고 인용되는 생활 경제 백과사전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대단한 분을 알지 못하고 산 세월이 40년이 넘을까?

학교 다닐 때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건 내가 공부를 게을리해서인가?

프랑스에 백과전서파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다. 18세기 무렵 계몽주의 시대 프랑스의 과학적 실증주의 사조 중 하나로 당대의 모든 지식을 망라하여 하나의 책이나 백과사전으로 만들자는 운동이었다고 한다. 가톨릭교회와 절대 왕정에 반대하는 개혁을 지향하였으며, 이성적ㆍ합리주의적 태도로써 근대적인 지식과 사고 방법을 전파하여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으며 디드로, 달랑베르, 볼테르, 케네, 마르몽텔 등이 대표적 인물이라 한다.

그런데 나는 비슷한 시기에 우리나라에 있었던 이익의 성호사설이나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를 연계지어 생각할 수 없었었다.

 

이제는 규합총서가 조금은 다르게 보인다.

그리고 빙허각 이씨에게 더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슬하에 4남 7녀를 두었으나 그 중에서 8명이 일찍 죽고 아들 하나와 딸 둘만이 살아남았으니 그 맘이 어땠을까? 그녀를 진심으로 위로하고 아픔을 공감해준 남편이 있어 깊은 시름에서 일어서곤 했다고 한다. 엄청난 장서를 갖고 있던 시댁에서 학자로서 삶의 동반자로서 남편과의 생활을 어땠을까? 갑자기 집안이 몰락하며 그녀가 감당했어야 할 것들에 얼마나 버거웠을까?

그래서 ‘빙허각’이라는 당호가 어떤 뜻인지 정말 궁금했었다.

허공에 기댄다는 것이 담고 있는 뜻이 예사롭지 않을 것 같았다.

소동파의 적벽부를 읽으며 ‘빙허’가 어떤 느낌인지 조금 알 것 같았다.

 

縱一葦之所如하여 凌萬頃之茫然하니 浩浩乎如憑虛御風而不知其所止하고 飄飄乎如遺世獨立하여

종일위지소여 능만경지망연 호호호여빙허어풍이불지기소지 표표호여유세독립

羽化而登仙이라

우화이등선

갈대로 만든 거룻배 하나의 가는 바를 따라 만경의 아득한 물결을 타고 가니 호호함이 마치 허공에 의지하고 바람을 타고 가는 듯 하여 그칠 바를 모르겠고 표표함이 세상을 버리고 홀로 서서 날개가 돋아 신선으로 오르는 듯하였다.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선 것 같긴 한데 그 마음을 그려낼 단어를 못 찾겠다.

그녀는 남편 서유본이 죽자 절명사(絶命詞)라는 글을 짓고 세상의 모든 일에서 단절하고 머리와 얼굴 씻는 것조차 멀리하며 연명하다가 19개월 후 1824년 3월 66세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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