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철학학교 ] 5주차 <차이와반복> 후기

가마솥
2022-04-11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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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철학학교 5주차 <차이와반복> 후기 _ 가마솥

 

< 차이 그 자체 >

 

   개인적으로 하이데거 이후에 두 번째로 서양철학자를 공부한다. 하이데거를 읽으면서 세 번이나 책을 집어 던지면서도 끝까지 따라 간 결과는, 기억나는 것도 있지만 내가 읽었나? 하는 대목도 있다. 잃은 것도 있지만 얻은 것도 있다. 이 들의 서양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 ‘머리를 쥐어뜯지 않을 방법’을 알게 된 것이 무엇보다 큰 수확이다. 그 중에 하나, 일단 서문은 논문의 마지막에 쓴 것이니 그냥 ‘그런가 보다’하고 읽는다. 이 것에 심각하게 시비를 걸면 책을 던지는 데에서 끝나지 않고 아예 덮고 강의실을 나갈 수 있다. 그러면 다시 그 사람을 보기는 이 生에서는 틀렸다. 아쉽지 않겠는가.

본문의 첫 장은 일단 쉬어 보여서 그런대로 읽힌다. 누가 논문의 첫 장부터 어렵게 출발하겠는가? 하지만 도입부가 찐해야 그 긴 논문을 읽을 것이 아닌가. 해서, 독자는 깨질 각오를 해야 한다. 내가 가진 선입견 혹은 그 동안의 사유방식 말이다. 문제는 철학자들이  비겁하게도 종종 자신의 의견을 최대한 불친절하게 말하며 독자들을 어둠 속에 집어 넣어 혼돈 속에 밀어 넣는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대적할 만한 나의 사유 능력의 부족이 아닌, 성질나게도 나의 독해 능력부터 철저하게 농락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깨짐’의 즐거움을 느낄려고 철학책을 든게 아닌가? 농담을 조금 섞으면, 포기하지 않고 읽을수록 그와 나와의 ‘차이’가 조금씩 가까워 지고 있다는 증거이지 않을까? 문제는 다 읽었는데, ‘내가 뭘 읽었지?’ 하거나 ‘겨우 이거 얘기 할려고 그런거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반복’해야지 별수 있나. (‘차이와 반복’을 다 읽은 기분.....흐흐흐) 하여, 다시 그의 책을 꺼내 읽으려면 이번 세미나에서 모두 이해할려는 욕망을 내려 놓고, 끝까지 가보는 것이다. 함께 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 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가는 데에도 못 가면, 그 또한 다시 이 철학자를 만나기 힘들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각설하고, 들뢰즈한테 가보자.

 

  서문에서 그렇게 어렵게 썼지만, ‘차이’? 그게 뭐 별것 있겠어? 일단 ‘무언가 다른 것’과 구별(차별)할 수 있는 것쯤 생각하면 되지 않겠어? 들뢰즈는 이 것부터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1장 1절 첫 문장부터 대뜸 (그렇다면,) ‘차별-없음(무차별성)’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부터 훅 던진다.(뜨끔! 난 질문하는 선생이 제일 싫은데......) 그는 무차별성은 아직 뭐라고 규정되지 않았거나 분화되지 않은 검은 무(無), 혹은 규정되어 있으나 아직 연결되지 않은 흰 무(無)라고 나름 멋지게 표현하면서 이런 상태를 차이가 없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독자를 살짝 멍하게 만든 다음에, 그렇다면 차이란 무엇일까? 하고 제대로 질문을 던진다. 차이는 ‘무차별성’의 이 둘 사이, 심연(검은 무, 미규정)과 표면(흰 무, 떠다니는 규정) 사이에 있는 걸까? (아니다.) 혹은 차이는 이 둘을 떠난 극단, 현전(現前)과 정확성의 유일한 계기가 아닐까? (그럴려면,) 차이는 보통의 규정들과 같은 외생적 규정들로 정의된 경험적 차이(두 사물 ‘사이’의 차이)가 아닌 본래적 규정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그런 상태이라고 운을 뗀다. 들뢰즈는 번개와 하늘의 관계를 예로 든다. 번개는 하늘로부터 구별되려 한다. 그러나 그 구별에는 바탕이 끌려 들어올 수밖에 없다. 번개에게 하늘은 바탕이기에 분리 불가능하다 그러나 번개는 하늘과 구별된다. 꼭 그렇게만 보이는가? 뭐, 초반이니까 그런가 보다 하자. 하지만 그것은 자신과 이혼하는 자와 자꾸만 결혼하는 것이다는 표현은 좀 거시기 하다.(나는 절대 안그렇다!)

 

   본래적 규정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상태로서의 차이란, 일방향적인 구별에 해당하는 이런 규정의 상태이므로 차이는 만드는 어떤 것, 만들어지고 있는 어떤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런 차이 혹은 본래적 규정이란 여전히 또한 잔혹성(!)이다라고 말한다. 엥? 머리 속이 안개가 스멀스멀 올라오며 나의 독해능력이 의심되기 시작한다. 즉, 본래적 규정으로 차이를 말해야 한다고 간신히 이해하고 있는데, 여기서 ‘잔혹성’을 왜 끌어 들인담? 본래적이라는 단어에 대한 나의 긍정적 선입견 때문에 또 내가 걸려 든거여? 무수한 현대 철학자들에게 욕먹는 언제나 불쌍한 플라톤이 나온다. '플라톤주의자들에 따르면 일자(一者)가 아닌 것은 일자와 자신을 구별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형상은 질료와 자신을 구별하려 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별자체가 하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사실 형상들은 재상승하는 바탕 안에 반영될 때 흩어지고 만다. 그때 바탕은 미규정자이기를 그친다. 형상들 역시 상호공존적이거나 상보적 규정으로 남아있기를 그친다. 바탕은 자율적 실존을 얻고 형상도 더 이상 형상이 아니다'(p.84-85)라며 플라톤을 슬쩍 혼낸다. 그 뒤로 처음 듣는 미술가들을, 그것도 내가 제일 싫어하는 추상화를 가지고 ‘추상적인 선은 자신과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바탕에 대해 구별짓기를 행할수록 그 만큼 더 폭력적으로 바탕에 참여한다’(p.85)며 바탕과 형상에 대한 차이나는 사유를 ‘오로지 이성의 잠만이 괴물을 낳는다는 것은 확실치 않다’(p.86)고 고야의 작품제목을 희화화(戲畫化)하면서 말한다(프랑스에서는 일찍부터 논문에 아제개그를 허용했는가 보다). 사유는 ‘차이’를 만든다. 하지만 (플라톤적 사고방식으로는) 이 ‘차이’는 파괴적이며 괴물로 취급된다고 비판한다.

 

‘사유는 차이를 “만든다. 하지만 차이는 괴물이다. 차이가 저주받은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 그것이 오류나 죄이며 속죄가 필요한 악의 모습을 띠고 있다는 사실에 놀랄 필요는 없다. 차이에 죄가 있다면, 그 것은 바탕을 올라오도록 만들고 형상을 와해시킨다는 죄밖에 없다. 잔혹성, 그것은 본래적 규정일 뿐이다.’(p.86) 어라? 본래적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사용한 느낌이 드네? 또 깨지나......

 

어쨌거나 도대체 플라톤이 뭐라 했는데 혼나는지, 인터넷을 뒤지고 문탁 철학학교에서(홍보 절대 아님!) 정군 튜터님과 함께 읽은(홍보임!) 서양철학사를 뒤져서 이해해 본다. 서양철학사에서 플라톤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 ‘동일성’의 전통이 있었다. 초월세계(이데아)를 상정하고 이를 통해 현실세계를 설명하는 방식인데, 여기에서 초월세계와 현실세계와의 많은 차이점, 다양성 등이 필연적으로 생성되는데, 이를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원래 이데아의 동일성으로 회복(환원)시키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그게 그렇게 나쁜 것인가? 정말 폭력적인가?  
그럼, 이렇게 생각해보자. 학교에 많은 학생들이 있다. 어떤 초월적 동일성(이데아)이 있어서 그것으로 학생들을 ‘규정’한다면, 학생들의 본질은 잘 배우는 것(공부 잘하는 것)으로 규정 될 것이고 공부를 잘 하는 학생만이 진정한 학생이 될 것이다(전교 일등의 출처!). 그렇게 되면 전교 일등이 되지 못한 다른 ‘차이’를 가진 학생들은 부정되고 극복할 대상이 되어 동일성에 포섭되기 위해 운동을 통해 ‘생성’ 시켜야 한다. 들뢰즈는 이러한 규정된 것에서 나온 차이에 대하여 동일성을 강요하는 사유는 폭력이다 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도 규정 속의 폭력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서태지의 ‘교실 이데아’를 들어 보시면 이해될 듯.

 

이제 그 동안 ‘차이’가 어떻게 왜곡되어 철학적 대우를 받았는 지 이야기를 좀더 체계적으로(논문 인정을 받아야 하니까)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재현의 네 측면이라는 소제목으로 말이다.  
'차이'는 하나의 바탕, '미규정적'인 바탕이다. 반대로 일자(一者)는 그러한 '미규정적인 것'에 '규정'을 부여한다. 얼굴, 이성, 형상 같은 말들은 '규정'의 다른 이름들이다. 문제는 여기에 미규정자를 향한 규정자의 규정운동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형상'이 바탕에 관계할 때 '형상'도 무언가를 잃어간다. 그런 이유로 '차이'는 저주의 대상이 된다. '차이의 철학'이 '차이'에 걸린 저주를 풀려는 기획처럼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어떤 '차이의 철학'적 시도들이 있었을까?

1) 차이를 '동일성' 안에 넣으려는 시도
2) 차이를 궁극적 개념들 간의 '유비적 질서' 안에서 다루려는 시도
3) 차이를 개념적 항들 사이의 '대립'으로 파악하려는 시도
4) 차이를 개념 규정된 대상 안의 유사성으로 파악하려는 시도

각각의 시도들을 지탱하는 것은 결국 '재현'이다. 이와 같은 시도들 속에서 '차이'는 직접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네 개의 항 중 하나의 항으로 '매개'된 채 나타난다. 서론에서 스치듯 지나간 '법칙은 주체들로 하여금 법칙 자신을 예시하도록 내몰지만, 이때 그 주체들은 자신의 고유한 변화들을 대가로 지불해야만 한다'와 같은 말을 이런 관점에서 다시 읽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구도 아래에서 '차이'는 도덕적 '악'이 되고, 법적으로는 '불법'이 된다. 들뢰즈는 이와 같은 것이 진정 '차이의 철학'인 것인지, '차이'를 이런 식으로 다루는 것이 과연 제대로 하는 것인지 묻는다. 명백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 '차이'를 '차이'로서 사고하는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정군).

 

그런데, 여기에서 왜 ‘매개’에 따옴표를 한 것이지? 철학적 용어인가? 찾아 본다. 지금 ‘재현’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니까, 플라톤 아니면 헤겔일 것이므로 헤겔이 말한 것으로 보자. ‘매개(媒介)란 자기 동일성 그 자체로 운동하는 것이고, 자기와 대립하여 있는 자아가 이를 자각하는 과정에서 다시 자기에게로 복귀하는 순수한 부정성인데, 이 운동을 순수하게 추상해보면 이것은 결국 생성의 운동이다.’ 이것은 뭔솔? 괜히 찾아 봤다. 혹만 붙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매개’라는 말이 따옴표로 묶여서 자주 나오니 뭐가 되었든 읽기 편하게 이해해야 한다(아렘님의 전략적 독법). 흠.......그러니까, 내가 어제 저녁에 잠들기 전에 후기 쓸 것을 걱정하면서 ‘나는 왜 들뢰즈를 이해하지 못할까?’하고 생각하는 장면에서 보면, 침대에 누워 있는 원본인 내가 ‘들뢰즈를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대상화하였는데, 이를 매개하여 주는 것은 ‘자기 부정’이고 이 순수 부정을 통해서 자기의 능력을 신장시킨 ‘생성의 운동’이라는 것이다. 흠...... 괜찮은데? 나도 가끔 이럴 때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거나 들뢰즈는 헤겔의 생성의 ‘매개’로 ‘자기 부정’이 운동하는 것처럼 ‘동일성, 유비적 질서, 대립, 유사성의 네가지 재현의 뿌리’으로써 차이를 ‘매개’하는 사유는 잘못이라는 것(부족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동일성,대립,유비,유사성이라는 사중의 뿌리에 종속되는 한에서 차이는 “매개”된다.’(p.87)

 

들뢰즈는 이 네가지 재현으로써 플라톤 다음으로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까지 혼낸다. 한마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의 논리학은 차이의 개념과 개념적 차이의 혼동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재의 본질적 속성들로 류(類), 종(種)의 개념을 이끌어냈다. 이렇게 속성으로 분류(分類)된 집합내에서 종간(種間)의 차이등을 훌륭하게 찾아 내었지만 이는 결국 동질성의 일반성에 기인한 개념일 뿐 진정한 ‘차이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차이의 고유한 개념을 설정한다는 것이 차이를 개념 일반 안에 기입하는 것으로 뒤바뀐다.’(p.92)

 

들뢰즈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크고 완전한 차이’라 여겼던 ‘종적 차이’가 “단지 상대적으로만 큰 차이”, “전적으로 상대적인 의미의 최대치”일 뿐임을 분명히 한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의 종차는 동일성에 의존하고, 그렇게 해야만 “차이는 대립에까지 이르고 상반성으로까지 끌려갈 수 있다.” ―사람과 동물이라는 종차에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의 차이가 동일성으로, 동물과 식물이라는 유적 차이에서는 다시 사람과 동물이라는 종차가 동일성으로…. 그리고 이렇게 동일성으로 묶은 뒤에야 차이는 대립, 유비, 유사성 등 매개의 측면들에 종속이 가능하다.―그리고 그것이 차이에 대한 선입견(저주받은 차이), 차이를 개념 일반에 기입하기 위한 그리스식의 ‘요술’이다. 이것이 “차이의 철학을 파멸로 몰고 간 혼동의 원리”이고, 차이라는 개념이 착오와 모순에 빠져 있는 이유이다.(지원)

 

중학교 때(?) 배웠던 린네의 생물 분류법, 계문강목과속종의 분류법을 생각하면서 내용을 읽으면 된다. 류(類)는 Class로 ‘강(綱, Class)’에 속한다. 포유류 라고 말할 때 그 류(類)이다. 그런데 최근에 ‘계(界, Kingdom)’ 위에 ‘역(域, Domain)’을 넣어야 한다는 주장(칼 워즈, 1990)이 제기되어 추가 되었다. 세균역, 고균역, 진핵생물역이 있으며 바이러스는 이에 포함되지 않는다. 인간의 경우, 진핵생물역(Eukaryota)이다. 이처럼 상위의 류(類)도 하위의 종차(種差)에 의해서 생성되기도 한다. 이 뒤 종적차이와 유적차이를 논하면서 ‘무엇보다 바로 여기에 이미 차이의 철학을 위한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 것이 아닐까?’(p.94)라고 방향을 제시하는데 종적,유적 차이의 내용이 아리송하다. 다음 시간에 더 논의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유적차이들이 어떤 다른 본성을 지닌다고 판단할 수 있다면, 이는 종차의 본성에 빚지는 추론이다. 마치 본성상 다르지만 서로 엉켜 있는 두 개의 로고스(logos)가 있다는 전제 아래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먼저 종들의 로고스, 아무개가 사유하고 말하는 사태의 로고스가 있다. 이것은 유로 간주되는 개념 일반의 동일성이나 일의성(一義性)을 조건으로 한다. 다른 한편 유들의 로고스, 우리들을 통해 사유되고 말해지는 로고스가 있다. 전자의 조건에서 벋어나 있는 이 로고스는 존재의 다의성(多義性) 안에서, 가장 일반적인 개념의 상이성 안에서 움직인다’(p.94)

나는 계문강목과속종 으로 외우고 있는데, 아렘은 종속과목강문계로 외우고 있는 차이를 말하는 것은 아닐테고...... 뭐지? 걍, 우선 그 동안 ‘차이’를 동질성 안에서 위에서부터 아래로,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일의적에서 분화되는 어떤 것으로 사유하였다면, ‘차이’ 안에서 동질성으로 묶어 내는(?) 아래에서부터 위로, 작은 것에서(개체?) 큰 것으로, 다의적인 것에서 묶어 가는 사유를 해보는 새로운 철학의 기회를 가져보자는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 간다. 또 이야기 하겠지......이제 첫 장인데.

 

추신 : 내가 문탁에 글을 쓸 때, 항상 인디언님을 언명하고 있다는 민원성 신문고가 있다고 인디언님에게 혼났다. 해서, 이번엔 인디언님을 얘기하지 않고 글을 쓰느라 혼났다. 엥? 뭐야? 또 인디언님을 말해 버렸네?......흐흐흐. 이런 들뢰즈 같으니라고 !!!

댓글 6
  • 2022-04-11 23:17

    성적으로 동일화하는 교실의 전략에 맞서, 차이를 생성하는 운동을 해본 자로서, 중간에 들어주신 예가 아주 확 와 닿습니다. ㅋㅋㅋ 그 와중에도 아예 수업을 빼먹은 적은 없으니 이것이 바로 '앉아서 유목하기'(?!) 읽는 동안에는 계속 헤매기만 한 것 같은데, 세미나가 끝난 다음에 그날 나간 분량을 다시 읽어보면 놀랍게도 좌라락 맞춰지곤 합니다. 거기에 가마솥샘의 후기까지 읽으니 잘 가고 있다는 확신이 생깁니다요 ㅎㅎㅎ. 

    마지막에 저희가 '다음 시간'으로 미루었던 부분을 잠깐 이야기하면, 

    '유와 종차' 전체는 '유'라는 동일성 안으로 포섭되는 '종차'의 구도인데, '종차'를 잘 살펴보면 거기에는 '동일화'에서 빠져나가는 것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걸 이제 '종차의 본성'(93쪽 하단, 92쪽 하단 '종차의 이상한 능력')이라고 부르는 것이고요. 이렇게 보면 '엉켜 있는 두 개의 '로고스'란, 1) 종차의 로고스로 '유'의 동일성을 조건짓는 '차이'이고, 2) 유들의 로고스는 '차이'를 '동일성'으로 통합하는 '사유'이겠죠. 그래서 '균열'은 '일의적인 것-최고의 동일자'과 '다의적인 것-온갖 차이(종차)들' 사이의 균열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걸 '유-종차'의 관계 안에서 봉합해두려고 했지만, '종차의 이상한 힘' 때문에 결코 봉합된 채로 머무르지 않는 '차이'들이 빠져나온다고 들뢰즈는 말하는 듯 합니다. 그러니까 '이걸 포착한 나님(들뢰즈) 대단하지 않나요?' 이 말인 것이죠. ㅎㅎㅎ 이게  '차이의 철학'을 일신하는 기회이고, 이 빠져나오는 차이들이야 말로 저 '동일성 철학'이 주장하는 '동일성'마저도 근거짓는 '절대적 개념'이 아니냐고 묻는 나(들뢰즈) 진짜 짱짱맨임이라는 것이고요.  

    녜.... 그래도 어쨌거나, 이번주 세미나에서는 '종적 차이와 유적 차이'부터 다시 읽겠습니다. ㅎㅎㅎ 

  • 2022-04-12 11:35

    '규정되지 않은'/'규정된', '종적 차이'/유적 차이', '술어', 존재(='있음' & '임'), '있음'&'임'의 다의성과 일의성.

     

    틈틈히 책을 펴며 붙들고 있었던 것들인데, 마지막 것이 제게는 조금의 전환점이 되어주었습니다. 종의 로고스에서는 존재의 일의성(모든 것이 같은 방식으로 '있다'&'이다')이 조건으로 깔립니다. 그런데 모든 차이를 종의 로고스로 설명할 수 없다는 데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한계점이 드러난다, 즉 이런 식으로 가면 두 개의 로고스가 존재하게 된다, 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비판이 아닐까, 라고 놓아봤어요. 종의 로고스로 설명하지 못한 것은 유의 로고스로 설명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존재의 다의성을 조건으로 할 수밖에 없다. (즉 다른 방식의 존재함(있음, 임)이 공존한다. 윌리엄 제임스 '바위는 동물과 다른데, 이는 투견이 장난감 푸들과 다른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143') 이걸 잡고 그 다음을 계속 읽어보고 있습니다.

     

    들뢰즈는 항상 '균열' 의 지점을 포착해요. 한편으로는 어느 방식이든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도구에는 언제나 어떤 한계점, 균열의 지점이 있어요. 내가 어떤 도구를 선택한 순간 나는 다른 것들을 대가로 치릅니다. 그 대가는 그 한계점, 균열에서 나오겠지요. 아리스토텔레스의 방식을 따르면 존재의 다의성이 불려나올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 같아요.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계속 그렇게 하면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를 서사로 풀어내는 것이 들뢰즈의 쓰기 방식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 이 심판대에 불려올 사람들이 (가마솥샘 표현을 빌리면 '혼날 사람들'은) 줄 서 있네요. 

  • 2022-04-12 14:38

    우리가 읽은 부분에서 들뢰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종차와 관련하여 '차이'에 대해 풀어나갑니다. 이런 방식, 어디선가 봤는데.. 바로 플라톤주의의 이데아로부터 '환영(시뮬라크르)'를 구제해내던 그 방식이 떠올랐습니다. 이데아/현상(환영)의 도식으로 세상을 볼 경우, 이데아로부터 환영이 생겨날 수 없다는 것이 논증되면 이 세계는 속절없이 환영들의 세계가 되어 버립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종적 차이를 통해 '차이'를 바라봅니다. 이 경우 유는 규정되지 않은 개념이 되고, 동일성이 되지요. 그래서 종적차이가 가장 크고 가장 완전한 차이 개념이 되는데.. 종적 차이가 그저  상대적인 차이에 불과하다는 걸 논증해버리면, 그 다음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개념은 유라는 동일성 안에서의 개념적 차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어 버리는군요.  그렇지만, 그의 종적차이는 그가 미처 알지 못했던 어떤 것, 자신의 차이에 대한 존재론을 무너뜨리는 강한 폭발력을 내장하고 있다는 이야기^^ 마치 플라톤주의가 전도된 환영주의(ㅎㅎ 이런 말이 성립될 수 있다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론도 종적 차이의 완전성을 무너뜨리는 전도된 차이론이 되고 마는군요.^^

     

    저는 <차이와 반복> 본문을 읽기 시작하면서 다시금 온갖 철학용어들 때문에 길을 잃는 것 같았습니다. 규정은 뭐고 미규정은 뭐람. 게다가 유가 규정되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가, 다시 궁극적인 규정이라고 했다가.. 규정되지 않은 개념인 유는 동일성과 엮이고, 규정가능한 궁극적 개념들인 유들(범주)은 유비로 엮이니 왜 그런 거야? 글고 대립은 뭐고 모순은 뭐고 상반성은 무엇인가.. 아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도 주문해야 하고, 이젠 나아가서 둔스 스코투스도 주문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다가.. 퍼뜩 떠오른 생각. 내가 잊고 있었구나! 들뢰즈가 서론에서 철학을 추리소설이자 SF라고 말했다는 것을! 하하하 그렇게 생각하니 급 마음이 놓입니다. 들뢰즈는 마치 우리가 이런 개념들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글을 쓰고 있지만, 그리고 그것들을 철학사적으로 아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의 탐구방식,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지점을 파헤치면서 사건을 다른 눈으로 새롭게 재구성해가는 탐정으로서의 들뢰즈! 그러고 나서 다시 1절부터 읽기 시작하니.. 음..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리는 것 같은.. 이것은 환시인가, 환청인가, 착란인가?ㅎ 가마솥님의 후기를 읽으면서 역시! 전교1등은 서론의 주요 포인트를 잊지 않고 있었구나, 뒤늦게 깨닫습니다.ㅋ 

    • 2022-04-12 14:50

      아리스토, 둔스 스코투스, 스피노자, 니체, 헤겔, 라이프니츠까지 나오니 뒀다가 다음주에 한꺼번에 주문하시길 추천드립니다. 뭐 사셨는지 알려주시면 따라서 사 보겠습니다. 저는 이해는 둘째치고 뭘 사야할지에서 이미 길을 잃었습니다. 

  • 2022-04-14 16:43

    저는 몇번을 다시 읽어도 아리송할뿐인데, 공부잘하는 요요님이 새삼 부럽습니다 ㅋㅋㅋ

    추리소설 매우 싫어하는 제가 끝까지 잘난체하는 들뢰즈를 놓지 않고 읽을 수 있기만을 바래봅니다...

  • 2022-05-09 14:39

    방학을 맞이하여 후기를 정독 중입니다....(아리스토텔레스에 발목 잡힌 거 같습니다만...) 

     

    알듯하다가 다시 모르겠고 모르겠지만 알 것도 같은 것의 반복입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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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철학학교 1] 3주차 후기: 지성! (17)
덕영 | 2024.03.01 | 조회 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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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철학학교 1] 순수이성비판 3주차 질문들 (9)
정군 | 2024.02.28 | 조회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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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철학학교 1] 2주차 후기: 칸트가 말합니다, 선험적 종합 명제는 이렇게 가능하지 (10)
호수 | 2024.02.25 | 조회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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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철학학교 1] 순수이성비판 2주차 질문들 (17)
아렘 | 2024.02.19 | 조회 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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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철학에서 '트란스첸덴탈'의 번역에 대해-2 (2)
세븐 | 2024.02.19 | 조회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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