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스피노자 읽기 1주차 질문들

정군
2023-05-10 00:03
560

여기에 댓글 본문으로 올려주셔요!

댓글 14
  • 2023-05-10 20:19

    105쪽 우리는 무에서 출발하지는 않는다. "지성은 그 본유적 힘으로 지적 도구들을 만들고, 이 도구들의 도움으로 다른 지적 산물을 위한 또 다른 힘을 획득하고, 이 지적 산물에 힘입어 다른 도구들, 즉 탐구를 더 멀리 밀고 갈 능력을 획득한다."
    스피노자의 '방법'과 데카르트의 '방법'이 어떻게 다른 걸까요? 여기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첫번째 가정 '우리가 처음에는 참된 관념을 아예 가지고 있지 않다(같은쪽)'는 것을 문제 삼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데카르트 그는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면서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발판을 도출해냅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신으로, 신을 경유하여 물질세계로 나가고요. 이 과정을 '본유적 힘으로 지적 도구들을 만'드는 과정으로 볼 수는 없을까요? 그렇게 보면, 이러한 스피노자의 '방법'에 대한 관점이 언뜻 데카르트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듯 보이기도 합니다.

    191쪽 "인간 본성은 동일하다" 인간은 자연의 한 부분이며, 그뿐만 아니라 인간 본성 자체가 항상적인 법칙들을 가지고 있다. 이 항상성은 환경, 시대, 계급의 다양성에 가려져 있을 수 있지만, 인간 행위에 대한 분석이 결국 발견해내는 것은 항상 그것이다."
    이 점이 스피노자의 핵심적 정식 중 하나라고 합니다. 충분히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타 다른 근대철학자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요컨대 애초에 가지고 있는 '본성'에 있어서는 모두 '동일'하다고 보는 것이 이른바 '근대적 주체'에 관한 일반적 평가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데카르트에게도 '생각하는 나'의 보편성이 핵심이고, 칸트에게도 주체의 '보편적 주관성'이 핵심 아니었나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피노자의 이와 같은 정식이 스피노자의 특이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 그런 것일까요?

  • 2023-05-10 20:54

    질문) 스피노자는 무신론자였는가?(P194)
    - "창조주이자 섭리의 주재자를 믿지 않는 데 있다면, 의심의 여지가 없다"(195p)
    - "끊임없이 저를 무신론으로 비난하는 대중이 저에 대해 갖는 견해: 이는 격퇴해야 할 불행한 일"(스피노자 서간집)
    * 초월적 신(神)을 정면으로 부인하면서도 신을 너무 사랑한 '신에 취한 철학자'.
    그런 의미에서 '스피노자는 무신론자였는가?'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질문해야 하는 걸까요?

  • 2023-05-10 22:16

    P139. (에티카) 1부에서 말해지는 것은 증명되지만, 무로서부터는 아니다. 스피노자 추론의 급진성이 전제 없이 시작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공리와 정의를 눈여겨보면, 이것들이 “철학자 독자”와 편견에 빠져 있는 독자 사이의 차이를 기정 사실로 상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연이 법칙들에 지배된다는 것, 사물에 원인이 있다는 것, 세계 안에서 관찰된 현상들은 이와 같은 법칙들과 원인에서 통일된다는 것 – 이를 깨달은 자에게만 1부 초반의 진술들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에티카를 읽을 예정이니 다른 데는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습니다만 얇은 책이 참 거대합니다. 저는 위 문장에서 시즌 1에서 읽은 데카르트의 깊은 자취 그러니까 시대적인 자취를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정의와 공리에는 시비걸지 말고 그냥 받아들여라. 싫으면 책을 덮어라. 시비를 걸거면 정리나 증명에서 찾을 일이다. 제게는 아주 고마운 충고입니다. 짧은 시간 거대한 책을 읽은 제 질문은 조금은 도발적입니다. 에티카를 읽기 위한 출발선상에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스피노자는 어디쯤 있습니까? 객관식입니다. 1번은 데카르트의 아류다. 2번 시대를 앞서간 독창적인 철학자다. 꼭 답을 해야 한다면 제게는 둘 사이 어디쯤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일단 1번에서 시작합니다.

  • 2023-05-11 08:54

    P. 186, 4
    " 그러나 어쨌든 신앙과 철학을 뒤썩는 중대하고도 필수적인 오류를 범한 것은 바울이다. "
    신앙에는 드러나거나 감추어져 있던 간에 철학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예수의 정신이 종교화하는데는 바울의 철학과 관리가 일등공신이라고 말해지기도 합니다. 신앙과 철학의 일반적인 관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요 ?

  • 2023-05-11 10:13

    140쪽. "하지만 스피노자는 속성들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할 뿐, 실체의 강등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런데 만일 두 용어가 같은 것을 말한다면,굳이 두 용어를 써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데카르트 철학에서처럼 실체가 속성을 통해 인식되기 때문이다. '나는 속성을, 어떤 실체에 대해 그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으로 이해한다.'『윤리학』1부 정의4"
    실체는 사유실체, 연장실체 따위가 있습니다. 실체가 속성을 통해서 인식된다면, 실체는 속성에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닐지 궁금합니다. 게다가 스피노자는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담고 있다고 하니까요. 만약 하얀 까마귀처럼, 속성과 본질이 일치하지 않는 애매한 경우는 어떻게 할까요?

    154쪽 "욕망, 이것은 자기 존재 안에 머무르고자 하는 경향이다. 기쁨, 이것은 우리 활동 역량의 증가이다. 슬픔, 이것은 우리 활동 역량의 감소이다."
    외국어 학습이라던가, 헬스장에서 분할 운동을 실시하는 것처럼 활동 역량이 증가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훈련이란 활동역량을 제한하고 일시적으로 감소시키는 데서 오지 않을까요? 외국어를 학습하려면 모국어를 잠시 중단해야 하고, 헬스를 하려면 일정한 부위을 제한하고 집중해야 합니다. 또,
    활동역량이 증가하고 있는 상태가 기쁨인지, 활동역량이 강화된 상태에서 불현듯 느끼는 충만한 순간이 기쁨인지 따져보면 애매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사실을 제대로 이해할 때 일반적으로 말하는 슬픔을 느끼는 데, 이는 단순한 기쁨보다는 더 만족스러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제주를 관광차원에서 소비하는 기쁨보다 4.3의 슬픔을 이해하는 것이 제주에 대한 이해도가 커지는 게 아닐까요?

  • 2023-05-11 11:09

    (191~193p) 스피노자의 원리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인간 본성은 동일하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 달라보여도 본성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이 본성을 토대로, "인간은 알면서도 자신이 아는 것을 실행하지 못할 수 있다"고 합니다. 실행하기 위해서는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힘"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는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첫 문장과 대조적입니다. "양식은 세상에서 가장 잘 분배되어 있다" "이성은, 모든 인간에게 자연적으로 동등하다"
    인간에게는 본성이 동일하다는 것과 이성이 동등하다는 것, 이 둘의 주장은 서로 다른 시각의 인간론의 토대가 아닐까 싶기도 한데요.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와 달리 인간의 본성을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스피노자에게는 성악설이나 성선설 같은 본성론은 없는 것 같은데, "세련됨에 감춰져있는 귀족의 악덕"을 상기시키는 부분에서 이것을 본성이라고 보았다면 어떤 의미일까요?

  • 2023-05-11 11:15

    1. (140)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적) 지성은 데카르트의 (순수) 지성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을까? (”나는 속성을, 어떤 실체에 대해 그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으로 이해한다<윤리학 1부 정의4>.”, “우리가 적합한 방식으로 신을 인식할 때, 우리는 신을 그 자체로, 즉 신이 그 자신을 인식하는 대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140)(”지성이 이렇게 정확히 고찰될 경우 본래 의미에서 어떠한 오류도 지성에서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성찰, 84>)

    2. (141~2) “1부의 말미에 달린 부록에서는 ….. 편견들의 주요 뿌리가 제시된다. 자유의지와 목적성이라는 이중의 가상 … 이와 동시에, 비평가들이 대개는 덜 주목했던 또 다른 뿌리가 등장한다—우리가 원인이자 결과로 존재하는 우주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사이의 차이 말이다. 후자는 유용성의 세계, 행위의 세계, 의식의 세계, 가능한 것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가상적인 것은 아니지만 가상을 만들어낸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세계에 거주한다.” 이어서 등장하는 <신학정치론> 4장 1절의 인용을 보면 보편적 고찰은 개별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사고에 전혀 소용이 없고 우리는 완전히 무지하다고 말한다. 삶의 유용성을 위해 사물을 가능한 것으로 간주하는 편이 낫다고도 말한다. 이 부분은 스피노자가 말하는 ‘가지可知적인 세계’("우주는 그 원리상 완전히 지성적으로 파악 가능하다."140) 상충한다는 생각이 든다(151쪽의 3종 인식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도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경험주의자들의 논리를 생각나게도 한다. 보편적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그에 대한 고찰이 가능한지 아닌지를 따지기보다 삶의 유용성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 낫다는 면에서 그렇다.

    3. (153) “주석가들이 부적절하게도 평행론이라고 부르는 원리 그러나 실제로는 속성들이 하나라는, 따라서 영혼과 신체가 하나라는 원리” ‘실제로는 속성들이 하나’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평행론이라는 표현이 이 말의 이해를 잘 돕는다고 생각했는데(“관념들의 순서 및 연관은 사물들의 순서 및 연관과 같은 것”143~144) 모로는 스피노자 철학에서 사유와 연장의 관계를 평행론이라고 부르는 것을 부적절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 2023-05-11 12:06

    스피노자, 그에게 신은
    ("철학할 자유"가 종교란 명분으로 박탈되던 당대에서)
    "철학할 자유"를 위한 "가상"의 도구가 아니였을까.
    _____________________
    "그러므로 [A삶의 유용성]을 위해서는 [B사물을 가능한 것으로 간주]하는 편이 낫다ㅡ나아가 이는 불가결하기까지 하다"_p.142
    _____________________
    "이 [A세계는 가상적이지는 않지만] [B가상을 만들어낸다]"_p.141
    _____________________
    이 도구(신)를 정교하게 다듬어 나가는 과정(증명)이 곧 그의 "삶의 유용성"(철학할 자유)를 획득하는 과정이자 삶 자체(자유의지와 목적성이라는 이중의 가상)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해 완전히 무지함에도 불구하고)그가 무신론자라고 확언할 수 없는것은 "삶의 유용성을 위해서는 사물을 가능한 것으로 간주하는 편이 낫지만", 한편 "이는 나아가 불가결하기까지"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에티카]에서 펼쳐질 그의 증명(p.132/136/139)들을 어서 마주하고 싶다.

  • 2023-05-11 12:32

    데카르트를 대충 읽은 티가 팍팍 납니다...ㅠ
    176p 스피노자의 저술을 읽는데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번째는 저술의 다양성에 입각해서 읽고
    두번째는 주제가 점점 스피노자주의로 진전되는 방향으로 읽고,
    세번째는 동인한 주제가 여러 저작에 걸쳐 얼마나 일관되고 강렬하게 말해지는지를 읽으라고 합니다.
    제가 질문하는 것은 두번째 읽는 방식에서 마트롱이 모범적이라고 말하는데요, "그에 따르면 『소론』에서부터 『정치론』의 처음 장들에 이르기까지
    '역량의 존재론'이 데카르트적 차용물의 허물을 벗으면서 점점 뚜렷하게 독자적인 기반을 제시한다고 했는데, 어떤 것이 결정적으로 차이를 보이는 건지...
    암튼 데카르트를 수용하면서 스피노자 자신이 그로부터 변별되는 지점이 어딘지 잘 모르겠네요...

  • 2023-05-11 12:35

    185쪽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는 일반적인 인식은 인간이 행위를 할 때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인간에게 자유의 착각을 불어넣기 위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인간 행위를 둘러싼 불투명성을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다"

    모든 것에 원인이 있다는 것은 자연에 내재적 법칙이 있으며 필연성을 말한다. 이 필연성을 인식하는 것이 행위를 할 때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단지 인간 행위를 둘러싼 불투명성을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자유의 탐구로 연결 되는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스피노자의 자유의 탐구와 행위로서의 자유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 2023-05-11 14:50

    191쪽의 "인간 본성은 동일하다"을 인간은 모두 사유한다. 이렇게 바꿔서 말할 수 있나요?
    그렇다면 193쪽 "인간이 알면서도 자신이 아는 것을 실행하지 못할 수 있다" 안 하는게 아니라 못하는 것라고 쓰는 건 왜 그런가요?

  • 2023-05-11 15:22

    '지성교정론'이 재미있어보이는데요. 아마 '성찰'과 '에티카'사이의 어디쯤인가에 있는 것처럼 보여서 그런 것 같습니다. p100 지각방식들 중 세번째, '결과에서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혹은 보편적인 것에는 항상 어떤 특성이 수반되어 있으므로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결론을 끄집어내는' - '참되지만 부적합한 지각'
    질문) 참되지만 부적합하다는 것도 특이해보입니다. 참된데 부적합하다는 건 어떤 걸까요? 또 위의 인용과 연결해볼 때 어떤 것이 참된 것에, 그리고 다른 어떤 것이 부적합한 것에 해당되는 내용인지 궁금합니다.

  • 2023-05-11 15:54

    P147 윤리학 2부의 한 공준은 (나는 생각한다가 아니라) 인간은 생각한다라고 진술한다. 사유만큼 중요한 것도 없지만 사유는 결코 토대가 아니다. 그리고 질 들뢰즈의 탁월한 정식대로, 사유는 의식을 초과한다. 주체가 의식하기도 전에 사유는 있다.

    이 지점이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와 차이를 보이는 것들 중 하나라고 생각되는데 이 차이는 어디로부터 비롯되었을지가 궁금해졌습니다. 더불어 들뢰즈가 “사유는 의식을 초과한다”고 한 부분에 대해서도 같이 얘기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오늘 참석을 못 하므로 제 질문은 혹시라도 시간이 남으면 다뤄주세요!

  • 2023-05-11 16:32

    질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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