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철학학교] 시즌1 9주차『정념론』질문

정군
2023-04-26 17:17
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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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1
  • 2023-04-26 17:26

    리가 자유의지를 사용한다는 것과 우리가 우리 의지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의지에 의존하는 행위에 대해서만 우리는 칭찬받거나 비난받을 수 있고, 자유의지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스스로의 주인으로 만들면서,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권리를 비겁함으로 인해 절대 잃지만 않다는면, 이를테면 신과 비슷하게 만들기 때문이다.(152항, 143쪽)
    데카르트에게 있어 ‘자유의지’는 인간을 우월한 존재자로 만드는 결정적인 지렛대입니다. 그것이 있어서 인간은 ‘기계’임에도 ‘기계적’이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우리에겐 ‘영혼’이 있습니다). <정념론> 3부에서는 ‘모든 덕의 열쇠(161항, 152쪽)’로 ‘관대함’이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이 ‘관대함’의 근거는 ‘자신에게 진정으로 속하는 것으로서 의지의 자유(153항, 144쪽)’입니다. 나아가 이 ‘의지의 자유’는 ‘최선으로 판단하는 모든 것을 시도하고 실행’하려는 의지(153항)라고 합니다. 요컨대 ‘자유의지’는 ‘모든 덕의 열쇠로서 관대함’이 성립할 수 있는 기초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인간)’은 ‘신’과 비슷해 질 수 있는 것이고요. 말하자면 ‘자유의지’의 유무가 신, 신적인 것과 그 이외의 모든 것을 가르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가령 ‘자유의지’의 현존함을 확인하려면 우리의 행동 중에 그러한 의지가 발견될 수 있어야 할 텐데, 우리의 특정한 행동들 중에서 ‘자유로운 의지’만을 원인으로 갖는 행동이 있을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숙고와 근면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 안에 피와 정기의 운동으로부터 그것과 결합되는 습관이 있는 생각을 분리하는 훈련을 하면서 본성이 지닌 결함을 교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211항, 184쪽)
    ‘자유의지’에 근거해서 ‘덕성’을 찾으려고 하면, 결국엔 ‘숙고와 근면’이 해결책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컨대 잘 생각하고, 잘 참는 것 이상의 도덕원리를 말할 수 없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구도 속에서 ‘최선’은 언제나 선험적으로 이미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뭐 어쨌든, 데카르트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숙고와 근면’을 통해서 ‘정기의 운동’과 결합되는 생각을 ‘분리’, 순수하게 ‘생각’만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역시도 오로지 ‘영혼적이기만한 생각’이라는 게 가능한 것인가요? 달리 말해서, 애초에 영혼과 육체를 별개의 것으로 분리하지 않는다면, ‘정념없는 생각’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다고 봐야하지 않을까요? 특히, 데카르트가 다른 곳에서 예로 드는 ‘수학적 관념’들이야 그렇다고 쳐도, ‘피와 정기의 운동’에서 분리된 ‘관념’ 역시 과거 어느 때인가에는 그것과 결합된 관념으로 우리 안에 나타났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 2023-04-26 22:32

    그 동안 정념은 규제해야 혹은 극복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데카르트는 정념에 긍정과 부정을 모두 부여한다. 마지막 212항에서는 영혼이 몸과 공통적으로 갖는 즐거움은 완전히 정념에 달려있다고도 말한다. 정념을 제대로 사용하려면(긍정) 우리가 지혜로써 그 정념의 주인이 되도록하여야 한다고 말하며 정념론을 마친다.
    그의 정념론을 되집어 읽어 보면, 정념에 주인이 되는 최고의 수준은 덕이 충만한 사람이고 이는 관대함에서 나오며, 또 관대함은 스스로를 존경하는 선한 의지, 자유의지에서 나온다고 한다. 결국 영혼의 ‘자유의지’ 가 핵심이다. 자유의지는 본성상 너무 자유로워서 속박될 수 없다(41항)고 한다. 자유의지는 어떤 일의 결과가 우리에게 달려있는 욕망이며, “이것이 좋은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144항). 여기까지만 보면, 자유의지와 이기심은 구분되지 않는다. 나에게 달려있는 욕망으로 내게 좋은 것을 하는 행위가 이기심이니까.
    그것을 의식했을까?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 있고, 의지를 지배할 수 있을 때 자신을 존경할 수 있는데, 이를 관대한 사람이라고 한다(151항). 또한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으면 겸손한 사람이 된다(153항). 마치 인간의 완벽함(신의 수준으로)을 추구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결국, 데카르트의 자유(자유의지)는 주체로서의 인간이 관대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는 144항 “이것이 좋은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문장과 서로 통한다.
    그런데, 여기서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누가 판단하나? 내가 해야 ‘자유’의지일텐데, 나의 의지/판단이 좋은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나? 인간 본성으로(혹은 선험적으로) 그냥 알 수 있는 것일까?

  • 2023-04-27 11:09

    데카르트의 정념론은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과 비슷하다고 느꼈습니다. 사회에서 살아가며 느낄 수 있는 정념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고 내용이 건전합니다 ex)'오만하지 말고 겸손하되 관대하라.' 하지만 질문거리를 만들기는 애매한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성찰, 방법서설과 다르게 읽으면 인생에 도움이 되는 교양서처럼 받아들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 사회는 아직 전체주의적 습성이 남아 있습니다. 성숙한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한 시민사회로 나아가야 하고 이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에 누구나 동의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하건 자기 자신에 대한 확고한 인식은 필요합니다. 좁은 자아에서 벗어나 남을 돕고, 타인과 공명하는 것도 우선 독립된 개인으로서 인식이 있어야 가능할 것입니다. 남들과 연대하기 위해서도 자신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없다면 집단의 가치관에 그대로 종속될 위험이 큽니다. 기독교 중세사회나 조선시대 농업 공동체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데카르트의 제2성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과연 근대의 산물로서 극복의 대상일까요? 오히려 현재에도, 앞으로도 유효한 철학적 명제가 아닐까요?

  • 2023-04-27 11:14

    156항
    “이와 더불어 관대한 이는 정념, 특히 욕망, 질투, 부러움의 완벽한 주인이 된다. 왜냐하면 그가 많이 원할 정도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획득하는 것은 오로지 그 자신에게만 달려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완벽하게 정념의 주인이 된다.”...이것은 바로 위의 문장에서 관대한 이는 다른 사람에게 좋은 것을 하는 것과 자신의 이익을 무시하는 것을 가장 커다란 것으로 평가한다고 하는 말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말 아닐까요? 오직 자신에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획득한다고 하면, 관대한 이의 욕망, 질투, 부러움은 자가 자신의 가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가치 때문에 영혼의 정념으로 일어나도 괜찮다는 말인가요? 또 욕망, 질투, 부러움이 과연 관대함과 나란히 할 수 있는 정념인지 혼란스럽네요.

    이와 관련해서 161항 ‘어떻게 관대함을 얻을 수 있는가’에는 ‘덕’이 나옵니다. 이 덕은 어떤 생각들을 하도록 각오하게 하는 영혼의 습관으로, 생각과는 다르지만 생각들을 생산하는 것이라고 하고, 또 이 생각들이 덕의 행위이며 영혼의 정념 전체라고도 합니다. 태생적으로 주어진 것이 덕이지만, 좋은 가르침으로 길러지기도 하는 것이 덕이라고 돼있네요. 그리고 관대함은 다른 모든 덕의 열쇠이고 정념의 모든 무절제에 대한 일반적인 구제책이라고 돼있어요. 그러니까 156항의 욕망, 질투, 부러움을 관대한 이가 덕으로써 완벽하게 컨트롤하기만 하면 된다는 뜻으로 읽어야 하는 것일까요?

    190항 자기만족에 대해 이야기해봤으면 합니다. 데카르트는 161항에 이어 ‘덕’을 이야기하는데, “덕을 따르는 이들이 언제나 갖는 만족은 양심의 평온과 휴식이라 불리는 그들 영혼에 있는 습관”이라고 말합니다. 데카르트는 이 문장을 이어서 “그러나 좋은 것이라 생각되는 어떤 행위를 방금 했을 때 새롭게 얻는 만족은 정념”이라고 말하고 이것은 기쁨의 일종이며 가장 감미로운 기쁨이며 그 기쁨의 원인이 자신에 의존하기 때문에 ‘자기만족’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자기만족은 긍정적인(좋은) 것인데 왜 ‘그러나’라고 역접을 한 것일까요? 자기만족은 정념이어서는 안된다는 말일까요? 왜냐하면 뒷부분에 나오는 내용은 모두 자기만족의 위험성, 부정적 측면만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냥 던지는 질문: 영혼에는 정념과 자유의지, 그 두가지만 있는 건가요?

  • 2023-04-27 11:55

    데카르트는 관대함과 고결한 겸손은 오만과 비열의 반대되는 정념이라고 말합니다. 관대함은 자기자신에 대한 존경으로부터 나오는 정념인데, 자신이 자유의지에 따라 덕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에 대한 경이, 기쁨, 사랑이 복합된 정기의 운동입니다. 이것은 연장인 몸이 자신의 영혼에 보내는 찬탄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의 견지에서 볼 때, 몸은 어떻게 영혼을 찬탄할 수 있게 되는 걸까요? 경이의 정의에 따라 뇌에 표상되는 어떤 인상으로부터 야기되는 정기의 운동이라고 이해하려 해도 납득이 잘 안가서요. 데카르트 자신도 이것을 단지 놀라움이라고 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불가사의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160항)

  • 2023-04-27 12:21

    존경과 무시, 이 두 가지 대표 정념으로 3부에서는 수많은 특수한 정념들을 갈래짓고 있습니다. 저는 이들 정념에 대한 데카르트의 통찰력에 대부분 공감하면서 재미있게 읽었는데... 딱히 질문은 없습니다. 다만 160항 문장 하나가 이해되지 않는데, 자꾸 오타인지 의심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존경이 지나쳐서 오만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150p) 이 특성들 가운데서 첫 번째는 오만과 비열의 상태에서보다는 관대함과 고결한 겸손의 상태에서 더 잘 발견된다. 반대로 후자는 오만이나 비굴함보다 관대함과 고결한 겸손에서 더 잘 드러난다.

    이 문장에서 "반대로"?? 맞나요? 아래 내용으로 봤을 때 정념의 운동이 가변적인 것은 오만과 비열함이, 정념의 운동이 지속적이고 균등한 것은 관대함과 고결한 겸손이어야 할 것 같은데요.

  • 2023-04-27 12:30

    1. 학습은 표상이나 기억 등 의식이 동반되는 활동이니 데카르트는 동물은 학습을 한다고 보지 않았을 것 같다. 토끼는 영혼이 없는 즉 의식이 없는 존재이므로 두려움이라는 정념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데카르트는 토끼가 천적을 만났을 때 도망치는 것을 어떻게 설명했을까? 가령 말이 채찍을 맞고 움직이는 것은 정기의 열과 근육으로 설명이 되겠지만 시각적으로 천적을 발견하는 것은 지각, 표상, 기억 등이 동반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오늘날 흔하게 볼 수 있는 심리적(정신적) 현상을 전부 물리적(연장적) 현상으로 환원해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은 데카르트가 자동 기계로 본 동물의 범위를 인간으로 확장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그렇다면 데카르트가 순수하게 영혼의 작용이라고 불렀던 것, 즉 의지만 소속이 사라진다. 자유의지를 그토록 강조한 데카르트의 철학이 자유의지를 환상으로 만드는 입장의 원류가 되었다고 한다면 이것 또한 참 아이러니하다.

    2. 정념은 분류하자면 사유 속성의 한 양태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데카르트는 사유 속성에 속하는 정념이 연장 속성에 속하는 정기의 활동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즉 정기의 자극으로 영혼 또는 사유 실체가 동요된다는 것이 사유 실체와 연장 실체가 실재적으로 구별된다는 말과 모순된다고 보지 않은 것일까? 데카르트가 이 문제를 명시적으로 해명한 적이 있는지, 말하자면 두 실체는 따로 존재할 수도 있지만 함께 긴밀하게 연결되는 것도 가능하고 그 예가 인간인 것이 두 실체의 실재적 구별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명시적으로 설명한 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 2023-04-27 13:47

    1. 정념의 규제는 왜 꼭 자유 의지여야 하나요? 자유 의지의 오류를 제한하는 지성이 하면 안되나요? 결국 정념이 어떤 것인지 '올바로 인식'하는 한에서 정념 대항 구제책(210항)도 더 잘 먹힐텐데 말이죠...

    2.무엇보다 정념의 구제책(210항), 1,2,3단계가 허세 없이 아주 현실적이어서 (좀 허무하긴 했지만) 오히려 데카르트가 아주 '인간적'으로 보였습니다.

  • 2023-04-27 14:27

    152항에서 의지를 왜 자유의지라고 썼을까요? 영혼의 정념이 수동적이라고 하면 의지는 원래 능동적인 것 같은데요.

    162항 '숭배에 대해'에서 "우리에게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을 할 것이라고 판단되는 자유 원인에 대해서만 숭배할 뿐이다."의 자유 원인은 무슨 의미인지

  • 2023-04-27 15:33

    <2성찰>p50 사유하는 것. 이것은 무엇인가? 의심하는 것, 이해하는 것, 긍정하는 것, 부정하는 것, 원하는 것, 원하지 않는 것, 또한 상상하는 것 그리고 감각하는 것이다.
    <6성찰>, p104 내가 여기서 명백히 깨닫는 것은 상상하기 위해서는 나에게 일종의 영혼의 특별한 긴장이 필요하지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긴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런 새로운 영혼의 긴장은 상상작용과 순수지성작용 간의 차이를 분명히 보여준다는 것이다.
    <방법서설> 3부 p49 우리 의지는 우리 지성이 그 의지에 좋은 것으로 혹은 나쁜 것으로 재현하는 것에 따라서만 어떤 것을 추구하지도 기피하지도 않기 마련이어서 잘 행하기 위해서는 잘 판단하는 것으로 충분하고 또 가장 잘 행하기 위해서도 다시 말해 모든 덕들 그리고 동시에 획득 가능한 다른 모든 선들을 획득하기 위해서도 가장 잘 판단하는 것오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질문-1. 정념론을 읽기 전에는 영혼/정신을 모두 그저 사유실체라고 생각했었는데요, <정념론>에서의 영혼은 잘 모르겠습니다. <정념론>17항에서 '생각'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영혼의 작용이고, 그것은 '모든 의지'라고 하죠. <방법서설>의 위 인용에 대한 주석을 보면 지성은 인식을, 의지는 판단을 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17항의 '생각'은 뭘 의미하는지 체크해보고 싶고요. 기본적으로 데카르트에서 영혼은 윤리적 개념인가요? 지성적 인식의 주체인가요? 영혼-의지의 matching이 뭘 의미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2. 질문1과도 관련이 있는데요. '상상'에 관해서 2성찰에서는 상상이 사유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6성찰에서는 상상작용과 순수 지성작용을 구별하면서 영혼의 긴장은 상상작용에서만 필요하다고 하죠. <정념론> 20항에서도 '영혼에 의해 형성된 상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상상은 특별히 '지각하려는 의지'에 의존한다고 합니다. 이 때의 의지는 지성 작용과는 다른 것일까요? '영혼의 작용'으로서의 의지의 정체가 좀 의아하긴 합니다.

  • 2023-04-27 15:51

    질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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