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철학학교 시즌 1] 데카르트 <정념론> 1항 ~ 26항 요약문

이형은
2023-04-09 22:43
465

1항~26항 요약문 첨부하였습니다. 

댓글 12
  • 2023-04-12 00:53

    “데카르트와 홉스는 자연 현상을 기하학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자연 현상에 대한 그들의 설명에는 수나 기하학 증명은 별로 없고 말이 많다.” <17세기 자연철학>

    제가 지금 과학세미나에서 읽고 있는 책에 나온 인용문입니다. 요약문 읽기 전에 한번 웃고들 가실 게요~~ ㅎㅎ

  • 2023-04-12 14:36

    『성찰』에서 인간의 정신과 신체의 존재방식을 선원과 배의 방식으로 설명하는 플라톤의 이원론을 거부하며, 신체와 정신은 실재적으로 구별되나 신이 부여함으로써 결합,혼합,일체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p.314). 이제 『정념』론에 들어 와서는 수동과 능동은 다른 두 개의 주체로 인해 두 이름을 지녀도, 그것들이 연관될 때 항상 동일한 하나이어야 한다고(1항) 이원론적인 것의 결합에 포석을 깔아 놓는다. 그리고는 신체의 운동(감각, 지각, 생각 등) 에 대해서 몇 항에 걸쳐서 정기,영혼 등을 도입하며 설명한 다음에 (30항에서)영혼은 몸의 모든 부분에 공동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선언(?)한다. 이 둘을 연관시키는 것은 정념, 정념의 주요한 효과(40항)이다.
    그런데 의문이 드는 것은 신체는 분리가능하고 유한한 연장으로서의 실체이고, 정신(영혼)은 분리불가능하고 무한한 실체인데, 공동으로 결합되어 있을 수 있남? 양보해서 이것이 가능하다고 한다면(연관되는 신 혹은 정념으로), 실체의 정의가 다른 존재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된 존재라고 볼 때, 신체와 영혼의 두 실체가 결합해야 할 이유는? 그것도 필요할 때만이 아닌 필연적으로 항상......
    혹시 이 연결고리인 정념을 끊어내면(불교의 고집멸도?), 신체와 영혼이 분리된 경지(해탈?)에 이를 수 있는 것인가요? 요요님?

  • 2023-04-12 19:40

    1. 19항 '지각과 의지는 실제로 동일한 것'이라는 문구와 1항 마지막의 '능동인과 수동인은 아주 다름에도, 능동과 수동은, 그것들이 연관될 시 서로 다른 두 개의 주체로 인해 두 이름을 지녀도, 항상 동일한 하나여야만 한다'는 문구를 연결시켜보면 어떨까요? 말하자면, '인간'은 사유실체이기도 하면서 연장실체입니다. 요컨대 [영혼-정념-지각-수동]과 [신체-작용-의지-능동]이 '인간' 안에서 만나게 됩니다. 이게 문제적인 이유는 '정념-지각'과 '작용-의지'는 각각 사유실체와 연장실체의 '양태'들인데, 이것들이 '동일'하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매우 특수하고, 예외적입니다. 이걸 정리해서 단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스스로의 원인이면서 결과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어쩐지 여기에서 데카르트의 이른바 '이원론'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두 실체 모두를 가지고 있는 완전자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말년의 데카르트는 '인간'을 '완전자'까지는 당연히 아니겠지만, '완전성에의 가능성'을 열여두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요?

    2. 데카르트는 '정념의 이론'을 사유하면서 어쩐지 '이원론적 구도'에 큰 문제가 있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성찰>까지의 담론에 따라 보자면, 영혼은 오로지 '능동', 신체는 오직 '수동'이어야 하는 것 같은데, 인간의 '정념-지각…의지'의 구도에서 보면 오히려 '신체'가 '작용'하는 '능동'이 되는, 다시말해 능동-수동관계가 역전 되는 게 뻔히 보이니까요. 그래서인지 50항 마지막에서 '정념의 훈련-절대적 지배력의 확보'에 관해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47항의, '감각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과 같은 것이고, 모든 욕구는 의지다' 이야기가 의미심장해 보입니다. 이 문장의 의미에 따라 보자면, <정념론>의 데카르트는 스피노자와 한 없이 가까워지는 듯 하기 때문입니다. 이 의미에서 50항의 '훈련'은 '이성적 사유의 훈련'이라기 보다는 '정념을 잘 다루는 훈련'처럼 보이니까요.

  • 2023-04-12 22:32

    1. 데카르트의 정념론은 스토아철학의 정념이해에 대해 비판적이고, 스콜라철학의 정념이해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것 같습니다. 짐작컨대 스토아철학이 정념론을 자연학으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비판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고대철학자로부터 멀어져야 진리에 가까이 간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스콜라철학과 관련해서는 능동과 수동의 개념을 계승하는 것 같은데요. 하지만 1항은 스콜라 철학의 능동/수동을 주시하면서도 그것들은 이름은 두 개이지만 항상 동일한 하나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스콜라철학의 영혼개념과 데카르트의 영혼개념의 차이도 한몫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데카르트의 능동/수동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2.(30항~34항) 30항에서 영혼은 몸 전체와 결합되어 있다고 합니다. 영혼은 연장이나 크기 또는 몸을 구성하는 질료의 다른 속성과 어떤 연관도 가지지 않고 단지 기관의 집합전체에만 연관을 갖는 본성이기 때문이라는군요. 기관의 집합전체에만 연관을 갖는 본성이란 어떤 본성일까요? 이어지는 설명으로 보면 기관의 집합이 와해되면 영혼이 몸에서 완전히 분리된다고 하는데, 결합이란 무엇이고, 분리란 또 무엇일까요? 몸전체와 결합된 영혼의 자리가 샘이라고 하는 것도 참 옹색합니다. 샘이 영혼의 가장 주된 자리여야 하는 것은 영혼이 몸과 관계하는 것이 정기를 통해서이고, 그 정기가 영혼과 운동을 교환하는 장소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나오게 되는 결론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영혼(의지)이 원인이 되는 정념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지성(순수사유)으로서의 영혼을 도입하면 데카르트의 이런 관점이 성립가능할까 의문입니다.(영혼과 몸의 두 실체를 전제하는 이원론이 빠질 수밖에 없는 함정이 아닐런지요?)

    3. 1부를 읽어보니 정념론은 데카르트의 인간론이군요. 영혼이 선장노릇을 하고, 몸은 배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몸 자체의 운동(여기서는 신체의 기능과 구조, 피의 순환, 정기의 운동)을 원인으로 하는 정념이 영혼의 정념을 구성하는 힘을 갖고 있다고 보는 데카르트의 견해는 비록 인간을 비롯한 동물의 몸을 기계로 봄에도 불구하고, 정교한 생물학적 기계로, 어떻게 보면 영혼을 압도하는 기계로 그리고 있는 것이 그 이전의 인간이해와 단절하는 지점이면서 새로운 전환을 가져오는 발견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 2023-04-12 23:36

    1항의 끝부분 "그래서 능동인과 수동인은 대체로 그것들이 아주 다름에도, 능동과 수동은, 그것들이 연관될 서로 다른 두 개의 주체로 인해 두 이름을 지녀도, 항상 동일한 하나여야만 한다."에 대한 주석에서 "데카르트는 이 원리를 항상 받아들여서 모든 영역에 적용한다. 이에 따라 우리 지성의 작용은 단지 정념일 뿐이다. 왜냐하면 신이 진리들을 창조하는 것이 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용과 정념은 두 가지의 실재성, 즉 하나는 능동이고 다른 하나는 수동인 것의 관계를 가정한다."
    질문) 아주 간단합니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주체가 무엇인가요? 처음 읽을 땐 당연히 몸과 영혼이라고 생각했는데 주석을 보니 모르겠네요. 설마 두 주체가 신과 인간의 지성은 아니겠죠? 가만히 읽다보니 문득 이 주석의 의미가 무슨 뜻인지 헷갈립니다.

  • 2023-04-13 11:06

    46쪽 "따라서 두 눈을 통해 오는 두 이미지나 다른 감각기관의 쌍을 통해 오는 두 개의 인상이 영혼에 도달하기 전에 하나의 인상으로 합쳐져서 그 대상을 두 개가 아니라 하나로 표상하도록 할 수 있는 어떤 장소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주시한다."
    - 데카르트는 영혼이 몸 전체에 걸쳐 있고 주된 자리는 뇌에 깊숙한 곳에 위치한 샘(송과선)이라고 합니다. 정신(영혼)이 신체를 콘트롤하는 모델처럼 느껴집니다. 이전까지 신의 조화에 의해서 정신과 몸이 별도의 실체임에도 100%동기화 되는 것처럼 설명했던 것 같은데요. 송과선은 데카르트의 기존 성찰과 어긋나는 아이디어가 아닐까요?

  • 2023-04-13 12:08

    데카르트식 <우리 몸 사용법>이나 (50항은)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읽는 것 같네요 ㅎㅎ

    47항 “감각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과 같은 것이고, 모든 욕구는 의지다.”(58)가 무척 인상적인데 여기서 ‘이성적’이라 함은 ‘사유하는’과 같은 의미로 봐야하겠지요? 만일 그렇다면 ‘의식적인’으로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싶고…. 여기서 더 나아간다면, 데카르트에서는 의식하는 것은 존재한다에서 시작해 나를 비롯한 인간이 사유 실체로 명명되었으니, 우리가 (이건 막 나간 것이지만 데카르트의 시대적 상식을 넘어서서) 동물과 식물에게도(심지어 무생물에게도) 의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물어본 적 없고 ‘검증’이 불가능한 영역이므로 가설적으로요) 데카르트의 명제는 만물이 사유 실체다로도 확장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데카르트의 전체 논리에서 이 선을 넘기가 상당히 쉽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울러, 데카르트의 <정념론>에서 영혼은 정념에 시달리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데요, 데카르트에 따르면 동물은 욕구가 없으므로 투쟁이 없고 시달림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식물을 보는 관점과도 유사하고요. 앞서와 유사하게, 이것 역시 사유 실체의 범위를 확장하면 달라지는 문제가 되겠고요.(“단지 우리는 후자[의지에 영향을 주는 정념이나 정념이 동반된 몸의 운동을 일으키는 운동]와 후자에 반하는 의지 사이에서 [발생하는] 투쟁을 주목할 뿐이다.”(59))

  • 2023-04-13 12:13

    제가 요약문을 만들면서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씩 발췌를 하면서 중복되는 내용은 생략했는데, 47항은 의도적으로 빼먹었습니다. 너무 길고 잘은 모르겠지만 앞서 뒤서 하는 얘기의 반복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군샘이 이렇게 갑자기 내용이 긴 항목이 끼어든 데는 이유가 있지 않겠냐는 겁니다. 중요하다구요... 다행히 아직까지는 47항 질문이 없지만, 굳이 여기서 질문을 만들어봅니다.

    사람들은 감각과 이성, 욕구와 의지가 대립한다고 상상하는데, 데카르트에게 감각=이성, 의지=욕구는 같은 것이다. 영혼에 반기를 드는 것은 오로지 몸(정기)뿐이다. 따라서 강한 영혼을 가진 사람은 자기 의지대로 몸을 콘트롤하는 사람이고 정념에 휘둘리지 않는다. 하나의 영혼 안에서 어떤 욕망과 그 욕망을 피하고자 하는 의지가 투쟁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영혼의)동요나 정념이 일어나는 이유는 신경, 심장, 피 안에서 이루어진 배치(상태)때문이라고 한다. 굳이 이러한 설명을 왜 해야 했을까??? 아무래도 한 인간에게 보여지는 선과 악, 이런 두 가지 측면을 선한 영혼과 악한 영혼이 투쟁한다고 생각하던 당시 사람들에게 우리의 영혼은 하나이고, 송과선의 중재로 인해 어느 순간 하나의 영혼에서 동시에 선악의 욕망을 느끼게되는 과정을 설명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두려운 상대를 만났을 때 도망가려고 다리를 번쩍 드는 것은 근육안으로 정기가 들어가서 어쩌구... 걍 몸의 반응이라치고, 한편 그 상대를 때려눕혀서 명예를 얻고 싶다는 의지는 도망가려는 행위를 멈추게도 한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설명은 지금 의학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내용도 있지만, 충분히 상식적이기는 합니다. "피가 끓는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신경이 예민하다" 우리가 평소에 많이 쓰는 표현인데, 이렇듯 우리의 정념이 몸의 정기가 어떤 상태냐에 따라 좌우된다는 주장이라고 보여집니다. 그렇게 볼 때 그가 심신이원론(신체를 떼내고 온전히 사유할 수 있다는)을 무리하게 주장하는 가운데 경험적으로 이들이 서로 주고받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를 해결하는 것이 그의 마지막 숙제였던 것 같습니다. 또.. 쓰다보니 질문이 아니네요..

  • 2023-04-13 12:14

    오늘은 결석입니다.

    사유실체와 연장실체 말고도 더 말할게 남았는데 차마 인간실체라 말하지 못하는 인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요샘이 정념론은 인간론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저도 마음이 기울고 있습니다. 사유 실체는 아마 연장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연장실체는 아마도 사유를 가지지 않을 것이구요…그런데 사유실체와 연장실체가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가까이 붙어있어서 묘해지는 지점이 정념을 가지는 인간이라고 생각한게 아닌가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아마도 능동/수동이 하나가 되는 경지 그 경지에서 인간에게 고유한 정념이란 것이 생기는 것으로 읽힙니다. 사유는 사유만 하고 연장은 연장만 해야할텐데 이 둘이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들러붙어 있다보니 정념이란 것이 생기고 그래서 이 정념은 순정한 사유실체(영혼)와 순정한 연장실체(몸)가 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 가까이 붙어 있을때의 사태 즉 인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뭐 그렇게 읽고 있습니다. 정기니 불이니 샘이니 피니 하는 것은 그냥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저는 사유와 연장의 격전지인 인간 정념을 매개로 사유와 연장이 펼쳐지는 인간론으로 읽고 있습니다.

  • 2023-04-13 13:57

    어제 정군샘에게 질문했던 건데.
    영혼의 정념이라고 할 때와 정념이 다른 것 같은 데 어떻게 다른가요.
    정념은 지각인 듯 보이는데, 이건 신체적인 것 같고, 사유는 영혼의 영역에 있다보니 굳이 이걸 다시 합쳐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래서 마지막엔 정념이 정기를 움직이면 신체적인 움직임이 생기고 그러니까 정념의 지도로 가야 하는 것 같은데 맞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 2023-04-13 17:00

    1. 감정,정서가 아니라 특별히 정념(passions)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2. 1항에서 "능동인과 수동인은 대체로 아주 다름에도 그것이 연관될 서로 다른 주체로 인해 두이름을 지녀도 항상 동일한 하나여야만 했다." 는 이전의 정신과 실체는 각각 독립 존재라는 이원론에 모순되는데, 30항에서도 "몸은 하나이고 분리불가능하다"며 영혼과 신체 전체의 연관 합일 결합성을 강조하지만, 여기서도 연장실체는 분할가능하디른 기존의 이원론과 모순되네요. 그렇다면 데카르트는 영혼과 신체의 '필연적'인 결합의 어떤 증거로써 정념을 설명하고 있다고 봐도 되는 걸까요?
    (성찰에서는 데카르트에게 신체는 연장실체인 기계적인 신체같다고 이해했는데, 정념론에서 신체로서의 몸은 '뭔가' 달라진것갈은 느낌ᆢ이 듭니다)

  • 2023-04-13 17:57

    질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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