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철학학교 시즌1] 데카르트 [성찰] 제3, 제4 성찰 요약과 질문

요요
2023-03-28 20:36
366

제3성찰 요약 올립니다.

댓글 12
  • 2023-03-29 13:30

    제 4성찰-참과 거짓에 관하여 요약문 올립니다

  • 2023-03-29 13:35

    제가 내일 낮에는 일이 있어서 컴퓨터를 만날 수 없어서 미리 질문올립니다.

    <제3성찰>

    (질문 1)
    “만일 내 관념들 가운데 어떤 관념의 그 표상적 실재성이 매우 커서 형상적으로도 우월적으로도 내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따라서 내가 나 자신이 그 관념의 원인일 수 없다고 확신한다면, 아로부터 세계안에 나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념의 원인인 다른 어떤 것 또한 현존한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따라 나온다.” P.67
    즉, 내 안에 명석판명하게 신의 관념이 있는데, 비의존적이고 완전한 실체가 유한하고 불완전한 나를 원인으로 할 수 없으므로, 신은 나의 밖에 현존한다는 것이다.

    Q) 결국 신은 관념적(정신적, 우월적) 존재자로 생각된다. 즉, 인간의 정신이 만들어 낸 것이어서 교회에서 얘기하는 실재적(질료적?) 존재자로서의 신과는 달라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결국 데카르트는 무신론자로 보이는데, 어떤가요?

    (질문 2)
    “신은 필연적으로 현존한가고 결론지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실체라는 바로 이 사실로부터 실체의 관념이 분명 내 안에 있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나는 유한하므로 그 관념이 실제로 무한한 어떤 실체에서 유래하지 않고서는, 무한 실체의 관념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P.70

    Q) 불완전한(유한한) 실체가 완전한(무한한) 실체의 원인이 될 수 없다(인과관계)는 논리로써, 나의 신의 관념은 무한한 실체에서 유래해야 하고 따라서 무한 실체인 신은 현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의 현존은 어쨌든 신의 관념을 가진 나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닌가? 사유하는 동안 존재하는 나로부터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로부터 나오는가? 나로부터?/ 신으로부터?

    <제4성찰>

    (질문1)
    "인식능력은 유한하지만 선택능력에는 어떠한 한계도 없다. 내가 내 안에서 더 큰 어떤 것에 대한 관념을 포착하지 못할 만큼 큰 것으로 경험하는 것은 의지, 즉 의지의 자유뿐이다. 그래서 내가 신의 어떤 형상과 모습을 닮았다고 이해하는 근거도 주로 의지이다." p.85

    Q) 제3성찰에서 사유들의 종류 중에서 관념, 의지와 정념, 판단을 말했다(p.61) 그리고 판단에서만 오류가 발생하므로 의지와 정념까지는 신의 형상과 닮음의 근거가 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그런데 “오류는 내가 의지를 지성과 같은 한계 내에 가두지 않고,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까지 이른다는 사실에서 생긴다”(p.86)고 한다. 그렇다면 ‘오류’란 의지와 지성사의 차이로 발생하며 구체적으로는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인데, 의지가 신의 형상을 닮은 수준의 사유이라면 오히려 이러한 ‘오류’에서 더 큰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 2023-03-29 23:43

    P64~65) “ 지금 자연의 빛에 의해 명백한 것은, 작용 및 전체 원인 안에는 그 원인의 결과 안에 있는 것과 적어도 동등한 실재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묻건대, 결과는 원인 아래에서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에서 자신의 실재성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리고 원인은, 또한 실재성을 갖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실재성을 결과에서 줄 수 있겠는가?” 데카르트가 이 말을 하는게 정당한가가 제 질문입니다. 원인은 결과보다 더 크거나 적어도 같아야 한다는 이 명제는 명석판명할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진리라고까지 합니다. 그런데 지금 데카르트는 명석판명함이 진리(참)라는 보증이 필요한 상황이고 이를 증명하는 과정에 있지 않은가요? 지금까지 데카르트는 코기토 명제는 명석판명하다라는 것을 논증했습니다. 그런데 명석판명이 참(진리)인지는 아리송한 단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보증이 필요하고 그래서 신이 있어야 하고 더군다나 속이지 않는 신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명석판명한 관념들을 연역하고 연역하는 방법이 참(진리)임이 증명될 테니까요. 저는 인용한 명제도 회의의 대상으로 삼아야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기반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언젠가 말씀드린 것처럼 데카르트 스텝이 여기서도 심하게 꼬이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논증이 꼬이고 꼬이는 데카르트 잡탕밥의 주재료 중 하나가 여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 2023-03-30 02:02

    58-62쪽 데카르트에게 진리는 ‘내가 매우 명석판명하게 지각하는 것’(58쪽)입니다. 이후 세 차원에서 진행될 ‘신 존재 증명’은 이러한 규칙을 보증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이고요. 요컨대 ‘증명하는 것은 증명되어야 할 것을 증명한다’는 순환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이건 그냥 제 느낌 뿐일수도 있지만, 데카르트가 어쩐지 ‘명석판명한 관념’의 수준을 나누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를테면, 직관적 인식에 따라 도출된 코기토 명제의 확실성은 굳이 ‘신’의 존재가 없더라도 이미 참된 것입니다. 58쪽 인용문의 앞문장에서, '명석판명한 지각이 거짓이라면 사물의 진리를 확신할 수 없다'고 그래서 '명석판명한 것은 진리'라고 하니까요. 그런데, 그 외의 것들, 이를테면 텍스트에서 데카르트가 누차 이야기하는 ‘바깥에서 온 관념’들의 명석판명함은 문제가 다른 것 같습니다. 그것은 ‘관념’ 일반을 아무리 회의한다 하더라도 구조적으로 명석판명함을 확증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신 존재 증명’이 필요한 것은 최초의 출발점으로서 코기토 명제를 정당화하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코기토 바깥은 세계 일반의 실존을 보증하는 것을 확증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 세계를 '명석판명한 것은 진리'라는 채에 걸러보면 '명석판명한 것'이 남을 겁니다. 요컨대 데카르트가 하려고 했던 건 그러한 '명석판명한 앎'의 근거를 세우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순환’이 아니게 됩니다.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오로지 자신에 대한 ‘회의’만을 이용해 ‘코기토’를 인식의 출발점으로 세우고, 이후 실재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외부 세계의 근거를 찾아 ‘신’의 실존을 증명하는 것이죠. 62쪽의 ‘이 관념들이 저 사물들과 유사하다고 믿게끔 나를 움직이는 근거가 도대체 어떠한 것인지 물어야 한다’는 말 속에 이미 그런 의도가 드러나기도 하고요. 만약 그가 방법서설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근거없는 지식들의’ 폭파가 목표라고 한다면 이 과정은 정당한 듯 보입니다.

    83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신’이 세계를 창조하고, 무려 보존까지 하는데, 도대체 왜 세계의 ‘불완전’은 상존하는 것일까요? 물론, ‘홀로 있다면 매우 불완전하게 보이는 것이 세계 안에서 부분의 지위를 갖는다면 매우 완전하’(83쪽)다고 이야기 합니다. ‘사물’에 한해서라면 이야기는 맞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지성이 있다는 점에서 신을 닮은 인간 지각의 불완전함의 현존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데카르트의 신은 ‘불완전함을 보존하는 신’이 되는 데 이것은 ‘신의 완전성’ 관념에 비춰 합당한 것일까요?

  • 2023-03-30 08:14

    78쪽 주저없이 결론지어야 하는 거은 내가 현존한다는 것, 그리고 극히 완전한 존재자 다시 말해 신에 대한 어떤 관념이 내 안에 있다는 이 사실만으로부터 신 또한 현존한다는 것이 극히 명증하게 증명된다는 것이다.
    79쪽 나는 또한 내가 의존하는 그것은 이 더 큰 모든 것을 무한정하게 그리고 가능적으로 만이 아니라 실제로 무한하게 자기 안에 갖고 있음을 그래서 그것이 신임을 이해한다. 그리고 논증 전체의 힘은 실제로 신이 또한 현존하지 않고서는 내가 지금과 같은 본성으로 현존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에 있다. 내가 말하는 신은 내 안에 그 관념이 있는 바로 그 신, 다시 말해 내가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 사유로 닿을 수 있는 모든 완전성을 가진 신 그리고 어떤 결함도 전혀 노출되지 않는 바로 그 신이다.
    문장 하나하나를 이해하기는 어렵고, 그냥 이런 문장들을 보면서 느낀 건 이렇게 말하면 道나 理 같은 단어가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러면 데카르트가 말하고 있는 신은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신이라고 할 수 있나요?

  • 2023-03-30 10:00

    1) “누구든지 나를 속일 수 있으면 속여보라. 그렇지만 내가 나는 어떤 것이라고 사유하는 동안, 결코 내가 무이게끔 하지는 못할 것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하는데, 일단 “나”를 먼저 던져놓고 시작하잖아요. 있는 나를 먼저 상정하고 내가 존재한다고 하니 이것은 완벽한 순환논법이 아닌가 싶네요. 그래서 우리가 “나” 얘기만 나오면 개미지옥에 빠지는 것이 아닌지…

    2) 신도 마찬가지인데요, 우리의 불완전함을 신에게 따질 수도 없고 우리는 신의 창조물의 일부이니 그 전체로 보면 우리의 불완전함이 전체의 완전함이란 기획 속에 있을 수 있으므로 불가지라고 합니다. 이 논리는 데카르트도 인정하듯 “신은 완전하다”라는 전제를 먼저 던지고 뭔가 설명이 잘 안 되면 신의 기획이라고 하는 건데, 이 구조도 신의
    기획으로 모든 것이 귀결되는 개미지옥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데카르트를 읽으면 읽을수록 이 분은 정말 신을 절대적으로 믿었고 이 절대성을 입증하는데 온 인생을 바치신 것이 아닌가…그래서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기 보다는 중세철학의 마지막 수호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 2023-03-30 10:14

    4성찰에서 데카르트는 특이하게도 오류는 의지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즉, 판단은 오성이 아니라 의지가 한다는 것. 지금의 상식은, 칸트도 그랬고 판단은 오성/지성의 몫이었다.
    질문은 데카르트가 말하는 오성이 참과거짓을 명석판명하게 확실하게 인식한다고 할 때 그 확실성의 '정도'에 대한 것이다. 확실성에도 정도가 있을텐데 만약 코기토가 덜 확실한 것을 아주 확실하다고 착각한다면 오류의 작동의 주원인이 의지가 아닌 오성이 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 2023-03-30 10:23

    76쪽. "천만에, 이미 앞에서 말했듯이, 원인 안에는 최소한 결과 안에 존재하는 것만큼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명료하다' 이 명제는 명석판명한 사실일까요? 저는 달걀에 닭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혹은 이 명제는 상황에 사실일 수도 거짓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신의 현존을 증명하기 위한 핵심 명제로서는 부족하지 않나 싶습니다.

    77쪽. "왜냐하면 반대로, 신 안에 있는 그 모든 완전성들의 단일성, 단순성, 즉 분리 불가능성은 내가 신 안에 있다고 이해하는 주요 완전성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3장만 때어놓고 봐서는 데카르트가 말하는 신은 우주 그 자체, 혹은 신플라톤주의의 이데아(일자)처럼 느껴집니다. 어쨌든, 자신을 가끔씩 일지라도 속일 수 있는 악마는 신이 창조하지 않은 별도의 존재일까요?(유치한 질문같기는 합니다) 아니면 악마는 그저 방법적 회의에 필요한 의심을 비유한 것일까요?

    88쪽 "그리고 사실 신이 나에게 준 것보다 더 큰 이해의 힘,혹은 더 큰 자연의 빛을 주지 않았다고 불평할 이유도 전혀 없다. 왜냐하면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유한한 지성의 본질에 속하고, 유한하다는 것은 창조된 지성의 본질에 본질에 속하기 때문이다."
    4장에서는 뛰어난 장인(신)이 부족한 피조물(자신)을 만들어냈고, 신이 나에게 준 본성(지성, 의지, 판단)를 이용해서 부족하게나마 신의 의도를 추론하는 방식으로 반복해서 전개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논의를 보면 데카르트는 물론 탁월한 철학자지만, 궁극적으로 권위에 순종하는 범생이의 모습처럼 느껴졌습니다. 데카르트의 허무한 죽음 역시 이런 측면에서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 2023-03-30 11:08

    전 여하튼 표상적 실재성부터도 뭔가 어렵습니다.
    1) (66쪽) "사물이 관념을 통해 지성 안에 표상적으로 존재하는 이 존재방식이 아무리 불완전하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분명 전혀 무가 아니며 따라서 무로부터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관념이 비존재는 아니고 적어도 지성 안에는 있는 것이라는 말일텐데, 그런데 이렇게 관념의 실재성을 측정하는 맥락이 궁금합니다. 이건 데카르트의 개념인가요?
    하여 이런 방식으로, 데카르트는 신의 관념이 갖는 표상적 실재성이 유한한 실체인 나보다 크기 때문에 신의 관념의 원인이 내가 아닌 다른 존재여야 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이건 일종의 '관념'과 '나'의 비교 우위를 따지고 있는 건가요?

    2)(66쪽)"그러나 이뿐만 아니라 또한 돌이나 열에 대한 관념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은 열이나 돌 안에 있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과 적어도 동등한 실재성을 자기 안에 갖고 있는 어떤 원인에 의해 내 안에 놓여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는 "왜냐면 ............." 하며 설명해주시는데, 설명 플리즈!

  • 2023-03-30 11:50

    1. (57쪽~64쪽)
    저는 3성찰 요약문에서 '코기토가 참이라는 것을 보증하기 위해서 신존재증명을 한다'고 했는데, 다시 읽어보니 그렇게 말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2성찰에서 코기토가 참이라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런 뒤 3성찰에서 데카르트는 내가 사유하는 존재라는 것은 명석판명하지만, 내가 사유한 것이 모두 명석판명하지는 않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관념의 종류를 구별하고, 관념들의 유래가 외부에 있는 것에 대해서는 확실한 판단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찾아냅니다. 관념들 중에서 본유적인 것과 내가 만든 것은 질료적으로 거짓일 수가 없습니다. 다만 외래적인 관념은 불확실한데, 나는 그 관념들이 자연적 충동이나, 감각을 통해서나, 혹은 다른 방식으로 내게 그 상을 넣어주는 어떤 것이 현존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대체 내 외부에 현존한다고 믿었던 그 어떤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내가 그동안 가져왔던 믿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것이 내 외부에 현존하는지를 탐구하려 하다 보니.. 그 귀착점이 신존재 증명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성찰에서의 데카르트의 인식의 순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니까 코기토가 참임을 보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 현존하는 것이 있는지 탐구한 결과, 신에 도달하게 되었다. 즉 신은 데카르트의 내적 성찰의 결과 도달한 곳이다, 이렇게 말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물의 질서에 따르면 신이 제1원인이므로 맨 앞에 놓이겠지만, 성찰은 인식의 순서를 따른다는 점.)

    2. (64쪽~67쪽)
    실체를 현시하는 관념과 양태를 현시하는 관념은 표상적 실재성의 면에서 볼 때 크기가 다르다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전제됩니다. 데카르트는 이 전제와, 원인은 결과보다 동등하거나 크다라는 인과법칙으로부터 신의 관념이 표상적 실재성 면에서 내 안에 있는 신에 대한 관념보다 완전하고 크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여기서 표상적 실재성에 관한 것이나 인과법칙에 관한 것을 데카르트는 본유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참이라고 한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문제는 데카르트가 그것들을 의심해야 한다, 아니다보다는 데카르트에게 본유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결국, 주체로서의 나도 데카르트에게는 본유적인 것이고, 모든 양식은 골고루 분배되어 있다도 전제도 본유적인 것 아닐까요?)

    3.(67~70쪽)
    2번의 질문과 유사한 질문입니다. 실체, 수, 지속은 내가 나의 관념으로부터 빌릴 수 있는 것이라고 데카르트는 말합니다. 실체, 수, 속성은 코기토로부터 연역된다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 역시 데카르트의 생각에 따르면 본유적인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지요?

  • 2023-03-30 12:13

    (70) 데카르트가 쓰는 표현이 무척 이질적으로 느껴질 때가 원인과 결과를 표현할 때 '넣어주다' '얻다' '갖고 있다' 등을 쓸 때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넣어주거나 얻거나 갖고 있는 대상들은 '실재성'으로 양화될 수 있는 것들(더 크다, 더 작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실재성에 종류가 있는 걸까요? 일단 유한 또는 무한 실체가 갖는 실재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관념에 대해서는 표상적 실재성과 현실적 혹은 형상적 실재성이 있습니다. 실체의 실재성과 관념의 실재성은 동일한 것일까요? 동일한 것이라면 나보다 실재성이 큰 관념을 내 안에 갖고 있다는 것은 이상합니다.

  • 2023-03-30 15:11

    질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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