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철학학교 시즌 1] 데카르트 [성찰] 첫번째 세미나 후기

이형은
2023-03-26 12:08
638

데카르트의 [성찰] 첫번째 세미나의 시작은 당최 왜 스르륵샘과 제가 오지 않는가 궁금해 하시는 가운데 시작하셨던 것 같습니다. 스르륵샘은 제주도 여행을 가셨고요 (부럽습니다!), 저는 생각보다 길이 막혀 늦었는데요, 다음부터는 제 시간에 올 수 있도록 더 서둘러 보겠습니다. 

이번 세미나도 여러 이야기가 오갔지만, 이번 후기는 제가 흥미롭게 생각한 것들을 중심으로 요약해 보겠습니다.

첫째, 상상, 감각 등은 데카르트에 따르면 사유속성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관련된 질문으로는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를 해 나가는 과정에서, 왜 꿈, 광인, 악령 등을 동원되는지, 데카르트는 왜 감각을 사유로 보는지가 있었습니다. 데카르트는 우리는 꿈을 꾸면서도 사유를 한다고 합니다. 사이렌과 같은 상상적 존재가 우리 꿈에 등장하더라도 이것은 사이렌을 해체했을 때 사이렌의 각 부분들은 일반적인 여러 부분을 조합한 것이라는 것이고, 따라서 가장 단순하고 보편적인 것들은 참된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참된 것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존재를 만들 수 있는 상상도 따라서 사유가 된다는 것이죠. 꿈, 광인, 악령 등이 등장하게 된 배경은 과장적으로 모든 것을 다 철저히 의심하고 회의해 보기 위해서인데, 제1성찰의 제목인 '의심할 수 있는 것들에 관하여'에 걸맞는 데카르트적인 접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감각이 왜 사유속성인지는 조금 더 논쟁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데카르트에게는 감각이 표상을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감각이다, 감각은 사람마다 다 다르게 느낄 수 있으므로 연장속성이 아니라 사유속성에 들어가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등의 다양한 의견이 있었습니다. 감각은 신체와 연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상상을 사유로 분류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의 시대를 기준으로 데카르트의 시점에서 데카르트를 읽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연장속성과 사유속성으로 양분된 구도에서는 감각이 어딘가에 속해야 한다면 감각이 연장속성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사유속성이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있었습니다. 모르면 수학문제도 외우던 고딩시절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는데요, 가끔은 이유를 모른채 외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감각 = 사유속성.

둘째, 동어반복의 데카르트입니다. 이 시작은 사유란 어떤 대상에 대한 사유인데, 그 대상에 대해 사유하는 동안에는 나에 대한 사유는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는 정군샘의 질문이었습니다. 이와 관해서는 사유에 관해서는 시간차는 중요하지 않다, 데카르트가 사유에 대해 말하게 된 이유는 나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유하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나에 대한 사유는 데카르트 입장에서는 필요치 않았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데카르트에서는 "나"의 사유라는 "나"의 존재가 중요한데, 이 "나"를 빼면 스콜라 철학과 다를 바가 없어지고, "나"를 인정하자니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이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에 대해 여러 의문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아렘샘은 데카르트에게는 존재가 "사유하는 것"인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 나에 "사유하는 것"을 대입하면 "사유하는 것은 사유한다, 사유하는 것은 존재한다"라는, 즉 같은 말을 반복함으로써 절대 틀릴 수 없는 명제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대단하다는 의견을 주셨어요. 이 동어반복에 대한 언급은 나중에 세션샘의 질문인 "사유 실체가 사유를 하는, 사유가 실체이면서도 도구가 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에서 다시 소환되었습니다. 사유하는 주체를 만들어 내야 하는 데카르트 철학의 입장에서는 사유를 증명할 때 사유를 사용할 수밖에 없을텐데, 이에 대한 논의는 열띠고 길게 이어졌지만 (연역 vs 귀납 논쟁, 아렘샘이 왜 공부를 하는지, 깰 수 없는 방패 비유까지!) 결국 열린 결론으로 끝났습니다. 이 논의가 말끔히 해결된 것도 아니지만 우리가 데카르트를 공부하는 동안, 주체로서의 나, 사유, 사유하는 나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데카르트의 [성찰]은 생각보다 잘 읽히는 듯 하지만 그 논리를 꼼꼼히 따라가는 과정은 절대 녹록치 않더라고요. [성찰]이 긴 책은 아니지만 데카르트의 문장 하나 하나, 논리 구성의 이면에는 데카르트가 거쳐갔던 길고 긴 사유의 길이 보였던 것 같습니다. 다음 주 세미나도 기대되네요.

제 요약이 듬성듬성하고 일부 오류도 있을텐데, 부족한 부분은 댓글로 채워주시기 바랍니다~ 

댓글 9
  • 2023-03-26 15:55

    이 후기를 읽으며 다시 생각해보니 코기토를 동어반복, 순환론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으로 출발하여, 나는 사유하는 어떤 것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 의심에는 의심 이전에 자신이 확실하고 명증하다고 믿었던 것들, 가령 나는 신체를 가지고 있다거나, 신이 나를 창조했다거나, 외부에 사물이 존재한다거나 하는 것들 모두가 포함됩니다. 이 의심을 통해 도달하는 것이 '나는 생각한다'이고, '생각하는 어떤 것으로서의 나'는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래서 방법적 회의에 의해 나에게 확실한 것에서 출발할 경우에만 오직 코기토만이 명석판명한 것으로, 철학의 제1원리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데카르트가 처음부터 '나는 사유실체다'라는 것을 답정너로 정해놓고 시작했다고는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데카르트는 '사물의 진리 안에서 내가 알고 있는 그 나'에서 출발하지 않고 '나에게 알려져 있는 것들'에서 따라나오는 것들을 따라 자신의 주장을 전개합니다. 만일 사물의 진리 안에서 내가 알고 있는 나에서 출발한다면 그것은 영혼이나 정신, 혹은 신을 닮은 인간, 이성적 동물, 아니면 사유실체, 뭐 그런게 되겠지요.
    물론 방법적 회의가 겨냥하는 것이 모든 것을 회의하는 회의주의가 아니라, 이성의 빛 아래 철학의 확실한 토대를 세우려고 했다는 점이 걸리기는 하지만요. 신존재증명은 바로 그것의 완결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런게 근대적 정신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그리고 완전성은 모든 불완전한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데요. 데카르트에게 완전함에는 무한함이 항상 함께 하는 것 같아요. 무한하면서 완전한 것이 신이니까요. 무한=완전이 되기 때문에 유한=불완전이 되는 것 아닌가요?(무한이 중요해진 것은 중세의 세계관으로부터 탈피하기 시작한 우주관의 변화와 관련이 있겠지요?) 그렇다면 혹 무한은 유한을 포함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수학에서의 무한집합과 유한집합을 생각해보면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의상 완전성은 어떤 결여도 없는 것이고, 불완전함은 결여가 있는 것이라고 하면, 완전함에 결여가 있는 것이 포함된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ㅎ

    • 2023-03-26 16:31

      요요샘 말씀처럼 데카르트는 명시적으로 논리적 증명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답정너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이 인식의 증명 순서를 따라간 마지막 '신이 다 했어' 정도에 이르고 나서야... 그러니까 인식론적 증명이 아닌 뭐라고 해야 하나요? 말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선험론적 증명(발생론적 증명?)쯤 가서 거꾸로 내려오는 순서를 상상해보면 답정너라는 말을 할 수도 있겠지요.

      완전이 불완전을 포함해야 한다는 엉뚱한 말은 제 말입니다. 신의 완전성을 상정하면 신 빼고는 다 불완전해지는데, 저는 차라리 세상이 완전하고 '신은 불완전할 능력이 결여된 무능한 완전함'이라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 여기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제게는....신이 궂이 있어야 한다면 세상 안에 있는 셈입니다. 제 개똥철학인 셈이지요...

      두 가지 다 책과는 별로 상관없는 말이네요.

  • 2023-03-26 16:40

    1,2성찰의 와중에도 데카르트는 여전히 '나=사유하는 것'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는 추기 잘 읽었습니다. 아울러 제가 세미나때 참 말이 많다는 것을 또한 일깨워주시는 후기입니다. "감각=사유속성" 어우 아주 시원합니다.

    "사유하는 것"인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 나에 "사유하는 것"을 대입하면 "사유하는 것은 사유한다, 사유하는 것은 존재한다"라는, 즉 같은 말을 반복함으로써 절대 틀릴 수 없는 명제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대단하다는 의견을 주셨어요. --> 이게 대단하다고 여긴 이유 중에 또 한가지는.... 자꾸 나는 신체가 있잖아 같은 샛길로 빠지지 말라는 경계처럼 들려서였습니다. 읽으면서....그러니까 말한 것에 대해서 집중하지 못하고 말해지지 않은 것으로 자꾸 넘어가는 고약한 버릇을 경계하게 만든 문구였습니다.

  • 2023-03-28 17:56

    쌤 후기는 진작 읽었는데 이번 주 내내 제가 어딜 다녀오느라 댓글을 달 수가 없었어요. 저는 지난 셈나가 왜케 어려운지 통 잘 모르겠더라고요. 어쩜 예전 책으로 읽어서 뉘앙스가 좀 달랐던지도 모르겠어요. 근데 형은샘께서 정리를 어찌나 잘 해주셨는지 아, 그랬지라고 생각했어요. 코기토의 논리 구조에 관해선 전 예전부터 좀 의문이 있었어요.엉뚱한 폭탄을 던져서 죄송하지만 '생각하는 나'가 주체이면서 동시에 대상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이 문제는 좀 더 따져봐야 할 것 같아요. 근데 이번 주는 목요일까지 계속 일이 있어서 책이나 읽고 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ㅠ

  • 2023-03-28 18:49

    댓글이 늦었습니다. 언제나 벙벙한 후기를 쓰는 저는, 이렇게 밀도 높은 후기를 보면 반응이 늦어집니다 ㅎㅎㅎ

    저는, 데카르트가 '의심할 수 없는 명증한 것'을 애써 찾고자 한다는 그 동기는 십분 이해가 갑니다. 이를테면 방법서설에서의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들이 사실은 아무 토대도 없는 잡지식이었다'는 말을 보면, '확실'한 것이 있어야만 뭐가 되도 되겠다는 생각이었을 테고요. 어쨌든, 그러한 '확실성에의 집착' 때문에, '불확실한 것들'이 어떻게 존재론적 가치를 상실했는지를 생생하게 볼 수 있어서 재미(?)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뭐랄까요. 데카르트가 그렇게 철썩 같이 '의심할 수 없다'고 하는 '사유하는 내가 있다'라는 게 그렇게까지 확실한 것 같지가 않습니다. 이를테면 내 지각에 떠오르는 이런 저런 것들의 의심할 수 있다면 그것은 '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걸 하는 '내가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하는 존재'라고, 이것만은 명석판명하다고 합니다. 저는 여기서 '나'가 없다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사유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라면요. 그런데 데카르트의 이 명제에는 '나'가 꼭 있어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이야기들을 할 필요도 없으니까요. '생각하는 나'라는 건 그것이 생각된다는 점에서 결국 '대상'일 수밖에 없고, 그것이 '대상'인 한에서는 데카르트의 '방법'에 따라 보자면 '확실성'을 장담할 수가 없게 됩니다. '나' 자체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 나인지 뭔지 알 수가 없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18세기 철학자들이 그렇게 '주체'의 내부를 '반성'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런 이유로 '근대적 주체'는 시작부터 어떤 심각한 손상을 안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러니까 '불확실한 것'들을 날려야만 명석판명한 출발점을 얻을 수 있는 것이죠. 그렇게 주체는 확고한 '능동'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수동'이 되고 맙니다. 그런 점에서 이 주체는 모든 걸 '대상'으로 만드는 주체, 자기 자신조차도 '대상'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주체, 오로지 자신만 '능동'인 주체인 셈이고요. 그래서 뭔가 데카르트의 원전을 세심하게 읽으면 읽을수록, 현재의 '주체'가 좀 더 잘 보이는 느낌도 듭니다. 그리하여 결론은 '17세기' 하길 잘했다, 입니다. ㅋㅋㅋㅋ

    • 2023-03-30 08:19

      원어로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여기에 나는 생각한다... 라고 읽는 이유는 당시는 주어를 다 빼고 써서 오늘날은 "나는"이라고 의례 넣어준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혹시 "나", "주체", "능동" 이런 개념도 후대에 덧입혀진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물론 데카르트의 코기토에 잉태하고 있었다는데는 동의합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나는 존재한다"고 그동안은 의심없이 받아들였는데... 슬슬 정말 그런가??? 정군샘 말처럼 나를 대상화해서든 아니면 사유하는 나를 지각하는 혹은 이해하는 나는 정말 명석판명하게 존재하는가... 의문이 듭니다.

      • 2023-03-30 14:13

        어디서 읽은 기억에.... 라틴어 동사들은 인칭변화를 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cogito, sum 모두 1인청 동사형으로, 나는 생각한다, 나는 존재한다가 맞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2023-03-29 01:11

    덕분에 지난 시간 쟁점들을 다시 돌아볼 수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1,2 성찰을 미리 읽을 때는 치밀하게 차근차근 진행되는 느낌이었는데 막상 세미나에서 진행된 논의는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어요. ‘나는 사유하는 것이다’에서 ‘사유하는 것은 사유한다’와 ‘사유하는 것은 존재한다’가 나왔을 때 무언가 탈락된 느낌이 드는 것은 데카르트에서 ‘나’라는 것은 과연 문제적인 개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 2023-03-29 16:09

    와우! 데카르트의 문제적 사유를 잘 지적하여 주셨네요. 내가 나를 사유하게 되는 결과말입니다.
    이번 주 3장에서도 데카르트의 제귀적인(자기 환원적인) 사유를 보았습니다. 내가 잘못 읽었는지도 모르지만......
    나의 관념에 신이 있다. 완전한 것이 불완전한 것의 원인이 될수 없다. 따라서 신이 나에게 (신의)관념을 주었다.
    그럼, 나는 누구인가? 신이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어쨌든 나로부터 신이 생겼으니까....

    형운님.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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